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스탄티노플 함락 시오노 나나미의 저작들 20
시오노 나나미 지음, 최은석 옮김 / 한길사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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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콘스탄틴'의 존 콘스탄틴이 이 콘스탄티노플과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나는 모른다. 그러나 동로마, 비잔틴 제국이라고 불리던 서구 문명의 한 뿌리가 서서히 퇴락을 거듭, 결국엔 이 콘스탄티노플이라는 이름만 남아 로마 역사의 마지막을 장식했다는 것은 알고 있다.

비잔틴 제국은 1,200여년 간의 역사 중 어느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다. 종교적으로는 로마 카톨릭과 대립하여 동방정교(그리스 정교)로 분리되었고 정치적으로는 왕권 다툼이 끊이질 않는 등 내정이 불안정해 급기야 13세기 초, 같은 기독교도로 이루어진 4차 십자군의 침략을 받아 잠시 동안 멸망하기도 했다. 그리하여 야금야금 제국의 영토는 줄어들고 영향력은 사라지기 시작해 비잔틴과
콘스탄티노플이 동일시 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콘스탄티노플은 원래 난공불락의 성이었다. - 십자군에게 점령 당한 것만 제외하면 - 육지의 경우 당대 최강이라 알려진 삼중 성벽은 적들이 침략 의도를 품기도 전에 포기하게끔 만들었고 한쪽 해변에서 대포를 쏘면 반대쪽 해변까지 날아갈 정도로 좁은 금각만의 해협은 그 입구에 거대한 쇠사슬을 걸어 두는 것만으로도 해상 공격을 완벽히 차단할 수 있었다.  

한낱 도시 국가로 전락해 버린 비잔틴 제국이 그때까지 국가로서의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이 성, 역사상 단 한번도 이교도의 침략을 허용치 않았던 콘스탄티노플 덕분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괴물같은 철옹성도 1453년, 투르크 제국의 21살내기 술탄에 의해 정복당하고 만다. 그리고 이 새파랗게 젊은 술탄, 메메드 2세는 자신의 선조 중 그 누구도 해내지 못한 위업을 기념하기 위해 투르크 제국의 수도를 이곳으로 옮겨왔다. 이것이 지금의 터키(Turki=투르크), 이스탄불(Istanbul)의 옛 역사인 것이다.

콘스탄티노플 함락은 이슬람과 기독교, 세계를 양분한 두 문명의 대충돌의 서막이었고 유럽의 역사를 변화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은 결정적 계기였다. 시오노 나나미가 이 전쟁에 집중하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콘스탄티노플 함락을 시작으로 로도스섬 공방전, 레판토 해전으로 이어지는 삼부작은 그녀가 평생을 바쳐 관심을 가졌던, 지중해 역사의 클라이막스이자 몰락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 소설의 주인공이 피도 눈물도 없이 그저 시간이 흐르는 방향으로 냉정히 걸어가는 '역사 자체'인 것은 아니다. 대신 '인간을 그리는 것을 제일의로 한다'는 작가의 고백처럼 역사의 무대 위에 올라선 사람들, 그들 각자가 이 세상에 대처해나가는 삶의 기록이 주인공이 된다.

그러나 거대한 역사의 무대를 그저 흔적에 불과한 우리 삶의 족적으로 채운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시오노 나나미가 방대한 사료를 직접 수집하고 분석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그녀는 '콘스탄티노플 함락'을 단단한 역사적 사실 위에 세운 뒤 소설적 상상력으로 디테일을 보강했다. 소설이 전해주는 생생한 현장감과 진한 사람의 냄새가 바로 여기서 나온다.

한 때는 오히려 이 때문에 시오노 나나미의 소설을 무시한 적이 있었다. 그녀에게서 배어나오는 진한 실증주의의 체취가 '모르는 것도 쓸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내 지난 날의 가치관을 거슬렀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오노 나나미의 전쟁 3부작을 완독하고 재독하는 이 순간, 이 위대한 소설이 먹어치운 작가의 피나는 노력을 깨달으며, 나는 조용히 지난날의 오만을 반성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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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탈리카의 명반이라 하면 Black Album을 떠올리는 사람이 많다. 새까만 바탕 한 귀퉁이에 하얀 뱀 한마리가 그려져 있는 그 앨범 쟈켓 말이다. 이 앨범이 명반이 된 데에는 아마도 Enter Sandman이라는, 메탈의 팬이 아니더라도 한 두 번쯤 들어봤을 유명한 노래 덕분일 것이다.  

한 때 고등학교 축제 시즌이 시작되면 각 학교 밴드부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이 음악을 오프닝으로 연주했다. 연주가 쉬운 탓에 주로 오프닝 무대를 책임지는 1학년 밴드부들이 공연하기 적합했고 멜로디가 익숙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집중 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메탈리카의 오랜 팬이라면 Black Album은 어딘지 모르게 힘이 빠지는, 마치 혁명의 불길을 20대의 몸으로 헤쳐나와 중년에 이르러 자유를 쟁취하게 된, 이제는 강가에 앉아 노을지는 붉은 하늘을 고요히 바라보는 것 말고는 달리 할일이 없어진 늙은 투사의 느낌을 받곤 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Enter Sandman을 들으면서도 입가엔 나직히 Master of Puppets을 읊조리곤 했다. 

Black Album이 Metalica의 음악적 성숙기를 상징하는 앨범이라면 Master of Puppets은 Slash Metal의 파괴력이 폭발적으로 분출되는 열혈 앨범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앨범의 명곡은 역시 Master of Puppets이다. 시작부터 후두부를 강타하는 듯한 강력한 북소리와 함께 '지기지기지기지기 징징징'하는 기타 리프는 듣는 순간 500 RPM으로 심장을 뛰게 하여 온 몸에 아드레날린을 나르기 시작한다. 오프닝을 기타와 드럼에 양보한 베이스는 그들의 연주가 30초를 지날 때쯤 서서히 눈을 뜨기 시작하는데 둥둥둥둥 울려오는 투박한  현 소리가 마치 지옥에서 올라오는 파리대왕의 날개 소리 같다.  

이제 바톤은 보컬이 이어 받는다. 탁하면서 동시에 카리스마를 내뿜는 제임스 햇필드(James Hetfield)의 보컬은 이제 막 미치기 시작한 악기 소리를 타고 깊이 깊이 감상자의 가슴에 부딪힌다. 만약 이곳이 라이브 콘서트장의 대형 스피커 앞이라면 그대로 심장이 폭발해 버릴지도 모른다고 나는 생각 한다. 그렇게 3분 40초가 흘러간다.  

이 때쯤 악기들은 잠시 소강상태에 들어간다. 그리고 이어지는 간주. 초승달 뜬 깊은 밤, 절벽에 앉아 있는 늑대의 울음소리 같은 커크 해밋(Kirk Hammett)의 기타 연주가 울려퍼지면 라스 울리히(Lars Ulrich)의 드럼은 차분하게 그리고 선명하게 리프를 껴안는다. 드럼과 기타의 말 없는 대화. 기타가 최후의 연주를 끝내고 Fade out 하면 라스 울리히의 북소리가 휴식의 끝을 알리듯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그리고 다시 시작되는 노래 'Master! Master!'.  

이 노래는 8분 30초가 넘어가는 대곡이다. Slash Metal의 교향곡이라 부를 수 있을 정도다. 그러나 용솟음 치는 울림에 몸을 맡기다 보면 어느새 시간은 사라지고 드넓은 공연장에 오직 밴드와 나만 남아 있는 것을 발견한다. 

1986년에 발표된 이 앨범은 메탈리카가 성공적인 음악 생활을 이어갈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 줬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적어도 몇 년 안에 메탈리카가 Legend로 군림할 수 있을 것이라는 가능성을 발견하기도 했다. 메탈리카가 현재 '전설'이라면 그건 Enter Sandman 때문이 아니라 Master of Puppets 때문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이 세상에 유일하게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모든 것은 변한다'라는 사실 뿐이다'는 말이 있다. 나는 60이 넘은 U2라던가 70이 넘은 Deep Purple은 상상할 수 있어도 할아버지가 된 메탈리카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다.   

그러나 라스 울리히의 심장을 멎게 만드는 드럼 소리도 시간의 흐름을 막을 수는 없었다. 내가 Master of Puppets에서 마모되지 않은 순수한 메탈혼을 느끼는 이유는 아마도 젊은 시절의 메탈리카가 보여줬던 살 떨리는 파워와 Master of Puppets을 끝으로 시간을 멈춰버린 클리프 버튼(Cliff Lee Burton)의 죽음이 오버랩되기 때문이 아닐까, 나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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촘스키, 누가 무엇으로 세상을 지배하는가
레미 말랭그레 그림, 드니 로베르 외 인터뷰 정리 / 시대의창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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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은 노암 촘스키다. 신자유주의와 권력 비판에 있어서 이 사람을 빼놓을 수는 없다.  

노암 촘스키는 원래 언어학자이자 교수였다. - 28세에 이미 MIT 교수였다 - 그러다가 1960년대 베트남 전쟁 반대를 기점으로 다양한 사회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 현재는 실천적 지식인의 상징이 되어 지옥으로 가는 산타마리아 호에서(미국) 유일하게 찬란한 빛을 발하고 있는 세계의 양심으로 칭송받고 있다.  

우리나라로 비교하자면 원래 미학자이자 교수였던 진중권을 떠올릴 수는 있으나 레벨로 따지면 글쎄, 노암 촘스키는 만렙이고 진중권은 이제 겨우 캐릭을 만든 newbie에 불과하다. 물론 그에 대한 진정한 평가는 노암 촘스키처럼 82세가 될 때 쯤에 다시 해보자. 어쨌든.

촘스키에게 감사하고 있는 사실중 하나는 그가 언어학자로만 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가 평생 연구만 하고 살았다면 나는 결코 촘스키의 사상을 접할 수 없었을 것이다. - 언어학은 너무나 어렵다. 그러나 그의 사명은 언어학에만 있지 않았다. 촘스키가 언제나 지식인의 책무를 강조하듯 그는 오롯이 그의 사상을 살아냈다.  

서기 0년에서 32년 사이에 활동했던 뜨거운 청년 예수도 사회 변화를 막는 가장 큰 적을 중산층 지식인으로 규정했다. 지식인으로서 사회의 존경을 받지만 비판만 할뿐 결코 행동하지 않는, 그리하여 하층민의 거짓 선지자 역할을 하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에게 있어 촘스키는 시대의 양심이란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지식인들이 어떤 행동을 해야하는지 길을 밝혀주는 등대요 횃불이라 할 수 있겠다.

촘스키에게 감사하고 있는 두 번째 사실은 그가 책을 쓰는 것과 동시에 다양한 인터뷰를 했다는 것이다. 글로 썼다면 분명 따분하고 어려웠을 내용들이 인터뷰에선 언제나 생생한 말들로 살아난다. '촘스키, 누가 무엇으로 세상을 지배하는가'도 그런 인터뷰를 모아놓은 대담집이다. 이 책은 두 시간 동안 촘스키와 나눈 대화를 무려 2년에 걸쳐 정리한 책이라고 한다.  

책을 읽어 보면 그 같은 정성을 쉽게 느낄 수 있다. 보통 말을 그대로 글로 옮겨 읽어 보면 앞뒤가 안맞는 경우가 많다. 말이란 두서 없이 진행되고 다양한 생략이 이뤄지기 때문이다. 답변자가 질문을 오해하거나 질문 내용에 대해 평소 깊게 생각해 보지 않은 내용이라면 답변은 빙빙 돌아 엉뚱한 곳에 불시착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책에선 그런 경우를 거의 찾아 볼 수 없다. 아마 2년에 걸친 정리 기간 동안 수 없이 인터뷰를 보완하고 여러 차례 촘스키의 감수를 받았을 것이다. 그리하여 노암 촘스키의 '말'은 번듯한 사상의 '글'로 재탄생 할 수 있었다.

나는 첫 페이지를 읽자마자 촘스키의 압도적 사상의 향연에 변기 속의 응아처럼 빨려들었다. 이런 결과물을 만나본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고릴라의 뱃속에서 구음진경을 발견한 장무기처럼 나는 이 책을 통해 진보의 내공을 더할 수 있었다.  

만약 당신이 지금의 세상에 불만을 품고 있다면, 그래서 이 세상을 바꾸고 싶다면, 부탁하건데 이 책을 보라. 문제에 처한 사람들이 스스로 체제에 대항하지 않으면 역사는 끔찍한 드라마를 되풀이 하는 법. 그러니 가난하고 힘 없는자, 우리 스스로를 대마왕 손아귀에서 구해내는 그날까지 Keep on fighting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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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폰 3GS 3G iPhone 3GS 3G 용 SGP 케이스 울트라씬 레더 그립 시리즈 - 화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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폰을 떨어뜨렸을 때, 케이스가 분리되어 보호를 하나도 못해줍니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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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깨짱 2010-06-29 08: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라더니... 40자평을 쓰셨군요
 
굶주리는 세계 - 식량에 관한 열두 가지 신화
프랜씨스 무어 라페 외 지음, 허남혁 옮김 / 창비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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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선 리뷰 'MB노믹스를 까고 싶다면 이 책을 봐라 - 장하준의 나쁜 사마리아인'편에서 나는 이미 신자유주의의 요점과 그것이 개발도상국의 경제를 지배하는 수법에 대해 설명한 바 있다. '굶주리는 세계'는 그 중에서도 농업과 관계맺는 점들을 살펴 그 폐해를 밝히는 책으로 신자유주의 체제하에서 개발도상국의 국민들이 실제로 겪는 신체적, 경제적 착취를 설명하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따라서 신자유주의에 대한 거시적 관점은 '나쁜 사마리아인'에서, 실제 피해 사례와 고통의 규모를 파악하는데는 '굶주리는 세계'를 읽는 것이 신자유주의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가능하게 한다고 볼 수 있다.

신자유주의 체제하에서 농업국들의 피해는 참혹하다. 정확히 말하면 농업국의 피해가 아니라 농업국에 살고 있는 농민들의 피해다. 문제의 요점을 살펴보자.  

신자유주의는 농업국을 농업국으로, 공업국을 공업국으로 영원히 유지하려는 목표를 갖고 있다. 그런데 농업국이 농업 수출국이 되기위해선 팔리는 작물을 심어야 한다. 이것을 환금 작물이라 부른다. 한편 이 환금 작물은 주로 대규모로 재배된다. 어떤 산업이든 규모의 경제를 유지해야 가격 경쟁력을 갖출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대규모 사업은 일반 농부들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당연 대지주나 대기업, 즉 소수의 부자들만이 가능한 사업이다. 바로 여기서 농민들의 비극이 시작된다.

신자유주의 이전의 시대에는 자영농이나 혹은 소작농들이 식량으로 쓸 수 있는 곡물들을 재배하며 그나마 먹고 사는 것이 가능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 체제가 들어서고 대기업과 지주들이 토지를 독점하게 되면 땅은 더이상 먹을 것과 입을 것을 마련해 주던 삶의 터전이 아니다. 기업의 관심은 오로지 단위 면적당 이익이다. 
그들에겐 팔리지 않는 곡물을 심어 땅을 낭비할 여유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온 국토의 논과 밭은 환금 작물로 도배된다. 이 과정에서 땅을 잃거나 더이상 농사로 삶을 유지하기 힘든 농민들은 전부 일용직 노동자가 되어 대기업들의 농장에서 하루 종일 착취 당한다.  

그러나 그들이 얻는 노동의 대가는 말하기 민망할 정도다. 자녀들의 교육 문화 비용을 감당하기는 커녕 천정 부지로 오른 곡물 값 때문에 식량을 구하기조차 힘들다. 농토가 환금 작물로 도배되는 바람에 주식이 되는 곡물들이 씨가 마른 탓이다. 수입 곡물을 사먹으면 된다는 말은 빵대신 고기를 먹자는 마리 앙투와네트의 말만큼 무심하다.

재앙이 여기서 그친다면 행복한 일이다. 농사를 짓기 위해선 많은 양의 비료와 농약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 농업국들에게 비료와 농약을 제공하는 것이 바로 선진국의 화학 기업들이다. 개발도상국의 농장은 선진국의 화학 기업들에게 값싸며 문제를 만들지 않는 실험장이다. 온갖 독극물로 제조된 농약들은 개도국으로 운반되고 이것들은 변변한 보호장구도 없이 사람에 의해 뿌려진다. 막대한 화학 물질에 맨 몸이 노출 되는 것은 물론 일용직 노동자가 된 농민들이다.  

이제 굶주리는 세계는 농민들의 피로 범람한다. 신자유주의는 그 피를 양분으로 무럭무럭 자라나는 지옥의 대마왕이다.

'굶주리는 세계'는 이 땅에 한 끼 밥 조차 챙겨 먹지 못하는 빈자들이 넘치는 이유를 다양한 사례를 들어 제시한다. 그곳엔 무의미한 외침과 선언,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정확한 통계와 구체적 수치가 존재한다. 그 수치 속에서 우리가 알아낼 수 있는 것은 굶주림이란 결국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 낸 것이라는 사실. 그러므로 그 해결 또한 우리의 손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만약 이 모든 것들이 현재의 당신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믿는다면 조만간 농약 앞에 서게 될 사람은 제 3세계의 농민들이 아니라 당신 자신이 될 것이다. 부자들의 톱니바퀴는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밟아 없앨때까지 결코 멈추지 않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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