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 노동 - 스스로 만드는 번아웃의 세계
데니스 뇌르마르크.아네르스 포그 옌센 지음, 이수영 옮김 / 자음과모음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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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팬데믹은 우리에게 가짜 노동과 진짜 노동이 무엇인지 구별할 기회를 줬다. 도시가 봉쇄되고 모임이 금지된 그 시기에도 반드시 모여 일을 해야만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청소부, 간호사, 소방관, 경찰관 기타 등등. 정말 놀라운 건 저 중에 내가 하는 일은 포함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회계사, 변호사, 전문 경영인, 마케터, 준법 감시 책임자 등도 마찬가지였다. 여기에 숨겨진 역설을 눈치챈 건 나만이 아닐 것이다. 특히 필수 인력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연봉 차이를 떠올리면 그 역설은 더욱 도드라져 보인다.


내 생각에 인간은 주 3일 근무가 적당하다. 5일씩이나 나와서 할 일은 거의 없다. 스스로 판단하여 진행할 일은 불필요한 보고 체계 속에서 한없이 늘어진다. 회의는 비 온 뒤 활짝 핀 버섯처럼 우후죽순 만들어지고 이 모든 걸 기록하고 정리하는 문서화가 시작된다. 누군가는 이 모든 비효율을 없애겠다며 TF를 구성해 새로운 보고 체계와 회의 규칙과 문서를 만들어낸다. BOOM!


우리 스스로 우리 일의 허위성을 드러내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다. 세상 그 누가 자기 일은 중요하지 않으며 사실 하루에 3시간 정도면 다 할 수 있다고 말하겠는가? 고대엔 노동이 오직 노예의 것이었다. 노동에서 해방된 시민은 충분한 여가를 즐겼고 이 시간은 어떠한 '실용적 목적'도 가질 필요가 없었다. 자유로운 인간이란 필요에 얽매이지 않는 존재였던 것이다.


상황을 바꾼 건 기독교의 세계관이었다. 근대 자본주의 사회 형성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평가받는 청교도 신앙은, 사실 우리 기대와는 달리 구원을 받을 사람은 이미 정해져 있다는 사상을 견지한다. 아무리 노력하고, 회개해도 당신은 절대로 천국에 갈 수 없다. 천국에 갈 사람은 이미 태어날 때부터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역설적이게도 이 사상은 사람들로 하여금 엄청난 노동을 가능케 했다. 이미 구원이 정해진 사람이라면 살아생전에도 축복을 받을 테고, 그 축복의 증거가 바로 속세에서의 성공이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자기가 구원받은 존재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 미친 듯이 일해 사회적 성공을 이뤄냈다. 그 결과 부를 만들어내는 노동이 신성화된다.


관점은 좀 다르지만 헤겔과 마르크스도 노동이 인간의 본질이라고 생각했다.


사물을 만들고 처리하는 행위는 인간이 자신의 환경과 유기적으로 상호작용하는 방식이며, 한 인간이 세상에 들어가서 자기 자신이 되는 방식이다. 인간이 환경을 처리하고 그 자신을 외면화, 즉 체현하는 건 노동을 통해서라고 헤겔과 마르크스는 말했다. - p.323


노동하지 않는 인간은 이 세계와 나를 유기적으로 연결할 수 없고 연결이 없다는 건 곧 소외됐다는 것이다. 번듯한 직장을 다니다 관뒀을 때 찾아오는 공허나 좋은 직장에 들어간 사촌의 어깨가 올라가는(자기가 곧 그 회사 자체인 것처럼) 이유가 다 여기에 있다. 전자는 세계와 단절이 된 거고, 후자는 더 많이 연결됐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소외란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부산물이다. A를 정상으로, B를 비정상으로 규정하는 순간 B에 속한 것들은 모두 소외된다. 우리에겐 두 개의 선택지가 있다. A를 정상으로 보는 생각을 받아들이고 최선을 다해 A로 옮겨가는 것과 사실은 B가 정상이었음을 주장하는 것. A로 옮겨가려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자기 일의 중요성을 부각하려 할 것이고 그 중요성은 대부분 노동에 투입되는 시간으로 측정될 가능성이 높다. 회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가장 바쁜 사람이다. 하지만 가장 바쁜 사람이 가장 중요한 사람일까? A에 대한 믿음은 우리 스스로를 중요한 사람이 아니라 바쁜 사람으로 만들라고 유혹한다. 


가짜 노동은 이렇게 탄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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