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판토 해전에서 가장 인상 깊은 인물을 고르라면 나는 주저없이 '울루지 알리'를 꼽겠다. 해전을 장식한 수 많은 인물 중에 하필 해적이라니. 하지만 현실적인 조건으로 보면 도저히 좋아할 수 없는 인물에 시나브로 빠져들고 마는 경우는 살아가면서 수 없이 경험해본 사실 아닌가. 적어도 울루지 알리에겐 기독교 연합함대의 귀하신 귀족들도 투르크의 오만한 군주도 따를 수 없는 확실한 존재감이 있었다. 흔해빠진 귀족들 사이에서 묻혀 버리기엔 그는 너무나도 독특한 배경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우선 그는 알리 파샤, 시로코와 함께 투르크 함대 최고위 지휘관 중 하나였다. 높은 지위에 뭐 그리 특별한게 있냐고? 이 말을 듣는다면 생각이 바뀔 것이다 울루지 알리는, 기독교 노예 출신 이었다.
울루지 알리 아니 조반니 디오지니는 1520년, 남부 이탈리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를 따라 어부가 된 그는 1536년 알제리 해적 지아페르 라이스에게 붙잡혀 갤리선의 노예가 되는 불운을 겪는다. 당시 베네치아를 제외한 모든 국가에선 갤리선의 노잡이로 적국의 노예를 이용했다.  

노잡이라는 것이 좁고 습한 갑판 밑에서 감독관이 휘두르는 채찍을 견뎌내는 혹독한 직업이다 보니 노예말고는 이런 일을 감당해 낼 수 있는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16세에 불과한 우리의 조반니도 얼마나 힘든 일을 겪었을까? 하지만 지긋지긋한 현실에서 탈출해 세상을 뒤집어 버리고 싶은 마음은 오히려 이 끔찍한 생활을 견뎌내는 뜨거운 불빛이 됐을 것이다.

그래서 조반니 디오지니에게 코르세어가 될 수 있는 기회가 왔을 때 소년은 결코 그 끈을 놓치지 않았다. 마침내 이슬람으로 개종한 그는 해적 역사에 길이길이 남을 '울루지 알리'로 다시 태어났다.

해양국의 전통이 없는 투르크는 주로 해적들이 해군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각자의 근거지에서 해적질로 먹고 살다가도 제국의 부름이 있을 때면 해군으로 출동하는 것이다. 그래서 해적이면서 동시에 총독, 장관 등의 직책을 겸비하는 경우가 많았다. 레판토 해전의 우익 지휘관 시로코도 이집트 총독으로 소개되고 있으나 사실은 유명한 해적이었다.  

울루지 알리도 트리폴리 지역의 해적 투르굿 라이스 휘하에 있었기에 1560년에 투르크 함대의 척후로 복무했다. 5년 뒤 몰타섬 공방전에 참전한 그는 투르크 제독의 눈에 띄었고 때마침 몰락한 투르굿 라이스를 대신해 트리폴리의 장관이 되었다. 그 뒤로는 오직 성공일로였다.

1571년 역사적인 레판토 해전에 울루지 알리가 참전했을 때 고귀한 투르크 제독 알리 파샤의 눈에 울루지 알리란 그저 더러운 이교도 출신의 천한 해적이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투르크 함대가 괴멸한 그 해전에서 유일하게 살아 남아 기독교 연합함대의 동진을 막은 것은 고귀한 알리 파샤도 총독 시로코도 아닌 울루지 알리였다.  

폐허가 된 전장을 유유히 빠져나가는 울루지 알리를 봤을 때 기독교 연합함대의 병사들은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울루지 알리가 살아있는한 베네치아 해군은 잠들 수 없다'는 트라우마는 이 때부터 생긴 일인지도 모른다.

그 후 울루지 알리는 투르크의 해군을 성공적으로 재건하면서 최고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16세, 기독교 포로로 잡혀와 노잡이가 되야했던 소년이 비로소 지중해의 왕이 되는 순간이었다.  

울루지 알리는 최고 사령관이 된 뒤로도 해적질을 멈추지 않았던 모양이다. 공식적인 집무가 없을 때는 여지없이 배를 타고 나가 기독교 선박을 노략했다는 기록이 있으니까. 그는 분명 해적질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그의 끊임없는 노략질은 자신이 해적임을 자각하려는 평생의 몸부림 이었으리라.  

적의 입장에서 보면 악몽에 가까울 그는 무려 일흔 다섯살이 되어서야 세상을 떠났다. 그것도 여자의 '배' 위에서. 참으로, 해적다운 마무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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