책과 세계 살림지식총서 85
강유원 지음 / 살림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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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책을 두 가지 목적을 가지고 썼다. 하나는 고전에 대한 자극을 주면서 그것들로 직접 다가가는 길을 알려주고, 다른 하나는 그 책들을 읽기 전에 미리 그 책들이 어떻게 서로 이어져 있고 대화하고 있는지를 짐작하게 하는 것이다. 어떤 목적이든지 이루어진다면, 이 책은 불필요해진다. 결국 이 책은 잊혀지고 버려지기 위해 쓰여진 셈이다.”

강유원이 책의 표지 안쪽에 밝혀둔 이 책을 쓴 목적이다. 그가 이 책을 쓴 목적을 나는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나는 순전히 강유원에게 매료된 탓에 이 책을 구입했다. 아무 망설임 없이 선택하게 된 데에 조금 보탬이 된 것은 이 책이 ‘살림지식총서’였기 때문이다. 이전에 사 읽은 몇 권의 살림지식총서들이 내게는 내용면에서나 분량에서나 가격에서나 모두 대단히 만족스러웠다. 빼놓을 수 없는 이 책의 매력은 단연 무게와 크기이다. 핸드백에 넣고 다니기에 이보다 더 알맞은 책을 나는 아직 보지 못했다. 핸드백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늘 책을 담고 다니는 내 핸드백은 제대로 된 모양을 가진 것이 거의 없다. 삐져나온 옆구리 살처럼 울룩불룩 배가 부른 핸드백은 자신의 정체성을 회의하는 듯 늘어져있다. 이 나이에 책가방을 맬 수도 없으니 어쩌랴, 수시로 가방을 바꾸는 수밖에. 포기했었는데 “세상의 모든 지식을 담기 위한 살림지식총서의 노력은 계속 이어질 것”이라는 살림출판사의 옹골찬 기획이 내 구차한 살림살이를 보살필 줄이야.

최근 나는 강유원에게 홀딱 빠져 있다. 그의 강의들을 다운받아 듣고, 게시판의 그의 글을 찾아 읽고, 언제쯤 강의를 들어볼 수 있으려나 눈과 귀를 모두 열어두고 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거의 스토커 수준이다. 어쩌다  스스로에게서 이런 스토커적 징후를 느껴보는 것이 내게는 행복이다. 이런 내 증세들을 그는 아는지 마치 내가 오염물질이라도 되는 양 차단한 벽을 만들어 두었다. 그 벽의 하나는 게시판의 트래픽 초과로 접근할 수 없다는 붉은 글씨의 벽이고, 둘은 내게는 만만치 않은 이 책이다. 나는 얼음판 위를 굴러가는 짱돌처럼 그의 책 겉에서 맴돌고 있다. 

 

 

세계의 인구가 60억이라고 할 때 책을 읽는 사람은 1억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사자가 위장에 탈이 나면 풀을 먹듯이 병든 인간만이 책을 읽는다.”는 강유원의 말대로라면 1억의 환자들이 있고 나도 그 환자 중의 한명이다. 사자는 풀을 먹으면 치료가 되는 모양인데 왜 나는 책을 읽을수록 병이 더 깊어만 지는지 모르겠다. 읽을수록 넓어지는 무지의 세계, 그 무지를 해결할 길 없는 나의 무력과 무능을 매일 확인하는 일은 차라리 저주다.

『책과 세계』는 그동안 내가 접한 살림지식총서 중 가장 버거운 책이다. 책은 세계를 상정하고 있고, 세계는 인간이 인식하는 범위 내에서의 세계이므로 모든 책은 인간과 세계의 관계를 다룬다. 강유원은 인간이 세계를 인식하는 방법을 <세계의 근본문제>에서 짚고 있다. 그것은 그들이 처한 환경과 밀접한 관련을 맺는다. 강유원은 인류의 4대문명 발생지중 메소포타미아 문명지역의 『길가메시 서사시』와 이집트 문명 지역의 『사자의 서』를 짚는다. 황화문명과 인더스문명은 빠져있는 대신  히브리 민족의 서사시라 할 『구약성서』가 들어가 있다. 『길가메시 서사시』, 『사자의 서』, 『구약성서』등을 통해 강유원은 그 책이 나온 당대 사람들의 생활과 생각을 거슬러 올라간다. 세계와 인간의 사이에 존재하는  '책'을 통해  시간을 역류하는 힘을 그는 내게 보여 주었다.    

그는 시간의 순서에 따라 고대, 로마와 중세, 근대의 차례로 고전이라 할 텍스트들을 선정하여 당대와 그 시대의 세계인식을 정밀하게 요약해두었다. <매체 : 또 다른 컨텍스트>라는 제목으로 다룬 두 챕터는 시대구분용인 것 같다. 책이 한눈에 들어오게 하기 위해 차례를 만들어보았다.

 

1. 책과 세계 또는 텍스트와 컨텍스트

2. 세계의 근본 문제 

   쓸쓸한 세계 『길가메시 서사시』--수메르(지금의 이라크지역) 
   텍스트의 힘 ; 모세 5경 - 히브리

   정지된 영원함 『사자의 서』 - 이집트

3. 인간과 사회

   영웅의 운명 『일리아스』
   철저한 자기인식 ; 고대 그리스의 비극들 
   순수주의의 체계화 『국가론』

4. 매체 : 또 다른 컨텍스트(Ⅰ) 

   매체의 발견 ; 진흙판에서 파피루스까지

5. 물음이 없는 단순한 세상 

   단순한 실천 『갈리아 전기』 
   행복한 시대의 징후 『우정론』

6. 지상과 천국, 두 세계의 갈등 

   환상적 불멸성 『신국』 
   중세의 봄 『신학대전』 

   중세의 가을 ;유식한 무지론 
   세속의 재발견 『군주론』

7. 매체 : 또 다른 컨텍스트(Ⅱ) 

   인쇄술, 매체의 혁명

8. 세속세계의 폭력적 완결

   차가운 현실법칙 『리바이어던』 
   텍스트에 의한 전통의 전복 『백과전서』 
   행복한 날들 『국부론』 
   쓰라린 세계 『종의 기원』

9. 에필로그

강유원은 이 책의 첫 번째 목적을“고전에 대한 자극을 주면서 그것들로 직접 다가가는 길을 알려 주”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의 목적대로 나는 고전에 대한 자극을 받았다. 읽은 책이 하나도 없고 읽으려고 조차 하지 않았다는 참담한 자극 말이다. 나는 정신착란푼수녀를 가끔 자처하지만 이건 엄두가 나지 않는다. 책을 읽는 1억 명의 환자들을 나란히 줄 세우고 그 줄의 맨 꼴찌에 서는 한이 있어도 어쩔 수 없다. 언젠가 내가 정말 정신착란을 일으켜서 저 책들을 만나게 된다면 그때 기억하리라. 한때 내가 해바라기 하던 강유원의 ‘고전안내서’가 있었노라고.  

 

그의 또 다른 목적은 “그 책들을 읽기 전에 미리 그 책들이 어떻게 서로 이어져 있고 대화하고 있는지를 짐작하게 하는 것이다.”그런데 나는 왜 전혀 짐작이 안 되는 걸까? 그가 책의 제목 앞에 써놓은 비슷한 수식어만 눈에 띈다. ‘행복한 시대의 징후 『우정론』’, ‘행복한 날들 『국부론』’같은 것 말이다. 표를 만들어놓고 보니 ‘텍스트의 힘 모세 5경’과 ‘텍스트에 의한 전통의 전복 『백과전서』’도 눈에 들어온다.

결국 나는 책을 살 때 내가 전혀 저자의 의도를 고려하지 않았던 것처럼 책을 읽고 나서도 전혀 그의 목적에는 부합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나는 이 책을 잊을 수도, 버릴 수도 없다. 나는 언제쯤 이 책을 버릴 수 있을까? 과연 버리기는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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