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속 세상은 어떤 일이 일어난다고 해도 다 받아들 일 수 있는 곳인가 보다. 단편 [모자]는 왜 아버지가 모자로 변신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변하는것 보다 나는 변신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나도 때론 내가 아닌 모습으로 살아가고 싶을때가 많았으니까. 모자로 변하다니, 말도 되지 않는다고 누가 이야기 할 수 있겠는가. 소설속의 허구일뿐인데. 저자의 마음속까지 들여다 볼 수 없어 왜 아버지가 모자로 변하는지 그 이유를 상세하게 밝혀놓지 않아 그저 내 마음대로 유추할 뿐이다. 누가 말릴 수 있으랴, 내 마음인데. 세 남매가 기억하는, 모자로 변하는 아버지의 모습은 유독 약해지거나 숨고 싶은 마음이 들 때인 것 같다. 다른 사람들이 아버지가 모자로 바뀌는 모습을 목격하게 되면 그 곳을 떠나 다른 집으로 이사하는 가족들. 사람들의 시선에 다르게 보인다는 것이 얼마나 곤혹스럽게 만드는지, 왜그리 타인의 일에 신경을 많이 쓰는지 헛웃음이 나온다. [일곱시 삼십이분 코끼리 열차]를 타 본적이 있는가. 나는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아주 어린시절 동물원에 몇 번 간 사진이 있긴 하지만 틀림없이 코끼리 열차를 타고 동물원에 들어가 본적은 없을 것이다. 입장권을 사고 몇 개의 우리들을 지나치면 관심마저 시들해지는 지금의 나에게 사라진 동심이 조금이라도 남아있었는지 이 코끼리 열차를 타보지 못해 쓸쓸한 마음까지 들게 된다. 동물원에 가고 싶다는 파씨는 "동물원이 가장 인간적인 영역"이라고 말한다. 우리에 동물들을 넣어두고 관람료를 받는 일을 하는 인간들의 영역에서 인간들에게 통제되고 영향받는 이 곳 동물들에게서 사람의 모습을 찾고 싶었다고 말한다. 언뜻 이해할 것도 같고 뭔가가 손에 잡힐 듯 잡힐 듯 그냥 사라져 버리는 것도 같다. 나는 무척 현실적인 사람인가 보다. 다수의 단편들이 이해가지 않는게 많았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등 뒤의 문을 통해 자신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단편 [문], 아마 나의 이해력은 여기까지 일 것이다. 이 단편도 모두 다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어렴풋이 그럴수도 있겠구나 생각할 뿐이다. 단조로운 일상을 이야기 하는 [무지개풀], [모기씨]에서 체셔 앞에 등장하는 모기는 미오의 눈이나 나의 눈에 보이지 않으니 환영이라는 생각이 들어 이 단편도 현실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하반신이 마비된 체셔를 돌봐주기 위해 고용된 미오가 넉달째 월급을 받지 못해 체셔를 버려두고 갔다고 해도 어떻게 비난할 수 있을까. 이 단편은 그것을 꼬집어 말하는 건 아닌것 같다. 블랙유머의 한 형태로 보여지는 [초코맨의 사회]만이 나에게 잠시나마 휴식공간을 제공해 주는 것 같다. 발랄한 느낌이 들지 않는 황정은의 소설은 내 마음속에 꽉 들어차 우울함만을 전해준다. 그녀가 전하는 이야기들을 오롯이 느껴보질 못해서일지도 모르지만 많은 부분 공감하지 못해 당황스럽다. 조금은 독자와 소통할 수 있는 문을 남겨두는게 좋지 않을까. '이것은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 이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만을 생각해야 한다면 독자와의 거리만 멀어질 것 같다. 세월을 더 보내고 나면 그녀의 글들을 조금 더 받아들일 수 있을지도. 그때 다시 한번 읽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