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란 세트 - 전3권 - 개정판 기란
비연 지음 / 파란(파란미디어) / 2012년 6월
평점 :
품절


모든 사건이 마무리 된지 고작 10년 뒤만을 보여주다니, 이 책이 '기란'의 일생을 그리고 있지는 않지만 다른 로맨스 소설과 같이 결말을 맺는 것은 역시 양기란답지 않은 일이다. 양기란, 그녀는 황제의 후궁이지만 양기란으로 살고자 했다. 황제보다 자신을 더 사랑한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여인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황제가 있음으로서 할 수 있는 말이 아닐까. '유령'이라는 드라마에서 박기영이 하는 말을 따라해보자면 "소설을 한 번 써 보자면 황제 윤이 오랫동안 살아 왕권을 강화시켜 놓았을 때만이 기란의 행복도 유지될 수 있는 것이다. 만약에 윤이 일찍 죽는다면 기란의 삶 또한 자불태후나 효열태후와 다르지 않다고 그 누가 말할 수 있을까. 윤이 오래오래 살고 후계 문제가 확실히 매듭지어진 다음에야 기란은 멀고 먼 서촉에서 살았던 때처럼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나. 고작 10년 뒤에 기란과 황제 윤, 이친왕까지 행복해 보인다고 모든 것이 다 잘되었으니 안심할 수 있다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아직 양기란은 살아있고 자신의 삶을 살아내야 한다. 그러니 여기에서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단지 이것 하나 뿐이다. 지금 그녀는 행복하고 앞으로 얼마나 될지 모르지만 꽤 오랜시간 행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끝나지 않은 기란의 삶을 상상하며 소설을 써 보자면 하는 말인데 그녀는 황제가 있든 없든, 죽을때까지 양기란으로써 살아가고자 노력할 것이다"

 

자불태후와 효열태후는 황제의 사랑을 받았던 그 시절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한 삶을 살아간다. 다른 여인의 품 속에 있는 황제를 보는 것이 괴롭고, 자신이 점점 늙어가는 것이 원망스럽다. 모든 것은 자신들이 선택한 삶의 결과이지만 도통 인정할줄 모르는 그녀들은 하나같이 똑같은 말만을 외쳐댄다. "이가의 남자들이란......" 그녀들도 이가의 남자를 사랑했으면서 더이상 사랑받지 못하는 삶을 타인의 삶을 파괴하는 즐거움으로 자신의 고통을 덜어내기 위해 타인의 생살을 뜯어 먹으며 살아간다. 이런 그녀들에게 황제 윤의 사랑을 받는 양기란은 죽여야 마땅할 여인일 뿐이다. 자신만을 바라본 황제 윤이 여색만을 탐하는 것은 황제로써 절대 할 수 없는 행동이다. 자불태후는 기필코 양기란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고야 말 것이며 호열태후는 그녀가 죽어가는 모습을 보며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릴 것이다.

 

구중궁궐 안에서 후궁들간에 암투가 벌어진 것이 어제 오늘 일이 아니지만 권력자에 의해 모든 사건이 오랜세월 짜임새 있게 사건이 만들어져 가는 것은 정말이지 너무나 섬뜩해서 지켜볼 수가 없다.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일까.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인지 아는 사람은 있을까. 촘촘하게 펼쳐진 그물을 피해갈 수 있는 이가 있을까. 그물을 만든 이조차도 이 그물이 무엇을 만들어 놓았는지 몰라 온몸이 감겨 죽어버릴 정도로 치명적인 독까지 품고 있다. 이 속에서 양기란이 살아남을 확율이란 거의 없을 것이다. 기란이 야맥처럼 정치적인 술수를 부리는 사람이 되는 것은 싫지만 너무나 순수하게 사랑만을 원하는 그녀는 너무나 바보같아서 답답하다. 냉궁에 내쳐진 후 윤의 품으로 다시 돌아온 그녀가 선택한 것이 자유로운 삶이라고? 과연 그럴까. 사랑을 미끼로 자신의 안정된 미래를 보장받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소소가 함께 떠나자고 했을 때 선뜻 따라나서지 못한 그녀다. 황제가 정말 그녀의 바람대로 놓아줬다면 자유롭게 훨훨 날아서 과거의 사랑을 추억하며 행복하게 살아갔을까.

 

단지 기란이 선택한 것이라면, 효열태후 앞에서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은 황제 윤의 사랑이 자신을 떠나갔을 때 자신은 그의 곁을 떠날 것이란 말이었다. 사랑을 잃고 권력만을 손 안에 움켜쥔 채 늙어가며 타인에게 고통만 주는 효열태후에게 할 수 있는 가장 무서운 말이지만 자불태후, 효열태후, 황후, 야맥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목숨을 지켜야 하는 기란이 한 일은 결국 황제의 사랑에 기댄 것 밖에 없다는 것이다. 황제의 사랑이 떠나가면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은 삶을 기란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비연의 '기란'은 아주 잘 만들어진 로맨스 소설이다. 사건들이 끊이지 않고 한 여자를 지키기 위해 남자가 아닌 황제가 되어야 하는 윤의 마음을 잘 표현해내고 있으며 황제의 사랑만을 바라고 그 안에서 설레임을 느끼는 기란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기란이 보여줄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다. 황제가 지켜주지 않으면 자신의 안전조차 보장받지 못하는 후궁의 삶을 보여줄 뿐이다. 권력의 다툼에서 물러나 행복만을 추구하며 살아가고 있다고? 허나 이는 스스로 만든 것이 아니라 윤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야맥은 아주 치졸하고 끔찍한 방법을 썼지만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삶을 살아갔고 자신이 선택한 삶의 결과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함께 자란 야맥에게조차 배신당한 기란이 권력자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을 보여준 적이 있었던가. 자신에게 일어난 일들에 대한 의문조차 가지지 못했다. 적어도 자식을 지켜내기 위해 처절하게 싸우는 부모의 모습이라도 볼 수 있다면 다행이다 싶을 정도로 강한 어머니의 모습조차 보여주지 않는다. 왕권이 안정되었으니 강한 어머니의 모습조차 보여줄 필요가 없다. 황제와 사랑을 나누는 기란의 모습이 잦은 것이 답답할 정도로 여기에는 황제의 후궁 양귀인만 있을 뿐 진정으로 그녀가 원했던, 그렇게 살아갈 것이라고 말했던 양기란의 삶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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