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분과 전체 - 정식 한국어판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지음, 유영미 옮김, 김재영 감수 / 서커스(서커스출판상회)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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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스웨덴 한림원은 독일의 물리학자 베르너 카를 하이젠베르크에게 '양자역학을 창시'한 공로로 노벨상을 수여했다. 그의 나이, 갓 30살을 넘긴 때였다.


도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이런 일이 가능한 걸까? 그는 누구와 만나 무슨 대화를 나누고 어디에 가 뭘 하며 지낼까? 궁금해지기 마련이다. <부분과 전체>는 이러한 궁금증을 풀어주기에 가장 적합한 책이다. 제목만 보면 양자역학의 심오한 원리가 골치 아프게 전개되는 물리학 서적 같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굳이 따지자면 이 책은 일기에 가깝다. 어린 시절 자신을 사로잡았던 철학적 의문에 대한 사색부터, 스승과 제자, 동료들과 나눴던 대화를 재구성해 놓았다. 범접할 수 없는 대 물리학자의 일상을 가까이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인 것이다.


<부분과 전체>를 읽으며 훌륭한 생각이 탄생하는데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역시 '환경'이라는 고루한 사실을 깨우쳤다. 하이젠베르크의 주변에 동일한 철학적 의문을 공유하고 토론할 친구들이 없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그는 아마 쓸데없는 걱정만 일삼는 무쓸모한 아이로 자랐을 것이다. 훌륭한 업적을 만드는 원동력은 단언컨대 의문을 떠올리는 능력이다. 어떤 주제에 대한 성실한 탐구도, 지독한 몰두도 애초에 의문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위대한 생각은 정해진 공부에 몰두하다 벼락처럼 현시하는 게 아니라 끊임없는 의문과 그것을 풀어내려는 노력에 의해 탄생한다. 선현의 지식을 아무리 집어넣어도 의문이 없이는 새로운 것이 탄생하지 않는다.


독일이란 나라의 특징인지 아니면 그의 복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주변엔 비슷한 의문을 갖고 심오한 토론을 즐기는 친구들이 즐비했다. 그의 생각에 동조하고 응원하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얘기가 아니다. 때로는 치열하게, 반대 의견을 내놓으며 설전을 벌이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렇게 생각을 주고받는 와중에 서로는 자기도 모르게 성장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성장이 토론의 주제와 질을 높이는 선순환 역할을 했을 것이다.


위대한 지식인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은 다양한 분야에 대한 다양한 지식의 추구다. 하이젠베르크는 물리학자이기 전에 뛰어난 피아니스트였고 아인슈타인은 바이올린을 즐겨 연주했다. 그들은 물리학만 아는 바보가 아니라 음악, 철학, 정치 기타 등등 이 세계와 인간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졌다. 조금만 심오한 얘기를 나눌라치면 '이과라서 죄송합니다.' 같은 말을 하는 동료는 주변에 없었다. 그들에게 뭔가에 대해 토론할 자격이 있다는 것은 문과냐 이과냐가 아니라 그 주제에 대해 논리적으로 생각할 힘이 있느냐 없느냐로 결정됐다. 이는 자연 과학과 철학이 오랫동안 하나의 뿌리로 여겨지던 서구 세계의 지적 전통 때문이었을 것이다(안타깝게도 이런 전통은 일본에 흘러들어 가 이과와 문과로 나뉘고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인 한국 사회는 여전히 그 폐해에 시달리고 있다.).


나는 하이젠베르크가 이룩한 위대한 업적보다 그가 자신의 의문을 얼마든지 논할 수 있는 친구를 가졌다는 사실이 부럽다. 의문을 가지면 건방지다는 질책을 들어야 하는 사회에 살았다면 그는 결코 오늘날과 같은 업적을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풀리지 않는 의문이 온 몸을 괴롭히는 외로운 밤. 그 고독을 견딜 수 있었던 건, 같은 고민을 하는 친구들이 그 밤을 같이 지켜줬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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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
벨 훅스 지음, 이경아 옮김, 권김현영 해제 / 문학동네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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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를 위한 페미니즘>은 제목 그대로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을 지향한다. 저자 벨 훅스는 페미니즘이 학문적 연구 대상이기 전에 실생활에 적용돼야 하는 실천적이고 정치적인 활동임을 명확히 한다. 페미니즘은 우리가 살고 있는 실제 세계를 변화시키기 위한 운동이라는 말이다.


그러기 위해선 먼저 사람들이 페미니즘이 무엇인지를 잘 알아야 한다. 최근에 나는 회사 엘리베이터 안에서 우연히 두 여성의 대화를 엿들은 적이 있다. 두 사람은 새로 입사한 직장 동료 중에 페미니스트가 있음을 이야기하며 그 사실에 상당한 놀람과 우려의 반응을 보였다. 대화는 결국 '페미니스트든 뭐든 나한테 피해만 끼치지 않으면 괜찮다'는 말로 마무리되기는 했지만 뉘앙스는 결코 긍정적이지 않았다. 이 대화는 그녀들만큼이나 나에게도 큰 놀라움을 주었는데, 오늘날 '페미니스트'란 한국 사회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걸까? 페미니스트란 도대체 뭐길래, 두 여성을 그토록 걱정하게 만들었을까? 짐작이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벨 훅스가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을 지향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심지어 같은 여성에게조차 적대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개념이라면 대다수 사람들의 오해와 편견은 그보다 더 심할 것이 분명하다. 단순히 학문적 성취를 위해서라면 대중이 어떻게 받아들이든 큰 문제가 될 건 없다. 하지만 이 모든 게 세상을 실제로 바꾸기 위해서라면? 오해는 정제하고 의미는 정확하게 사람들의 마음속을 파고들어야 한다.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이 돼야 하는 것이다.


벨 훅스는 페미니즘을 '성차별주의와 그에 근거한 착취와 억압을 끝내려는 운동'으로 정의한다. 성차별주의가 만연한 사회에선 이 단어가 '여자의 입'에서 나왔을 때 일군의 화난 여자들이 남자가 차지한 권력을 뺏기 위해 악다구니를 벌이는 모습을 떠올리기 쉽다. 이러한 편견은 페미니스트를 '극단적 남성 혐오자'로 페미니즘을 '남자의 권력을 차지하기 위한 여성의 반란'으로 쉽게 단정해 버린다.


하지만 저 문장을 다시 한번 읽어보라. 저기 어디에 '남자가 문제'라는 말이 들어 있는가? 벨 훅스가 문제로 꼽는 것은 '성차별주의'이지 '남자'가 아니다. 성차별주의가 만연한 세상에선 '남자로 태어나든 여자로 태어나든 성차별주의적 사고와 행동양식을 받아들이게끔 사회화'(p.18)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러한 이유로 '여자도 남자만큼이나 성차별주의자가 될 수 있다'(p.18).


벨 훅스는 레즈비언 커플, 편모 가정을 예로 들어 성차별주의가 남성의 전유물이 아니며 많은 가정에선 오히려 여성에 의해 전파되고 공고화 한다는(가정 교육의 주체가 주로 어머니이기 때문에) 사실을 지적한다. 성차별주의가 남성이 여성에게 가하는 폭력이라면 레즈비언 커플 사이에선 오직 평화만이 존재해야 한다. 하지만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남자가 사라진 편모 가정도 마찬가지였다. 혹시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해 남보다 더 엄하게 길렀다'는 말을 자랑처럼 하던 얘기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누가 나쁜 놈인지 정확하게 알고 싶은 사람들에게 이같은 주장은 다소 혼란스러울 것이다. 예상했겠지만 벨 훅스는 같은 페미니스트들에게도 수많은 비판을 받아왔다. 하지만 그녀에게 페미니즘은 단순한 여남의 대립 구도가 아니었다. 여자가 남자의 위치를 대신하고, 그 자리에 올라서지 못한 모두를 억압하고 차별한다면 그건 또 다른 성차별주의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여성의 사회 진출과 성공을 막는 유리 천장을 부숴야 하는가?' 라는 질문에 벨 훅스는 '그렇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동일한 일을 하는 여성이 남성과 똑같은 임금을 받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에도 단연코 '그렇다' 고 대답할 것이다. 하지만 벨 훅스는 여성의 사회 진출이 늘어남에 따라 저임금으로 가사 노동을 전담하는 직업군이 탄생했으며, 이 직업의 종사자가 대부분 '여자' 라는 사실을 지적할 것이다. 여성이 양질의 대학 교육을 받은 중산층과(미국의 경우 주로 백인 여성)과 저임금의 허드레 일로 연명하는 빈민층으로 나뉜다면, 그리고 여자든 남자든 이 계급의 분화를 부정하고, 하위층을 억압하고 착취하여 이득을 얻으려 한다면, 벨 훅스는 그 주체가 여자든 남자든 상관없이 그들 모두와 싸울 것이다.


벨 훅스가 원한건 여남의 평등이 아니라 인간 그 자체의 평등이었다. 그녀의 사상은 '내로남불'을 인정하지 않는 엄격함을 보였기에 자신이 목숨을 걸고 지켜온 사람들한테까지 손가락질을 받아야만 했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녀의 페미니즘엔 동류의 주장들을 초월하는 숭고함이 있다.


누군가는 극단주의가 판을 치는 요즘 세상에서 이런 생각이 먹히겠냐고 지적할 수도 있다. 동감한다. 사람들을 뜨겁게 달구려면 명확한 '적'이 있어야 하고, 그 적을 쓰러뜨려 전리품을 나눠가지는 희망을 심어줘야 한다. 그래서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은 내용의 좋고 나쁨을 떠나 많은 고민거리를 안겨준다. 숭고한 대의만으로 사람들의 행동을 바꿀 수 있을까? 그랬다면 이 세상은 진작에 좋아지지 않았을까? 고민은 깊은데, 마무리할 문장은 떠오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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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들핑거 2020-04-17 2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뇌내 마스터베이션은 일기장에 하면 좋겠지만, 잘난 티는 내야 하니 그럴 수야 없겠죠. 있는 척 쓰느라 고생했어요. 책이 아깝네요.

한깨짱 2020-04-19 09:13   좋아요 0 | URL
매번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드디어 열혈 팬을 만났네요.
 
SF 작가입니다 - 딴 세상 사람의 이 세상 이야기
배명훈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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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명훈 작가가 들으면 대단히 섭섭해하겠지만, 나는 그의 소설보다 이 에세이가 100배쯤 더 재미있다. 이미 여러 권의 책을 낸 사람이고 꽤 이름도 알려진 작가지만 그의 소설은 잽만 날리다 끝나버린 권투 경기처럼 어딘가 심심한 데가 있다. 내 읽기 능력이 부족한 탓도 있겠지만 이야기가 내포하는 현실 세계의 비유도 내 눈엔 잘 들어오지 않는다.


그런데 이 에세이를 읽고 나니 배명훈 작가가 가진 이야기가 얼마나 흥미진진한지 깨달았다. 그와는 며칠 밤을 새우면서도 지겨워지지 않을 이야기를 마음껏 나눌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물론 그가 받아주지도 않겠지만). 작가관이나 소설에 대한 철학도 확고해 의견을 나누는 맛이 날 것 같다. 배울게 많은 작가이고, 도움이 되는 에세이였다.


그런 걸 보면 소설 쓰기란 정말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새삼 깨닫게 된다. 소설은 에세이처럼 설명을 하거나 자기의 속내를 툭 까놓고 얘기할 수 없다. 등장인물의 대사와 사건의 전개를 통해 스스로 드러나야 하는데, 말이 쉽지 망망한 백지 위에 한 번이라도 앉아본 사람이라면 그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알 것이다. 소설은 술집에서 신나게 떠벌이는 말과는 차원이 다르다. 평상시에 아무리 재미있던 사람도 TV에 나가면 한 마디도 못하고 돌아오는 어려움에 비유할 수 있을까? '야, 너 소설 한번 써봐라'라고 말할 만큼 대단한 입담을 가진 사람도, '야 이런 소설은 나도 쓰겠다'라고 자신만만히 외치는 사람도, 실제로 소설가가 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이러한 사실은 무라카미 하루키도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에서 귀납적으로 증명한 바 있다.


말이 나온 김에 계속하면, 나는 소설가가 되려는 사람들에게 소설가가 쓴 참고서 중에 하루키의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보다 뛰어난 책을 읽어본 적이 없다. 안정효의 <글쓰기 만보>가 있기는 하지만 그건 작가로서의 삶과 태도를 밝히는 책이라기 보단 구체적인 작법서다. 하루키는 평생을 시시껄렁한 에세이를 써왔지만 저 책에서만큼은 진심을 다해 소설가가 무엇인지를 얘기해 준다. 나는 이 책을 바로 그 옆에 꽂아두고 싶다.


그만큼 <SF 작가입니다>는 소설가가 되려는 사람들에게 피가되고 살이 되는 이야기로 가득하다. 이 글의 첫 문장을 읽는 순간 배명훈 작가가 이 말을 듣고 기분이 좋아질 일은 없을 것 같지만, 그래도 온 힘을 다해 이 책을 홍보함으로써 그의 작가 생활에 도움을 주고 싶다.


나는 작가라는 사람이 하는 수 많은 일 중에 가장 위대한 걸 하나 꼽으라면 '글로 밥을 버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위대한 예술혼이고 나발이고 전업 작가가 되려면, 끝까지 살아남아 언젠가 자신이 꿈에 그리던 대작을 쓰려면, 다 집어 치고 일단 밥부터 벌어야 한다. 나는 이 책이 많이 많이 팔려 배명훈 작가가 어렵지 않게 다음 책을 내놨으면 한다. 그런 의미에서 택도 없이 부족할 테지만, 여기 고사리 손 하나를 얹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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켈리 갱의 진짜 이야기
피터 케리 지음, 민승남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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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켈리 갱의 진짜 이야기>는 호주 개척 시대의 아일랜드인들을 주인공으로 한다. 네드 켈리, 그리고 그의 가족과 친구들. 이들은 당시 '켈리 갱'으로 불렸지만 알 카포네 같은 마피아를 연상해선 안된다. 이들은 평범한 소몰이꾼 혹은 농부에 불과했지만 몇몇 운명의 장난으로 인해 갱으로 '만들어'진다. 두목 네드 켈리는 자기 없이 자랄 딸을 위해 이야기를 남겼고 그 이야기는 배신자의 손에 넘어가 역사가 된다. 얄궂은 일이지만, '인생이 다 그런 것' 아니겠는가.


이 책을 관통하는 두 산맥은 호주라는 미지의 대자연을 터전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끈질긴 생명력과 범죄자는 태어나는가, 아니면 만들어지는가, 하는 질문이다. 우선 첫 번째 산맥을 타고 올라보자.


초기 호주 정착민들은 거대한 오세아니아 대륙에서 가능성과 무력함을 동시에 느꼈을 것이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압도적 공백이 전하는 무력함. 억척스러움은 그들에게 선택이 아니라 필수였다. 새로운 목초지를 찾아내고 울타리를 치고 집을 짓고 마을로 가는 길을 만들고. 이렇게 쟁취한 것들을 누군가가 뺏으려 한다면 잠자코 앉아 대화를 나누기 보단 산탄총을 꺼내 대답을 날리는 게 더 효율적인 법이다. '주둥이 닥치고 내 땅에서 나가. 이 빌이 먹을 xx야.'


네드 켈리의 어머니는 남편을 두 번이나 바꿔가며 끊임없이 자식을 낳는다. 그녀에게 남자는 자신의 제국을 만들고 지키기 위한 수단이었지만 이런 계획이 한 번도 제대로 돌아간 적은 없다. 감옥에서 돌아온 남편은 시름시름 앓다 세상을 떠나고 새로 만난 남자는 헛된 망상에 빠져 가족을 가난의 구렁텅이에 처넣는다. 또 다른 남자는 쓸 일도 없는 주제에 바람을 피운다. 어머니는 바람을 핀 남편에게 샷건을 쏘지만 나쁜 놈은 유유히 도망쳐 나간다. 엄마는 목이 잘린 말 위에 앉아 마른 눈물을 흘린다.


하지만 이 가족의 가장 큰 적은 언제나 권력이었다. 정부는 이상한 법으로 갈고닦은 땅을 뺏으려 하고 부패한 경찰은 자신의 무능을 숨기기 위해 무고한 자를 감옥에 처넣는다. 지금이나 그때나 공권력은 가난한 자의 친구라기 보단 부자들의 집을 지키는 개새끼 쪽에 가까웠다.


켈리 가족의 몰락은 피츠 페트릭이라는 경찰과의 악연에서 시작한다. 그는 네드 켈리의 여동생 중 하나와 결혼을 하길 원하지만 그에겐 이미 여자가 있었다. 이 빌어먹을 생각을 어떤 어머니가 허락할 수 있겠는가? 하물며 네드 켈리의 엄마라면? 피츠 페트릭은 네드 켈리의 여동생을 강제로 끌어 안아 무릎에 앉힌 뒤 허리춤에 찬 콜트 권총에 손을 댄다. 네드 켈리가 말한다. '무슨 개수작이야?'. 네드의 엄마가 삽으로 머리를 후려치자 권총을 뽑아 든 경찰의 손목을 네드 켈리가 쏘아 맞춘다. 경찰은 무릎을 꿇고 자신의 잘못을 반성한다. 그는 켈리 가족의 용서로 목숨을 구한다. 그리고는 모든 경찰력을 동원해 일가족을 쫓기 시작한다. 이쯤 되면 이런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범죄자는 태어나는가, 아니면 만들어지는가?


낭만이라고는 단 한 톨도 섞이지 않은 이 소설에서 재미를 느낀다면 머리가 좀 이상한 걸까? 하지만 소설의 분위기는 생각보다 어둡지 않다.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욕설과 문법을 어긴 문장은 이야기에 이상한 활력을 불어넣는다. 얼핏 코맥 매카시의 국경 삼부작이 떠오르지만 켈리 갱에게서는 상처를 숙명처럼 받아들여 속에 새기는 매카시의 캐릭터들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저항이 느껴진다. 매카시의 캐릭터가 침묵을 남기는 장소에서 켈리 갱은 '씨 x'이라고 말한다. 매카시라는 에스프레소에 위트를 두 스푼 넣은 뒤 마르케스라는(백년 동안의 고독) 찻잔에 받쳐 나온 것 같달까? 신화 같은 이야기 속에서 그들은 생생한 날숨을 내뿜는다. 두꺼운 밧줄이 목에 걸리는 장면을 목격하는 그 순간에서조차 어쩐지 졌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어쩌면 그건 우리가 현대 호주의 모습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인지 모른다. 태어난 모두를 범죄자로 만들었던 끔찍한 대륙은 이제 세상에서 가장 살기 좋은 나라 중 하나가 됐다(인종차별이 심하긴 하지만). 네드 켈리의 가족은 오늘의 진보가 결국 과거에 쏟은 피의 축적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켈리 갱의 투쟁은, 결국 승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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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들핑거 2020-04-02 08: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어쩜, 온갖 예쁜 깃털들을 주어 치장하고 장식한 갈까마귀 같은 글들이네요.

한깨짱 2020-04-02 12:38   좋아요 0 | URL
까악~ 까악~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 우리의 직관 너머 물리학의 눈으로 본 우주의 시간
카를로 로벨리 지음, 이중원 옮김 / 쌤앤파커스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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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카를로 로벨리의 다른 책들과 마찬가지로 매우 어렵다. 마치 음률과 뉘앙스가 완전히 망가진 번역된 시를 읽는 것 같다. 아주 작고 얇은 책이라 만만해 보이지만 어지간한 집중력으로는 이해는커녕 문장을 읽어 나가는 것조차 쉽지 않다.


시간은 이 세상에서 가장 매력적인 물리량이다. 시간 여행은 SF의 단골 소재고 거기서부터 파생된 패러독스와 평행우주는 우리를 온갖 상상력과 가능성의 바다에 던져 넣는다. 미국의 유명 감독 크리스토퍼 놀란은 여기에 온 인생을 뺏겨 <인셉션>과 <인터스텔라>와 <테넌트>를 만들었다.


내가 이 책을 통해 깨달은 유일한 사실은 시간이 보편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심지어 바로 옆에 있는 사람과도 우리는 동일한 시간을 경험하지 않는다. 시간이 중력과 속도에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예컨대 친구와 오늘 오후 3시에 극장 앞에서 만나기로 했다고 치자. 당신은 이미 도착해 극장 앞 벤치에 앉아 있다. 세시가 다 돼갈 때쯤 저 멀리서 빛의 속도로 달려오는 친구의 모습이 보인다. 당신의 시계는 이미 3시를 넘어 3시 1초, 2초를 가리킨다. 지각을 했으니 그에 응당한 대가를 치러야 하는 법. 당신은 당당히 팝콘을 요구하지만, 세상에 친구의 시계는 정확히 3시를 가리키고 있다. 어떻게 된 일일까?


시간은 속도가 빠를수록, 중력이 강할수록 느리게 간다. 친구가 빛의 속도로 달린 순간 이미 그의 시간 변화량은 0이 되었다. 그 속도를 유지하는 한 친구는 절대 늦을 수가 없는 것이다. 물론 이 비유도 정확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친구와 당신이 태어난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완전히 동일한 속도와 중력을 경험해야만 두 사람 사이에 시간의 오차가 발생하지 않기 때문이다. 생각을 더 확장해 나가면 엄마의 뱃속에 있었을 때부터, 엄마가 할머니의 뱃속에, 할머니가 증조할머니의 뱃속에... 설령 빅뱅 이후 완전히 동일한 조건에서 탄생한 원자들이 완전히 동일한 환경 속에서 당신과 당신의 친구를 구성해 냈다고 하더라도 동일한 공간을 점유하지 않는 이상 차이는 생길 수밖에 없다. 게다가 이렇게 맞춘 시간도 결국 당신과 당신 친구 사이의 '특수한' 경험에 불과하다. 다른 위치에서 다른 중력과 속도를 경험하는 사람의 눈에는 두 사람 모두 늦었거나 제시간에 도착한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시간은 결코 보편적이지 않다. 빅뱅 이후 지금까지 우주를 관통하는 단 하나의 시간축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건 우리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당신과 나는 하나의 시간, 하나의 역사를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만의 특수한 역사를 경험한다. 시간은 수조개의 거미줄을 겹쳐 놓은 것처럼 복잡하게 얽혀 있다.


내가 이 책을 통해 어렴풋하게나마 깨달은 두 번째 진실은 시간도 양자라는 것이다. 여기서부턴 나의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에 독해에 주의를 기울여 주기 바란다. 


시간은 부드러운 비단 같이 매끈한 연속이 아니라 더이상 쪼갤 수 없는 특정한 물리량으로(플랑크 단위) 점점이 흩어져 있다. 시간도 양자라는 말인데, 그렇다면 우리가 수많은 물리 서적에서 확인한 그 기이한 양자적 특성을 시간도 똑같이 갖고 있다는 말이 된다. 이게 무슨 말이냐고? 양자 역학 책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전자의 위치가 전자구름 내의 확률로만 기술될 뿐 정확한 위치는 우리의 관측을 통해서만 확정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시간도 마찬가지다. 시간은 1초에서 2초로 매끈하게 흐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양자(시간)에서 다른 양자로 점프를 한다. 마치 첫 번째 관측에서 전자가 좌상단에 두 번째 관측에선 우하단에서 발견되는 것처럼 말이다. 전자의 위치를 확정하는 상호작용이 우리의 관측이라면 시간을 확정하는 것은 사물과 사물, 인간과 인간, 만물과 만물 사이의 '사건'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사건을 일으킴으로써만 시간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아까 극장 앞에서 만난 친구와 지각을 했냐 안 했냐로 싸움을 시작했다고 하자. 이 싸움은 두 사람이 싸움을 일으키기 전까지는 마치 전자의 위치가 확률로만 기술될 수 있듯 과거와 미래에 동시에 존재한다. 하지만 두 사람이 싸우기로 결정한 순간 두 사람이 만나기 전에 두 사람이 싸움을 벌이는 확률은 붕괴하고 만난 이후에 싸움을 벌이는 것으로(미래) 확정되는 것이다! 시간이 양자화 되는 순간 이처럼 미래와 과거 사이의 차이는 완전히 사라지고 만다.


그럼 이런 질문을 던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 무엇과도 상호작용하지 않는다면, 그러니까 이 모든 것을 떠나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산다면 우리의 시간은 멈출까? 그렇지 않다. 우리의 몸은 이미 내부 기관들 사이의 복잡한 상호작용이 일어나는 사건의 보고다. 뿐만아니라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 '곳'이라는 말에서조차 우리는 '곳', 즉 장소의 존재를 배제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공간은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그 또한 더 이상 쪼개질 수 없는 물리적 실체(양자)의 집합이다. 그러니까 질문은 '아무것도 없는 곳'이 아니라 '아무것도 없는 것'으로 바꿔야 하는데, 이는 그 자체가 모순이다. 아무것도 없는 것은 말 그대로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여기까지가 내가 이 책을 통해 깨달은 시간의 특성이다. 읽을수록 머리가 복잡해지고 정신이 아득해지지만 매우 흥분된다는 사실은 감출 수가 없다. 이 세상은 왜 이렇게 만들어졌을까? 이 질문을 던지는 과정에서 혹자는 신과 같은 창조자의 존재를 전제해야 할 것 같은 강력한 유혹에 시달릴 수도 있다. 누군가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만든 게 아니라면 어떻게 이처럼 일관적인 논리에 의해 세상이 구성될 수 있냐는 것이다.


창조자의 역할을 이 판을 만든 존재, 그러니까 양자화된 시간과 공간이라는 모눈 종이를 만든 존재로 한정한다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 이후에 벌어지는 모든 사건은 양자들이 상호작용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우연의 집합에 불과하다. 우리가 하나의 사건을 경험하는 순간 다른 사건이 발생할 확률은 모두 붕괴하기 때문에 우리의 눈엔 보이는 건 단 하나의 실제이고, 그래서 마치 그것이 필연인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양자의 세계에서 필연은 없다. 모두가 우연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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