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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5구의 여인
더글라스 케네디 지음, 조동섭 옮김 / 밝은세상 / 2012년 1월
평점 :
제자와의 스캔들로 모든 것을 잃은 해리의 운명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아름다운 여인 마지트와의 만남은 그녀를 필요로 했던 해리에게 운명이었고 죽을 때까지도 그녀와 이어진 인연의 끈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해리는 자신의 주변에서 일어난 모든 끔찍한 사건들이 자신때문에 일어난 일이 아니기를 바라며 마지트와의 관계 또한 끊어내 버릴 수 있다고 믿는다. 아니 믿었었다. 지금은 마지트의 곁에서 일주일 중 두 번의 만남을 위해 살아가는 처지가 된 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지만 그 또한 자신이 원하는 삶을 위해 마지트에게 의존하게 된다.
마지트는 천사일까, 악마일까. 머리에 뿔 두개가 달려 있고 창을 휘두르며 위협하는 존재만이 악마는 아니다. 마지트는 천사라기 보다 악마에 가깝고, 아니 그녀는 악마가 분명하다. 해리와 운명적으로 이어진 인연으로 인해 그의 삶에 관여하게 되면서 그녀는 염라대왕보다 더 큰 권력을 휘두르게 된다.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 마지트와 해리의 관계는, 모호한 현실의 경계선 위에서 위태롭게 이어져 나가게 된다.
진정 해리는 마지트의 손에서 벗어나길 원하는가. 자책감과 죄책감을 짊어지게 되지만 세상에서 나쁜 놈으로 불리우는 사람들은 받아야 할 벌을 받았고 그 결말 또한 해리에게 유리하게 작용하여 통쾌함마저 안겨주는데 굳이 그녀를 탓해야 할까. 그렇지만 마지트에 의해 세상 일이 어그러지고 이리 엮였다가 저리 엮였다가 하는 것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녀로 인해 나의 삶도 어떤 형태로든 영향을 받게 될지도 모르니까. 처음부터 해리를 점찍어두고 그의 삶을 마음대로 조종하지 않았는가 의심이 가지만 지금의 결말을 놓고 보자면 마지트의 손을 잡은 것은 현명한 선택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기에 해리는 그녀에게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과 다르게 그녀의 손을 계속 붙잡고 있을 수 밖에 없고 자신을 만나는 시간 이외에는 자유롭게 생활해도 된다고 했지만 해리의 나머지 삶도 마지트에 의해 조종당하게 된다.
해리로서는 꽤 억울하긴 하겠지만 마지트가 없었다면 쓸쓸하고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을 것이고 딸에게 부모다운 모습도 보여주지 못한 채 그렇게 생을 마감했을 것이다. 자, 이쯤 되면 해리가 현명한 선택을 한 것으로 판단해도 되겠지? 해리와 마지트의 마지막이 어떠했을까 알지 못한 채 결말을 맞이한 것은 무척 아쉬운 일이다. 마지트가 제시하는대로 살아갔을 해리는 생의 마지막에 어떤 생각을 했을까. 죽고 나서도 마지트와 함께 해야 하는 것은 아닌지 불안해 했겠지만 자신이 하고 싶어 했던 일을 하며 딸 메건과 연락을 주고 받으며(메건도 프랑스에 와서 함께 살았을지도 모르겠다) 평범한 삶을 살아간 것에 만족하지 않았을까. 모름지기 삶은 예기치 못했던 난관을 만나며 어려운 선택을 하면서 살아가는 것이지만 해리에겐 정해져 있는 길을 따라 살아간다는 것이 달랐을 뿐 분명 그도 마지트가 제시한 길이지만 자신의 의지에 따라 살아가려 노력했을 것이다. 치열하게 부정하고, 때론 포기하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들을 하면서 살아갔을 것이다.
이쯤되면 궁금한 것이 있을 것이다. 해리처럼 그의 곁에 수호신 마지트가 있는 삶을 살아보고 싶으냐고. 어려운 질문이라 오래 생각을 해 봐야겠다. 단번에 부정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 마지트의 존재가 매력적으로 보이나 보다. 미래를 알 수 없어 불안한 삶을 살아가지만 자유을 빼앗기는 대신 안정된 삶을 원하느냐는 질문은 죽을 때가 되어서도 답을 내리기 쉽지 않다. 그러나 한 번쯤 그런 삶을 살아보고 싶다. 잠시동안만 허락한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