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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작가입니다 - 딴 세상 사람의 이 세상 이야기
배명훈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0년 2월
평점 :
배명훈 작가가 들으면 대단히 섭섭해하겠지만, 나는 그의 소설보다 이 에세이가 100배쯤 더 재미있다. 이미 여러 권의 책을 낸 사람이고 꽤 이름도 알려진 작가지만 그의 소설은 잽만 날리다 끝나버린 권투 경기처럼 어딘가 심심한 데가 있다. 내 읽기 능력이 부족한 탓도 있겠지만 이야기가 내포하는 현실 세계의 비유도 내 눈엔 잘 들어오지 않는다.
그런데 이 에세이를 읽고 나니 배명훈 작가가 가진 이야기가 얼마나 흥미진진한지 깨달았다. 그와는 며칠 밤을 새우면서도 지겨워지지 않을 이야기를 마음껏 나눌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물론 그가 받아주지도 않겠지만). 작가관이나 소설에 대한 철학도 확고해 의견을 나누는 맛이 날 것 같다. 배울게 많은 작가이고, 도움이 되는 에세이였다.
그런 걸 보면 소설 쓰기란 정말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새삼 깨닫게 된다. 소설은 에세이처럼 설명을 하거나 자기의 속내를 툭 까놓고 얘기할 수 없다. 등장인물의 대사와 사건의 전개를 통해 스스로 드러나야 하는데, 말이 쉽지 망망한 백지 위에 한 번이라도 앉아본 사람이라면 그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알 것이다. 소설은 술집에서 신나게 떠벌이는 말과는 차원이 다르다. 평상시에 아무리 재미있던 사람도 TV에 나가면 한 마디도 못하고 돌아오는 어려움에 비유할 수 있을까? '야, 너 소설 한번 써봐라'라고 말할 만큼 대단한 입담을 가진 사람도, '야 이런 소설은 나도 쓰겠다'라고 자신만만히 외치는 사람도, 실제로 소설가가 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이러한 사실은 무라카미 하루키도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에서 귀납적으로 증명한 바 있다.
말이 나온 김에 계속하면, 나는 소설가가 되려는 사람들에게 소설가가 쓴 참고서 중에 하루키의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보다 뛰어난 책을 읽어본 적이 없다. 안정효의 <글쓰기 만보>가 있기는 하지만 그건 작가로서의 삶과 태도를 밝히는 책이라기 보단 구체적인 작법서다. 하루키는 평생을 시시껄렁한 에세이를 써왔지만 저 책에서만큼은 진심을 다해 소설가가 무엇인지를 얘기해 준다. 나는 이 책을 바로 그 옆에 꽂아두고 싶다.
그만큼 <SF 작가입니다>는 소설가가 되려는 사람들에게 피가되고 살이 되는 이야기로 가득하다. 이 글의 첫 문장을 읽는 순간 배명훈 작가가 이 말을 듣고 기분이 좋아질 일은 없을 것 같지만, 그래도 온 힘을 다해 이 책을 홍보함으로써 그의 작가 생활에 도움을 주고 싶다.
나는 작가라는 사람이 하는 수 많은 일 중에 가장 위대한 걸 하나 꼽으라면 '글로 밥을 버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위대한 예술혼이고 나발이고 전업 작가가 되려면, 끝까지 살아남아 언젠가 자신이 꿈에 그리던 대작을 쓰려면, 다 집어 치고 일단 밥부터 벌어야 한다. 나는 이 책이 많이 많이 팔려 배명훈 작가가 어렵지 않게 다음 책을 내놨으면 한다. 그런 의미에서 택도 없이 부족할 테지만, 여기 고사리 손 하나를 얹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