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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렙 ㅣ 보르헤스 전집 3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옮김 / 민음사 / 1996년 3월
평점 :
보르헤스를 완전히 이해하는 날, 더이상 나는 내가 아니다. 이 글은 아직 내가 나일때 쓰는 감상이다. 이해했다는 건 거짓말이고, 읽었다는 사실조차 자신이 없다.
'알렙'은 이 세상의 모든 지점과 모든 역사와 모든 시간과 모든 영상과 모든 소리가 결코 겹쳐지거나 투명해지는 법 없이 담겨 있는 구슬이라, 그것을 보는 순간 세상의 비밀을 모두 알아챌 수 있다지만, 오히려 알렙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하면 할수록 이것을 더더욱 알 수 없게 되는 역설은 보르헤스를 이해하는 한 방법인지 아니면 나의 무지를 드러내는 조롱인지, 역시 모르겠다.
소설 '알렙'에는 신, 시간, 영겁회귀, 우주같은 형이상학적 주제들이 미로, 불사, 재규어의 가죽 무늬, 바퀴 등의 모호한 상징물로 나타난다. 게다가 이 상징물들은 보르헤스가 평생을 고집한 단편이라는 형식 속에서 고도로 압축되어 제시되는 탓에 애초에 갖고 있던 모호함을 넘어 완전한 혼돈 속에 빠지는 경우도 다반사다. - 해외의 독자들은 여기다 번역의 모호함이라는 재앙까지 선물로 받게 된다.
이쯤에서 우리는 작가에게 해석 또는 그에 준하는 실마리를 요구하려 하지만, 보르헤스는 이러한 모호함을 작품 속에서 적극적으로 해석하기 보다는 모호성 그 자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는 권고를 내림으로써 독자를 안개 자욱한 숲 속에 가둬 버린다.
생각해 보면 보르헤스의 작품들은 애초에 머리로 받아들일 수 있는게 아닐지도 모른다. 모든 역사와 시간을 동시에 본다는 것은 존재했고, 존재하며,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이해한다는 얘기지만, 이것을 말과 글로 설명하려 할 때 인간은 수십 만년 동안 갈고 닦은 언어의 기술이 아무짝에도 쓸모 없다는 사실만을 깨달을 뿐이다.
이것은 보르헤스도 마찬가지다. 그는 말과 글이 아무리 뛰어나다 하더라도 그것이 시간의 흐름을 거스르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뱉어낸 모든 말들이, 씌여진 모든 글들이 인과관계에 묶인 죄수에 불과하다는걸 알고 있었다. 결국 언어의 테두리 안에서 알렙이 할 수 있는 최선의 표현은 모순, 불가지 같은 야심차지만 빈약하기 그지 없는 말들이다.
그렇다면 알렙을 이해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때로는 너무 많은 생각이 좋은 생각을 잡아 먹는다. 또는 계산된 음모가 우연을 이기지 못한다.
알렙은 직관으로 봐야한다.
알렙은 점점이 박힌 별들에서 나타나는 별자리 같은거고 갈라진 나무 무늬에서 떠오르는 사람 얼굴 같은 거다. 어떤 단어를 수없이 되풀이해 떠올려 본 적이 있는가? 어느 순간 단어가 의미를 잃고 완전히 낯선 소리로 다가왔던 것을 기억할 것이다. 무의식 속에서 씻겨진 단어는 이 세상과 굳게 관계 맺고 있던 논리의 사슬을 풀어헤치고 괴물같은 본래의 모습을 드러낸다.
안타까운건 설령 당신이 알렙을 직관으로 파악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다른 사람과 공유할 길이 없다는 것이다. 당신은 나에게, 나는 당신에게 결코 설명할 수 없는 것이 이 직관의 깨달음이다. 알렙은 알렙을 말하는 순간 알렙이 아니다.
글로 설명할 수 없는 이야기를 글로 써야 하고 머리로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를 머리로 읽어야 하는 것이 우리의 운명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고작 이성의 무지가 그리는 무한의 고리 위에서, 영원히 방랑하는 것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