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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하하는 저녁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3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처음에는 나의 일도 아닌데 8년간 같이 살다가 단 사흘 만에 새로운 사랑을 찾아 떠난 다케오와 다케오가 사랑하게 된 그 새로운 상대인 하나코가 리카의 집에 함께 살게 된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아 속으로 얼마나 투덜거렸는지 모른다. 매몰차게 말하지 못하는 리카가 답답했다. 리카의 홍콩행 비행기표를 훔쳐 홍콩으로 떠나는 하나코의 행동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였을까. 모두가 하나코를 찾기 시작할 때, 리카의 집에 있는 하나코가 자연스럽게 느껴지기 시작했을 때부터였을 것이다. 그녀가 느끼고 있을 공허함, 쓸쓸함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이러니하게도 하나코와 함께 하는 동안 리카는 그녀를 통해 다케오와의 사랑이 끝났음을 알게 된다.
하나코의 등장은 무엇을 의미할까. 8년 동안의 사랑을 버리고 단 사흘 만에 새로운 사랑을 찾아 떠나버린 다케오의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서? 만약 그랬다면 하나코의 삶을 좀 다르게 표현해줬어야지. 리카와 다케오의 공간에 하나코가 들어옴으로써 다케오의 존재감은 희미해지고 리카와 하나코의 이야기만이 보여지는 것에 대해 도저히 작가의 의도를 알 수가 없다. 하나코를 스쳐지나가는 인연으로 그렸다면 좀 더 현실적이었을까. 모든 이들이 만나고 싶어하는 하나코의 존재를, 리카와 다케오를 통해서만 봤어야 하는 것이 안타까울 정도로 하나코, 그녀의 삶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 그녀가 선택한 자신의 삶, 모든 것으로부터 도망다닌 그녀가 선택할 수 밖에 없었던 것에 대해 그녀가 나에게 들려줄 이야기가 분명 있었을 것이다.
결말이 불분명한 소설을 싫어하는데 다케오에게 "이사할까 봐"라고 말하는 리카의 말을 듣고 이보다 더 명쾌한 결말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케오와 리카의 사랑이야기가 아닌 하나코와 리카의 이야기인 듯한 느낌은 핑크빛 로맨스 이야기가 아니어도 상관 없었다. 리카의 집에서는 하늘을 날아가는 비행기가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도 비행기를 좋아하는 하나코가 굳이 리카의 집에서 살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 이번에도 자신이 돌아갈 장소가 없었을 것이다. 모든 것으로부터 끊임없이 도망다니는 하나코에게 어디곳이든 돌아갈 장소는 없었다.
리카가 하나코를 마지막으로 만난 날 "오늘, 돌아올거지?"라고 묻는다. 이 물음에 하나코는 "글쎄"라고 대답했다. 그때 그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이제야 돌아갈 곳이 생겼다고 안도했을까. 여전히 돌아갈 곳이 없었다면, 예전과 같은 삶을 살아야했다면 다른 선택을 했을까. 아아, 머리만 아플뿐 알 수 있는 것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