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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기억의 피아니시모
리사 제노바 지음, 민승남 옮김 / 세계사 / 2009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어느덧 겨울이 가고 봄이 오는 소리가 들린다. 봄에는 개나리꽃, 벚꽃 등 누가 더 예쁜지 뽐내기라도 하듯 아름다운 꽃을 피울 것이다. 앨리스는 알까. 계절이 바뀌고 시간은 끊임없이 흘러간다는 것을. 앨리스를 오롯이 바라보고 있는 것이 힘이 든다. 내가 앨리스를 오랫동안 바라보지 못하는 이유는 나 또한 이 병에서 완전한 자유로움을 얻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일 것이다. 바라보지 않음으로서 이 병을 비껴갈 수 있다는 듯이 말이다. 가까운 미래, 내게 어떤 일이 생길지 알 수 없으나 지금 나는 미래를 향해 나아가고 있고 몇 십년 뒤의 나의 모습도 떠올릴 수 있으나 그녀에겐 이런 사소한 행복조차 가질 수가 없어 안타깝다.
앨리스가 처음 자신이 알츠하이머에 걸렸다는 말을 들었을 때 얼마나 무섭고 외로웠을까. 지금까지 살아온 세월 동안 간직해 온 추억과 그리움이 모두 물거품이 되어 사라진다니, 믿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70, 80대에 이 병을 진단 받았다면 덜 억울했을까. 아니 어떤 삶이든, 어떤 사람이든 이 병만은 걸리지 않기를 바랄 것이다.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살아온 앨리스, 아직은 많은 시간이 남았을 것이란 생각에 하고 싶었던 일들을 뒤로 미루어 두었지만 이제는 그럴 수가 없다. 시간이 없다. 읽지 못했던 책도 읽어야 하고 딸이 쌍둥이를 낳는 것도 보고 싶다. 자식들에게 이 몹쓸 병을 물려주었다는 생각을 하면 견딜 수가 없지만 그녀에겐 가족들이 꼭 필요하다.
앨리스는 대학을 가지 않고 연극을 하는 리디아를 늘 못마땅해 했다. 오로지 무대에 서고 싶다는 열정을 가진 리디아와 끊임없이 다퉈왔지만 남은 시간이 별로 없는 지금 앨리스와 리디아는 그 누구보다 가까워졌다. 딸의 이름보다 이제는 '여배우'라고 기억하지만, 무대에 선 리디아를 알아보지 못해 슬프지만 앨리스의 곁을 떠나지 않는 가족들이 있기에 완전한 암흑속에 있어도 더이상 외롭지 않다. 아니 왜 외로운지조차 그녀는 알지 못하리라.
알츠하이머 환자는 투명인간이 아니다. 미래가 없다고 죽은 사람은 아니다. 앨리스가 어떤 선택을 할지 그녀에게도 의견을 물어봐줘야 한다. 선택한 미래를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도 말이다. 가지고 있는 기억이 얼마 되지 않지만 이 삶을 소중하게 지켜내고 싶은 앨리스는 사람들에게 말한다. 우리는 완전히 무능하지 않다고, 지친 사람들에게 어깨를 빌려줄 수 있고 아무 조건 없이 사람들의 말을 들어 줄 수 있다고 말이다.
25년간 하버드 교수로 재직한 앨리스는 알츠하이머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녀가 우리들에게 보여준 700일이라는 시간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그녀는 멀어졌던 가족과 더이상 싸울 시간이 없다는 것, 자신이 하고 싶어하는 것을 더이상 미루면 안된다는 것을 열정적으로 알려줬다. 늘 똑같은 일상을 지겨워하는 내게 그녀가 전하는 메시지가 가슴을 벅차오르게 한다. 타인에게도 손을 내밀 수 있는 용기를 준다. 삶은 결코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으니까.
앨리스, 그녀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이제 끝이 났다.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채 그녀는 여전히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가족들이 곁에 있어도 알아보지 못할테지만, 그녀를 기억해주는 사람들이 곁에 있어 비워진 삶을 채워줄 것이다. 조건없이 모든 것을 받아주는 것, 이것이 사랑일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