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이 어렵다 보니 자주 이사를 하게 된다. 바로 직전에 살던 집은 일년 반을 채우지 못했고 그 전에 살던 집도 채 2년이 되지 않아 나가야했다. 물론 그 전, 그러니까 채 2년을 채우지 못하고 떠나야 했던 그 집 바로 전에 살았던 아파트에서는 꽤 오래 지냈긴 했다. 17평, 작지만 큰 저층 주공아파트. 하지만 그 주공아파트도 네 번의 이사 끝에 겨우 정착한 집이었으니, 1989년 2월 서울로 전입 신고를 한 이래 우리 가족은 무려 일곱 번이나 이사를 하며 이 동네를 맴돌고 있는 것이다. 일곱 개의 집 중 어느 하나도 우리집은 없었다.  

 

 

새로 이사온 집은 빌라인지 주택인지, 어쨌든 2층 짜리 집이긴 한데 우리는 2층에 있는 세 개의 방 중 두 개를 차지했다. 방 하나는 집 주인의 것으로, 실제 집은 홍천에 있어 가끔 올라와 그 방을 쓴다고 한다. 그런 줄 알았다면 세들지 않았을텐데, 그래도 월세가 너무 싸고 우리에겐 별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는지라, 밤사이 고마운 마음을 되새기며 잠에 들었다.

주택 입구에는 가슴팍에도 미치지 않는 쪽문이 달려 있다. 2층으로 올라 오려면 Z자로 꺽인 계단을 두 번이나 돌아야한다. 계단 끝에는 윗 부분이 유리로 되어 있어 안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철제문이 달려 있다. 튼튼한 자물쇠가 달려있긴 하지만 유리를 깨고 문을 열면 속수무책이다. 훔쳐갈 거라곤 책밖에 없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현관문을 닫고 왼쪽으로 돌아서면 또 다시 철제문이 보인다. 집으로 들어가는 최후의 관문이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바로 오른쪽에 집주인의 방이 있고 왼쪽에는 장판을 깔거나 도배를 하지 않아 콘크리트가 그대로 드러난 창고가 있다. 이 두 방 사이로 길다란 복도가 이어진다. 그 복도 끝에 마치 두 개의 삶을 구분하려는 듯, 낡은 나무 문이 버티고 서 있다. 문을 열면 나타나는 두 개의 작은 방이, 바로 나의 집이다.  

 

 

이사에 대해선 그닥 거부감이 없다. 어릴 때 부터 이사를 많이 다녔다. 더 어릴적은 모르겠지만 그래도 기억이 닿는 한에서만 헤아려 봐도 전북 이리 - 지금의 익산 -, 경기도 수원, 인천시 주안동, 송월동, 십정동... 그 중에는 우리 네 가족이 누우면 딱 하나 책상이 들어갈 만한 공간이 남았던 단칸방도 있었고 13층 삼익 아파트의 꼭대기층도 있었다. 할머니, 할아버지, 막내 고모와 함께 살던 집은 금강빌라 302호였다. 베란다에 서면 파란 천막으로 둘러싼 김치 공장이 보였던 게 생각난다. 지금은 이 곳에 주안역이 들어서 모든 것이 사라져 버렸다.

원래 망해서 간 집에는 정 붙이기가 힘들다던데, 이번 이사는 바로 전 집으로 갈 때에 비하면 웬지모를 친숙함마저 느껴진다. 한 번 겪어본 일이기도 하고, 오랫동안 살았던 옛 동네로 돌아온다는 설레임 때문일 수도 있다. 뭐, 앞으로 이보다 못하지는 않을 거라는 체념섞인 희망 탓일지도 모르고.

아무튼 변기 물이 잘 내려가지 않는 다는 점과 화장실 환기가 어렵다는 점만 빼면 이 집은 대체로 합격이다. 책장이 복도에 있어 내 오래된 미래들을 멍하니 바라보는 여유를 누릴 수는 없게 됐지만, 그래도 책을 버리지 않고 가져온 것만해도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이사할 때 마다 우리가 버리고 온 책을 모으면 아마 지금의 집을 가득 채우고도 남았을 것이다.  

  

  <출처: Flickr, m4calliope>

 

이러나 저러나 25년여, 나와 함께 살아온 동네로, 나는 돌아왔다. 앞으로의 내 인생이 어디로 향할지, 이보다 좋아질지 아니면 더 나빠질지 누구도 예측할 수 없을 것이지만, 그래도 그 시작이 이토록 미약하다는 사실에 나는 감사한다.

그 시작은 미약했으나 네 끝은 창대하리라. 역경을 견디고 고난을 참는건 내 특기다.  

이 뒤의 이야기가 어떻게 될지 들려주고 싶어 이 글을 쓴다. 글을 읽은 모든 사람은 내 삶의 목격자가 된 셈이다. 아무쪼록 지루하지 않은 이야기가 되도록 노력해 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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