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판토 해전에서 가장 인상 깊은 인물을 고르라면 나는 주저없이 '울루지 알리'를 꼽겠다. 해전을 장식한 수 많은 인물 중에 하필 해적이라니. 하지만 현실적인 조건으로 보면 도저히 좋아할 수 없는 인물에 시나브로 빠져들고 마는 경우는 살아가면서 수 없이 경험해본 사실 아닌가. 적어도 울루지 알리에겐 기독교 연합함대의 귀하신 귀족들도 투르크의 오만한 군주도 따를 수 없는 확실한 존재감이 있었다. 흔해빠진 귀족들 사이에서 묻혀 버리기엔 그는 너무나도 독특한 배경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우선 그는 알리 파샤, 시로코와 함께 투르크 함대 최고위 지휘관 중 하나였다. 높은 지위에 뭐 그리 특별한게 있냐고? 이 말을 듣는다면 생각이 바뀔 것이다 울루지 알리는, 기독교 노예 출신 이었다.
울루지 알리 아니 조반니 디오지니는 1520년, 남부 이탈리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를 따라 어부가 된 그는 1536년 알제리 해적 지아페르 라이스에게 붙잡혀 갤리선의 노예가 되는 불운을 겪는다. 당시 베네치아를 제외한 모든 국가에선 갤리선의 노잡이로 적국의 노예를 이용했다.  

노잡이라는 것이 좁고 습한 갑판 밑에서 감독관이 휘두르는 채찍을 견뎌내는 혹독한 직업이다 보니 노예말고는 이런 일을 감당해 낼 수 있는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16세에 불과한 우리의 조반니도 얼마나 힘든 일을 겪었을까? 하지만 지긋지긋한 현실에서 탈출해 세상을 뒤집어 버리고 싶은 마음은 오히려 이 끔찍한 생활을 견뎌내는 뜨거운 불빛이 됐을 것이다.

그래서 조반니 디오지니에게 코르세어가 될 수 있는 기회가 왔을 때 소년은 결코 그 끈을 놓치지 않았다. 마침내 이슬람으로 개종한 그는 해적 역사에 길이길이 남을 '울루지 알리'로 다시 태어났다.

해양국의 전통이 없는 투르크는 주로 해적들이 해군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각자의 근거지에서 해적질로 먹고 살다가도 제국의 부름이 있을 때면 해군으로 출동하는 것이다. 그래서 해적이면서 동시에 총독, 장관 등의 직책을 겸비하는 경우가 많았다. 레판토 해전의 우익 지휘관 시로코도 이집트 총독으로 소개되고 있으나 사실은 유명한 해적이었다.  

울루지 알리도 트리폴리 지역의 해적 투르굿 라이스 휘하에 있었기에 1560년에 투르크 함대의 척후로 복무했다. 5년 뒤 몰타섬 공방전에 참전한 그는 투르크 제독의 눈에 띄었고 때마침 몰락한 투르굿 라이스를 대신해 트리폴리의 장관이 되었다. 그 뒤로는 오직 성공일로였다.

1571년 역사적인 레판토 해전에 울루지 알리가 참전했을 때 고귀한 투르크 제독 알리 파샤의 눈에 울루지 알리란 그저 더러운 이교도 출신의 천한 해적이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투르크 함대가 괴멸한 그 해전에서 유일하게 살아 남아 기독교 연합함대의 동진을 막은 것은 고귀한 알리 파샤도 총독 시로코도 아닌 울루지 알리였다.  

폐허가 된 전장을 유유히 빠져나가는 울루지 알리를 봤을 때 기독교 연합함대의 병사들은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울루지 알리가 살아있는한 베네치아 해군은 잠들 수 없다'는 트라우마는 이 때부터 생긴 일인지도 모른다.

그 후 울루지 알리는 투르크의 해군을 성공적으로 재건하면서 최고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16세, 기독교 포로로 잡혀와 노잡이가 되야했던 소년이 비로소 지중해의 왕이 되는 순간이었다.  

울루지 알리는 최고 사령관이 된 뒤로도 해적질을 멈추지 않았던 모양이다. 공식적인 집무가 없을 때는 여지없이 배를 타고 나가 기독교 선박을 노략했다는 기록이 있으니까. 그는 분명 해적질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그의 끊임없는 노략질은 자신이 해적임을 자각하려는 평생의 몸부림 이었으리라.  

적의 입장에서 보면 악몽에 가까울 그는 무려 일흔 다섯살이 되어서야 세상을 떠났다. 그것도 여자의 '배' 위에서. 참으로, 해적다운 마무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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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알게 된 사실인데 지중해 시대의 해전은 오늘날 내가 상상하는 그런 싸움이 아니었다. 나는 해전이라고 하면, 적어도 2, 3층 정도 되는 높이에 길이가 200-300미터는 되는 방주급 기함 수십척과 강력한 대포로 무장한 쾌속선 수백대가 초정밀 사격을 가하는 규모와 과학이 어우러진 화려한 경연장 정도로 상상하고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레판토 해전에 쓰인 배들을 살펴보면 수송용 대형 범선과 함포 사격을 담당했던 갈레아차 등이 포함되어 있지만 역시 주류는 갤리선이었다.  




갤리선은 사람이 직접 노를 저어 움직이는 배다. - 전혀 과학적이지 않다! - 보통 노 1개에 3명의 노잡이가 달라 붙었고 노의 갯수는 배의 규모에 따라 각각 달랐다. 그러나 이 배가 사람의 힘으로 움직인다고 해서 능력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비록 대양에서의 항해에는 약점이 있을지 몰라도 기동/조종에 관한한 당시 바다에서 갤리선을 따라올 배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갤리선을 이용한 해전은 대충 이런 양상을 보였다.

양쪽 진영의 함대가 서로 마주보고 선다. 전쟁 시작을 알리는 함포 소리와 함께 양 진영의 선박들이 돌진한다. 서로가 가까워졌다고 느낄때쯤 양쪽의 군사들은 서로를 포위하기 위해 이리저리 움직인다.  

하지만 이리저리 움직이기만 해선 적 선박을 포위할 수 없다. 게다가 이 곳은 뻥 뚫린 바다. 아차 하는 순간에도 곧바로 방향을 틀어 도주해 버리면 쉽게 포위망을 빠져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적 선박의 기동력을 제거하는 것이야말로 이 갤리선 전투의 핵심이었다. 레판토 해전에서 바르바리고가 이집트 총독 시로코를 무찔렀던 방법도 바로 이것으로 당시 바르바리고는 시로코의 함대를 갯벌 쪽으로 몰아 적 함대를 사실상 고립시킬 수 있었다.

기동력을 잃은 적선에 아군의 배가 충돌하여 엉키고 나면 더 이상 바다는 없다. 멈춰버린 한 무더기의 배들은 거대한 육지가 되는 것이다. 그럼 양쪽의 군사들이 서로 칼을 들고 나와 피비린내 나는 백병전을 벌인다. 당시의 해전이 '바다 위에서 벌이는 육전'으로 불렸던 이유가 이것이다.

그러나 육, 해, 공을 막론하고 새로운 무기의 출현은 언제나 전쟁 양상을 크게 변화시켰다. 1453년 콘스탄티노플 함락에 최대의 공을 세운 대포가 함대의 주요한 공격 무기로 자리잡게 되자 기나긴 세월 동안 영광을 누리던 갤리선의 지위는 급속도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 뒤의 이야기는 앞선 리뷰에서도 말한바 있듯이 에스파냐의 무적함대가 영국 해군에 완파당하면서 마무리 지어진다. 이런 양상은 비슷한 시기, 지구 반대편에 있던 조선에서도 발견되는데 그것은 이순신이 활약한 임진왜란에서였다.  

압도적인 전투병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백병전을 주로 하는 일본의 해군이 '아직 12척의 배를 갖고 있던' 이순신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조선의 판옥선에 영국 해군과 마찬가지로 뛰어난 대포와 그를 활용한 절묘한 전술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세월이 흘르고 흘러 당시의 대포는 이제 고성능 미사일과 항공모함으로 업그레이드 되었다. 그런데 2차 세계 대전 당시 이 미사일과 항공모함을 무력화 시킨 것이 마치 백병전을 연상케하는 카미카제 특공대였다는 것은 참 아이러니한 사실이다.  

카미카제 특공대에 충격을 받은 미군은 그 때 이후로 상당한 연구를 거듭, 급기야 현대 해양 강국의 기준이 된다는 무적의 방패 이지스함을 등장시키기에 이른다. 그러나 카미카제가 항공모함을 무너뜨린것 처럼 이지스함 또한 되풀이 되는 역사의 희생양이 될 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도 이지스함은 무적이라고? 역사의 진보를 믿는 당신의 마음에 상처주고 싶진 않지만, 카미카제 특공대의 자살 테러에 무너지기 전까지 항공모함이 불리던 이름이 바로 그 '무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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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판토 해전 시오노 나나미의 저작들 4
시오노 나나미 지음, 최은석 옮김 / 한길사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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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9년 9월 13일, 베네치아 국영조선소에 화재가 발생했을 때 키프로스 섬은 입만 닫으면 먹혀버리고 마는 악어새의 운명에 처해 있었다.

키프로스는 당시 여왕이었던 카트린느 코르나로로부터 매각을 강요, 1489년 베네치아 공화국의 차지가 된 지중해의 섬이다. 그런데 이 섬의 위치를 보면 이슬람 안뜰의 뱀둥지로 불리던 성 요한 기사단의 로도스 섬보다도 투르크 제국에 밀착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야말로 호랑이의 입 한복판에 자리잡고 있는 셈.  

코 앞에 있는 적들로부터 끊임 없는 위협을 받아야하는 이 섬이 뭐가 그리 중요하냐고 물을 수 있겠지만, 영토에 의지하지 않고 그저 해상 무역만으로 지중해의 최강자가 될 수 있었던 베네치아에게 대 투르크 무역의 전초기지인 키프로스는 그야말로 없어서는 않될 중요한 섬이었던 것이다.  




이는 물론 투르크에게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두 나라의 입장은 좀 달랐다. 투르크의 입장에선 키프로스가 베네치아령임으로 인해 얻는 이득이 자신이 직접 차지하고 있을 때 보다 오히려 재미가 좋았기 때문이다.  

우선 '베네치아령 키프로스'의 존재로 인해 투르크는 동서를 잇는 다양한 문화, 기술과 지속적으로 교류할 수 있었고 서유럽 강대국들과 외교적인 접촉을 시도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베네치아로 
부터 거둬들이는 조공, 통상료등의 물질적 이득은 매우 짭짤했다. 한마디로 '베네치아령 키프로스'는 가만히 앉아 있는 투르크 제국의 발 밑으로 호박 넝쿨째 굴려주는 보물단지였던 것이다.

그러나 종교가 개입하면 언제나 일은 비합리적으로 굴러가기 마련이다. '눈 앞의 섬 키프로스는 제국의 목을 향해 겨눈 칼날과 같다. 존귀한 알라 앞에서 어찌 물질적 이득을 논할셈인가. 섬에서 이교도들을 몰아내고 위대한 알라의 힘을 보여주자' 이것이 투르크 궁정의 주류로 떠오르고 있는 대(對) 유럽 강경파의 논리였고 일관된 주장이었다. 그러니 1569년의 베네치아 국영조선소의 화재 소식이 그들에겐 베네치아를 쓸어 버릴 수 있는 천재일우의 기회로 보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1570년 2월 중순 베네치아 시에 투르크 제국의 사신이 도착한다. 그가 전한 술탄의 친서는 간단 명료. '키프로스 반환'. 끝을 모르는 이교도의 오만에 베네치아 의회는 220표 중 199표의 반환 반대로 화답했다. 이리하여 그 찬란했던 역사를 스스로 마무리 지으려는 듯 지중해 최후의 전쟁 레판토 해전의 서막이 올랐다.

레판토 해전은 기독교 연합함대 210척과 투르크의 대함대 300척이 맞붙은 최대의 해전이었다. 여기에는 물론 베네치아를 대표하는 바다의 총사령관 '미스터 성채' 베니에르, 참모장이자 소설의 주인공인 바르바리고, 이집트 총독 시로코, 해적왕 울루지 알리 등 지중해를 주름잡던 바다의 터프가이들까지 모두 포함된다. 그야말로 바다와 관계된 모든 것들이 투입된 전쟁인 것이다.

전쟁 준비가 한창 무르익을 즈음 기독교연합함대에 무거운 소식이 전해져왔다. 1년여의 농성 끝에 결국 키프로스가 함락된 것이다. 베네치아 병사들은 슬퍼할 새도 없이 막바지 전쟁 준비에 몰두했다. 자신의 칼 앞에 으스러질 이슬람 병사들의 죽음을 다짐하면서.

1571년 10월 7일, 마침내 '500척의 갤리선과 17만명의 인간이 레판토에서 정면으로 격돌'했다. 정오에 시작한 전투는 저녁때 까지 이어졌다. 적장 시로코의 패배가 알려지는가 싶더니 곧이어 바르바리고의 전사 소식도 알려져왔다. 잠시 후 이슬람 우두머리 알리 파샤의 기함이 연합함대의 기함 앞으로 조용히 끌려나왔고 해적왕 울루지 알리는 남겨진 네 척의 배를 이끌고 유유히 도망쳐갔다. 마침내 연합함대의 뱃전에서 승리의 깃발이 나부꼈다.

포획한 적의 갤리 군선 117척, 소형선 20척, 이슬람 전사자 8,000명, 포로 10,000명, 풀려난 기독교 노예 15,000명. 전과는 거대했다. 가시적인 성과 말고도 베네치아가 얻은 이익은 충분했다. 레판토 해전의 승리는 그 후 7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베네치아에게 귀중한 평화를 안겨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대해전의 승리도 역사의 흐름만큼은 막을 수 없었나 보다. 레판토 해전은 갤리선이 활약한 최대 최후의 전쟁이었다. 이것은 정확히 17년 뒤 에스파냐의 무적함대가 대영제국 해군에 완파 당하면서 확실히 증명 됐다. 대형 범선과 함포사격이 주인공이 된 바다위에 더이상 갤리선이 설 자리는 없었던 것이다.  

또 이 전쟁은 십자가를 앞세운 최후의 전쟁이기도 했다. 역사의 무대가 서유럽으로 옮겨지고 너도나도 영토 국가의 대형화를 지향하던 혼란기에 유럽 어느 국가도 지중해 변방의 이교도들에게 눈길을 돌릴 여력은 없었던 것이다.

이로써 콘스탄티 노플 함락으로 마지막 불씨를 살린 지중해 역사는 로도스섬 공방전으로 활활 타오르더니 마침내 레판토의 앞바다에서 그 장렬한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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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도스섬 공방전 시오노 나나미의 저작들 5
시오노 나나미 지음, 최은석 옮김 / 한길사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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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 중반 쯤에 '마계마인전'이란 소설이 있었다. 원래 제목이 '로도스도 전기'였는데, 그래서 난 로도스 섬을 판타지 소설이 만들어 놓은 환상 속의 섬으로만 알고 있었다. 그런데 '로도스섬 공방전'을 보니 로도스란 섬은 실제로 존재하는 섬이었단 말씀. 게다가 비록 드래곤과 엘프, 드워프가 존재하지는 않으나 그래도 '기사단이 살았던 섬'이었던 것이다.

중세 시대의 기사단이라 하면 대충 3가지로 좁혀진다. 우선 하버드 대학 기호학 교수인 로버트 랭던이 열심히 찾아 헤매던 템플 나이츠(Temple Knights). 성당 기사단으로도 불리며 온갖 신비주의와 결합하여 현존하는 수 많은 '믿거나 말거나' 전설의 뿌리가 된 기사단이다. 14세기 초 프랑스 왕 필리프4세가 이교도로 몰아 주축 기사들이 화형된 뒤로 완전히 소멸됐다.

둘째는 튜튼 기사단. 주로 독일인 기사로 이루어져 있어 독일 기사단이라고도 불렸다. 원래 성지 탈환을 목적으로 십자군에 참여했으나 이슬람 교도가 완전히 성지를 차지한 이후로 유럽 각지를 돌며 이교도들과 싸움을 벌였다. 한 때는 유럽 전역에 영향력을 끼치기도 했으나 정치적으로 이용되는 등 점점 힘을 잃다가 결국 19세기 초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의해 해체되었다.

셋째가 바로 로도스 섬의 옛 주인이자 현재까지도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성 요한 기사단이다. 원래 성지를(예루살렘) 순례하는 순례자들을 위한 의료 활동이 주 임무였으나 제 1차 십자권 원정 당시 군사적인 성격을 띤 기사단으로 발전하였다. 팔레스타인에서 기독교 세력이 축출된 이후 기사단은 로도스 섬으로 근거지를 옮겼고 이것이 바로 이슬람의 정원에 똬리를 '그리스도의 뱀들'이 된 것이다.

1453년 메메드 2세가 난공불락의 성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한 뒤 동지중해는 투르크 제국의 내해로 포섭되었다. 그런데 그 목구멍에 가시가 걸리 듯 로도스 섬이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저자의 표현대로 '서유럽 최강의 군주라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카를 5세가 투입할 수 있는 전력이 2만에 지나지 않던 시대에, 10만 정도는 가볍게 동원할 수 있는 대제국 투르크의 왕 슐레이만 1세'가 이를 가만 두고 볼 리 있었겠는가.  

게다가 성 요한 기사단은 가만히 농사나 짓고 살던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기사단으로 불렸으나 주업은 해적질 이었고 그 대상은 투르크의 선박 뿐만 아니라 투르크와 우호적 관계를 맺는 기독교 국가에까지 뻗쳐 있었다.

투르크 입장에서 보자면 로도스는 쌀 한톨에도 미치지 못하는 곳이다. 그러나 이는 자존심의 문제다. 엄연한 대제국의 내해를 제 집 안방 드나들듯 하는 벼룩같은 이교도 기사단을 밟아 버리기 위해 슐레이만 1세는 간단히, 10만 대군을 동원해 로도스로 출발했다.

60일 남짓 이어지던 공방전은 1522년 12월, 성 요한 기사단의 완전 항복으로 막을 내렸다. 기사단 모두를 살려주는 조건, 게다가 무장까지 허용한 최고의 예우였으나 창설 이후 단 한번도 이교도와의 타협을 허용치 않았던 기사들의 마음 속에 '항복'이란 두 글자가 비수가 되어 서늘한 찬바람을 일으켰다. 그리고 몇일 뒤,  

장미 꽃 피는 섬 로도스, 영원한 노스탤지어가 될 고향을 뒤로하고 기사단의 배는 정처 없는 떠돌이의 돛을 올렸다.

이 후 기사단은 유럽 각지를 도는 난민이 되었다 가까스로 몰타 섬에 근거지를 마련한다. 그러나 더 이상 전쟁의 최전선에서 이교도와 맞서 싸우던 시절의 기사단이 아니었다. 결국 1798년 이집트 원정길에 나선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 의해 몰타 섬마저 빼앗겼고 또 다시 난민 생활을 이어가다 19세기 초 로마에 정착 하였다. 이 때부터 기사단은 군사적인 측면을 모두 버리고 그 옛날 *아말피 상인의 병원 임무로 돌아가 멀고 먼 역사의 윤회에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성 요한 기사단의 퇴장은 영토형 대국의 등장과 맞물려 서서히 저물어 가는 지중해 시대의 몰락을 의미한다. 이 후로 수 십년이 지나고 나면 바다에서 갤리선은 존재를 감추고 지중해를 호령했던 도시 국가들은 자취를 감춘다. '몰락하는 계급의 마지막 생존자'였던 기사단은 이렇게 뒷 세대에 역사의 바톤을 넘긴 뒤 쓸쓸히 망토를 휘날리며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하였다.

*성 요한 기사단은 이탈리아 아말피 출신 상인이 순례자들의 구호 활동을 위해 세운 '아말피 병원'에서 시작된 종교 기사단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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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티노플 함락 시오노 나나미의 저작들 20
시오노 나나미 지음, 최은석 옮김 / 한길사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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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콘스탄틴'의 존 콘스탄틴이 이 콘스탄티노플과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나는 모른다. 그러나 동로마, 비잔틴 제국이라고 불리던 서구 문명의 한 뿌리가 서서히 퇴락을 거듭, 결국엔 이 콘스탄티노플이라는 이름만 남아 로마 역사의 마지막을 장식했다는 것은 알고 있다.

비잔틴 제국은 1,200여년 간의 역사 중 어느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다. 종교적으로는 로마 카톨릭과 대립하여 동방정교(그리스 정교)로 분리되었고 정치적으로는 왕권 다툼이 끊이질 않는 등 내정이 불안정해 급기야 13세기 초, 같은 기독교도로 이루어진 4차 십자군의 침략을 받아 잠시 동안 멸망하기도 했다. 그리하여 야금야금 제국의 영토는 줄어들고 영향력은 사라지기 시작해 비잔틴과
콘스탄티노플이 동일시 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콘스탄티노플은 원래 난공불락의 성이었다. - 십자군에게 점령 당한 것만 제외하면 - 육지의 경우 당대 최강이라 알려진 삼중 성벽은 적들이 침략 의도를 품기도 전에 포기하게끔 만들었고 한쪽 해변에서 대포를 쏘면 반대쪽 해변까지 날아갈 정도로 좁은 금각만의 해협은 그 입구에 거대한 쇠사슬을 걸어 두는 것만으로도 해상 공격을 완벽히 차단할 수 있었다.  

한낱 도시 국가로 전락해 버린 비잔틴 제국이 그때까지 국가로서의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이 성, 역사상 단 한번도 이교도의 침략을 허용치 않았던 콘스탄티노플 덕분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괴물같은 철옹성도 1453년, 투르크 제국의 21살내기 술탄에 의해 정복당하고 만다. 그리고 이 새파랗게 젊은 술탄, 메메드 2세는 자신의 선조 중 그 누구도 해내지 못한 위업을 기념하기 위해 투르크 제국의 수도를 이곳으로 옮겨왔다. 이것이 지금의 터키(Turki=투르크), 이스탄불(Istanbul)의 옛 역사인 것이다.

콘스탄티노플 함락은 이슬람과 기독교, 세계를 양분한 두 문명의 대충돌의 서막이었고 유럽의 역사를 변화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은 결정적 계기였다. 시오노 나나미가 이 전쟁에 집중하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콘스탄티노플 함락을 시작으로 로도스섬 공방전, 레판토 해전으로 이어지는 삼부작은 그녀가 평생을 바쳐 관심을 가졌던, 지중해 역사의 클라이막스이자 몰락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 소설의 주인공이 피도 눈물도 없이 그저 시간이 흐르는 방향으로 냉정히 걸어가는 '역사 자체'인 것은 아니다. 대신 '인간을 그리는 것을 제일의로 한다'는 작가의 고백처럼 역사의 무대 위에 올라선 사람들, 그들 각자가 이 세상에 대처해나가는 삶의 기록이 주인공이 된다.

그러나 거대한 역사의 무대를 그저 흔적에 불과한 우리 삶의 족적으로 채운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시오노 나나미가 방대한 사료를 직접 수집하고 분석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그녀는 '콘스탄티노플 함락'을 단단한 역사적 사실 위에 세운 뒤 소설적 상상력으로 디테일을 보강했다. 소설이 전해주는 생생한 현장감과 진한 사람의 냄새가 바로 여기서 나온다.

한 때는 오히려 이 때문에 시오노 나나미의 소설을 무시한 적이 있었다. 그녀에게서 배어나오는 진한 실증주의의 체취가 '모르는 것도 쓸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내 지난 날의 가치관을 거슬렀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오노 나나미의 전쟁 3부작을 완독하고 재독하는 이 순간, 이 위대한 소설이 먹어치운 작가의 피나는 노력을 깨달으며, 나는 조용히 지난날의 오만을 반성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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