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남편 외 도스토예프스키 전집 14
도스또예프스끼 지음, 정명자.박현섭 옮김 / 열린책들 / 2007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최고 상류사회의 교육을 받은 바 있는 벨차니노프는 38,9세의 독신자다. 그는 남러시아로 가려던 여행도중 뜻하지 않게 소유지에 관한 민사소송에 얽혀 뻬쩨르부르그에 머물게 된다. 벨차니노프는 이곳에서 자신의 주변을 얼쩡거리는 한 남자를 만나게 되는데, 그는 벨차니노프가 9년 전 사랑했던 한 유부녀(나딸리야 바실리예브나)의 남편 빠벨 빠블로비치였다. 죽은 아내의 유품에서 그녀의 방탕한 생활을 증명한 편지들을 모조리 읽은 빠벨 빠블로비치는 딸 리사를 데리고 그녀의 애인들을 만나러 뻬쩨르부르그에 나타난 것이다. <영원한 남편>은 벨차니노프와 그의 정부의 남편인 빠벨 빠블로비치 사이의 사건을 그린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영원한 남편>에서 벨차니노프의 입을 빌려 새로운 인간유형을 탄생시킨다. 벨차니노프가 사랑했던 나탈리야 바실리예브나와 같은 유형의 여성과 그녀의 남편 빠벨 빠블로비치로 대표되는 남성이다. 여성은 오직 불성실한 아내가 될 목적 하나만으로 이 세상에 태어난 것 같은 여성으로 정열적이고 잔인하며 또한 관능적인 타입의 여성이다. 이런 여성은 방탕한 생활을 혐오하며 믿을 수 없을 만큼 맹렬히 비난하고 있지만 바로 그녀 자신이 방탕한 여인임을 모르고 있다. 이런 여성과 아주 잘 어울리는 남편의 유형도 존재하는데  빠벨 빠블로비치처럼 끊임없이 부정을 저지르는 아내와 살면서 평생토록 오직 남편이 되기만 할 뿐 그 이상은 아무것도 아닌 유형의 사람을 말한다. 벨차니노프는 이런 남편을 ‘영원한 남편’이라고 부른다. 이런 남편의 중요한 특징은 태양이 빛나지 않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내에게 배반당하지 않을 수 없는 남편이다 

세계명작 혹은 대문호라는 이름은 참다운 독서를 방해하는 경향이 있다. 작품을 읽기보다 작품의 이름이나 작가의 이름을 먼저 대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또 필독 도서 목록이라거나 방학숙제 등 강압에 의해 읽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인 것도 한 몫을 하는 것 같다. 나는 고등학교시절 처음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알게 되었는데, 이 작품은 태어나 처음 그 이름을 듣는 순간 이미 나를 책 안 읽는 학생으로 낙인 찍어버렸다. 당시 나는 하이틴 소설을 두루 걸쳐 두껍고 낡은 하드커버의 『악의 꽃』과 시도 때도 없이 애절하게 ‘시몬’을 부르는 『렌의 애가』같은 시집 속에 빠져 있었던 것 같다. 지금생각해보니 시에 대한 동경은 이때부터 시작된 것 같다. 당시 나와 단짝이었던 친구는 도스토예프스키에 빠져있었는데 『죄와 벌』,『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먼저 읽고 와서는 등나무 아래 벤치에 나를 눕히고는 마치 도스토예프스키에게 사주받은 사람처럼 그날 읽은 책의 내용들 읊어주었었다. 이야기를 듣다보면 잠들기 일쑤였지만 그건 이야기가 재미없어서가 아니라 우리를 감싸고 있던 보랏빛 등꽃향기와 친구의 정다운 목소리와 따뜻한 햇볕과 언제까지라도 수천의 손을 흔들어 줄 것 같던 미루나무의 고요한 반짝임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운 친구여!

 

 

나는 중개자 없이 도스토예프스키를 만났다. 지금까지 학교에서 혹은 매체를 통해 들어왔던 그의 명성과는 달리 커다란 감흥을 느낄 수는 없었다. 심리소설처럼 보여지기도 하지만 고차적 심리소설도 아니고, 죽어버린 아내의 정부를 찾아 복수를 하겠다는 추리소설도 아니고, 남편과 정부 사이에 일어나는 단조롭고 소소한 사건이 너무나 평이하게 전개되고 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대문호의 호칭으로 불리지만 그때는 다른 작가에 비해 원고료도 절반정도 밖에 받지 못하는 소설가였다고 한다. 그나마 쓰여지지도 않은 소설을 걸고 가불하기가 일쑤였고 돈은 도박판에서 모두 잃었다. 두명의 아내를 두었지만 여성들에게 인기있는 작가는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런탓인지 도스토예프스키는 여성보다는 남성의 심리 묘사에 더 능한 것 같다. 이 소설에서도 한 여자의 남편과 정부 사이의 미묘한 심리묘사를 그리고 있다.  

 

이 소설에 대해서 좀 더 알고싶은 분께는 르네 지라르의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을 함께 볼것을 권하고 싶다. 르네 지라르의 ‘욕망의 삼각형’ 이론은 <영원한 남편>과 적확하게 부합하는 소설이다.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에서 지라르는  빠벨 빠블로비치의 욕망은 벨차니노프를 자신의 욕망의 중개자로 삼고 있다고 얘기한다. 

 

 “빠벨 빠블로비치는 벨차니노프의 중개에 의해서만 욕망을 품을 수 있으며, 신비론자들이 말하듯이 벨차니노프 안에서만 욕망을 품을 수 있다. 그래서 그는 벨차니노프를 자기가 선택한 여자의 집에 데리고 가서, 벨차니노프가 그 여자를 욕망의 대상으로 삼고 그 여자의 에로틱한 가치를 보증하도록 한다.(94쪽)”

르네 지라르는 또 “『영원한 남편』은 내면적 간접화의 본질을 가능한 한 단순하고 순수한 형태로 드러내준다. 독자의 주의력을 딴 데로 돌리거나 독자로 하여금 길을 읽고 헤매게 하는 쓸데없는 이야기는 하나도 나오지 않는다. 이 텍스트는 너무나 분명해서 오히려 수수께끼처럼 보인다. 이 작품은 소설의 삼각형에다 우리를 눈부시게 하는 빛을 비추고 있다.” 고 말한다.

자신의 이론에 적확하게 부합하는 텍스트를 찾아낸 지라르에게 박수를!!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한 내 욕망의 중개자였던 나의 친구에게 그리움의 포옹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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