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 - 개정증보판 한 권으로 읽는 실록 시리즈 2
박영규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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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 천하는 뭉치면 흩어지고 흩어지면 뭉친다는 말은 역사의 고금을 통틀어 늘 진실이었다. 나당 연합군이 고구려에 최후의 일격을 가해 삼한이 통일되고 대한민국의 역사는 이로써 한반도에 갇히게 됐다. 경상도에 고립된 천년 왕국의 통치자들에겐 그 땅을 나와 반도를 걷는 것만으로도 천하를 가진 듯 가슴이 벅찼겠지만 철기병을 이뤄 벌판을 달리던 사람들은 도저히 같은 마음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한반도는 다시 세 개로 쪼개져 자웅을 겨루게 된다. 견훤, 왕건, 궁예. 난세는 결국 왕건으로 종결되고 한반도에는 다시 한번 고려라는 통일 왕조가 탄생한다.


고구려를 계승했다던 나라의 이름이 왜 고려인지는 더 이상 궁금해할 필요가 없다. 고구려가 곧 고려이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고구려와 고려를 혼용해서 썼던 것 같다. 심지어 장수왕 때는 아예 국호를 고려로 고쳤으니 고구려가 곧 고려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그 취지와는 달리 고려는 신라와 더 가까웠던 것 같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통일신라 기간 백제나 고구려 출신이 사회의 주요 인물이 됐을 리는 없었을 테니, 다시 난세에 튀어나온 유력자들은 다 신라를 기반으로 한 호족이었던 것이다.


단적으로 고려 왕실은 족내혼을 선호했다. 왕족과 왕족이 결혼해 성골을 이룬 신라처럼. 고려 왕실의 가계를 보고 있으면 정말 눈이 돌아갈 정도로 복잡하다. 남매끼리의 결혼은 흔하다는 축에도 끼지 못하고 형이 동생의 딸을 왕비로 맞는다든가 자신의 딸을 조카에게 시집보내는 등등도 별일이 아니었다. 왕실이 족외혼을 하는 경우는 왕권이 아주 불안할 때였다. 통일 이후에도 여전히 지방 세력은 사병을 거느리는 등 잠재적 위험으로 존재했기 때문에 이 중 세력이 강한 귀족과 혈연관계를 맺는 것으로 왕실은 그 기반을 닦으려 했다. 태조 왕건이 괜히 19명의 마누라를 들인 게 아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고구려의 계승은 명분일 뿐 현실이었던 적은 없다. 확실히 귀족들은 자기 기반을 떠나 모험하기를 꺼린다. 만주에서 말을 달리던 사람이야 이 땅이 얼마나 작고 소박한지 알겠지만 평생 거기서 나고 자란 사람들은 그 큰 세상을 알 길이 없다. 현실을 바꾸려면 꿈을 꿔야 하고 꿈을 꾸려면 그런 세계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걸 눈으로 봐야 한다. 배를 만들고 싶으면 만드는 법을 가르치지 말고 바다를 보여주라는 말처럼. 


서희가 강동 6주를 오직 말로 얻어내고, 강감찬이 거란을 물리치긴 했으나 흠, 뭐 거란과 여진이 돌아가며 세력을 키운 바람에 있는 땅을 지키기에도 여의치가 않았다. 이런 거란과 여진이 세력을 상실한 건 세계의 재앙이라 불리는 몽골의 부상 때문이었다. 그 재앙을 바로 코 앞에서 맞닥뜨린 고려다 보니 보통의 인간이라면 팔자 탓을 하며 살아갈 의지를 꺾는다 해도 이해할만했을 것이다.


그래도 고려는 멸망하지는 않았다. 오랑캐와 대륙 사이에서 균형 외교를 벌였고 세계를 집어삼킨 몽골의 시대에도 국가를 유지했다. 완전히 사대로 돌아선 조선과는 차이가 있었다는 말이다. 고려와 조선의 차이는, '불가능해도 포기하지는 말아야 한다'와 '현실을 냉정히 받아들이고 할 수 있는 일을 하자'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중요한 건 둘 중에 뭐가 맞는지 따지는 게 아니라, 언제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지 다. 뭐가 맞는지는 언제나 상황에 따라 다르기 때문이다. 유연한 사고가 있었다면 고려가 몽골과 손을 잡고 여진과 거란, 송을 격파한 뒤 몽골을 황제의 나라로 섬기는 대신 만주 땅을 얻어낼 수 있지 않았을까? 조선이 여진과 손을 잡고 명을 무너뜨린 뒤 한몫 크게 챙기는 건 정말로 불가능한 일이었을까?


작은 나라는 정말로 똑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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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한 호칭 문학동네 시인선 18
이은규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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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새로운 언어를 찾고 싶을 때 시집을 읽는다. 평소에는 함께할 수 없었던 단어들이 먼 곳에서 찾아와 한 문장을 이룬다. 이게 저 옆에 설 수도 있구나, 저게 이 앞에 올 수도 있구나. 그 낯섦에 읽는 눈이 매끄럽지는 않지만 오히려 그 요철이 마음에 걸린다. 두 개가 만나 온전한 그림을 이루는 퍼즐처럼.


이은규 시인의 <다정한 호칭>에는 구름과 바람과 꽃이 흐드러진다. 그러나 이것들은 평범한 숭배의 대상이 아니다. 이 시에서 구름과 바람과 꽃은 나와 함께 살아가는 친구에 가깝다. 구름이나 바람이나 꽃이 되고 싶은 게 아니라, 그것들은 그냥 우리의 옆에 서 있는 자연물이다.


  긴 기다림일수록 빨리 풀리는 바람의 태엽

  입김을 동력 삼아 한 꽃이 허공을 새어나온다

  찢겨진 것들의 화음으로 소란한 봄

  꽃은 피는 것이 아니다.

  찢겨진 허공에서 새어나오는 것일 뿐

- 별무소용(p.34)


  꽃잎이 귀띔해준 

  초속 3센티미터로 지는 그 이름은 비밀에 부치기로 한다

  말들은 공기의 미동에 따라 알맞게

  바람에게서 귀동냥한 표현이거나 출처를 잊어버린 인용의 일부이기도 하다

- 발끝의 고해성사(p.78)


  빗물 고인 소금사막에 떠 있는 기억의 신기루

  그 풍경을 손에 담으면 구름을 간직할 수 있을까

  간직을 꿈꾸게 하는 이름들

  구름과 당신이 같은 종족임을 말하지 않겠다

- 소금사막에 뜨는 별(p.80)


  바람의 춤이 보인다면 그건 구름의 몸을 빌렸거나 폐활량이 푸른 여름잎의 소관일 것, 구름은 바람으로 흐르고 바람은 여름잎으로 들리니까

- 허밍, 허밍(p.94)


<다정한 호칭>은 쉽게 읽히는 시는 아니다. 멀리 있는 고단한 잠과, 나를 찾지 못한 잠이 누구의 호흡으로 도착해 하룻밤을 보내고 있는지(p. 60) 절기 전에 꽃을 잃는 기억(p.72)이 무엇일까 상상해야 한다. 손을 짚어가며 여러 번 읽어도 눈이 걸려 넘어진다. 그래서 시인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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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톈 중국사 14 : 선종의 흥기 이중톈 중국사 14
이중텐 지음, 김택규 옮김 / 글항아리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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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톈 교수의 중국사 시리즈가 있다는 걸 이제야 알게 되어 대단히 아쉽다. 이중톈 교수로 말할 것 같으면 중국의 르네상스인으로 모르는 분야가 없는 박학다식의 천재다. 이름이 알려진 건 <백가강단>이라는 TV 프로그램에서 <삼국지 강의>를 한 게 계기였다. 이 강의는 동명의 책으로도 2권이 출간되어 큰 인기를 얻었다. 나는 두 권을 다 읽었을 뿐만 아니라 내친김에 <초한지 강의>까지 달렸다. 여기에 <이중톈 미학강의>를 더하면 얼추 대표작을 다 나열한 것 같다. 이 중 무엇이 가장 재미있었냐는 질문은 크게 의미가 없지만 굳이 따진다면 미학 강의, 삼국지 1, 삼국지 2, 초한지 순이 아닐까 한다.


이 외에도 중국 현대의 시류를 다룬 책이 있었던 것 같은데 기억이 나지 않는 걸 보니 별로였던 것 같다. 그렇게 자연히 멀어져 오랜 시간 각자의 삶을 살다 이렇게 다시 역사로 만나니 그 반가움이 이루 말할 수 없는 지경이다. 나는 이 중국사 시리즈를 벌써 두 권이나 독파 중이다.


<선종의 흥기>. 내 눈을 사로잡은 건 바로 '선종'이었다. 달마가 시조로 알려진 이 종교는 불교의 한 종파로 아주 독특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꾸준한 정진과 수련을 통해서만 해탈을 이룰 수 있다는 다른 종파와는 달리 한 순간의 깨달음만으로도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돈오점수'와 이를 상징하는 얄궂은 선문답이 바로 그것이다.


중국은 공산주의 국가인 탓에 지배적인 종교가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비단 정치 체제만의 문제가 아니었던 것 같다. 고대 중국사를 통틀어도 종교가 흥기 한 경우는 거의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도교와 불교가 자웅을 겨루던 시절이 있었다. 그들은 황권에 의지하여 서로 세력 다툼을 벌였다. 정치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인연. 중국에서 종교의 흥망성쇠는 오직 권력의 조정에 달려 있었다. 이것은 신앙과는 무관한 일이었다.


실제로 중국 황제 중 진정한 신앙인은 매우 드물었다. 이것이 기독교, 이슬람 세계의 왕들과 매우 다른 점이다. 역시 가장 큰 이유는 '공자' 때문이었다. 유교는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였고 그 정점에 황제가 있다. 백성은 모두 황제의 자식인데 초월적 신이 나타나 황제 또한 그의 자식이라 한다면 어떻게 국가의 기강이 서겠는가.


특히 불교는 황제를 불안하게 만드는 몇 가지 요소를 갖고 있었다. 승려들은 호구에서 제외되어 각종 세금을 면제받았고 군주보다 부처를 위에 두었다. 수많은 사원들은 자체적인 법률과 법규, 심지어 승병을 갖고 있었다. 그들이 단단한 연합체로 발전하면 주지들이 제후로 자처하는 것도 먼 일이 아니었다. 그런 면에서 선종이 그토록 흥기 한 건 정말 의아한 일이다. 달마의 고향에선 거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 종교니 말이다.


<선종의 흥기>는 이 똑똑한 종교가 종교의 무덤이라 불리는 중국에서 어떻게 수천 년을 살아왔는지 살펴본다. 더 좋은 건 같은 시기 대제국을 완성한 이웃 문명을 같이 둘러본다는 것이다. 세 문명은 각각 불교, 이슬람교, 기독교를 중심으로 형성되어 약간의 시차를 두고 각자의 흥망성쇠를 반복한다.


큰 역사를 조명하는 건 언제나 즐거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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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노동 - 스스로 만드는 번아웃의 세계
데니스 뇌르마르크.아네르스 포그 옌센 지음, 이수영 옮김 / 자음과모음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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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팬데믹은 우리에게 가짜 노동과 진짜 노동이 무엇인지 구별할 기회를 줬다. 도시가 봉쇄되고 모임이 금지된 그 시기에도 반드시 모여 일을 해야만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청소부, 간호사, 소방관, 경찰관 기타 등등. 정말 놀라운 건 저 중에 내가 하는 일은 포함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회계사, 변호사, 전문 경영인, 마케터, 준법 감시 책임자 등도 마찬가지였다. 여기에 숨겨진 역설을 눈치챈 건 나만이 아닐 것이다. 특히 필수 인력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연봉 차이를 떠올리면 그 역설은 더욱 도드라져 보인다.


내 생각에 인간은 주 3일 근무가 적당하다. 5일씩이나 나와서 할 일은 거의 없다. 스스로 판단하여 진행할 일은 불필요한 보고 체계 속에서 한없이 늘어진다. 회의는 비 온 뒤 활짝 핀 버섯처럼 우후죽순 만들어지고 이 모든 걸 기록하고 정리하는 문서화가 시작된다. 누군가는 이 모든 비효율을 없애겠다며 TF를 구성해 새로운 보고 체계와 회의 규칙과 문서를 만들어낸다. BOOM!


우리 스스로 우리 일의 허위성을 드러내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다. 세상 그 누가 자기 일은 중요하지 않으며 사실 하루에 3시간 정도면 다 할 수 있다고 말하겠는가? 고대엔 노동이 오직 노예의 것이었다. 노동에서 해방된 시민은 충분한 여가를 즐겼고 이 시간은 어떠한 '실용적 목적'도 가질 필요가 없었다. 자유로운 인간이란 필요에 얽매이지 않는 존재였던 것이다.


상황을 바꾼 건 기독교의 세계관이었다. 근대 자본주의 사회 형성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평가받는 청교도 신앙은, 사실 우리 기대와는 달리 구원을 받을 사람은 이미 정해져 있다는 사상을 견지한다. 아무리 노력하고, 회개해도 당신은 절대로 천국에 갈 수 없다. 천국에 갈 사람은 이미 태어날 때부터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역설적이게도 이 사상은 사람들로 하여금 엄청난 노동을 가능케 했다. 이미 구원이 정해진 사람이라면 살아생전에도 축복을 받을 테고, 그 축복의 증거가 바로 속세에서의 성공이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자기가 구원받은 존재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 미친 듯이 일해 사회적 성공을 이뤄냈다. 그 결과 부를 만들어내는 노동이 신성화된다.


관점은 좀 다르지만 헤겔과 마르크스도 노동이 인간의 본질이라고 생각했다.


사물을 만들고 처리하는 행위는 인간이 자신의 환경과 유기적으로 상호작용하는 방식이며, 한 인간이 세상에 들어가서 자기 자신이 되는 방식이다. 인간이 환경을 처리하고 그 자신을 외면화, 즉 체현하는 건 노동을 통해서라고 헤겔과 마르크스는 말했다. - p.323


노동하지 않는 인간은 이 세계와 나를 유기적으로 연결할 수 없고 연결이 없다는 건 곧 소외됐다는 것이다. 번듯한 직장을 다니다 관뒀을 때 찾아오는 공허나 좋은 직장에 들어간 사촌의 어깨가 올라가는(자기가 곧 그 회사 자체인 것처럼) 이유가 다 여기에 있다. 전자는 세계와 단절이 된 거고, 후자는 더 많이 연결됐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소외란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부산물이다. A를 정상으로, B를 비정상으로 규정하는 순간 B에 속한 것들은 모두 소외된다. 우리에겐 두 개의 선택지가 있다. A를 정상으로 보는 생각을 받아들이고 최선을 다해 A로 옮겨가는 것과 사실은 B가 정상이었음을 주장하는 것. A로 옮겨가려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자기 일의 중요성을 부각하려 할 것이고 그 중요성은 대부분 노동에 투입되는 시간으로 측정될 가능성이 높다. 회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가장 바쁜 사람이다. 하지만 가장 바쁜 사람이 가장 중요한 사람일까? A에 대한 믿음은 우리 스스로를 중요한 사람이 아니라 바쁜 사람으로 만들라고 유혹한다. 


가짜 노동은 이렇게 탄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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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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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에서 나는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를 좋아했다. 야미쿠로가 득시글한 미지의 동굴을 탐험하고, 이상한 박사님과 어시스턴트가 등장하고, 탐정이 미스터리를 풀어나간다. 그야말로 모험활극이 무엇인지 알려주는 소설이었다. 이 소설의 유일한 단점은 중간중간에 '세계의 끝'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이 '세계의 끝'에는 마라맛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단물 빠진 이야기로 가득하다. 한참 모험을 즐기다 이 '끝'을 맞닥뜨리면 장로드래곤 앞에서 한타가 벌어진 순간 PC 전원이 꺼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은 정확히 '세계의 끝'의 확장판이다. 1, 2, 3부로 나뉜 이 소설에서 나는 은근히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를 기대했다. 그래, 이 지루한 1부를 클리어하고 나면 반드시 원더랜드가 기다리고 있을 거야. 기대는 완전히 박살 났다. 768페이지 내내 기다려온 장면은 단 한 문장도 나타나지 않았다.


하루키는 이 작품에 어떤 짐을 느끼고 있었던 것 같다. 과거에 발표한 중편 소설 하나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런저런 곳에 발표한 글들은 전부 출판까지 이어졌으나 이 작품만은 예외였다. 작가로서의 역량이랄까? 뭐 그런 게 부족했던 모양이다. 이후 하루키는 이 모티브를 이런저런 방식으로 풀어냈고 그중에 하나가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였다. 하지만 응어리는 여전했고 그것이 바로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으로 등장했다. 이로써 하루키는 수십 년  담아 온 체기를 모조리 토해냈다.


70세가 넘은 노작가에게는 홀가분한 기분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독자인 나에게 이 소설은 고구마에 고구마를 씹어 삼킨 듯 답답했다. 베레모에 스커트를 즐겨 입는 도서관장이라든가 내 몸에서 분리된 그림자를 찾아가 대화를 나누고, 죽어서 유령이 된 사람을 눈앞에 두고도 아무렇지 않게 그 현실을 받아들이는 특유의 시그니처를 곳곳에 찍어뒀지만 뒷 이야기가 궁금하지 않았던 적은 이 작가의 책 중 유일하지 않았나 싶다.


아무튼 이 꾸준한 작가는 원하는 글을 어디든 발표할 수 있고 심지어 출판까지 가능하다. 그것이 궁극의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습작이든, 징검다리든, 아니면 완전히 실패한 것이든. 나는 이 책이 두세 권으로 분권 됐다면 아마 절대로 읽지 않았을 것이다. <기사단장 죽이기>가 딱 그랬다. 그런데 이 두꺼운 책 한 권을 꾸역꾸역 읽고 나니 <기사단장 죽이기>에 갑자기 흥미가 생겼다. 이것보다 재미가 없기는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처럼 'The World of Haruki'를 꾸준히 탐험해 온 사람이라면 이 기복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어디로 나아가고 있는지 느끼며 정상참작이 가능하겠지만 중간에 뜩하고 끼어든 뉴비들은 당혹스럽지 않을까 싶다. 하루키에 대한 혐오는 대부분 거기서 시작되는 것 같다. 인생에 늘 흥망성쇠가 있듯 작품도 마찬가지인데, 누군가는 '망'에서 시작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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