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몽
야쿠마루 가쿠 지음, 양수현 옮김 / 북홀릭(bookholic) / 2010년 5월
평점 :
절판



하얀 눈 위에 붉은 핏자국이 번져간다. 점점이 떨어지는 핏자국도 가슴을 아릿하게 만드는데 이렇게 무차별 살인자에 의해 희생된 이의 붉은 핏자국은 보는 이의 가슴을 짓누른다. 헉헉, 하얀 눈이 모두 붉게 물들어 가는 모습은 나의 숨도 막히게 한다. 세 살 난 아이 '루미'가 희생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너무도 잔인하게 아이의 목을 찌른 살인자 '후지사키'는 그 때 루미를 제대로 보지 않았다. 검은 안개가 보였을 뿐이다. 아이였다면, 아이의 모습이 보였다면 이 살인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검은 안개가 눈 앞을 가렸기에 그는 심신상실자로 법의 울타리를 벗어난다.

 

심신상실자의 행위는, 이를 벌하지 않는다는 일본 형법 제 39조에 의해 후지사키는 4년 후 아무렇지 않게 평범한 일상속으로 돌아온다. 희생자의 가족에겐 경악할 일이다. 그러나 부부가 함께 낳은 아이지만 루미의 존재가 미카미에게는 목숨까지 내던질 정도의 큰 의미는 되지 않았다. 그저 미스터리 소설을 쓰면서 소설속 이야기로 범인과 희생자를 탄생시켰던 그에게 루미의 죽음은 글을 쓸 수 없게 만들어 버렸을 뿐이다. 이제 더이상 모든 것이 소설속 이야기가 아니었으니까. 그는 그 때 딸을 지켜내지 못했다. 아내도 지켜주지 못했다. 다시 눈 앞에 나타난 후지사키에게서 아내를 지켜낼 수 있을까.

 

아이를 잃은 고통에 살인자와 똑같은 병인 통합실조증에 걸린 사와코는 삶의 의미를 잃을 정도로 루미의 존재를 가슴에서 떼어낼 수 없어 했다. 살인자를 처단하기 위해 목숨까지 던지려 했지만 이 계획은 치밀하지 못해 그저 사회 고발을 목적으로 한 듯 보인다. '천사의 나이프'에서 미성년자의 살인 행위가 법의 울타리 안에서 보호 받았던 것을 생각해 볼 때 '허몽'은 '천사의 나이프'와 비슷한 패턴으로 이야기를 이끌어 간다. 이는 대중적으로 이름을 알린 미카미가 사람들에게 심신상실자의 행위에 대해 사회에 알리기 위해 글을 쓰기 시작하는 모습이 작가 야쿠마루 가쿠의 모습과 겹쳐 보이게 한다.

 

유키와 후지사키의 만남은 운명이라 하기엔 너무 작위적인 우연의 냄새가 많이 난다. 독자들에게 심신상실자의 입장에 서서 한 번쯤 그들의 삶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게 하지만 '살인'에 대해서는 그 어떤 것도 용납할 수 없기에 이 두 사람을 바라보는 것은 가슴만 답답하게 만들 뿐이다. 거리에서 직접 마주치게 될까 두렵다. 내 아이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이 살인자의 무차별 살인에 의해 희생되지 않을까 무서워진다. 나는 결코 그들의 행동에 그 어떤 이해도 할 수 없다. 그저 현실속의 이야기가 아니기를 바라며 이들의 곁에서 도망가고 싶을 뿐이다. 심신상실자의 행위는 벌하지 않는다니, 이게 무슨 소리란 말인가. 나의 소중한 가족들을 잃었는데 그 어떤 이유이든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미카미에게 가족은 꼭 지켜내야 할 목숨과도 같다. 지금은 그가 아내 사와코와 표현방법이 다를 뿐 사와코처럼 목숨을 다 바쳐 딸 루미를 사랑했었다는 것을 안다. 이제는 하늘에 있는 딸에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엄마를 지켜낸 것 맞지?"라고. 미카미는 이제 더이상 도망가지도 않고 현실과 맞서 싸우며 소중한 사람을 지켜낼 것이다. 루미를 떠올리는 그의 눈 빛이 너무나 슬퍼 보인다. 아이는 왜 자신이 죽어야 했는지 그 이유를 알지 못하고 죽었는데, 잠깐의 삶을 위해 이 세상에 온 아이의 모습을 생각하면 가슴 한 켠이 아파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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