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이 어렵다 보니 자주 이사를 하게 된다. 바로 직전에 살던 집은 일년 반을 채우지 못했고 그 전에 살던 집도 채 2년이 되지 않아 나가야했다. 물론 그 전, 그러니까 채 2년을 채우지 못하고 떠나야 했던 그 집 바로 전에 살았던 아파트에서는 꽤 오래 지냈긴 했다. 17평, 작지만 큰 저층 주공아파트. 하지만 그 주공아파트도 네 번의 이사 끝에 겨우 정착한 집이었으니, 1989년 2월 서울로 전입 신고를 한 이래 우리 가족은 무려 일곱 번이나 이사를 하며 이 동네를 맴돌고 있는 것이다. 일곱 개의 집 중 어느 하나도 우리집은 없었다.  

 

 

새로 이사온 집은 빌라인지 주택인지, 어쨌든 2층 짜리 집이긴 한데 우리는 2층에 있는 세 개의 방 중 두 개를 차지했다. 방 하나는 집 주인의 것으로, 실제 집은 홍천에 있어 가끔 올라와 그 방을 쓴다고 한다. 그런 줄 알았다면 세들지 않았을텐데, 그래도 월세가 너무 싸고 우리에겐 별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는지라, 밤사이 고마운 마음을 되새기며 잠에 들었다.

주택 입구에는 가슴팍에도 미치지 않는 쪽문이 달려 있다. 2층으로 올라 오려면 Z자로 꺽인 계단을 두 번이나 돌아야한다. 계단 끝에는 윗 부분이 유리로 되어 있어 안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철제문이 달려 있다. 튼튼한 자물쇠가 달려있긴 하지만 유리를 깨고 문을 열면 속수무책이다. 훔쳐갈 거라곤 책밖에 없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현관문을 닫고 왼쪽으로 돌아서면 또 다시 철제문이 보인다. 집으로 들어가는 최후의 관문이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바로 오른쪽에 집주인의 방이 있고 왼쪽에는 장판을 깔거나 도배를 하지 않아 콘크리트가 그대로 드러난 창고가 있다. 이 두 방 사이로 길다란 복도가 이어진다. 그 복도 끝에 마치 두 개의 삶을 구분하려는 듯, 낡은 나무 문이 버티고 서 있다. 문을 열면 나타나는 두 개의 작은 방이, 바로 나의 집이다.  

 

 

이사에 대해선 그닥 거부감이 없다. 어릴 때 부터 이사를 많이 다녔다. 더 어릴적은 모르겠지만 그래도 기억이 닿는 한에서만 헤아려 봐도 전북 이리 - 지금의 익산 -, 경기도 수원, 인천시 주안동, 송월동, 십정동... 그 중에는 우리 네 가족이 누우면 딱 하나 책상이 들어갈 만한 공간이 남았던 단칸방도 있었고 13층 삼익 아파트의 꼭대기층도 있었다. 할머니, 할아버지, 막내 고모와 함께 살던 집은 금강빌라 302호였다. 베란다에 서면 파란 천막으로 둘러싼 김치 공장이 보였던 게 생각난다. 지금은 이 곳에 주안역이 들어서 모든 것이 사라져 버렸다.

원래 망해서 간 집에는 정 붙이기가 힘들다던데, 이번 이사는 바로 전 집으로 갈 때에 비하면 웬지모를 친숙함마저 느껴진다. 한 번 겪어본 일이기도 하고, 오랫동안 살았던 옛 동네로 돌아온다는 설레임 때문일 수도 있다. 뭐, 앞으로 이보다 못하지는 않을 거라는 체념섞인 희망 탓일지도 모르고.

아무튼 변기 물이 잘 내려가지 않는 다는 점과 화장실 환기가 어렵다는 점만 빼면 이 집은 대체로 합격이다. 책장이 복도에 있어 내 오래된 미래들을 멍하니 바라보는 여유를 누릴 수는 없게 됐지만, 그래도 책을 버리지 않고 가져온 것만해도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이사할 때 마다 우리가 버리고 온 책을 모으면 아마 지금의 집을 가득 채우고도 남았을 것이다.  

  

  <출처: Flickr, m4calliope>

 

이러나 저러나 25년여, 나와 함께 살아온 동네로, 나는 돌아왔다. 앞으로의 내 인생이 어디로 향할지, 이보다 좋아질지 아니면 더 나빠질지 누구도 예측할 수 없을 것이지만, 그래도 그 시작이 이토록 미약하다는 사실에 나는 감사한다.

그 시작은 미약했으나 네 끝은 창대하리라. 역경을 견디고 고난을 참는건 내 특기다.  

이 뒤의 이야기가 어떻게 될지 들려주고 싶어 이 글을 쓴다. 글을 읽은 모든 사람은 내 삶의 목격자가 된 셈이다. 아무쪼록 지루하지 않은 이야기가 되도록 노력해 보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내가 교대역 플랫폼에 한 가득 쏟아져 있던 인분을 보고 놀라 이러는게 아니다. 냄새가 고약했기 때문도 아니다. 구역질이 났기 때문도 아니다. 어딘가에서 그 똥의 주인이 나를 지켜보고 있을 거란 생각에 겁이 났기 때문도 아니다.

물론 처음엔 이런것들 때문에 짜증이 나긴 했다. 하지만 짜증은 오래가지 않았다. 후각은 적응했고 시선은 손에 들고 있던 책 쪽으로 곧장 옮겨갔다. 그런데 아무리 집중하려 해도 도통 책을 읽을 수 없었다. 시퍼렇게 멍들어 스치기만 해도 격통이 몰려오는 상처를, 웬지 모르게 계속 찌르며 아픔을 느끼고싶은 마조히즘적 본성이, 귓가에 인분을 쳐다보라고 속삭였다.

나는 끝내 그 똥을 바라보지는 않았다. 하지만 책도 읽을 수 없었다.
 

 

 

내가 삼호선에서 칠호선으로 향하는 고속터미널역 통로에 한 가득 쏟아져 있던 인분을 보고 놀라지 않았다고 하는건 거짓말이다. 깜짝 놀랐다.

불과 수 센티미터 앞에 똥이 놓여 있다는 것도 모르고 나는 걸었다. 참사를 막은 건 후각이었다. 코를 찌르는 인분의 냄새는 고장으로 멈춰버린 대관람차처럼 내 발을 허공에 정지시켰다. 나는 멀찍이 돌아나와 인분을 바라보았다. 바닥위에 점점이 찍혀 있는 흔적을 봤을 때 누군가 똥을 밟고 지나간 것이 확실했다.

아침부터 어지간히 운이 없는 사람이다.

똥은 매우 굵었다. 하마터면 몸짓이 거대한 짐승의 짓이라고 생각할 뻔 했다. 그러나 지하철 내를 돌아다닐 수 있는 동물 중 크기로 따지면 인간이 으뜸 아닌가. 코끼리나 코뿔소 따위가 7호선 어린이대공원역으로 가기 위해 지하철을 이용한다고 생각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것은 인간의 것이 확실했다.

나는 이 똥이 교대역의 그 똥이라고 확신했다. 똥의 색깔과 크기가 심각할 정도로 비슷했다. 게다가 교대와 고터는 삼호선으로 한 정거장 차이였다. 교대가 먼저고 고터가 나중인걸 볼 때 녀석은 삼호선을 타고 움직이는 것 같았다. 해도 해도 너무한다는 생각에 앞서 범인이 아무도 없는 플랫폼에 쭈그리고 앉아, 어딘가에서 나타날지 모르는 관객들 때문에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밤새 삭힌 응가를 시원하게 배설해낼 때 느끼는 카타르시스가 얼마나 클지 상상해 봤다.

이런 상상을 한다고 해서 나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볼 건 없다. 도덕은 도덕이고 감정은 감정이다. 아침마다 변비로 고통받는 누군가라면 그것이 얼마나 시원하게 배설된 건지, 그리하여 자신은 언제 경험해 봤는지조차 생각나지 않는 정화의 기쁨을 어떻게 이리도 간단하게 느낄 수 있을까 하는 사실에, 일부는 부러움과 또 일부는 시기심이 충만한 시선으로 응가를 바라보지 않을 거라고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한편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플랫폼 위에 덩그러니 놓인 응가가 우주의 비밀을 노래하는 우울한 이야기일 수도 있다.

안달복달 해봐야 인간은 결국 똥으로 변신할 뿐이다.

무한한 우주의 시간 속에서 인간에게 주어진 100년 이라는 시간은, 저 응가가 콘크리트 위에 존재할 수 있는 수 십분의 시간과 아무런 차이가 없다라고, 누군가는 울적한 마음에 빠져 그날 하루를 보냈을 것이다. 


 

 

  

원초적 행위는 그것의 단순한 형태에도 불구하고 때때로 심오한 상징을 나타내기도 한다. 만약에 그가 시원하게 갈긴 응가 옆에 장 활동을 돕는 기능성 음료를 놓아뒀더라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이따위 글을 쓰기 위해 이토록 많은 노력을 기울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다행히 녀석은 그렇게 노골적인 놈이 아니었다.

한때 자기 몸의 일부였던 말랑말랑한 덩어리를 단칼에 분리해낸 뒤 곧이어 도착하는 전철을 타고 유유히 사라진다. 고도로 압축되어 있는, 나무랄데 없는 퍼포먼스다.  

나는 언젠가 꼭 한번, 그 놈을 만나보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알렙 보르헤스 전집 3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옮김 / 민음사 / 1996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보르헤스를 완전히 이해하는 날, 더이상 나는 내가 아니다. 이 글은 아직 내가 나일때 쓰는 감상이다. 이해했다는 건 거짓말이고, 읽었다는 사실조차 자신이 없다.

'알렙'은 이 세상의 모든 지점과 모든 역사와 모든 시간과 모든 영상과 모든 소리가 결코 겹쳐지거나 투명해지는 법 없이 담겨 있는 구슬이라, 그것을 보는 순간 세상의 비밀을 모두 알아챌 수 있다지만, 오히려 알렙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하면 할수록 이것을 더더욱 알 수 없게 되는 역설은 보르헤스를 이해하는 한 방법인지 아니면 나의 무지를 드러내는 조롱인지, 역시 모르겠다.
  

 

 

소설 '알렙'에는 신, 시간, 영겁회귀, 우주같은 형이상학적 주제들이 미로, 불사, 재규어의 가죽 무늬, 바퀴 등의 모호한 상징물로 나타난다. 게다가 이 상징물들은 보르헤스가 평생을 고집한 단편이라는 형식 속에서 고도로 압축되어 제시되는 탓에 애초에 갖고 있던 모호함을 넘어 완전한 혼돈 속에 빠지는 경우도 다반사다. - 해외의 독자들은 여기다 번역의 모호함이라는 재앙까지 선물로 받게 된다.

이쯤에서 우리는 작가에게 해석 또는 그에 준하는 실마리를 요구하려 하지만, 보르헤스는 이러한 모호함을 작품 속에서 적극적으로 해석하기 보다는 모호성 그 자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는 권고를 내림으로써 독자를 안개 자욱한 숲 속에 가둬 버린다.
  

 

  

생각해 보면 보르헤스의 작품들은 애초에 머리로 받아들일 수 있는게 아닐지도 모른다. 모든 역사와 시간을 동시에 본다는 것은 존재했고, 존재하며,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이해한다는 얘기지만, 이것을 말과 글로 설명하려 할 때 인간은 수십 만년 동안 갈고 닦은 언어의 기술이 아무짝에도 쓸모 없다는 사실만을 깨달을 뿐이다.

이것은 보르헤스도 마찬가지다. 그는 말과 글이 아무리 뛰어나다 하더라도 그것이 시간의 흐름을 거스르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뱉어낸 모든 말들이, 씌여진 모든 글들이 인과관계에 묶인 죄수에 불과하다는걸 알고 있었다. 결국 언어의 테두리 안에서 알렙이 할 수 있는 최선의 표현은 모순, 불가지 같은 야심차지만 빈약하기 그지 없는 말들이다.

그렇다면 알렙을 이해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때로는 너무 많은 생각이 좋은 생각을 잡아 먹는다. 또는 계산된 음모가 우연을 이기지 못한다.

알렙은 직관으로 봐야한다.
알렙은 점점이 박힌 별들에서 나타나는 별자리 같은거고 갈라진 나무 무늬에서 떠오르는 사람 얼굴 같은 거다. 어떤 단어를 수없이 되풀이해 떠올려 본 적이 있는가? 어느 순간 단어가 의미를 잃고 완전히 낯선 소리로 다가왔던 것을 기억할 것이다. 무의식 속에서 씻겨진 단어는 이 세상과 굳게 관계 맺고 있던 논리의 사슬을 풀어헤치고 괴물같은 본래의 모습을 드러낸다.

안타까운건 설령 당신이 알렙을 직관으로 파악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다른 사람과 공유할 길이 없다는 것이다. 당신은 나에게, 나는 당신에게 결코 설명할 수 없는 것이 이 직관의 깨달음이다. 알렙은 알렙을 말하는 순간 알렙이 아니다.

글로 설명할 수 없는 이야기를 글로 써야 하고 머리로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를 머리로 읽어야 하는 것이 우리의 운명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고작 이성의 무지가 그리는 무한의 고리 위에서, 영원히 방랑하는 것 뿐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시간의안그림자 2011-03-08 05: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각적이고 분석적인 글 잘 읽었습니다^^세상에는 빛이 존재하고, 인생에는 진리라는 것이 존재한다고 하니 그 속에 삼차원 속에 존재하고 있는 우리들이 확인할 길이 보이지 않는 영화 속의 무극은 아니지만 무극같은 사차원적 영원성 같은 것이 있지 않나 싶어 보입니다^^

한깨짱 2011-03-12 10:11   좋아요 0 | URL
네, 사차원적 영원성. 이게 알듯 모를듯 긴가민가한데 막상 글로 표현하려면 정말로 어려운 것 같네요. 이 글은 쓰면서도 올바로 쓰고 있는지 확신이 안섰는데 칭찬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안정효의 글쓰기 만보 - 일기 쓰기부터 소설 쓰기까지 단어에서 문체까지
안정효 지음 / 모멘토 / 2006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안정효는 나에게 번역가로 더 익숙한 사람이다. 우리 집에 있는 책만 헤아려 봐도 그가 번역한 책이 벌써 몇권이다. 얼핏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최후의 유혹과 G.마르케스의 백년 동안의 고독이 눈에 잡힌다. 그런데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그리스 사람이고 G.마르케스는 콜롬비아 사람이다. 그리스 사람은 그리스어를 쓰고 콜롬비아 사람은 스페인어를 쓴다. 뭐 이리 빙빙 돌려 말하냐고 따져 묻기 전에 생각해 보자. 두 대륙의 물리적 거리만큼 큰 차이가 있는 두 작품을 한 남자가 번역한다. 그것도 한 시대를 들었다 놓은 대가들의 작품을.

이런 번역은 맡긴 사람보다 맡은 사람을 칭찬해 줘야 한다. 맡긴 쪽은 약간 무책임하다. 맡긴 쪽이 무책임한게 아니라면, 아마도 역자에게 어마어마한 신뢰를 주고 있는 것이리라. 힐끗 보니 출판사가 열린책들과 문학사상사다. 둘 모두 호락호락한 회사는 아니다.

그런데 더더욱 놀라운 건 이 사람이 사실은 소설가라는 것이다. 90년대 초 큰 인기를 끌었던 영화 하얀전쟁(1992),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1994)의 원작이 바로 이 사람의 소설이다. 게다가 그는 영어로 작품을 쓰고 외국에서 직접 출판하는 몇 안되는, 혹은 유일한 한국 작가이기도 했다. 글에 관한한 웬만한 내공이 아니라는 말씀.  

 

  

 

안정효가 글을 쓰기로 작정한 때는 대학 시절이었다. 만화가가 되고 싶었으나 서강대 영문과에 진학해 버렸다. 이왕 영문과에 간 김에 두루두루 문학을 섭렵하기로 한 모양이다. 그 때부터 많은 책을 읽었다고 한다. 그리고는 방학때가 되면 어느 시골 산 속에 틀어 박혀 영어로! 소설을 썼다.

영어로 소설을 썼다는것 보다 무시무시한 사실은 그가 1981년, 42세의 나이로 문단에 데뷔했다는 거다. 글쓰기를 시작한지 20년 동안 그는 소설가라는 타이틀을 얻지 못했다. 이제 막 소설가의 꿈을 키우는 학생인 동시에 그 일을 시작하기엔 늦은감이 없지 않은 한 사람으로서, 이 사실이 전해주는 위안과 깨달음을 뼈에 새기지 않을 수 없다.

글쓰기는 뚝심이다. 

 

 

 

내 비록 많은 글쓰기 참고서를 읽진 않았지만 감히 말하건대 이 책은 글쓰기를 배우고 싶은 사람이 오래오래 소장하며 두고두고 찾아볼 명작 교과서다.

안정효는 글이란 무엇인가를 따지기 보다는 글 쓰는 '법'을 가르친다. 그래서 알쏭달쏭한 철학과 뜬구름 잡는 얘기가 없다. 벼락같이 영감을 받아 삼일 밤낮을 쉬지 않고 쓰고나니 명작 한 권이 놓여 있더라 하는 말도 없다. 대신 그는 철저한 과정으로서의 글쓰기를 가르친다. 어디에 앉아서 어떤 마음으로, 무엇부터 시작하여 어떻게 끝내야 하는지, 글쓰기의 알파와 오메가를 차근차근 짚어준다. 깐깐한 노교수에게 일대 일 첨삭 지도를 받는 기분이다. 

게다가 이 책은 한국 사람이 한국어로 글을 쓴다는 것에 대해 한국어로 쓴 한국 책이다. 이 사실이 전해주는 감동은 생각보다 거대하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으면 지금 당장 인터넷 서점의 미리보기를 이용하여 글쓰기 만보의 첫꼭지 '수영과 글쓰기'와 어슐러 K. 르 귄의 '글쓰기의 항해술' 서문을 비교해 보라. 한국 사람이 쓴 한국어 문장이 얼마나 강력한 흡입력을 발휘하는지, 책에서 손을 놓을 수 없다는 것이 과연 어떤 경험인지, 어디한번 느껴보라.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 책은 글쓰기를 배우고 싶은 사람이 오래오래 소장하며 두고두고 찾아볼 명작 교과서다. 당신이 다른 생각을 갖고 있으며, 다른 책들을 읽어 내 의견을 반박하고자 한다면, 부디 이 책을 대조군으로 삼아 당신의 가설을 검증해 나가길 바란다. 이 책이 그 정도의 자격쯤은 갖추고 있다고 나는 확신한다.

물론 나 또한 사람들이 좋다고 하는 글쓰기 지침서들을 꾸준히 찾아볼 것이고 그 감상을 여기에 쓰겠다. 이보다 좋은 책을 발견하게 되면 상당히 기쁜일이 되겠지만, 이 책을 읽은 후로는 도무지 다른 책을 찾아볼 마음이 들지 않는다는게, 문제라면 문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이클 베이의 데뷔작 '나쁜 녀석들'(Bad boys, 1995)이 한국 비디오 대여점의 선반 한구석을 차지했을 때, 사람들은 '대박인 비디오가 하나 나왔다'며 포스터를 지나칠 때마다 한 마디씩 하곤 했다. 참나, 그게 벌써 16년 전이다. 

 

 

 

내 기억에 '나쁜 녀석들'은 저예산 영화였다. 윌 스미스가 나오는 영화가 무슨 저예산이냐고 하겠지만 1995년 당시 윌 스미스는 저예산 영화에 어울리는 싸구려 배우였다. 사실 그가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영화는 나쁜 녀석들 보다 일년 늦게 개봉한 '인디펜던스 데이'(1996)라고 볼 수 있는데, 이 영화 감독이 롤랜드 에머리히다. 여기까지만 얘기해도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겠지만, 보충 설명. 이 사람은 블록버스터만을 고집하면서도 주연 배우만큼은 절대 블록버스터하지 않은 배우를 쓰는걸로 유명하다. 소시적의 제이크 질렌할도(투머로우에 출연) 여기에 속한다.
어쨌든,

잘나가는 연예인들도 한때 어려운 시절이 있었듯 현존하는 최강의 블록버스터 감독 마이클 베이도 처음에는 저예산 영화로 시작했다. 하지만 스타일리쉬한 액션 연출과 유머에 대한 감각, 성공하는 대중 영화의 절대 방정식 두 개를 공학 계산기도 없이 암산으로 풀어 버리는 듯한 마이클 베이를 나쁜 녀석들의 프로듀서 제리 브룩하이머는 한 눈에 알아봤다. 

 

  

<CSI의 아버지 제리> 

 

이 둘이 의기투합한 결과가 1996년 더 락(The Rock)! 1997년 콘 에어(Con Air)! 1998년 아마겟돈(Amargedon)!이다. 오늘날 제리 브룩하이머가 CSI로 침좀 뱉고 캐리비안의 해적으로 어깨뽕을 넣어 입을 수 있는 이유는 사실상 이 3년동안 내리 쌓은 성공이 진토되고 넋이 되어 자금적, 기술적으로 튼튼한 토대가 됐기 때문이 아닐까, 나는 생각한다.

문제는 진주만(Pearl Harbor, 2001)이었다. 전작 3편의 과도한 흥행으로 한껏 고무된 마이클 베이는 장장 300km의 필름을 소모하며 어지간히 미친짓을 해댔다. 흥행 성적 자체는 그리 나쁜게 아니었으나, 마이클 베이는 그 해 최악의 감독상을 수상했다. 줄거리가 개판인 탓이었다.

그런데 그게 뭐?

마이클 베이의 영화치고 줄거리가 탄탄한 영화는 더 락 외에 전무하다. 브루스 윌리스 대신 살아 돌아온 벤 애플렉을 함박 웃음으로 맞이하는 리브 타일러의 모습에서 친구의 친구를 사랑한 케이트 베킨세일을 그리는건 어렵지 않은 일 아닌가? 만약 마이클 베이가 꽉 짜인 스토리 구성 능력까지 갖췄다면 그건 거의 스티븐 스필버그 급이다. 그런데 스티븐 스필버그가 베이만큼 액션을 잘 찍나?

마이클 베이가 스무쓰한 스토리 텔링에 젬병이라고 욕하지만, 그의 영화에선 액션, 근래에 들어서는 CG 자체가 하나의 완벽한 스토리 텔링이다. 이런 사실을 여실히 보여주는 영화가 바로 '트랜스 포머(Transformer, 2007)'다. 

 

 

 

트랜스 포머의 줄거리는 단 한 마디로 요약할 수 있다. 

I'm Optimus Prime!

그리고는 옵티 머스 프라임의 주먹이 날라간다. 대사도 필요없다. 액션의 도입부에서 묘사하는 상세한 변신 장면은 일종의 세레모니다. 전투전에 행해지는 마우리 족의 군무처럼 이것은 스펙타클을 기대하는 관객의 마음속을 한껏 고양시킨다. - 나는 변신 장면에서 눈물이 주륵주륵 쏟아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여전히 줄거리가 개판이라는 말을 들었다.

나는 세상 사람들이, 성공을 위해선 부단히 단점을 극복해야 한다고 말할 때 마다 창자가 비틀어지고 머리가 어질해진다. 하고 싶은 일을 위해선 하기 싫은 일을 해야만 하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진지하게 충고하지만,

다 개똥같은 얘기들이다.

인간에게 주어진 시간은 평생 장점만 갈고 닦아도 그것이 꽃필지 시들어 버릴지 알 수 없을 만큼 짧다. 그런데도 어떻게 단점 따위에 전전긍긍하며 마음을 졸일 시간이 있겠는가?

마이클 베이는 마이클 베이다. 못하는건 하지 않는다. 당신이 스티븐 스필버그가 되든 마이클 베이가 되든 그건 내가 알바 아니지만, 그렇다고 베이의 길이 우습다고 깔봐선 안된다.

그건 사자의 목이 기린의 목보다 짧다며 비웃는 것과 같다.


<뒷 이야기>
마이클 베이는 2003년 '나쁜 녀석들 2(Bad Boys 2)'를 마지막으로 제리 브룩하이머와 결별했다. 제작비가 폭증한 것에 비해 벌이가 시원찮았던 탓이리라. 결별의 사유가 제리에게 있었는지 마이클에게 있었는지 알바 아니지만, 마이클이 제리를 떠나 만든 첫 영화가 아일랜드(2005)라는 사실을 볼 때, 마이클의 선택은 좋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Dream Works를 만났고 스티븐 스필버그라는 갑옷과(제작자) 샤이아 라보프라는 검까지(주연 배우) 얻게 됐다. 스티븐은 다행히 마이클의 장점과 가능성을 존중해주는 관대한 제작자인 것 같다.

믿음은 언제나 위대함을 낳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