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을 끓이며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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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김훈의 수필을 들었다. 숙명처럼 인 박힌 무거움과 글쓰기라는, 노동의 땀에 절인 단어들이 마음을 무겁게 누른다. 언제나 그렇지만 김훈의 글을 읽고 나면 완전히 탈진해 버린다. 그 적막한 피로와 고됨이 싫어 항상 관둬야지 관둬야지 하면서도 기어이 다시 손에 들고 마는 마력이 김훈의 글에는 담겨 있다. 이 경지에 이르기까지 김훈은 얼마나 많은 문장을 빚고, 굽고, 깨부쉈을까? 어쩌면 그의 글을 읽는 동안 우리는 갓 태어난 연어 새끼가 되는 지도 모른다. 나자마자 대양을 향해 떠나가지만 태어난 곳의 향과 풍경이 그리워 다시 강가로 돌아오는 것처럼.


<라면을 끓이며>는 완전히 새로운 글이 아니다. 김훈이 써온 여러 수필집에 실린 글 일부와 그 후에 새로 쓴 글을 합쳐서 엮은 책이다. 나는 과거 그의 수필을 몇 권 읽은터라 여러군데서 익숙한 글을 다시 만났다. 그러니까 <라면을 끓이며>는 나에게 재회 안에 재회가 켜켜이 쌓인 다시 봄의 밀푀유랄까?


익숙함은 익숙해서 좋고 익숙해서 나쁘기도 하다. 익숙해서 좋은 이유는 그것이 익숙하기 때문이고 익숙해서 나쁜 이유는 역시 그것이 익숙하기 때문이다. 김훈은 이렇게 허황된 말놀이를 좋아하지 않고 무의미한 동어 반복을 경멸하지만 방금 내뱉은 저 말엔 김훈의 글이 가진 독특함이 반영되어 있다. 김훈의 글은 시대와 뒤엉켜 시비를 가리려 하지 않는다. 김훈은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말들에 대하여> 언제나 진저리를 치며 자신이 딛은 길 위를 묵묵히 걸어갔다. 익숙함은 익숙해서 좋고 익숙함은 익숙해서 나쁜 것처럼 말이다.


아마도 그의 뼈에 새겨진 기자의 낙인 때문일 것이다. 언제나 공정하게 사실 만을 전하겠다는 직업 윤리가 그가 써내는 온갖 글들에 절절이 배어 있는 것이다. 기자는 불 속에서 타버린 소방관의 시체를 보고, 그 숯덩이를 부여 잡고 통곡하는 애엄마의 울음 소리를 들으며, 그리하여 그 죽음이 낳은 비애와 고통을 느끼지만 그 절절한 감정을 기사 속에 풀어 넣을 수는 없다. 기사는 기사여야지 일기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김훈은 여러 글에서 자신이 가 닿으려 했으나 결국엔 닿지 못한 것들에 대해 말한다. 나는 그것이 김훈의 실력이 부족해서라거나 김훈이 닿으려 한 곳이 너무 멀기 때문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김훈이 닿고자 하는 곳에 닿을 수 없는 이유는 세상을 대하는 그의 태도 때문이다. 그는 늘 세상을 관조하려 한다. 그 뜨꺼운 핵심에 뛰어들고 나면 온 몸이 타버려 사라지는 걸 두려워 하기라도 하듯. 이 늙은 작가의 몸 안엔 아직도 그런 공포가 있는 것 같다. 나같은 풋내기가 어찌 그의 마음이 보는 세상의 깊이를 알겠냐마는.


이 책에서 가장 좋은 글은 안타깝지만 이 책의 글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 다른 수필집에 등장한 적이 있다. <1975년 2월 25일의 박경리>다.


이 글은 평범한 사건기록지처럼 특별할 게 하나도 없다. 김지하의 출감을 기다리는 1975년 2월 15일의 기록이 시간순으로 늘어서 있다. 그런데 그 시간 속에서 느닷없이 박경리가 등장한다. 이야기는 순식간에 기사에서 드라마로 전환될 것을 요구하지만 김훈의 문장은 차분하고 끈질기다. 그 인내와 차가움이 어떻게 마지막에 이르러 뜨겁고 무거운 진실로 변하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어쩌면 이것이 김훈이 수 없이 빚고, 굽고, 깨뜨리는 글의 정수인지도 모른다. 나는 그것을 익히려고 여러 차례 같은 페이지를 넘겼다.


김훈은 이 책을 펴내며 과거에 출간한 적 있는 여러 편의 수필집을 절판시킨 것 같다. 참으로 그다운 행동이다. 이제 그의 과거를 읽으려면 이 책을 손에 드는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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