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의 책
클라이브 바커 지음, 정탄 옮김 / 끌림 / 2008년 7월
평점 :
품절


 
아무 생각없이 표지를 봤었는데 단편 '피의 책'을 읽고 나서는 표지에 손을 대는 것조차 두렵다. 망자들이 다니는 길인 교차로가 있다. 톨링턴 가 65번지, 이 곳에서 에식스 대학의 초심리학 연구팀이 맥닐을 영매로 써서 사후 세계의 증거들을 기록해왔다. 맥닐은 망자들을 불러내고 망자들은 황토색 벽에 자신의 이야기들을 남긴다. 하지만 벽에 남긴 글들은 망자들이 남긴 것이 아닌 맥닐이 쓴 것으로 그는 사기꾼이었다. 망자들은 이 맥닐을 가만놔두지 않는다. 부서진 물병 조각이 날카로운 바늘이 되어 맥닐의 몸에 그들의 이야기들을 쓰기 시작한다. '피의 책', 망자들은 신체 어느 부분, 눈꺼플조차 공간을 남겨두지 않고 빽빽하게 자신들의 이야기들을 남긴다. 망자들이 남긴 이야기들이 이 책의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쯤되면 표지를 만지는 것조차 무서워지고 밤에 책을 읽는 것이 얼마나 소름끼치는 일인지 깨닫게 된다.

 

망자들이 남긴 이야기라고 하지만 딱히 그들이 어떻게 죽임을 당했는지, 어떤 마음으로 살고 있는지를 보여주지는 않는다. 여타의 추리소설과 다를 바 없이 다양한 주제를 가지고 단편들을 엮어 나가고 있다. '피의 책'이라는 첫 시작이 괜찮았다. 공포의 서막을 올렸고 그 뒤에 등장하는 단편 '미드나잇 미트 트레인'을 읽으며 가슴이 제어가 되지 않을정도로 쿵쿵 나의 몸을 흔들어 버린다. 피의 책이 되어버린 남자의 표지 밑에 지하철이 온통 피로 물든 그림, 아 이제야 이 책이 나에게 어떤 공포심을 선사하는지 그 끝을 알 수 없어 두려워진다. 내 머릿속에서 상상으로만 공포심을 준 것들이 이제는 실체를 가지고 다가오게 된다.

 

꼼꼼하게 면도질 당한 상태, 실오라기 하나 없는 알몸의 시체는 지하철의 손잡이에 발부터 거꾸로 매달려 있었다. 검은 플라스틱 통이 시체의 상처에서 계속 흘러내리는 피를 받고 있고 이 '로레타 다이어'의 시체가 열차 차량 안에서 발견된다. 이 얼마나 자세한 설명인가. 어떤 상태인지 이미 머릿속에서 그 형상이 그려지고 있다. 속은 거북해지고 이 단편에 등장하는 카우프만이 다음 희생자가 되지 않을까 가슴이 두근거린다. 인간이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지, 과연 카우프만이 살아남을 수 있을지 잔인하고 끔찍한 살육이 멈췄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열차 안에는 고깃덩어리로 변한 시체들이 계속 지하철 손잡이에 걸리게 된다. 살인범 마호가니를 카우프만이 죽여 버려 그의 살육은 멈춰지지만 이 후 이 살육은 계속 되고 멈추지 않았을 것이다. 도시의 아버지가 시체들을 원하는 한. 

 

'미드나잇 미트 트레인' 단편을 읽고 난 후 그 뒤엔 또 어떤 끔찍한 이야기들이 있을까 긴장하게 되지만 이후에 등장하는 이야기들은 공포심을 반감시킨다. 단편 '야터링과 잭'은 잭을 무너뜨리려는 악마 야터링의 존재가 귀엽기까지 하고 '피그 블러드 블루스'는 거대한 돼지가 인간의 목소리를 내며 사람들을 잡아먹지만 그리 현실감있게 다가오진 않는다. '섹스, 죽음 그리고 별빛'은 한 편의 연극을 보는 것 같지만 이미 죽은이들이 무덤에서 나와 자신만의 연극을 하고 이들에게 죽임을 당한 이들이 영원한 삶을 얻어 또 다른 연극 무대를 향해 떠나는 모습을 그리고 있어 그 실체를 바로 앞에서 본다고 해도 그리 무섭지 않을 것 같다.

 

단편 '언덕에, 두 도시'는 무엇을 이야기 하고 있는지 솔직히 이해하기 힘들고 '드레드', '로헤드 렉스'는 자주 접하는 내용들이라 불편감없이 아주 편안하게 읽어나갈 수 있었다. 너무 강력한 공포심을 유발한 '미드나잇 미트 트레인'을 먼저 읽었기 때문일까. 공포심이 반감되거나 느낄 수 없고, 여타의 추리소설처럼 비슷한 느낌을 갖게 하는 단편들이 조금 아쉽게 다가온다. 아마도 '미드나잇 미트 트레인'에서 느낀 공포심을 끝까지 느낄 수 있길 원했기 때문일 것이다. 장편소설인줄 알았는데 단편들로 이루어져 있어 다른 빛깔을 담은 이야기들로 즐거운 시간을 보냈지만 '미드나잇 미트 트레인'을 장편소설로 엮었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아쉬움을 느끼며 "피의 책" 마지막 책장을 덮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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