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코맥 매카시 지음, 임재서 옮김 / 사피엔스21 / 2008년 2월
평점 :
절판


이야기 하기에 앞서


이 글에는 엄청난 양의 스포일러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읽지 않은 사람은 이해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이 글은 오직 읽은자들을 위한 글이다. 그러니 읽지 않은 사람은 이 글을 보지 말았으면 한다. 이 책을 선택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 때문에 이곳에 들른 사람이라면 이렇게 얘기해 주고 싶다. 세상에는 이유를 막론하고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 있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를 읽는 일이 그렇다. 


이 책을 다섯 번이나 읽고 나서야 이 글을 쓴다.



루엘린 모스


베트남 참전 군인 루엘린 모스는 저격용 라이플의 조준경을 통해 황량한 대지를 바라본다. 그 위엔 영양떼가 있다. 모스는 다시 한 번 조준경의 거리를 맞추고 방아쇠 위에 손가락을 올린 뒤 숨을 가다 듬는다. 피융! 총알이 영양의 대퇴부에 꽂히고 소리가 뒤따라 날아온다. 영양들이 달리기 시작하고 대지는 엷은 먼지 구름에 휩싸여 뿌옇게 흐려진다. 모스는 핏자국을 따라 영양을 추적한다. 그의 목에는 멧돼지 이빨 목걸이가 걸려 있다. 그는 사냥꾼이다. 그러나 핏자국의 끝에서 250만 달러가 든 돈가방을 발견했을 때 그는 자신의 처지가 피를 흘리는 영양의 처지와 뒤바꼈음을 눈치채지 못했다. 


모스는 욕망의 불길 속으로 몸을 던진다. 그의 이름 Moss가 나방을 뜻하는 단어 Moth와 흡사하다는 사실은 놀랄 것도 아니다. 그는 가방을 들고 황량한 대지를 가로질러 트럭에 도착해 뒷좌석에 가방을 놓고 점화 플러그에 키를 꼽는다. 키를 돌려 시동을 걸었을 때 덜덜거리는 엔진소리와 함께 어디선가 육중한 톱니바퀴가 굴러가는 소리가 들린다. 


톱니바퀴는 모스를 집어삼켜 산산조각을 낼 때까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으스러지는 뼈소리를 들으며 그는 한 남자와 마주한다. 그 남자의 이름은 안톤 시거다. 사상 최악의 사냥꾼이다.



안톤 시거


안톤 시거가 무엇을 상징하는지에 대한 설명은 여러가지가 있지만 나의 지지는 변함이 없다. 안톤 시거는 '죽음'을 상징한다. 시거는 국경지대에서 남자 하나를 죽이고 보안관에게 잡힌다. 보안관의 사무실에서 시거는 손에 찬 수갑을 보안관의 목에 걸어 목졸라 죽인다. 시거는 임박한 위기나 죽음 앞에서도 당황하지 않는다. 그는 언제나 의연하다. 언제나 무표정이다. 그럴 수 있는 이유는 명확하다. 시거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죽음은 죽지 않을 뿐더러 가둘 수 조차 없다는 사실을. 시거는 사실 의도적으로 잡혔다. 의도적으로 잡히기 위해 그는 의도적으로 살인을 저질렀다. 그러니까 국경지대에서 저지른 두 건의 살인은 시거가 자기 자신이 죽음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한 시험에 불과한 것이다. 자기 존재의 확인이 죽음으로 마무리된다면 그 존재의 실체는 죽음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시거의 동전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시거와 마주친 자들은 거의 죽음을 맞이하지만 간혹 기회를 얻는 사람들이 있다. 시거는 동전을 던져 그들로 하여금 앞, 뒤를 맞추게 한다. 맞힌 자는 죽지 않는다. 이것은 그저 변덕스런 절대자의 놀이인가? 그렇지 않다. 시거의 동전은 한순간의 선택이 우리의 삶을 죽음으로 몰아 넣을 수도 있음을 암시한다. 사람들은 죽음으로 감당하기에 동전 던지기는 너무 사소한 선택이라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세상에 사소한 선택이란 없다. 살면서 내린 선택들은 돌고 돌아 언젠가 눈덩이처럼 커져 돌아온다. 그 눈덩이를 마주하는 날이 우리 삶의 청산일이다. 그 날이 바로 죽음이 우리에게 동전을 던져주는 날이라는 말이다. 사람들은 단지 동전의 앞뒤를 맞추지 못해 죽은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건 그저 마지막 선택이었을 뿐이다. 그 선택의 뒤로 무수한 선택이 사슬처럼 얽혀 우리가 태어난 날에까지 가 닿아 있음을 알아야 한다.





다시 안톤 시거의 정체로 돌아와, 그가 지극히 평범한 모습을 하고 있다는 사실도 시거가 '죽음'을 상징한다는 사실을 뒷받침한다. 시거를 쫓는 보안관 벨은 시거를 목격한 아이들을 찾아가 그의 인상착의를 묻는다. 아이들은 시거가 그저 보통 사람 같았다고 말한다. 아주 평범한, 우리 주위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사람들은 죽음이 아주 특별한 모습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어두운 망토를 두른채 큰 낫을 들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라는 생명이 태어나는 그 순간 바로 나의 죽음도 탄생한다. 나와 죽음은 쌍둥이인 것이다. 죽음은 나와 너무 닮아 있어서 혹은 너무 평범하기에 눈에 띄지 않는다. 우리는 죽음에 임박해서야 비로소 내 손목을 잡은 그 죽음이 나와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으며 아주 오랫동안 내 옆에 있었음을 깨닫는다. 죽음은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바라본다. 당신이 아무런 눈치도 못챈 게 전혀 놀라울 것 없다는 듯이.


하지만 시거를 죽음으로 해석하는 결정적인 이유는 역시 그가 가진 숙명성이다. 시거가 가는 길에는 언제나 죽음의 융단이 깔린다. 그 누구도 시거를 피할 수 없다. 시거는 돈가방이 어디 있는지 안다는 웰스(범죄 조직은 돈가방을 찾기 위해 시거를 보내지만 통제할 수 없는 그를 막기 위해 다시 웰스라는 청부업자를 파견한다)에게 이렇게 말한다. 


시거: 가방이 어디 있는지 안다고?

웰스: 그래.

시거: 나는 더 좋은 걸 알고 있지.

웰스: 뭔가.

시거: 가방이 어디로 갈지.

웰스: 어디인가.

시거: 나한테 와서 내 발밑에 놓일 거야.

(p.195)


그리고는 산탄총으로 웰스의 얼굴을 쏴 그의 머리를 끈적이는 고깃덩이로 만든다. 시거에게 이 모든 소동의 해결은 그저 시간 문제에 불과할 뿐이다. 사람이 어디로 가든 어디에 숨든 그는 결국 시거(=죽음)를 만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예상대로 그의 앞에 선 모든 생명은 무로 돌아가고 돈가방은 시거의 차지가 된다. 사람들은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가 숨막히는 추격전을 그리고 있다고 말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시거는 단 한 번도 그들을 쫓은 적이 없다. 시거는 그저 목적지에 먼저 도착해 기다릴 뿐이다. 죽음을 피해 열심히 도망쳤다고 생각한 그들은 사실 필사의 힘을 다해 죽음의 품으로 달려든 것이다.





텍사스에서 온 악마


이 부분은 나의 해석이 아니다. 나는 이 글을 쓰기 위해 많은 참고 자료를 찾았는데 거의가 쓰레기 같은 글이었다. 그 쓰레기 중에는 꽤 많은 조회수와 추천이 있는 글도 있었다. 그러던 중 나는 하루 방문자가 4명 밖에 안되는 블로그에서 이 글을 발견했다. 나는 이 글을 소개해야만 한다.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ggulchance&logNo=60126538922


이 글의 요지는 '잘 살아 보자'는 달콤한 거짓말이 어떻게 레이건을 대통령으로 만들었는지, 또 그로부터 시작된 신자유주의 열풍과 미국의 패권주의가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는지 알려주는 영화가 바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라는 것이다


레이건이 시작한 재앙은 텍사스 출신의 두 대통령(이 소설의 배경은 텍사스다) 죠지 부시 부자에 의해 완성된다. 모두가 알다시피 아버지는 걸프전을 아들은 아프간, 이라크 전쟁을 벌여 전세계에 죽음의 융단을 깐다. 코엔 형제는 2007년에 이 영화를 개봉한다. 그것은 미국 대선이 있기 1년 전이었다. 코엔 형제는 돈에 혹한 루엘린 모스의 선택이(잘 살아 보세에 속은 당신들이) 얼마나 끔찍한 살인마를 데리고 왔는지(텍사스 출신의 두 살인자 죠지 부시 부자)를 보여줌으로써 곧 있을 선택이(대선)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려주려 한 것이다. 미국은 2008년 11월 4일 오바마를 선택해 회복의 여지를 만든다. 그러나 한국은 당시 이명박을 선택한다.



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는가


많은 사람들이 이 소설의 제목을 보고 의아해 한다. 나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만큼 내용과 제목의 연관성이 깊은 소설이 없다고 생각한다.


늙은 보안관 벨(이 소설은 도망자 모스와 추격자 시거 그리고 그 둘을 쫓는 보안관 벨의 이야기가 번갈아가며 진행된다)은 틈날 때 마다 세태를 한탄한다. 이 나라 어딘가에는 노인의 사회보장기금을 가로채기 위해 그들을 납치한 뒤 앞마당에 묻은 젊은이들이 산다. 자기의 관할 구역에선 몇일 사이에 수 많은 사람이 그것도 소를 잡을 때 쓰는 스턴건에 이마가 뚫린채 살해 당한다. 범죄자들은 보안관을 향해 샷건을 쏘고 그들을 목졸라 죽이고 차트렁크에 넣어 불태운다. 곳곳에 마약이 있다. 학생들이 그것을 산다. 뉴스에는 끔찍한 사건 사고가 줄을 잇지만 더 이상 새로울 것도 없는 소식들이다. 사람들은 무심한 표정으로 뉴스를 흘려넘긴다. 이곳은 분명 노인을 위한 나라가 아니다.


노인이 살아가기엔 이 세상이 지나치게 폭력적이고 강팍하다는 사실만으로는 제목의 타당성에 의문을 품을 수도 있다. 그럴 수 있다.





이 소설은 모스와 시거의 추격전 사이사이에 그 둘을 쫓는 보안관 벨의 독백이 실린다. 그러나 이 독백은 이야기의 전개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숨막히는 추격전의 흐름을 툭툭 끊어버리기까지 한다. 이것은 의도적이다. 작가는 우리가 현명한 노인의 이야기에 좀 더 귀를 기울이기 원하지만 벨의 독백은 그저 걱정 많은 노인네의 잔소리처럼 느껴진다. 시간의 세례를 받은 노인은 그 누구보다 삶의 비밀에 더 가깝게 다가간 사람이며 그 누구보다도 사는 법을 잘 아는 사람임에도 세계는 언제나 젊은이들에 의해 만들어진다. 그 누구도 노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모든 역사 모든 세계에 걸쳐 나타나는 노인의 아이러니다.


안톤 시거의 살인 행각이 결국 미해결로 정리됐을 때 벨은 보안관을 관두기로 결심한다. 마지막 근무날 그는 군청을 나와 자신의 트럭에 올라 가만히 앉아 있는다. 벨은 자신을 짓누르는 감정이 무엇인지 안다.


그것은 패배였다. 영락 없는 패배였다. 죽음보다 더 비통한 패배(p.336).


그러나 이것은 벨의 착각이다. 그는 시거와의 싸움에서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았다. 죽음이 싸움을 받아주지 조차 않았기 때문이다.


모스가 죽고 난 직후 벨은 알 수 없는 예감에 사건 현장인 모텔을 다시 찾는다. 그때 먼저 와서 돈가방을 찾은 시거가 주차장에 앉아 벨을 바라본다. 벨은 그곳에 시거가 왔다 갔음을(모스는 시거와 멕시코 범죄 조직, 두 일당에게 쫓기는데 그를 죽이는 건 멕시코 범죄 조직이다. 시거는 나중에 사건현장을 찾아와 숨겨둔 돈가방을 찾아간다) 알아채고 주차장을 유심히 바라본다. 벨은 주차장에 시거가 있음을 직감적으로 알고 있다. 그는 총을 들고 주차장으로 나가 순찰차에 탄 뒤 모텔을 빠져 나온다. 모텔이 보이지 않는 곳까지 온 벨은 무전기를 들고 두 대의 순찰차를 부른다. 그들은 모텔 주차장으로 쳐들어가지만 시거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다. 벨은 지원을 나온 보안관을 향해 아무래도 우리가 놓친 것 같다고 말한다. 벨은 여기서 첫번째 착각을 한다벨이 시거를 놓친 게 아니다. 


시거가 벨을 놓아준 것이다


노인은 사태를 바로잡을 수 있는 핵심에 뛰어들기 원하지만 그것은 결코 허락되지 않는다. 죽음은(시거) 그저 가만히 앉아 자기를 기다리기나 하라는 듯 노인을 무시한 채 유유히 사라진다.


노인에게 죽음보다 비통한 것은 패배감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무용함을 깨닫는 것이다. 자신의 존재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완전히 무가치한 것으로 전락한 세계. 과감히 죽음과 대항하려하지만 죽음조차 관심을 갖지 않는 존재로 전락한 세계. 그 세계야말로 'No country for old men'이다.





꿈의 해석


이 소설에는 두 개의 꿈 이야기가 나온다. 둘다 보안관 벨의 꿈이다. 첫 번째 꿈은 벨이 아버지가 준 돈을 잃어버린다는 내용이다. 이것은 이 세상에 돈 보다 더 중요한 가치가 있으니 돈 같은 건 잊고 그것을 찾으라는 의미일 것이다. 돈에 대한 코맥 매카시의 부정적 태도는 이 소설 전반에 이를 뿐만 아니라 최근작인 <카운슬러>에 까지 이어진다. 코맥 매카시는 이 나라의(미국) 모든 문제가 돈에 대한 욕망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두 번째 꿈은 조금 복잡하다. 나는 여기에 그 전문을 옮기겠다.


두 번째 꿈에서 우리 둘 다 꽤 옛날로 돌아갔고 내가 밤중에 말을 타고 산 속을 통과하고 있었다. 산 속의 협곡을 통과하는 중이었다. 날이 춥고 땅에 눈이 쌓여 있었고 아버지는 말을 타고 나를 지나쳐서 계속 나아갔다. 아무 말씀이 없었다. 그는 단지 나를 지나쳤을 뿐이고 담요를 뒤집어쓰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는데 그가 나를 지나칠 때 나는 아버지가 옛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불을 머금은 뿔피리를 들고 있는 것을 보았다. 나는 그 안에 담긴 불빛으로 뿔피리를 볼 수 있었다. 달빛 색깔과 비슷했다. 꿈에서 나는 아버지가 계속 앞으로 나아가서 그토록 춥고 어두운 세상의 어딘가에서 불을 피우려 한다는 것을 알았다. 내가 언제든 닿으면 아버지가 거기에 있으리라는 것을 알았다(p.339).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변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언제나 정직하고 올바르게 산다. 그들은 눈보라를 뚫고 어둠을 넘어 얼음 위에 불을 피우는 사람들이다. 벨도 그런 사람 중 하나다. 그리고 벨의 전에는 그의 아버지가 그랬다. 벨은 언젠가 아버지가 있는 곳으로 가 그 불을 다시 뿔피리에 담아야 할 것이다. 그때는 벨의 차례다. 그 불을 가슴에 품고 말을 달리는 것 말이다.


불을 옮기는 자에 대한 의미는 코맥 매카시의 <더 로드>에서 더 명확하다. 그 의미를 되새겨 본다면 아마 위의 해석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조금 다른 해석을 해보려 한다. 


달빛 색깔과 비슷한 그 뿔피리는 죽음이다. 달은 때로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나를 지나쳐 죽음을 피워 놓고 나를 기다린다. 그곳이 죽음의 세계라면 나는 결국 그곳에 닿을 것이고 그곳에 아버지가 있을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아버지가 불을 피워 놓고 기다렸기에 죽음의 세계는 더이상 어둡고 추운 곳이 아니다. 이 세계가 아무리 노인을 위한 나라가 아니라도 결국엔 끝이 있다. 끝 이후엔 다행히 그 어떤 소동도 없다. 이 잔인한 세계에선 죽음만이 유일한 안식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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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자란 2014-02-24 1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30대이후 지금까지 이상하게 소설책은 읽혀지지가 않더군요. 이유는 잘모르겠지만 노력은 했지만 끝까지 읽은책은 아마 더 로드가 유일할 겁니다. 너무 인상적이라 영화로 나온 것까지 봤는데 살아가면서 그 로드의 흔적이 제 삶에 지울수 없는 흔적같은게 있습니다. 뭐라 말할 수 없는 느낌 어쩌면 그 감정을 말로 표현할수 없는 느낌 같은거....덕분에 잘 읽었습니다!

한깨짱 2014-02-24 12:53   좋아요 0 | URL
저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를 영화로 접했습니다. 그 후 소설을 봤죠. 그리고 코맥 매카시의 전작을 읽었습니다. <더 로드>를 재밌게 보셨다면 코맥 매카시의 전작도 꼭 읽어보시길 권해드립니다. 잘 읽어주셔서 너무나 감사합니다!

군자란 2014-02-24 17: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실 요즘하는 일이 있어 책을 읽지는 못하고 가끔씩 서재를 돌아 보는것이 제가 할수 있는 일일뿐 그냥 땅기는 책있으면 사서 조금씩 쟁여 놓는 일이 제가 하는 유일한 취미이지요.(요즘 과소비가 아닌가 걱정됩니다?) 매카시 전작중 꼭 읽어보았으면 하는 책 3권정도만 말씀하시면 고민해 보겠읍니다. 혹 시간이 나면 읽을수도....

한깨짱 2014-02-25 13:54   좋아요 0 | URL
매카시 자체가 다작을 하는 사람이 아닌데다 국내에는 일부만 번역되어 총 7권 정도가 있는 것 같습니다. <더 로드>는 이미 보셨으니 저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만을 추천합니다. <핏빛 자오선>, <모두다 예쁜 말들>, <평원의 도시들>, <국경을 넘어서>는 호불호가 극명할 것 같아 쉽게 추천드리기 어렵구요, 최근작 <카운슬러>는 소설이 아니라 영화 시나리오라 개봉한 영화를 보시길 추천드립니다. 굳이 한 권을 더 꼽자면 <국경을 넘어서>를 추천드립니다.

travelholic 2022-01-02 2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참 전에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를 보았는데 제목과 내용의 연관성에 대해 어렴풋한 느낌을 가지고 있었어요. 한깨짱님 글을 읽으니 좀 더 명확하게 가닥이 잡히네요. 잘 읽었습니다.

한깨짱 2022-01-09 10:02   좋아요 0 | URL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욕도 참 많이 먹은 글이에요 ㅎㅎ
 
유쾌한 하녀 마리사
천명관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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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 이후의 소설들


천명관의 <고래>를 읽은 사람이라면 반드시 여기에 도착했을 것이다. 그들의 마음은 한결 같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저 이야기가 계속 되기를 바랄 뿐이다.



삶은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삶의 부조리나 아이러니라는, 뭔가 거창하고 상투적인 말 보다 나는 '우발성'이라는 말을 쓰고 싶다. 단편집 '유쾌한 하녀 마리사'를 표현하는 말로 말이다. 이 소설 속의 등장인물들은 어디선가 불쑥 등장하는 삶의 모습에 당황하거나 즐거워하거나 절망을 겪는다. 이를테면 성묫길을 향하는 대서의 자동차, 그 백미러에선 마누라와 딸대신 이혼의 그림자가 보이(세일링), 연못 속에서 골프공을 줍던 아이는 불현듯 싸늘하게 식어 있는 친구의 죽음과 조우하게 된다(13홀). 그런가하면 하녀의 실수로 외도한 남편을 독살하게 된 여자도 있다(유쾌한 하녀 마리사). 또 다른 하녀는 부지불식간에 주인이 열등감을 느끼는 어떤 천재의 원고를 불쏘시개로 쓰고 만다(프랑스혁명사-제일 웰시의 간절한 부탁). 


감히 말하건대, 삶이란 내가 볼록한 퍼즐 하나를 놓는다고 해서 잇따라 오목한 퍼즐이 놓이는 보드판이 아니다. 삶은 그야말로 무작위다. 삶은 내가 어떤 패를 들었고 어떤 패를 놓을지에 대해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는다. 그저 자신의 패를 내키는대로 늘어 놓을 뿐이다. 인간의 첫번째 슬픔은 이 무작위성을 작위적으로 대비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에서 나온다. 그러니까 삶이란 안개낀 바다 한가운데서 부족한 레고 블럭을 들고 서 있는 것과 같다는 말이다. 우리는 그 레고 블럭으로 어떤 배를 만들지 골똘히 계획해 보지만 안타깝게도 나머지 블럭은 모두 삶이 갖고 있다. '어떤' 블럭을 '언제' 줄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것은 지금 내 발 밑에 상어가 나타났거나 해일이 몰려오는 것, 그러니까 내가 얼마나 간절히 원하는지 얼마나 그것이 필요한지와는 완전히 무관하다인간의 두번째 슬픔은 모든 사람이 거대하고 안전한 배를 만들길 꿈꾸지만 대개는 위태로운 뗏목조차 가지지 못한다는 사실에서 나온다.


사실 이 단편집의 소설들이 이 정도로 우울한 건 아니다. 천명관은 레일을 벗어난 인생의 비극적 최후를 잔인하게 묘사하기 보다는 바로 그 어긋난 순간 짓는 인간의 표정에 집중한다. 그 표정은 대개 웃음이다. 그러나 즐거움에서 나오는 웃음만 있는 건 아니다. 그것은 '어쩌다 내 인생이 이렇게 됐지' 혹은 '살다 살다 이럴 수도 있나'하는 상황을 맞닥뜨렸을 때 자기도 모르게 터지는 헛웃음을 포함한다. 대개는 이 헛웃음이다. 천명관이 다루는 것들이 말이다.



<고래> 이후의 소설들?


이 단편집을 얘기하면서 <고래> 얘기를 안할 수가 없다. 천명관의 <고래>를 읽은 사람이라면 반드시 여기에 도착했을 것이며 그들의 마음은 한결 같기 때문이고 그들은 그저 <고래>와 '같은' 이야기가 계속 되기를 바랄 뿐이기 때문이다.


<프랭크와 나>를 제외하고는 여기에 수록된 모든 소설이 <고래> 이후에 씌여진 것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왜 이것들이 <고래> 이전에 씌여졌어야 할 예행연습으로 보이는걸까? 책의 말미에 씌인 어떤 평은 이것이 <고래>의 미니어쳐라고 하지만 이 말이 <고래>를 밀도 있게 압축했다는 말은 아닐거라고 믿는다. 나는 오히려 난도질 되어 부위별로 늘어놓은 고래를 본다. 이야기들은 모두 고래의 편린을 지녔지만 그 무엇도 완전한 고래가 될 수는 없다. 


<고래>의 매력은 무엇보다도 암세포처럼 번져나가는 이야기의 실타래였다. 침 한 번 삼키지 않고 계속되는 놀라운 입담. 고래의 물줄기처럼 힘차게 터져나오는 기기묘묘한 이야기. 그에 반해 이 단편들은 미처 터지지 못한 폭탄 처럼 보인다. 단편의 한계일 수도 있다. 형식이 문제라는 말이다. 나는, 그러길 빈다. 


사실은 한 마디로 이 리뷰를 끝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유는 나도 모르겠다. 그게 뭔지 듣고 싶다면 해줄 수 있다.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다. 


이 소설은 <고래> 보다 훨씬 재미 없다.


어쩌면 이 한 마디로 끝내는 게 더 좋았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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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쯔 2014-09-25 17: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며칠 전 <칠면조와 달리는 육체노동자>를 읽었는데, 뭔가 좀 아쉬움이 남더군요.
<고래>를 읽어봐야겠어요.

한깨짱 2014-09-26 11:35   좋아요 0 | URL
저 방금 그 책을 사려 했는데! 역시 <고래>만한 소설은 없는가 보군요. <고래>는 천명관의 최초이자 최후의 명작이 될 가능성이 높은 것 같네요.
 
나무 위의 남작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7
이탈로 칼비노 지음, 이현경 옮김 / 민음사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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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지모 피오바스크 디 론도


장차 남작 작위를 물려 받을 피오바스코 디 론도 가문의 장남 코지모 피오바스크 디론도가 누나의 괴물같은 달팽이 요리를 먹이려는 아버지의 강압에 항거, 나무 위로 올라간 것이 1767년 6월 15일, 바야흐로 남작의 나이 열두 살 때였다.


그렇다면 이 작품은 반항기 많은 사춘기 소년의 성장 소설일까?


그렇지 않다. 민음사 세계 문학 전집이다. 세계 문학 전집에 사춘기 성장 소설이 등장하려면 그 작가가 적어도 도스토옙스키나 헤밍웨이 쯤은 되야 한다. 노름꾼과 알콜중독자가 썼다면 흔해 빠진 성장 소설도 세계 문학이 될 수 있겠지. 그러나 이 소설은 이탈로 칼비노의 작품이라네.


단순한 반항심만으로 평생을 나무 위에서 살 수는 없었을 것이다. 거기에는 뭔가 원대한 이상이 숨어 있다고 생각할 수 밖에.



나무 위의 남작


코지모는 달팽이 요리가 싫어서 나무 위로 간 게 아니었다. 세상엔 계몽주의가 싹텄어, 형이상학은 상식과 과학으로 대체되고, 권위보다는 개인의 자유가, 특권보다는 평등한 권리가 중시되는 사회가 도래하는데도 여전히 과거에 매여 있는 가족의 모습이 꼴보기 싫었던 거지. 열두 살 아이치고는 상당히 조숙했다. 아니 조숙했다고 말하기 무색할 정도로 뜻이 컸던 것이다.


그러나 처음 얼마간 나무 위에서 보여준 코지모의 행동은 그 큰 뜻과는 사뭇 거리가 있는 것들이었다. 그는 집에서 건네주는 음식을 받아 먹고 들고양이와 사투를 벌였으며 이웃집 소녀에게 한눈이 팔려 한동안 사랑의 열병을 앓기도 한다. 그러니까 톰 소여나 허클베리 핀 같은 생활을 했다는 것이다. 세계 문학이 될려면 아직도 멀었지.


사랑하는 소녀와 이별한 뒤 코지모는 자기가 세상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고민하게 된다. 고민의 과정은 독서였다. 그는 무작정 책을 읽기 시작했으며 서서히 사상과 철학과 이성의 힘을 깨닫게 된다. 코지모는 견문을 넓혔다. 나무와 나무가 이어지는 곳이라면 어디든 여행했다. 그의 소문은 널리 퍼져 세계의 유명 인사들에게까지 가 닿았고 코지모는 그 거인들과 편지를 주고 받았다. 이제 코지모는 자신의 고향 옴브로사를 위해 할 수 있는 게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그는 수로를 만들고 숲을 지키기 위해 자경단을 조직했다. 그는 나무 위에서 돛으로 건너가 터키 해적을 물리쳤고 권위에 웅크리고 있던 사람들에게 시민의식을 심어줘 귀족과 국가에 대항하게 했다.


누군가는 '나무 위에 사는 사람이 어떻게 땅 위의 사람들에게 이로움을 줄 수 있느냐'고 물을 수 있을 것이다. 코지모는 이렇게 대답했다. 


"땅을 제대로 보고 싶은 사람은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


연기 뿌연 술집에 앉아 독한 술을 나누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걸로 시름을 잊는 사람들에게 시름의 진정한 원인은 보이지 않는 법이다. 그것을 밝혀내는 건 그 흥분 속에도, 그 울분 속에도, 그 위로 속에도 속하지 못한 채 모든 걸 냉정하게 바라봐야 하는 외로운 사람이다. 코지모 피오바스크 디 론도는 세상을 너무 사랑했기에 외로움을 자처했다. 너무 사랑했기에 떠날 수 밖에 없었다는 못난 남자의 이야기가 바로 이런 것이었던가?



이탈로 칼비노


나에겐 노름꾼과 알콜중독자를 트럭으로 갖다 준다고 해도 바꾸지 않을 소설가가 바로 이탈로 칼비노다. 이탈로 칼비노는 보르헤스와 마찬가지로 소설이 가진 서사의 힘을 믿는 것 같다. 그들에게 소설은 그 무엇이기 전에 우선 이야기다. 소설에 관한 그 무엇도 이것보다 앞설 수는 없다. 우리는 코지모 디 론도의 행위에 어떤 철학적 의미가 숨어있는지 찾아내며 흥분하기 전에 우선 코지모 디 론도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열광하게 될 것이다. '나무 위의 남작'에 대한 가장 적확한 평가는 아마 '재미 있다'는 것일테다. 


소설에게 이 이상 무엇이 더 필요할까?


세계 문학은 그 다음에 되도 상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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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쯔 2014-09-25 17: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아하는 친구가 선물해준 책인데, 이야기가 강렬하게 마음을 흔들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글을 재미있게 쓰시네요!

한깨짱 2014-09-26 11:34   좋아요 0 | URL
재미있게 쓰려다 보니 가끔은 본질을 벗어난 것 같은 느낌도 듭니다.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떠드는 느낌이랄까요. 그래도 재미있게 보셨다니 한 가지 목표는 달성했네요. 감사합니다~
 
쉽게 쓴 후성유전학 - 21세기를 바꿀 새로운 유전학을 만나다
리처드 C. 프랜시스 지음, 김명남 옮김 / 시공사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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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후성유전학'처럼 오로지 한자로만 된 단어를 만나면 그 속에 깊은 어려움이 담겨 있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감지해낸다. 또한 이러한 본능은 그것으로부터 소원해지는 계기를 그리고 이 계기는 결국 '쉽게 쓴'이라는 타이틀을 붙인 전문서적을 탄생시키곤 한다. 


믿거나 말거나.


하지만 선입견을 갖지 말고 하나하나 뜯어보면 이 단어가 그렇게 어려운 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우선 후성(後成)이란 대충 '뒤에 생겼다'는 것일테고 '유전학'은 우리에게 익숙한 그 '유전학'이 맞다. 그렇다면 후성유전은 뒤에 생긴 유전이라는 말일테니 이제 남은건 이제 남은건 '무엇의 뒤인가?'라는 질문 뿐이다. 질문에 대한 답은 내가 하겠어. 그것은 바로 '수정'즉 정자와 난자가 만난 이후라네, 친구.



피보다 진한 것


사실 정자와 난자가 만났다는 건 엄마와 아빠로부터 물려 받을 DNA가 확정됐다는 걸 의미한다. 그리고 이 말은 무엇이 유전될지 이미 정해졌다는 말이다. 이제 아이를 유산시키고 새로 임신을 하거나 발생 과정에서 돌연변이가 일어나지 않는 이상 때려 죽여도 물려받은 유전자가 변하는 일은 없다. *수정된 정자에 하필 당신 아버지가 갖고 있던 알콜중독자의 DNA가, 난자에 샤넬에 미친 당신 어머니의 DNA가 있었다면 당신은 결국 샤넬을 밝히는 알콜중독자로 태어난다는 말이다. 이것이 바로 지긋지긋한 피의 저주다. 그러나 오늘의 주제인 후성유전학은 이 피의 저주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후성유전의 과정을 이해하려면 우선 DNA의 구성과 발현 방식에 대해 알 필요가 있다. 우선 DNA는 우리가 흔히 상상하듯 그 유명한 나선형태를 꼿꼿히 유지하며 맨몸으로 있는 게 아니라 온갖 물질들과 화학결합을 하고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건 모든 생명 현상을 통제하는 것처럼 보이던 이 DNA들이 사실은 어떤 부착물이 붙느냐에 따라 활성화되거나 억제된다는 사실이다. DNA는 자신이 가진 능력을 발휘하려하나 자기를 둘러싼 환경(부착물)에 의해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발휘되는 현상. 그러니까 후성유전은 DNA 자체는 바꾸지 않되 그 행동을 바꿔 장기간 유전자를 조절하는 현상이며 후성유전학이란 이 부착물들이 어떻게 붙고 떨어지는지 연구하는 학문인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왜 유전이라는 말이 붙은걸까? 그것은 바로 이 후천적 유전자 행동 변화가 바로 다음 세대들에게 까지 어이지기 때문이다.


정말 놀랍지 않은가?


후성유전적 변화는 우리의 환경은 물론이거니와 음식, 그 유명한 환경호르몬들, 심지어 사회적 상호 작용에 의해 벌어지는 데 이 말은 곧 내가 '시금치를 먹느냐 안 먹느냐' 혹은 '어떤 플라스틱 물병을 쓰느냐(환경호르몬의 문제)' 혹은 '부모와 얼마나 자주 스킨쉽을 했느냐' 따위의 이유로 유전자의 행동에 변화가 올 수 있다는 것이며 물리적으로는(유전자 자체가 변형된 게 아니므로) 아무것도 물려주지 않았음에도 이것이 세대를 거쳐 유전된다는 얘기다.


후성유전학은 마치 지긋지긋한 운명론자들을 싹쓸어 버릴 수 있는 정교한 과학적 근거처럼 보인다. 운명이요? 오늘부터 유리컵을 쓰면 당신의 운명은 바뀔 수 있습니다!


물론 실제 후성유전적 변화 과정은 이것보다 훨씬 복잡할 뿐만 아니라 우리는 현재 수 많은 유전자가 수 많은 자극과 반응해 수 많은 변화를 발생시키는 것 중 고작 몇 개만을 발견해 냈을 뿐이다. 그러나 이런 연구를 통해 열리는 가능성은 실로 어마어마하다. 특히 후성유전의 가역적 특성은 새로운 의학 혁명을 일으킬 잠재적 도구로 여겨지는 데 어떠한 현상, 즉 암, 알츠하이머, 비만 등이 후성유전적 결과라면(부착물이 붙거나 혹은 붙지 않아서 생기는 문제라면) 일련의 화학조치를 통해(부착물을 붙이거나 떼내어) 이것을 정상으로 되돌릴 수 있기 때문이다.



쉽게 쓴 후성유전학


이제 왜 예부터 어르신들이 '좋은 것만 보고 들어라', '건강한 걸 먹어라', '몸가짐을 똑바로 하라'며 잔소리를 했는지 알 것 같은가? 어르신들은 후성유전학은 몰랐지만 후성유전적 변화에 대해서 만큼은 오랜 시간 임상적으로 터득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책은 우리에게 아주 친숙한 유전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아주 흥미롭다. 특히 생활 환경, 습관에 따라 인간이 얼마나 많이 변할 수 있는 지 또 그것이 얼마나 쉽게 다음 세대로 이어질 수 있는 지 경각심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에서 아주 교훈적이기까지 하다. 그러나 '쉽게 쓴'이라는 타이틀이 무색할 정도로 이 책은 결코 쉬운 책이 아니다. 고등학교 생물 시간, 멘델의 완두콩을 박살내고 싶을 정도로 유전학이 싫었던 사람에게는 고역을 넘어 고문이 될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쪽수가 235페이지 밖에 안된다는 사실은 어떤 희망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짧고 굵다면, 고통의 순간도 한번 해볼만 한 것이니까.



*물론 유전 과정은 이처럼 단순하지 않다. 유전은 유전자를 아빠에게 받았느냐 아니면 엄마에게 받았느냐에 따라 혹은 성체가 여자냐 남자냐에 따라 그리고 이 글의 주제인 후성유전적 변화가 복잡하게 얽혀 진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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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의 심장 열린책들 세계문학 213
미하일 불가꼬프 지음, 정연호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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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11월, 볼셰비키 혁명은 인류 역사상 최초의 공산주의 정권을 탄생시킨다. 드디어 프롤레타리아의 해방, 비로소 종말을 맞은 억압의 역사. 수고롭고 짐진 자들의 모든 근심이 완전히 사라질 것처럼 보이던 시대, <개의 심장>의 미하일 불가꼬프는 그 희망의 소용돌이 속에서 도리어 환멸을 본 소설가였다.



<개의 심장>, 그리고 <악마의 서사시>


이 책에 수록된 두 편의 소설 <개의 심장>, 그리고 <악마의 서사시>는 모두 공산주의 사회의 천박함과 부조리를 고발한 작품이다. 


<개의 심장>에선 끓는 물에 화상을 입은 옆구리를 질질 끌며 떠돌아다니는 개 샤릭이 등장한다. 어느날 외과 의사 필립 필리뽀비치는 이 개를 데려와 따뜻히 입히고 먹이는데, 그것은 샤릭에게 인간의 뇌하수체와 생식기를 이식하기 위해서였다. 이 그로테스크한 실험을 통해 개 샤릭은 인간이 된다. 인간이 된 샤리꼬프(개인간 이라는 뜻)는 가지지 못한 것이 폭력 행사의 자격이 되는 양 충천해 있던 그 시대의 프롤레타리아처럼 온갖 폐 끼치기가 자신의 권리라고 생각한다. 겉모습은 인간이지만 여전히 지성이 부족한 샤리꼬프. 불가꼬프는 받아야 될 이유도 모르는 채 권력을 부여받은 인간이 얼마나 단순하고 천박해 질 수 있는지 인간이 된 개 샤리꼬프의 행위로 은유한다. 


<악마의 서사시>는 공산주의 중앙 집권 체제의 비효율과 인간성의 말살을 조롱하는 작품이다. 볼셰비키 혁명의 주역 레닌은 강력한 중앙 집권 체제를 꿈꿨고 실제로 그러한 국가를 건설했다. 강력한 중앙 집권 국가는 모든 생산과 소비 기타 등등 인간의 행위를 계획한다. 이후 체제는 이것을 맹신하고 예외를 인정치 않는 권위주의적 사회로 변질되는 데 특히 소비에트 사회는 의문을 제기하는 자를 반혁명으로 규정함으로써 '인간의 생각하는 능력'을 완전히 마비시킨다. 생각이 마비된 인간은 창의적으로 행동할 수 없고 창의가 결여된 인간은 다양한 예외가 존재하는 세상 일에 기계적 반응으로 일관할 뿐이다. 결국 체제는 끔찍한 비효율 덩어리로 전락하고 인간은 하나의 부속품이 된다.


불가꼬프는 개에서 인간으로 급변한 '샤리꼬프'의 만행을 들려줌으로써 혁명처럼 급진적인 변화가 이 세상에 얼마나 큰 혼란을 초래하는지 보여주고자 했다. 불가꼬프는 <악마의 서사시>를 통해 그 대단한 혁명이 이뤄낸 것이 그토록 무능하고 비효율적인 정부였는지 의문을 던진다.


물론 역사가 보여준 공산 국가의 실체는 불가꼬프의 묘사대로였다. 프롤레타리아에게 혁명은 그저 분노를 배설할 화장실에 불과했고 스탈린, 마오쩌둥, 김일성 같은 사람들에겐 권력을 차지할 구실에 지나지 않았다. 진짜 해방은 어디에도 없었다. 결과적으로 혁명은 인류 역사상 가장 끔찍한 사기가 됐다. 하지만 나는 불가꼬프에게 묻고 싶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가능한 방법이 과연 무엇인지를.


불가꼬프는 우리가 충분한 시간을 가져야 한다고 말하지만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가 나타나고 국가라는 것이 형성된 이후 착취의 구조는 거의 변한 적이 없다. 우리는 수 천년의 시간을 가져왔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변하지 않았다. 아니 변할 생각 조차 하지 않았다. 인류의 역사는 오랜 시간을 두고 점진적으로 발전하기도 하지만 놀라운 진화는 언제나 급진적 변화를 통해 이뤄져왔다. 공산주의 혁명이 그 과정에서 많은 실수를 저질렀고 사악한 독재자들 때문에 변질된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그 순수한 가치마저 폄하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공산주의 혁명은 인간은 모두 평등하다는 사실을 실제로 확인한 사건이었으며 우리에게 또 다른 길이 있음을 보여준 중요한 가능성이었다.



그러나 분노가 거세된 세대에게...


임상수 감독의 영화 <돈의 맛>에 보면 회장 비서 영작(김강우 분)이 회장 아들 윤철(온주완 분)에게 싸움을 거는 장면이 나온다. 윤철의 수모를 참다 못한 영작은 차를 세우고 윤철을 차 밖으로 끌어낸다. 힘으로는 이길 수 있을 거라 믿었던 영작은 그러나 주먹으로도 윤철을 이기지 못하고 길바닥에 뻗어버린다. 피착취자 최후의 수단마저(힘, 혁명) 무용지물이 되는 것이다.


임상수 감독은 분노하지만 철저하게 짓밟히는 우리 세대의 무력감을 표현하려 했던 것 같다. 촛불 시위에 나섰다 물대포에 쓰러지는 시민의 마음 같은 것 말이다. 그러나 이것도 다 옛말이다. 


영작은 실패했지만 분노할 줄 안다는 면에서 일종의 가능성을 갖는다. 그러나 지금의 우리는 다르다. 우리는 짜증을 내는 일은 있어도 분노할 줄은 모른. 우리의 분노는 완전히 거세됐다. 뭔가를 해야한다는 건 뭔가가 억압하는 것만큼 짜증나고 귀찮은 일일 뿐이다. 그런 얘기를 하려면 그냥 닥쳤으면 좋겠다.


사실 이 소설은 나에게 거의 아무런 흥미도 주지 못했다. 혁명이란 우리 세대의 관심사에서 뿌리 끝까지 사라져버린 단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도 변할 수 있겠지. 사람은 늘 변하는 법이니까. 이 상황이 더 악화되는 방향으로 변할 수도 있다는 게 함정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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