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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이크 없는 문화 - 문화 엘리트와 대중
테어도르 데일림플 지음, 채계병 옮김 / 이카루스미디어 / 2007년 6월
평점 :
테어도르 데일림플은 영국의 정신과 의사다.
그런데 무슨 의사가 글을 이렇게 잘 쓰냐구!!
아무래도 그는 정신과에서 아무 쓸모 없는 메스를 영국 사회의 환부를 도려내는데 사용하고 있는 것 같다. 그가 휘두르고 있는 정신의 메스. 예리하고 아프지만 부럽기 짝이 없다. 최근 읽고 있는 책들 - 수잔 손택의 『타인의 고통』, 아룬다티 로이의 『9월이여, 오라』, 리차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등이 모두 겨냥하고 있는 과녁이 미국의 부시 정권이라는 특징을 지닌다. 물론 그들의 일차적 겨냥은 부시정권이지만 보다 근원은 절대적인 복종을 요구하는 종교, 신의 이름으로 전쟁을 합법화하고 그곳에서 자신의 부를 챙기는 그 누구라도 예외는 아닐것이다. 부시가 '우리는 평화를 사랑한다'고 말한 이후에 평화와 전쟁이 동의어가 되었듯이 고양이는 쥐가 되고, 늑대는 사슴이 되지 않았는가. 세계의 곳곳에 평화 혹은 신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온갖 문제들을 추문으로 만드는 지식인들이 있고 그들의 글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모른다.
책의 원제가 Our culture, What's left of it.으로 되어있는데 나는 <브레이크 없는 문화>라는 번역이 썩 마음에 들지 않는다. 문화는 끊임없이 변화해가고 있고 그런 면에서 문화에 브레이크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저자는 브레이크 없는 문화를 그저 지켜보는 것이 아니라 문화 이면에 있는 그 무엇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문화라는 현상을 보면서 그런 현상이 생겨나기까지 간과되었던 혹은 누구도 의식하지 못했던 다양한 문제들을 읽어내면서 문화라는 현상에 딴지걸기 혹은 문화의 가속화에 브레이크를 밟고 있다.
두 파트로 구성되어 있는 이책은 1부는 예술과 문학, 2부는 정치와 사회라는 제목아래 각각 12편과 13편의 에세이가 실려있다. 1부에서는 문학, 사진, 회화 등 작품을 다루고 2부는 사회적 현상들을 통해 정치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보이지 않는 부분들까지 파헤치고 있다. 테어도르 데일림플은 정신과 의사였는데 영국 빈민가 병원과 교도소 등에서 일한 경험을 통해 어떤 현상의 이면을 보는 눈을 키운 것 같다. 그는 영국 어린아이의 40%가 사생아이며 그 비율은 여전히 증가하고 있고 음주, 약물남용, 10대 임신, 범죄율이 세계에서 가장 높다고 거침없이 말한다. 이러한 결과에 대한 많은 이야기들이 가능하겠지만 무엇보다도 자신의 순간적 쾌락을 우선시하는 악의 천박함 때문이라고 규정하고 있다.또 그는 이런 재난에는 지적, 정치적 엘리트들의 도덕적 비겁함이 단단히 한 몫 하고 있다고 일갈한다.
베트남 전쟁시 목숨을 잃은 사진작가들이 베트남 전쟁을 찍은 사진 전시회 "레퀴엠"을 열었을때 테어도르는 그들에게서 '위험에 대한 취향'을 읽어낸다. 이들 사진작가들은 전쟁을 증오하지만 동시에 전쟁을 사랑하기도 하며 위험의 비할 데 없는 매력을 알고 있는 자들이라는 것이다. 그들에게 위험은 내성이 강한 마약과 같아서 똑같은 효과를 얻기 위해 그들은 훨씬 더 많은 약을 복용하고 싶어하게 된다. 어쩌면 그들은 태평성대의 평화로움을 증오할지도 모른다는 말이 옳을지도 모르겠다.셰익스피어가 불멸인 이유, 로렌스가 포르노그래피 작가인 이유 등은 설득력있게 다가왔다. 또 다이애너 왕세자비를 '가정에서 시련을 겪는 자들의 여신'으로 읽어내고, 가족해체와 영양실조를 연결짓는 그의 시선은 중층적이다. 글쓰기의 풍요로운 배경이 되고 있는 그의 의사로서의 경험과 그가 가진 정신의 메스가 부럽기 짝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