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계자들
김언수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 결말이 왜 이래. '래생'이 왜 이렇게 멋있는 거냐고. 내 옆에 작가가 앉아 있었다면 다시 쓰라고 생떼를 부렸을 것이다. 다시 써 줄 때까지 놓지 않았을 거다. '래생'의 직업을 떠올릴 때마다 이름이 같이 떠 올라 이 아이러니한 상황이 어이 없더니 기어이 나의 가슴을 치는구나.

 

하늘 어딘가에서 이 땅에 숨쉬며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한 줄에 한 명씩 묶어 조정이라도 하고 있는 것 같다.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나의 생각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일들이 많이 생길 수가 없을 것이다. 사람들은 이런 것을 흔희 '운명'이라고들 하지만 래생이 쓰레기통에서 태어난 것부터가 운명이요. 하필 너구리 영감에게 입양된 것이 운명이요. 래생과 미토, 미사, 수민의 만남이 예정된 운명이라 해도 조금은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게 해 줄 수 있는거 아닌가. 그런데 이들에겐 왜 이것조차 허락하지 않는 건인지. 그래, 이 모두가 운명때문이니까. 이 하나로 모든 질문에 대답이 되니 참 쉽다. 살아가는 것은 늘 어렵기만 한데 말이다.

 

설계자들의 뜻에 따라 움직이는 자객 '래생'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내가 살아가는 곳과는 전혀 다른 별세계의 이야기들 뿐이었다. 왜 죽어야 하는지, 사랑하는 이가 왜 죽었는지 모른 채 살아가는 가족들이 눈 앞에 나타나 책장을 넘기는 손길이 결코 편하지 않았지만 낯선 세상에 대한 호기심은 한 발, 한 발 나를 마지막 책장을 향해 나아가게 했다. 그랬기에 나는 '래생'이 위험에 빠질 때마다 가슴이 옥죄어 오는 긴장감을 느꼈다. 그가 죽으면 이 모든 것들의 이야기가 끝이 날지도 모르기에, 다른 이에게 듣는 이 별세계의 이야기는 아무런 의미를 지닐 수 없을 것이기에 진정으로 그가 끝까지 살아남기를 바라며 읽었다. 요즘 드라마나 영화에서는 주인공(사실과 다를지라도 나는 '래생'이 이 책의 주인공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을 죽이는 예가 너무 많다. 왜 주인공을 죽이는지 모르겠다. 이는 관람객들과 독자들의 심장이 터져 죽기를 바라는 누군가의 농간일 것이다. 400페이지가 넘는 책장을 넘기는 동안 래생의 안위를 걱정하며 읽는 것이 얼마나 많은 정신적 소모를 겪게 하는지 누가 좀 알아줬으면 좋겠어서 이렇게 잠깐 밝혀두고 넘어간다.

 

누구나 홀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지만 래생의 고독감은 나의 고독감을 넘어서는 것 같다. 그야 물론 암살자니까. 설계자들의 계획에 따라 살인을 하고 시체를 처리하고 나면 허탈감에 자신의 존재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지지만 이 무력감은 아, 마, 도 더 살고 싶다는 욕구가 아닐까. 누군가 자신을 죽이러 오지 않을까 긴장된 시간을 살아간다는 것은 죽어 있는 삶이나 다름 없을테니까. 그래서 래생이 평범한 한 여자와 행복하게 살게 되었을 때 이 시간이 영원히 계속 되기를 바랐다. '설계자들'의 이야기가 여기서 끝을 맺더라도 아쉽기는 하지만 래생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괜찮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래생이 왜 고독한 삶을 계속 걸어 가기로 결정했는지 그 이유는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한 여자의 삶을 흔들어 놓는 래생의 행동이 처음에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도 이런 평범한 삶을 원한다고 생각했으니까. 래생의 마음속을 들여다 보았기에 그를 잘 안다고 생각했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나의 착각이었다.

 

래생이 표적을 지긋이 응시할 때 주위의 모든 것이 멈춘 것처럼 고요해진다. 숨조차 쉬지 못할 정도로 독자들의 마음까지 정적인 상태가 된다. 죽어서 흔적이라도 남길 수 있는 삶조차 허락되지 않은 평범하지 않은 사람들의 마지막 길은 내가 지금 죽는다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 이미 심장은 죽음에 이른다. 필연적으로, 운명적으로 암살자들의 죽음의 끝도 결코 평범할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래생은 잘 알고 있다. 누군가에 의해 선택 되어지는 삶보다 자신이 마지막으로 선택하는 할 수 있는 것은 죽음 뿐이라는 것을, 이것이 래생이 자신의 삶에서 유일하게 할 수 있고 해 낼 수 있는 행동일 것이다. 그래, 이 글을 쓰면서 깨닫게 된 것인데 '설계자들'의 마지막 결말은 작가가 만든 것이 아니라 래생이 만든 것이었다. 래생이 선택한 오로지 자신만의 것, 그것이었어. 이제야 모든 것이 명료해진다. 미토에 의해 다른 결말이 있었을지도 모르는 여지를 무참히 잘라버린 래생의 행동이 어떤 의미였는지 이제야 알겠다. 책장을 다 덮고 나서도 여운이 참 길게 가는구나. 마음을 쓸쓸하게 만들어. 왠일인지 소주 한 잔이 생각나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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