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교대역 플랫폼에 한 가득 쏟아져 있던 인분을 보고 놀라 이러는게 아니다. 냄새가 고약했기 때문도 아니다. 구역질이 났기 때문도 아니다. 어딘가에서 그 똥의 주인이 나를 지켜보고 있을 거란 생각에 겁이 났기 때문도 아니다.

물론 처음엔 이런것들 때문에 짜증이 나긴 했다. 하지만 짜증은 오래가지 않았다. 후각은 적응했고 시선은 손에 들고 있던 책 쪽으로 곧장 옮겨갔다. 그런데 아무리 집중하려 해도 도통 책을 읽을 수 없었다. 시퍼렇게 멍들어 스치기만 해도 격통이 몰려오는 상처를, 웬지 모르게 계속 찌르며 아픔을 느끼고싶은 마조히즘적 본성이, 귓가에 인분을 쳐다보라고 속삭였다.

나는 끝내 그 똥을 바라보지는 않았다. 하지만 책도 읽을 수 없었다.
 

 

 

내가 삼호선에서 칠호선으로 향하는 고속터미널역 통로에 한 가득 쏟아져 있던 인분을 보고 놀라지 않았다고 하는건 거짓말이다. 깜짝 놀랐다.

불과 수 센티미터 앞에 똥이 놓여 있다는 것도 모르고 나는 걸었다. 참사를 막은 건 후각이었다. 코를 찌르는 인분의 냄새는 고장으로 멈춰버린 대관람차처럼 내 발을 허공에 정지시켰다. 나는 멀찍이 돌아나와 인분을 바라보았다. 바닥위에 점점이 찍혀 있는 흔적을 봤을 때 누군가 똥을 밟고 지나간 것이 확실했다.

아침부터 어지간히 운이 없는 사람이다.

똥은 매우 굵었다. 하마터면 몸짓이 거대한 짐승의 짓이라고 생각할 뻔 했다. 그러나 지하철 내를 돌아다닐 수 있는 동물 중 크기로 따지면 인간이 으뜸 아닌가. 코끼리나 코뿔소 따위가 7호선 어린이대공원역으로 가기 위해 지하철을 이용한다고 생각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것은 인간의 것이 확실했다.

나는 이 똥이 교대역의 그 똥이라고 확신했다. 똥의 색깔과 크기가 심각할 정도로 비슷했다. 게다가 교대와 고터는 삼호선으로 한 정거장 차이였다. 교대가 먼저고 고터가 나중인걸 볼 때 녀석은 삼호선을 타고 움직이는 것 같았다. 해도 해도 너무한다는 생각에 앞서 범인이 아무도 없는 플랫폼에 쭈그리고 앉아, 어딘가에서 나타날지 모르는 관객들 때문에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밤새 삭힌 응가를 시원하게 배설해낼 때 느끼는 카타르시스가 얼마나 클지 상상해 봤다.

이런 상상을 한다고 해서 나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볼 건 없다. 도덕은 도덕이고 감정은 감정이다. 아침마다 변비로 고통받는 누군가라면 그것이 얼마나 시원하게 배설된 건지, 그리하여 자신은 언제 경험해 봤는지조차 생각나지 않는 정화의 기쁨을 어떻게 이리도 간단하게 느낄 수 있을까 하는 사실에, 일부는 부러움과 또 일부는 시기심이 충만한 시선으로 응가를 바라보지 않을 거라고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한편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플랫폼 위에 덩그러니 놓인 응가가 우주의 비밀을 노래하는 우울한 이야기일 수도 있다.

안달복달 해봐야 인간은 결국 똥으로 변신할 뿐이다.

무한한 우주의 시간 속에서 인간에게 주어진 100년 이라는 시간은, 저 응가가 콘크리트 위에 존재할 수 있는 수 십분의 시간과 아무런 차이가 없다라고, 누군가는 울적한 마음에 빠져 그날 하루를 보냈을 것이다. 


 

 

  

원초적 행위는 그것의 단순한 형태에도 불구하고 때때로 심오한 상징을 나타내기도 한다. 만약에 그가 시원하게 갈긴 응가 옆에 장 활동을 돕는 기능성 음료를 놓아뒀더라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이따위 글을 쓰기 위해 이토록 많은 노력을 기울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다행히 녀석은 그렇게 노골적인 놈이 아니었다.

한때 자기 몸의 일부였던 말랑말랑한 덩어리를 단칼에 분리해낸 뒤 곧이어 도착하는 전철을 타고 유유히 사라진다. 고도로 압축되어 있는, 나무랄데 없는 퍼포먼스다.  

나는 언젠가 꼭 한번, 그 놈을 만나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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