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서아 가비 - 사랑보다 지독하다
김탁환 지음 / 살림 / 2009년 7월
평점 :
품절



유감스럽게도 '노서아 가비'의 향기를 맡아 보질 못했다. 이 커피를 좋아했다는 고종의 이야기 또한 생소하다. 고종 암살이라는 큰 사건 아래 '따냐'라는 여인과 이 사건이 어떤 관련이 있는 것인지 예측조차 되지 않았다. 거대한 물줄기를 바라보는 느낌을 받아야 했으나 아쉽게도 빠르게 넘어가는 책장만큼 따냐의 독백으로 시작되는 모든 이야기들이 너무 가볍게 느껴졌다. 정말 실제 있었던 일인가. 어린 시절 모여 앉아 듣던 그런 옛날 이야기를 듣는 듯 존재하지 않는 곳의 이야기를 듣는 듯 했다. 

 

따냐 인생의 긴 여정의 끝에는 고종에게 매일 커피를 올린 조선 최초의 바리스타 이야기라는 아주 대단한 이야기가 들어 있으나 아버지의 죽음으로 러시아로 가게 된 그녀의 삶이 그리 순탄하지 않았다. 러시아 숲을 유럽 귀족들에게 팔아 온 여자사기꾼인 그녀가 고종을 어떻게 만나게 되었는지 듣다 보면 하루가 금세 저물고 커피 생각이 간절해질 것이나 이반과의 사랑이야기에 몰두하다 보면 애초에 내가 왜 그녀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지 헷갈리고 만다. "이반과의 사랑이 진실했느냐?"에 대한 답을 찾다보면 어느새 마지막장에 이르게 되고 고종암살 사건에 대한 것은 그녀가 살아온 지난 세월의 일부분으로 바뀌어 무언가에 한 대 얻어 맞은 듯 정신이 멍해지는 것이다.

 

"리심"을 통해 이 시대에 대한 작가의 글이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판타지 마냥 이렇게 가볍고 쉽게 읽어지는 책을 대하고 보니 작가가 정말 '김탁환'이 맞는지 다시 한번 살펴보게 된다. 따냐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진실때문에라도 이반과는 만날 수 밖에 없었던 운명적인 덫에서 그녀가 얻은 것이 무엇이었는지 궁금하다. 한 몫 크게 잡겠다는 이반을 도와 그의 곁에 머물렀던 따냐는 어떤 생각으로 그와 함께 했던 것일까. 사랑보다 지독한 '노서아 가비'보다 나는 이 둘의 사랑조차 이해 할 수 없었다. 얽힌 관계속에서 이렇게 만나 사랑을 한다는 것이 드라마속 이야기처럼 나를 불편하게 만든다.

 

이반과 따냐가 조선으로 올 수 밖에 없는 운명론을 들고 나오자니 따냐와 다르게 이반의 행동 또한 이해되지 않는 것 투성이다. 따냐의 독백을 통해 툭툭 던져지는 사건에 대한 내막들은 이반이 진실된 마음으로 명확하게 말해주지 않는 한 밝혀지는 것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엔 "이반이 따냐에게 진실했느냐?"라는 질문에 이르게 되니 따냐의 삶조차 선명한 모습으로 다가오지 않는 것이다. 따냐와 고종의 신분을 넘어선 우정, 황제의 예복을 그녀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고종의 마음이 절절하게 느껴지는 순간 코 끝에 알싸한 커피향기가 머물고 지나가지만 왜 나의 마음은 이렇게 답답해지는걸까. 책을 향해 손을 뻗게 만드는 매력적인 소재를 담고 있는 이 책이 너무 가볍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으니 따냐를 만나 그녀가 타주는 커피를 마시며 직접 이야기를 듣지 않는 한 이런 느낌은 계속 사라지지 않을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