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산진의 요리왕국
기타오지 로산진 지음, 안은미 옮김 / 정은문고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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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산진은 만화 <맛의 달인> 속 최고의 미식가로 등장하는 유키하라 유잔의 실제 모델이라고 한다. 요리를 미각만의 전유물에서 해방시켜 보고, 만지고, 듣고, 맡는 종합 예술로 발전시킨 사람이다.


특정 분야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이는 사람의 경우 아주 끔찍할 정도로 까다로운 경우가 많다. 때로는 이 까다로움이 불쾌하게 느껴지고 그것이 시비를 가르는 기준이 될 때(조미료를 넣은 음식은 음식이 아니다, 회를 얇게 썰어 먹는 사람은 회 맛이 뭔지 모르는 것이다 등) 듣는 이의 분노를 일으키기도 한다. "도대체 니가 뭘 알아? 맛은 각자가 느끼는 건데!"


로산진은 현대에 태어났으면 딱 꼰대가 됐을 그런 사람이었다. 맛의 기준이 명확해 판단에 거침이 없다. 취향이 없는 게 전반적 취향이 되버렸고 고급과 저급에 대한 감식안이 떨어진 요즘 세상에선 틀림없이 어마어마한 악플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호오의 판단을 오로지 주관에 맡겨야 한다는 생각에 100% 동의할 수 없다. 주관 또한 불변의 기준이 아니다. 그것은 경험에 의해 형성되며 경험이란 얼마든지 더하고 뺄 수 있기에 주관 또한 시간을 거쳐 다양한 변화를 겪게 된다. 따라서 드라이 에이징 소고기고 나발이고 나는 집 앞 기사 식당의 제육볶음이 제일 맛있다 고 말하는 사람은 물론 매우 행복한 사람일 순 있으나, 그 판단은 아주 미천한 경험에 의한 것일 수도 있다.


전문가들이 TV에 나와 고기는 어떤게 맛있고 어떻게 해야 맛있고를 떠들고 이 와인에선 타르 맛이 나며 젖은 흙냄새, 오렌지 껍질, 장미 향이 난다고 하는 건 단순히 개수작이 아니다. 우리가 느끼지 못한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게 아니다. 밤이 되면 태양을 볼 수도 그 흔적을 느낄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태양이 사라졌다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솔직히 이런 말을 하는 나도 로산진의 얘기를 듣고 있으면 수시로 분노가 일만큼 그가 보여주는 맛의 기준은 까다롭다. 하지만 그는 엄청나게 많은 음식을 스스로 먹어 본 사람이고 직접 해 본 사람이다. 그의 말이 무조건 옳은 것은 아니지만 그의 말이 맞을 확률이 높다는 것은 인정해야 한다. 이걸 인정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 사회 전반에 통용되는 직급과 연봉 체계를 거부해야 한다. 오늘날 10년 차의 디자이너가 신입 디자이너보다 직급이 높고 더 많은 월급을 받는 이유가 뭘까? 그래, 때로는 신입 디자이너가 수석 디자이너 보다 높은 퀄리티의 결과물을 낼 수 있고 어떤 사안에 대해 더 맞는 판단을 내릴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럴 '확률'은 확실히 낮다. 그게 아니라면 우리의 직급 체계는 완전히 거꾸로 되야 한다. 부장으로 입사해 시간이 흐를수록 차장, 과장, 대리, 사원으로 떨어져야 한다는 말이다.


맛이나 미를 논하는 것과 객관적으로 평가 될 수 있는 능력을 논하는 건 다른 거라고 말할 수도 있다. 능력이 객관적으로 평가된다고 믿는다면 지난해 말 당신이 받은 고과를 떠올려 보자. B 혹은 C? 당신은 그게 합당하다고 생각하는가? 추호의 의심도 없는 객관적 기준에 의해 내려진 거라고 받아들이는가? 사람들이 맛이나 미를 두고 왈가왈부 할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쉽기 때문이다. 보고 맛을 느끼는 것 자체는 어려울 게 없다. 인터넷 검색만 하면 1초 안에 누구나 피카소의 게르니카를 볼 수 있고 종로의 유명 평양 냉면은 맘만 먹으면 얼마든지 가서 먹을 수 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미와 맛의 세계는 사기꾼, 비전문가의 영역 좋게 말해 오로지 주관에 달린 것이라고 믿게 만든다. 하지만 한 가지만 더 생각해 보자 우리가 프로 화가와 프로 요리사의 지위를 인정한다면(현대 사회에서 이는 거의 논란의 여지가 없다) 프로 비평가와 미식가의 지위를 인정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있을까?


<로산진의 요리왕국>에는 다양한 요리가 등장하고 그 요리를 맛있게 먹는 법, 그 요리를 맛있게 조리하는 법이 등장한다. 딱히 생생한 표현은 없어 건조하게 느껴질 수는 있지만 확실히 "아, 이런 게 있었구나.", "한 번 먹어보고 싶은 걸." 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다. 물론 친절한 사람은 아니다. 자기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엔 "아니야." 라고 소리를 질러 버린다. "요리 하나에 뭐 이렇게 까다롭게 굴어." 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이거 하나만큼은 알아줬으면 한다. 까다롭지 않은 요리에 매력이 있듯이, 까다로운 요리에도 마찬가지로, 매력이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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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면을 끓이며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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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김훈의 수필을 들었다. 숙명처럼 인 박힌 무거움과 글쓰기라는, 노동의 땀에 절인 단어들이 마음을 무겁게 누른다. 언제나 그렇지만 김훈의 글을 읽고 나면 완전히 탈진해 버린다. 그 적막한 피로와 고됨이 싫어 항상 관둬야지 관둬야지 하면서도 기어이 다시 손에 들고 마는 마력이 김훈의 글에는 담겨 있다. 이 경지에 이르기까지 김훈은 얼마나 많은 문장을 빚고, 굽고, 깨부쉈을까? 어쩌면 그의 글을 읽는 동안 우리는 갓 태어난 연어 새끼가 되는 지도 모른다. 나자마자 대양을 향해 떠나가지만 태어난 곳의 향과 풍경이 그리워 다시 강가로 돌아오는 것처럼.


<라면을 끓이며>는 완전히 새로운 글이 아니다. 김훈이 써온 여러 수필집에 실린 글 일부와 그 후에 새로 쓴 글을 합쳐서 엮은 책이다. 나는 과거 그의 수필을 몇 권 읽은터라 여러군데서 익숙한 글을 다시 만났다. 그러니까 <라면을 끓이며>는 나에게 재회 안에 재회가 켜켜이 쌓인 다시 봄의 밀푀유랄까?


익숙함은 익숙해서 좋고 익숙해서 나쁘기도 하다. 익숙해서 좋은 이유는 그것이 익숙하기 때문이고 익숙해서 나쁜 이유는 역시 그것이 익숙하기 때문이다. 김훈은 이렇게 허황된 말놀이를 좋아하지 않고 무의미한 동어 반복을 경멸하지만 방금 내뱉은 저 말엔 김훈의 글이 가진 독특함이 반영되어 있다. 김훈의 글은 시대와 뒤엉켜 시비를 가리려 하지 않는다. 김훈은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말들에 대하여> 언제나 진저리를 치며 자신이 딛은 길 위를 묵묵히 걸어갔다. 익숙함은 익숙해서 좋고 익숙함은 익숙해서 나쁜 것처럼 말이다.


아마도 그의 뼈에 새겨진 기자의 낙인 때문일 것이다. 언제나 공정하게 사실 만을 전하겠다는 직업 윤리가 그가 써내는 온갖 글들에 절절이 배어 있는 것이다. 기자는 불 속에서 타버린 소방관의 시체를 보고, 그 숯덩이를 부여 잡고 통곡하는 애엄마의 울음 소리를 들으며, 그리하여 그 죽음이 낳은 비애와 고통을 느끼지만 그 절절한 감정을 기사 속에 풀어 넣을 수는 없다. 기사는 기사여야지 일기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김훈은 여러 글에서 자신이 가 닿으려 했으나 결국엔 닿지 못한 것들에 대해 말한다. 나는 그것이 김훈의 실력이 부족해서라거나 김훈이 닿으려 한 곳이 너무 멀기 때문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김훈이 닿고자 하는 곳에 닿을 수 없는 이유는 세상을 대하는 그의 태도 때문이다. 그는 늘 세상을 관조하려 한다. 그 뜨꺼운 핵심에 뛰어들고 나면 온 몸이 타버려 사라지는 걸 두려워 하기라도 하듯. 이 늙은 작가의 몸 안엔 아직도 그런 공포가 있는 것 같다. 나같은 풋내기가 어찌 그의 마음이 보는 세상의 깊이를 알겠냐마는.


이 책에서 가장 좋은 글은 안타깝지만 이 책의 글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 다른 수필집에 등장한 적이 있다. <1975년 2월 25일의 박경리>다.


이 글은 평범한 사건기록지처럼 특별할 게 하나도 없다. 김지하의 출감을 기다리는 1975년 2월 15일의 기록이 시간순으로 늘어서 있다. 그런데 그 시간 속에서 느닷없이 박경리가 등장한다. 이야기는 순식간에 기사에서 드라마로 전환될 것을 요구하지만 김훈의 문장은 차분하고 끈질기다. 그 인내와 차가움이 어떻게 마지막에 이르러 뜨겁고 무거운 진실로 변하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어쩌면 이것이 김훈이 수 없이 빚고, 굽고, 깨뜨리는 글의 정수인지도 모른다. 나는 그것을 익히려고 여러 차례 같은 페이지를 넘겼다.


김훈은 이 책을 펴내며 과거에 출간한 적 있는 여러 편의 수필집을 절판시킨 것 같다. 참으로 그다운 행동이다. 이제 그의 과거를 읽으려면 이 책을 손에 드는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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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으로서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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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하루키 에세이의 가벼움은 그것이 수필이라는 장르의 본래적 특성임을 감안하더라도 "이건 좀 너무하잖아" 하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들이 많다. 이건 하루키가 미워서 하는 말이 아니다. 본인도 자신의 에세이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자기도 인정하는 얘기란 말씀.


알면서도 그런 짓을 하는 거 보면 당연히 고의적이라고 봐야 하고 그 뻔뻔한 행동을 수 십 권에 걸쳐(어디 한 두 권으로 끝내야 말이지) 하니 이는 작가 특유의 곤조랄까, 아무튼 나의 에세이는 이런 거고 이렇게 밖에는 쓸 수 없으니 사고 안 사고, 읽고 안 읽고는 순전히 독자 여러분에게 달린 일이다 고 말하는 것 같다. 틀린 말은 하나도 없다.


그런데 이 에세이는 무언가 다르다. 기존의 것과는 다르게 자기 자신을 더 밀도 있게 드러내 보인다. 그것도 신변잡기 식의, 무슨 위스키를 좋아하고 무슨 브랜드의 차를 타며 누구누구와 친하고 누구누구와 이런 일을 겪은 적 있다는 얘기가 아니다. 하루키 아이덴티티의 핵심을 이루는 찐득하고 리얼한 얘기가 담겨있다. 감상을 말하자면 음, 역시, 그래, 이 정도인가? 하루키잖아. 결국, 아, 이게 다? 설마 진짜? 라고 하는 건 거짓말이고, 역대 최강. 농담 하나 보태지 않고.


우선 어떻게 해서 소설가가 됐는지가 나온다. 사실 이 얘기는 워낙 많은 지면에서 소개된 바 있어 새로울 건 없다. 세계 전복을 목표로 전공투가 열도를 지배하던 시절에 대학을 나와 공부는 뒷전, 한량처럼 책만 읽다 아내를 만나 결혼하고 대담하게 재즈바를 차린다. 바를 운영하며 가까스로 졸업도 오케이. 그러던 어느날(서른 살을 앞둔 1978년) 도쿄 신주쿠 진구 구장의 잔디가 깔린 야외석에 누워 프로야구 개막전을 관람하다 자신이 응원하는 야쿠르트 스왈로스의 1번 타자 데이브 힐턴이 2루타를 날린 순간 불현듯 소설을 써야겠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바로 '에피파니'의 전형. 하루키는 자신의 눈 앞에 현시한 이 말씀을 두 손으로 받아들었고 이후 영업을 마친 바에 앉아 수 개월간 소설을 집필, 신인문학상을 받게 된다. 하루키 소설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 불현듯한 마술 세계로의 진입이 어쩌면 이 에피파니의 영향이 아닐까 싶다. 아무리 눈을 씻고 쳐다봐도 흙 알갱이 하나 무너질 것 같지 않은 굳건한 현실세계에서 그 같은 기적을 경험했으니 소설에서야 뭐 마음껏 스르륵 빠져가는 게 어찌보면 당연한 일인지도.


볼 게 참 많은 수필이지만 특히 하루키의 작품이라면 진저리를 쳤던 사람들에게 강력 추천하고 싶다. 사실 몇몇 작품을 좋아하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나 또한 눈을 흘겨 뜬 채 의심의 눈초리를 던지는 사람 중 하나였다. 이거 사기꾼 아냐? 확실히 하루키 월드는 이런 색채를 짙게 내뿜는다. 두 개의 달이라든지 샌더스 대령, 어둠 속의 야미쿠로, 느닷 없는 섹스씬. 시간이 흘러 내가 이 남자를 인정하게 된 건 어찌됐든 저찌됐든 뒷 이야기를 궁금하게 만드는 능력 때문이었다. 그 이유를 이 책을 통해 알게 됐다. 하루키 말에 따르면 그것이 바로 '매직'이다. 이야기는 결국 매직의 힘으로 흘러가고 매직의 힘으로 읽힌다. 문장을 잘 쓰고 못 쓰고의 문제가 아니다. 거기에 매직을 불어넣을 수 있느냐 없느냐. 그런 면에서 하루키는 뛰어난 마술사고 자신의 믿음을 정확히 반영하는 작품을 쓴다. 그 확고한 믿음. 그 소박한 철학이 30세에 등단한 이 젊은 작가를 68세가 되기까지 작가로서 존재하게 만든 힘이다.


이 에세이를 덮고 나면 하루키의 소설이 무척이나 읽고 싶어진다. 퇴근길 서점으로 돌진해 몇 권을 들춰봤지만 끝내 빈 손으로 돌아왔다. 뭐랄까, 조금 더 이 에세이의 감동을 간직하고 싶었달까. 농밀한 소설의 언어로 덮어버리기엔 머리 속에서 느껴지는 청량감이 너무나 좋았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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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너선 아이브 - 위대한 디자인 기업 애플을 만든 또 한 명의 천재
리앤더 카니 지음, 안진환 옮김 / 민음사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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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으로 하여금 불가능에 도전하도록 비전과 목표를 제시하는 사람을 리더라고 부르고 그 일을 실제로 해내는 사람을 실무자라고 부른다. 리더와 실무자는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처럼 어느 것에 우위를 둘 수 없이 똑같이 중요한 요소지만 우리는 대체로 성공의 모든 영광을 리더에게 돌리곤 한다. 시간이 흐를수록 리더는 신격화되고 심지어 실무자의 능력까지 훔쳐 갖는 경우도 많다.


사람들이 강력한 리더에게 마음을 뺏기는 이유는 에리히 프롬의 명저(<사랑의 기술> 따위가 아니다)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얻을 수 있다. 사람들은 자유가 억압당하는 걸 엄청난 인권유린으로 간주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자신에게 주어진 자유를 끔찍이도 부담스러워 한다. 무제한의 자유는 인간을 도대체 뭘 해야 할지 모르는 패닉 상태로 빠뜨린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자신의 자유를 반납하고 자신의 목에 올가미를 걸어 강제로 끌고 가주는 독재자를 소망한다. "너는 내가 하라는 대로만 해. 그러면 잘 먹고 잘 살 수 있어." 자유는 너무 과대평가 되어 있다. 그렇지 않다면 그토록 수 많은 독재자들이 '국부'로 칭송 받는 일은 없을 것이다. 우리도 한 사람 갖고 있잖아.


많은 사람들이 애플을 그저 변태 오덕들이 사랑하는 장난감 제조 회사로 여기는데 정말 몰라도 너무 모르는 얘기다. 애플은 오늘날 우리가 너무도 당연히 소유하는 Personal Computer라는 개념을 우주에서 최초로 만든 기업이다. 그러나 더 위대한 건 그들이 컨셉이 아니라 실물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기 위해 겪어야 했던 수 많은 난제를 최고의 기술력으로 극복해낸 기업. 그저 디자인으로 눈을 홀리는 Fake 컴퍼니가 아니란 말이다. 더 놀라운 건 이들이 H/W와 S/W 양쪽을 꽉 쥐고 있다는 점이다. 애플은 구글과 삼성이 합병을 해도 겨우 상대할 수 있을까 말까한 지구 역사상 가장 강력한 '제조' 회사다.


이 모든 걸 스티브 잡스가 이뤄냈다고 생각하면 정말로 슬픈 일이다. 스티브 잡스가 리드 컬리지를 다녔을 때 타입페이스(폰트) 관련 강의를 들었기 때문에 애플 제품이 그토록 강력한 폰트 랜더링 기술을 갖추게 됐다고 회자되지만 사실 그에겐 아주 조그만 안목이 있었을 뿐이다. 보이지 않는 곳까지 완벽히 처리해야 한다는 생각도 마찬가지다. 그걸 생각하는 것과 그걸 실제로 해내는 것 사이에는 어마어마한 심연이 존재한다. 그래서 나는 잡스 보다는 워즈니악이나 조너선 아이브를 더 좋아한다. 특히 조니 아이브, 기사 작위를 받은 이 영국 남자를 말이다.


쫓겨났던 잡스가 다시 애플로 돌아온 뒤 굳건히 자리를 잡게 된 결정적 성과는 젤리빈 아이맥의 메가 히트 덕분이었다(LG에서 생산했다!). 색색의 투명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일체형 PC 아이맥. 이후 비슷한 디자인의 아이북으로 쐐기를 박은 애플은 아이팟, 아이폰, 아이패드로 세상을 지배한다. 애플 제품의 특징은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압도적 디자인에 있다. 그런데 여기서 궁금증 하나. 매출 200조가 넘는 삼성 전자엔 그만한 제품 디자이너가 없을까? 직원 수가 10만 명에 가까운 메가 컴퍼니에 말이다. 정답은 "있다" 이다. 문제는 그런 디자인을 실제 제품으로 구현할 만한 디자이너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디자인이란 단순히 그림을 잘 그리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다. 조니 아이브가 위대한 이유는 그가 최적의 디자인을 고안하고, 스케치하고, 목업을 만들고, 시제품을 생산하고, 양산이 가능한 기술을 발굴해 그 제품을 우리의 손에 쥐어줬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메모리나 CPU나 레티나 디스플레이 같은 것만 테크놀로지라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 디자인, 디자인이야 말로 진정한 하이퍼 테크놀로지의 결과물이다.


애플이 어떻게 그렇게 위대한 제품을 만들었는지 알고 싶다면 숱하게 쏟아져 나오는 잡스 관련 서적보다는 이 책 <조너선 아이브>를 읽는 게 훨씬 나을 것이다. 비전을 현실로 구현해낸 실무자의 이야기인 만큼 이 책엔 손에 잡히고 눈에 보이는 실제 이야기가 더 많다. 애플을 그저 상상의 동화속 회사로 알고 싶지 않은 사람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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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무선) 웅진지식하우스 일문학선집 시리즈 1
나쓰메 소세키 지음, 박유하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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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고 나서야 왜 나쓰메 소세키가 일본 근대 문학의 아버지인지 알 수 있었다. 지은 지 100년이 넘은 소설이다. 하지만 방금 갓 지은 소설처럼 따뜻하고 싱싱하다. 고전은 시간을 초월한다는 상투적 표현에도 고개가 절로 끄덕이게 만드는 작품이다. 


나쓰메 소세키가 일본 근대 문학에 끼친 영향은 지대하다고 말하기엔 너무 약한 면이 있다. 왜냐면 이 자가 일본의 천 엔 짜리 지폐에 당당히 등장하는 남자기 때문이다. 소설가로서 이만한 영광을 누린 사람이 전 세계에 몇 명이나 있을지 생각해 보라. 나는 지금으로부터 약 10년 전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라는 작품으로 이 남자를 만났다. 돌이켜 보면 그 작품도 상당히 세련됐다. 심지어 <마음>보다 10년 전에 발표된, 그러니까 을사조약이 체결되기 딱 한 해 전인 1904년에 출간된 작품인데도 말이다. 게다가 이것이 그의 데뷔작.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에서도 언뜻 알 수 있지만 소세키는 인간의 무의식 속에 숨은 허영, 고독, 불안, 죄의식 등을 누구보다 날카롭게 느끼는 작가 같다. 그런 능력이 작품에 고스란히 발휘되어 때로는 풍자적으로 때로는 그 어두운 덩어리들을 두 손으로 퍼올려 문장 하나 하나를 빚어낸다. <마음>은 후자에 속하는 작품이다.


<마음>에서 가장 감동한 부분은 조곤조곤 쉽게 말하면서도 가슴 깊숙이 훅 찔러들어오는 고독의 날카로움이었다. 나쓰메 소세키는 뭔가를 주장하지 않는다. 인간의 어쩌고를 정의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인간은 ~인 존재입니다. 우리가 ~하는 이유는 우리가~하기 때문입니다 라고 말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그런데도 무엇을 얘기하려는지 이야기 속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읽는 이는 그것을 알지 못할 수 있지만 느낄 수는 있다. 제목 그대로 '마음'에 부딪는 소설인 것이다.


에메랄드 파스텔 톤으로 책표지를 꾸몄지만 이렇게 밝은 소설이 아니다. 마음하면 느껴지는 따뜻함과 포근함은 없다. 오히려 축축하고 차가운 감정이 느껴진다. 프로이트 식으로 말하자면 무의식(이 소설은 그의 연구가 소개되기도 전에 나온 것이라 한다), 마음 속 깊은 바닥에 고인 검은 물을 그린 소설이다. 읽고 있으면 인간은 본질적으로 혼자일 수 밖에 없으며 고독은 숙명이라는 생각에 쓸쓸해진다.


세상을 등지고 혼자 살아가려는 사람의 팔을 붙잡고 늘어지는 사람들이 있다. 인간은 결코 혼자가 아니며 우리가 당신의 친구가 될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다. 불신으로는 아무 것도 이룰 수 없다. 타인을 믿어라. 이 멍청이들이 이토록 긍정적일 수 있는 이유는 둔하기 때문이다. 마음에 대해서. 특히 자신의 마음에 대해서. 에고이스트들은 남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관계를 거부하는 것이다. 이들은 자신의 마음 속에 축축하고 어두운 죄의 근원들이 고여 있다는 걸 안다. 그들은 매일 밤 그 속을 들여다 본다. 자기의 마음 속에 그토록 끔찍한 죄들이 숨어 있다는 것을. 이런 죄의식이 마음 위로 단단한 껍질을 만들어낸다. 행여나 그것이 빠져나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해칠까봐, 행여나 그것이 삐져나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보여질까봐. 둔해서 행복한 사람은, 그래서 긍정적일 수 있는 사람은 그 더러운 죄들이 마음을 벗어나 주렁 주렁 살갗 밖에 달렸는데도 악수를 청하며 미소를 짓는다.


<마음>은 휴양지에서 우연히 만난 선생님과 내가 우정을 쌓아가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나'는 아직 어리기에 선생님이 감각하는 죄의식을 느끼지 못한다. 그래서 자꾸만 선생님께 다가가려 한다. 선생님은 어째서 오늘과 같은 마음을 갖게 된 걸까? 나는 궁금하지만 선뜻 그 핵심에 다가갈 용기는 없다. 내가 그 핵심을 열어 젖혔을 때 선생님과 나 사이의 관계가, 나아가 선생님의 마음 자체가 파괴될 수 있다는 걸 어렴풋이 알기 때문이다. 나는 시간을 두고 선생님을 지켜보려 한다. 언젠가는 선생님이 직접 말해줄 날이 올 것이다. 그러던 나에게 어느날 선생님이 보낸 장문의 편지가 도착한다.


<마음>의 뒤에는 <꿈 열흘 밤>이라는 단편 소설이 붙어 있다. 이 소설은 인간의 무의식에 자리한 회한, 욕망, 절망, 가책 등의 감정을 열 개의 꿈 속에 풀어낸다. 숨이 막힐 정도로 스타일리쉬하고 몽환적이다. 굳이 우열을 꼽자면, 나는 오히려 이 단편을 손에 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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