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 우리의 직관 너머 물리학의 눈으로 본 우주의 시간
카를로 로벨리 지음, 이중원 옮김 / 쌤앤파커스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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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카를로 로벨리의 다른 책들과 마찬가지로 매우 어렵다. 마치 음률과 뉘앙스가 완전히 망가진 번역된 시를 읽는 것 같다. 아주 작고 얇은 책이라 만만해 보이지만 어지간한 집중력으로는 이해는커녕 문장을 읽어 나가는 것조차 쉽지 않다.


시간은 이 세상에서 가장 매력적인 물리량이다. 시간 여행은 SF의 단골 소재고 거기서부터 파생된 패러독스와 평행우주는 우리를 온갖 상상력과 가능성의 바다에 던져 넣는다. 미국의 유명 감독 크리스토퍼 놀란은 여기에 온 인생을 뺏겨 <인셉션>과 <인터스텔라>와 <테넌트>를 만들었다.


내가 이 책을 통해 깨달은 유일한 사실은 시간이 보편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심지어 바로 옆에 있는 사람과도 우리는 동일한 시간을 경험하지 않는다. 시간이 중력과 속도에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예컨대 친구와 오늘 오후 3시에 극장 앞에서 만나기로 했다고 치자. 당신은 이미 도착해 극장 앞 벤치에 앉아 있다. 세시가 다 돼갈 때쯤 저 멀리서 빛의 속도로 달려오는 친구의 모습이 보인다. 당신의 시계는 이미 3시를 넘어 3시 1초, 2초를 가리킨다. 지각을 했으니 그에 응당한 대가를 치러야 하는 법. 당신은 당당히 팝콘을 요구하지만, 세상에 친구의 시계는 정확히 3시를 가리키고 있다. 어떻게 된 일일까?


시간은 속도가 빠를수록, 중력이 강할수록 느리게 간다. 친구가 빛의 속도로 달린 순간 이미 그의 시간 변화량은 0이 되었다. 그 속도를 유지하는 한 친구는 절대 늦을 수가 없는 것이다. 물론 이 비유도 정확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친구와 당신이 태어난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완전히 동일한 속도와 중력을 경험해야만 두 사람 사이에 시간의 오차가 발생하지 않기 때문이다. 생각을 더 확장해 나가면 엄마의 뱃속에 있었을 때부터, 엄마가 할머니의 뱃속에, 할머니가 증조할머니의 뱃속에... 설령 빅뱅 이후 완전히 동일한 조건에서 탄생한 원자들이 완전히 동일한 환경 속에서 당신과 당신의 친구를 구성해 냈다고 하더라도 동일한 공간을 점유하지 않는 이상 차이는 생길 수밖에 없다. 게다가 이렇게 맞춘 시간도 결국 당신과 당신 친구 사이의 '특수한' 경험에 불과하다. 다른 위치에서 다른 중력과 속도를 경험하는 사람의 눈에는 두 사람 모두 늦었거나 제시간에 도착한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시간은 결코 보편적이지 않다. 빅뱅 이후 지금까지 우주를 관통하는 단 하나의 시간축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건 우리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당신과 나는 하나의 시간, 하나의 역사를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만의 특수한 역사를 경험한다. 시간은 수조개의 거미줄을 겹쳐 놓은 것처럼 복잡하게 얽혀 있다.


내가 이 책을 통해 어렴풋하게나마 깨달은 두 번째 진실은 시간도 양자라는 것이다. 여기서부턴 나의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에 독해에 주의를 기울여 주기 바란다. 


시간은 부드러운 비단 같이 매끈한 연속이 아니라 더이상 쪼갤 수 없는 특정한 물리량으로(플랑크 단위) 점점이 흩어져 있다. 시간도 양자라는 말인데, 그렇다면 우리가 수많은 물리 서적에서 확인한 그 기이한 양자적 특성을 시간도 똑같이 갖고 있다는 말이 된다. 이게 무슨 말이냐고? 양자 역학 책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전자의 위치가 전자구름 내의 확률로만 기술될 뿐 정확한 위치는 우리의 관측을 통해서만 확정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시간도 마찬가지다. 시간은 1초에서 2초로 매끈하게 흐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양자(시간)에서 다른 양자로 점프를 한다. 마치 첫 번째 관측에서 전자가 좌상단에 두 번째 관측에선 우하단에서 발견되는 것처럼 말이다. 전자의 위치를 확정하는 상호작용이 우리의 관측이라면 시간을 확정하는 것은 사물과 사물, 인간과 인간, 만물과 만물 사이의 '사건'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사건을 일으킴으로써만 시간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아까 극장 앞에서 만난 친구와 지각을 했냐 안 했냐로 싸움을 시작했다고 하자. 이 싸움은 두 사람이 싸움을 일으키기 전까지는 마치 전자의 위치가 확률로만 기술될 수 있듯 과거와 미래에 동시에 존재한다. 하지만 두 사람이 싸우기로 결정한 순간 두 사람이 만나기 전에 두 사람이 싸움을 벌이는 확률은 붕괴하고 만난 이후에 싸움을 벌이는 것으로(미래) 확정되는 것이다! 시간이 양자화 되는 순간 이처럼 미래와 과거 사이의 차이는 완전히 사라지고 만다.


그럼 이런 질문을 던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 무엇과도 상호작용하지 않는다면, 그러니까 이 모든 것을 떠나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산다면 우리의 시간은 멈출까? 그렇지 않다. 우리의 몸은 이미 내부 기관들 사이의 복잡한 상호작용이 일어나는 사건의 보고다. 뿐만아니라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 '곳'이라는 말에서조차 우리는 '곳', 즉 장소의 존재를 배제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공간은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그 또한 더 이상 쪼개질 수 없는 물리적 실체(양자)의 집합이다. 그러니까 질문은 '아무것도 없는 곳'이 아니라 '아무것도 없는 것'으로 바꿔야 하는데, 이는 그 자체가 모순이다. 아무것도 없는 것은 말 그대로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여기까지가 내가 이 책을 통해 깨달은 시간의 특성이다. 읽을수록 머리가 복잡해지고 정신이 아득해지지만 매우 흥분된다는 사실은 감출 수가 없다. 이 세상은 왜 이렇게 만들어졌을까? 이 질문을 던지는 과정에서 혹자는 신과 같은 창조자의 존재를 전제해야 할 것 같은 강력한 유혹에 시달릴 수도 있다. 누군가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만든 게 아니라면 어떻게 이처럼 일관적인 논리에 의해 세상이 구성될 수 있냐는 것이다.


창조자의 역할을 이 판을 만든 존재, 그러니까 양자화된 시간과 공간이라는 모눈 종이를 만든 존재로 한정한다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 이후에 벌어지는 모든 사건은 양자들이 상호작용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우연의 집합에 불과하다. 우리가 하나의 사건을 경험하는 순간 다른 사건이 발생할 확률은 모두 붕괴하기 때문에 우리의 눈엔 보이는 건 단 하나의 실제이고, 그래서 마치 그것이 필연인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양자의 세계에서 필연은 없다. 모두가 우연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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