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가요 엄마
김주영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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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세 시에 아우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예상했던 전화였지만 경원은 시종일관 담담했다. 아우와 대화를 나누는 경원은 엄마의 죽음에 무심해 보였다. 속울음이라도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아우와 이리도 담담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것인가. 내 안에서 끓어오르는 감정들을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 타인의 죽음일 뿐이다. 이 세상의 모든 '엄마'가 그리움의 대상이라고는 하나 나와는 일면식도 없는 그녀가 죽었다고 해서 나의 감정까지 평정을 잃어야 할 이유는 없었다. 그런데도 나는 아우에게 소식을 들은 후 거실에서 대형 LCD 스크린에서 터져나오는 섹스 장면들을 보는 그에게 불신의 감정을 품는다. 맞은편 아파트에 살고 있는 여자가 봤을까봐 걱정하는 그를 보며 나이든 노모를 돌보는 일은 아우에게 맡겨두고 자기 편한대로 살아가는 사람이라 단정짓고 만다. 그때서야 내 안에 소용돌이치던 감정들이 하나둘 가라앉기 시작한다.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들이 어떤 이야기든 나도 시종일관 무심하게 그를 바라보기로 한다.
 
엄마의 얼굴에 남아 있는 화장의 흔적, 외삼촌의 자전거, 장춘옥의 짜장면, 경원은 그 어디에서 엄마와 둘 뿐이던 세상이 무너질 것이라 본 것일까. 엄마와 외삼촌과 함께 먹은 짜장면은 늘 배고픔에 허덕이는 경원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이었을텐데, 이것을 뱉어내게 할 정도로 그를 무섭게 만든 사건이 무엇일까. 누구든 짐작 가능한 일일테지만 경원 나이의 어린 소년이 본능적으로 자신에게 위협이 되는 상황을 감지해 낸다는 것이 놀랍다. 엄마에게 남편이 생긴다는 것은 경원에게 울타리를 만들어 줄 수 있다는 것이었지만 경원에게 새아버지가 생긴다는 것은 엄마를 빼앗긴다는 위기감 뿐이었다.
 
학교에서 공부를 하다가도 엄마가 사라질까 두려워 권씨 집으로 달려 갔던 소년은 이제 어른이 되고 머리에 흰머리가 늘어가는 나이가 되었지만 여전히 엄마의 손길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고향을 떠나 살아가면서도 엄마의 그림자를 떼어내지 못한 채 어린 시절의 기억에서 놓여나지 못한다. 아우에게 듣고서야 엄마의 삶을 이해할 수 있었던 못난 아들은 핸드백에 넣어두고 바르지 않은 엄마의 립스틱을 보면서 무너져 내린다.  
 
경원과 아우가 기억하는 엄마의 모습은 두 사람의 기억이 합쳐져서야 온전한 엄마의 모습이 된다. 두 아들이 기억하는 엄마의 모습은 모든 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묵묵히 고통을 감내하며 살아가는 억척스러운 여인의 모습이다. 운명이 무엇일까 철학적인 고민 따위는 하지도 않았을 터이지만 분명 그녀는 역사의 소용돌이속에서도 저항 한 번 하지 못하고 자신이 살아가야 할, 살아낼 세월을 묵묵히 견뎌낸다. 엄마의 삶은, 그저 그때 그 시절이 그랬다는 말로는 설명이 부족하다. 경원의 외할아버지의 이야기까지 거슬러 올라가 그 사연 많은 세월까지 풀어내자면 긴긴 밤이 부족할 지경이다. 
 
엄마의 몸짓, 손짓하나 그 의미를 알지 못했던 아들이 엄마가 죽고 나서야 그 뜻을 알고 속울음으로 써 내려간 글인 '잘가요 엄마'는 임종을 지키지 못했던 못난 자식의 엄마를 향한 그리움이 담겨 있다. 한 번도 아우를 가족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던 그가 엄마가 돌아가신 후에야 가족의 의미를 알아간다. 새아버지가 생기고 아우가 태어난 후 엄마를 끊임없이 그리워했던 소년은 어른이 되어서도 그때의 마음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애숙이 누나를 만난 후에야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는다.
 
언제부터였을까. 경원의 얼굴을 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책을 잡은 손가락에 시선을 두자니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볼 수 없고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오롯이 바라보고 있으려니 그의 첫 인상을 나쁘게 봐 버렸던 내가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다. 엄마와 그, 사이에는 무수히 많은 세월이 있었고 그의 아우조차 발을 디밀지 못했던 그들만의 이야기가 있었다. 감히 내가 가까이 다가갈 수도 없는 신성한 곳이었다. 그곳에는 자식을 향한 엄마의 사랑만이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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