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영화를 보러 갔다
윤대녕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11월
평점 :
품절


 
이 책은 과거의 기억을 잃어버린 한 남자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옛날 영화를 보러 갔다"의 책 제목을 보며 이 남자가 과거를 찾아간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저 옛날 영화를 보러 갔다는 표현일 줄이야. 물론 이 두 가지 의미를 다 가지고 있을 수도 있다. 두 시간 남짓, 영화 한편을 보고 나면 갑자기 현실로 돌아오는 것이 낯설게 느껴지고 아직 과거에 머무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때도 있는데 그 때 느낀 쓸쓸함을 이 책 한권을 읽는것만으로도 다시 느낄 수 있다면 책장을 펼치는데 용기가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눈이 쌓여 있는 길을 걷는 한 남자를 바라보며 책 표지에 손을 대는 것조차 저어 되는 것은 나도 과거 어딘가 가고 싶지 않은 그곳이 떠올랐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에 대한 추억쯤은 모두 하나씩 가지고 있을 것이다. 내가 처음 어떤 영화를 봤는지 기억나진 않지만 내 기억속의 첫 영화는 친구들과 함께 "사랑과 영혼"였다. 요즘엔 영화관이 최신설비로 완비되어 사람들에게 각종 편의를 제공하지만 그때만 해도 직접 가서 표를 끊고 휴게실에 앉아 상영시간을 기다려야 했는데 인터넷에서 표를 예매하고 돈을 지불하는 시스템에 젖어 예전에는 어떻게 살았는지, 참 불편했었다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그땐 그래도 사람 냄새가 났었던 것 같다. 지금은 어딜가나 기계가 사람을 대신하여 마음까지 닫혀버린 느낌이 들지만 말이다.

 

과거가 떠오르지 않는 형섭은 자신의 존재 자체가 허상으로 느껴진다. 어느날 E라는 이름으로 자신에게 다가오는 남자, 분명 그는 형섭의 과거를 알고 있고 그와 함께 했던 인물인데 E가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나는 도대체가 알 수가 없었다. 단지 형섭이 기억을 떠올리기만을 바라는지, 옛 시절 함께 했던 그때를 돌이켜보며 그 시절처럼 살기를 원하는지, 뭔가 불길한 생각이 드는데 팩스를 통해 형섭을 자신의 자리로 끌어당기는 E를 보며 썩 유쾌한 기분이 들진 않는다. 좀체 기억나지 않는 과거로 인해 정체성의 혼란마저 겪는 형섭에게 옛날 영화를 보는 상영관은 과거로 가기 위한 출구로 여겨진다. 형섭은 어린시절 E와 '벌레구멍'과 '영원의 회귀성'에 대한 논의를 하곤 했는데, 그 나이에 할 수 있는 철학적인 생각이란게 이정도라니 이들의 말을 이해하는게 쉽지 않아 이전에 읽은 "제비를 기르다" 보다 어렵게 다가온다.

 

형섭은 기억속에 잠재되어 있는 한 여인을 레코드점 "쇼팽네 가게" 주인의 얼굴에서 찾게 된다. 그녀가 낯설지 않아 꼭 운명처럼 느껴진다. E가 전해오는 팩스를 통해 과거를 찾아가는 내용은 추리소설을 보는 듯 긴장감을 고조 시키지만 형섭의 아내 승미에 대한 설정은 불필요한 이야기 같다. 물론 형섭이 안정된 직업 없이 왜 번역 일을 하는지, 왜 사람들과 섞여 살아가지 못하는지 그 이유를 설명해주긴 하지만 직업이 아나운서인 아내 승미의 집안 내력과 이력을 보면 요즘에 드라마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재벌집 딸과 평범한 남자의 결합처럼 보여 읽는 것이 거북해진다. 거기에 갈등의 요소까지 가지고 있으니 이리저리 쓸려 다니는 나약한 인간의 감정만 소모된다.

 

"옛날 영화를 보러 갔다" 책에서 하동에 날아온 되새떼만이 유일하게 생동감 있는 존재로 느껴지는데 되새떼는 우리네 어두운 과거와 연결되지만 유일하게 눈에 보이는 실체로 다가온다. 자신을 되찾은 형섭의 앞으로의 삶은 어떻게 바뀔 것인가. 여전히 아내의 그림자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새로운 사랑인 선주에게서 과거 기억속에 잊혀졌던 여자를 떠올리는 그가 새로운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지만 옛날 영화 한편이 그저 과거의 잔영일 뿐이라 생각하며 떨쳐 일어나 새로운 삶을 살아가지 않을까. 옛날 영화 한편이 이렇게 무수히 많은 기억들을 떠올리게 할 줄 몰랐다. 살아지는 것, 살아가야 하는 힘을 과거의 기억속에서 얻는다면 지금 내가 보내는 시간 또한 과거가 된다는 사실에 두려워지지만 과거의 시간들이 모여 삶을 이루는 것을 보며 켜켜이 쌓인 묵은 때를 벗기듯 과거를 흘려보내는 것이 아닌 갈무리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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