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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콜릿 코스모스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 북폴리오 / 2008년 5월
평점 :
절판
온다 리쿠 판 [유리가면].
맞다. 가슴두근거리며 이 책을 읽는 동안 내내 [유리가면]을 읽은 그 때의 감동이 되살아났다. 날이 밝는지도 모르고 책에 몰입하여 일체감을 느껴본게 언제였던가. 온다 리쿠의 책들을 많이 읽어보지 못했지만 분명 늘 그녀만의 색깔을 가지고 있었다. 때론 몽환적이고, 때론 현실감있게 다가오지만 이 책은 글쎄, 드라마 '온 에어'에서처럼 큰 세상안에 또 다른 작은 세상을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세리자와는 두 여자가 나오는 연극을 기획하면서 오디션을 비밀리에 진행시킨다. 자질이 있는 여배우에게 아무도 모르게 오퍼가 다가오게 되고 이것은 동료 여배우들에게 시기심과 질투심을 불러일으킨다. 제로극단에서 이제 연극배우로 활동하는 아스카는 [목적지]에서 단 두 배역으로 사람들의 머릿속에 자신을 강력하게 각인시켜 버린다. 천재 배우 아스카. 무대 위 어두운 그 곳에 있는 무언가를 잡기 위해 연극을 하게 되었다는 그녀에게 세리자와가 권하는 오디션은 두렵기만 하다. 왜? 일정하게 짜여있는 틀을 벗어나 어디론가 그녀를 데려가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쓰미, 아라가키 못지 않게 아스카가 2차 오디션을 보지 않겠다고 했을 때 나는 "미쳤다"며 등이라도 한 대 때려주고 싶었다.
1차 오디션 [열린 창문]에 등장하는 사람은 2명, 그러나 지문에는 분명 3명이 나온다. 여배우 몇 명이 상대 배우와 임기응변으로 어떻게든 끝까지 오디션을 해내지만 제대로 표현해내는 여배우는 없었다. 그래서 세리자와의 연극 두 여자 이야기를 쓸 가미야 역시 아스카의 등장은 충격이었다. 오디션이 한 편의 연극을 보는 듯 책장을 넘길 뿐인 나의 눈 앞에서도 선명하게 펼쳐지고 아스카, 그녀를 보며 나의 가슴은 세차게 뛰고 있었다. 두 명이 의상에 변화를 주며 몇 번이나 다른 사람이 되어 공연을 하다니, 역시 대단하다. 아스카 혼자만 베라가 되었다가 큰어머니가 되었다면 어색했을 것이다. 그녀와 상대 배역이 던지는 파란 시트, 빨간 천이 공중에 휘날리던 장면이 잊혀지지 않는다.
철저하게 그 배역에 빠져드는 아스카, 없는 듯 기척을 숨기기도 하고 다른 사람의 흉내를 완벽하게 내는 그녀에게 결여된 것이 있다면 자의식이다. 좋아하는 팬들이 그 배우를 찾을 땐 그 자의식에 강렬한 매력을 느끼기 때문인데 아스카는 자신을 지우고 그 배역에 녹아들기에 그녀의 존재를 찾을 수가 없다. 이것이 세리자와가 염려하는 것이었다. 아무리 천재라고 하지만 이 벽을 깨지 못하면 이름없는 사람이 되어 무대에서 사라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느 배역이든 완벽하게 소화해내는 아스카지만 자의식이 없다는 것이 큰 걸림돌이 될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을 것이다.
2차 오디션에서 블랜치역으로 나오는 교코, 나는 세리자와가 교코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려 버렸다. 물론 독자들이 알수 있게 저자가 충분한 언질을 주긴 하지만 책의 흐름을 먼저 읽었다는 것이 왜이리 기쁜지. 배우들은 무대에서 '~척'을 할 뿐이다. 죽긴 하지만 진짜 죽는 것이 아닌 죽은 척을 하고 눈물을 흘리며 슬픈 연기를 하지만 슬픈 척을 할 뿐이다. 오롯이 홀로 있는 시간이 아닌 타인에게 노출되는 나의 삶도 다른 의미로 본다면 배우로써 사는 것일게다. 때론 슬퍼도 기쁜 척, 기뻐도 슬픈 척, 아무런 감정이 없지만 가슴 아픈 척을 해야 할 때가 많으니까. 그러고보면 누구나 나의 인생이라는 무대 위에서 배우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결말이 어떻게 될지는 극본가의 손에 달려있는 것이 아닌 이 무대에서는 오로지 배우의 손에 달려 있다는 것이 다를 뿐. 당신은 어떤 삶을 살고 싶은가. 누구나 바라는 것은 해피엔드일 것인데 가끔 힘든 일이 있어야 행복이 찾아왔을 때 이것이 행복임을 알아보는 우리들 인생이고 보면 어떨 때는 헛웃음이 나온다.
"초콜릿 코스모스"로 이름 지어진 연극 무대를 보지 못한 것이 무척 아쉽다. 어쩌면 온다 리쿠의 손에서 이것을 소재로 한 두 번째 이야기가 탄생할지도 모르겠다. 무대 위에서 어둠속에 있는 실체를 느꼈던 교코와 아스카는 어떤 무대를 보여주었을까. 오디션만을 보는 것만으로 떨렸던 가슴이 진정한 본 무대를 보면 터져버릴 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보고 싶냐고? 물론. 기꺼이 손을 내밀어 그 무대로 다가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