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르는 척 시작시인선 82
길상호 지음 / 천년의시작 / 2007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모르는 척, 아프다

 

 

술 취해 전봇대에 대고

오줌 내갈기다가 씨팔씨팔 욕이

팔랑이며 입에 달라붙을 때에도

전깃줄은 모르는 척, 아프다

꼬리 잘린 뱀처럼 참을 수 없어

수많은 길 방향없이 떠돌 때에도

아프다 아프다 모르는 척,

너와 나의 집 사이 언제나 팽팽하게

긴장을 풀지 못하는 인연이란 게 있어서

때로는 축 늘어지고 싶어도

때로는 끊어버리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감전된 사랑이란 게 있어서

네가 없어도 나는 전깃줄 끝의

저린 고통을 받아

오늘도 모르는 척,

밥을 끓이고 불을 밝힌다

가끔 새벽녁 바람이 불면 우우웅…

작은 울음소리 들리는 것도 같지만

그래도 인연은 모르는 척

 

 
길상호는 200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모르는 척』은 첫시집『오동나무 안에 잠들다』에 이은 두번째 시집이다. 등단 6여년만에 두권의 시집을 묶어냈다면 그는 시에 성실했다고 할 수 있겠다. 시는 양산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첫번째 시집을 읽지 않은 탓에 그의 시가 어떤 시적 변화를 가졌는지 알 길이 없다. 두번째 시집의 제목으로 뽑아올린 시는 원제가 「모르는 척, 아프다」이다.  '모르는 척'이라는 말은 앎을 전제하고 있다. 우리는 알고 있는 사실은 '모르는 척' 할 수 있지만 모르는 것은 '모르는 척'할 수가 없다. 그것은 그냥 모르는 것이다. 시인은 무엇을 '모르는 척'하는 것인가?  시 속에 등장하는 전봇대는 술취한 이의 오줌발을 받아내면서 '모르는 척' 한다. 하지만 전봇대는 '아프다.'  전봇대는 전깃줄을 끌고 가가호호 방문한다. '때로는 축 늘어지고 싶어도/때로는 끊어버리고 싶어도' 그렇게 하지 못한다. '감전된 사랑이란 게 있어서'다. 시인은 사랑에 감전되어 있기 때문에 아무리 스스로 '모르는 척'해도 그는 아프다. 누구나 다 타인의 아픔을 아파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시인이기에 가능하다. 그가 '모르는 척'하는건 그가 아프기 때문이다. 

 

지금은 전깃줄 보다도 더 질긴, 눈에 보이지도 않는  끈 world wide web으로 세계가 연결되어 있다. 연결된 것들 하나하나를 모두 아파한다면 시인은 온 생을 앓으며 살아야하리라. 알아야하는 것은 시인의 몫이다. 앓아야하는 것도 시인의 몫일 것이다. 알지만 앓을 수 없는 시인의 생존 방법은 그래서 '모르는척'일 수밖에 없는지도 모른다.

 

짧은 기간동안 두권의 시집을 낸 시인의 눈이 미치지 않는 곳은 거의 없다. 그는 과일 껍질을 벗기면서 '삶의 나사를 풀어 놓는 중이라고'(「껍질의 본능」) 생각하고, 구두에서 소 한마리를 본다. 때로는 '몬트레 수심 1500m 바닥에/ 다리 셋달린 물고기(「세다리 물고기」)'도 보고  브라운관이 깨진 채 버려진 텔레비젼에서 '어떤 노숙자'를 읽기도 한다. 시를 찾는 시인의 눈이 가 닿지 않는 곳이 없다. 그러나 이 폭넓은 視界는 그 넓이만큼 깊이를 획득하고 있는지는 확신할 수 없다.

 

강변에 앉아 소주 한 병 들이켜고

소주병 말고 나를 던져버리면 되는 일,

어차피 병 속의 술을 몸에 옮겼으니

내가 소주병 되어

뻐끔뻐끔 기포 토하며 가라앉을 수 있으리라

                                        「서울이여, 안녕」

그가 저렇게  말하자 나는 공연히 불안해진다.  그의 첫번째 시집 『오동나무 안에 잠들다』가 그 제목만으로 식물적 상상력 혹은 자연친화적이라면 이 두번째 시집은 앓고 있는 자의 '모르는 척'이기 때문이다. '모르는 척' 그가 이미 견딜 수 있는 한계에 다라랐음의 다른말이기도 하지 않은가.  난중일기를 떠오르게 하는

굳이 내 육신의 수몰처럼 사소한 일은

신문에 한 줄 글로 기록하지 마라

같은 구절에서는 그의 시에 넘쳐나는 물의 이미지와 겹쳐 나는 출렁, 시의 멀미를 느껴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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