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집으로 이사오면서 베란다의 공간이 넓어졌음에도 나는 조그마한 공간에 화분 몇 개만을 가져다 놓았다. 그 중 아버지께서 세 개를 주셨는데 받아올 때 얼마나 들고 오기 싫던지. 하지만 몇 개월동안 꽃을 피우고 있을 때면 대견하기도 하고 '잘 보살펴 주지도 못했는데' 싶어 미안함을 느끼게 된다. 산이 허물어지고 아파트들이 들어설수록 쉴 공간이 점점 사라지는 것 같다. 산책로를 찾을라치면 도로의 아스팔트를 건너 한참을 걸어가야 하니 도로에 심어져 있는 가로수가 반가울밖에. 봄에 벚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난 도로를 달려가며 그제야 봄이 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이렇듯 나무와 꽃들과의 거리가 베란다에 나만의 공간을 만들게 하는게 아닐까. 친정에 가면 마당에 토마토, 고추, 딸기 등이 심어져 있는 것을 보면서 시골에 온 듯 잠시 마음을 내려놓을 수가 있었는데 친정도 아파트로 이사하면서 그런 작은 여유도 누릴 수 없게 되어 아쉽기만 하다. 우리집에 있는 화분들은 이름이 없다. 행운목, 철쭉, 난 등 그저 태어날때부터 가지고 있는 것들 뿐이다. "누구야~" 라고 불러주면 식물들도 좋아할텐데. 나이가 들어갈수록 내 이름이 잊혀진다는 것이 얼마나 서글픈 일인지 잘 알면서도 몇 년을 함께 하는 화분에 이름조차 붙여주지 않다니 책을 읽으면서 부끄러워 저자의 나무와 꽃을 사랑하는 마음에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요일을 정해두고 물 주는 것조차 귀찮아 하는 '나'이니 말 못하는 식물들이 날 얼마나 원망했을까. 차가운 베란다에서 자기네들끼리 옹기종기 모여 하루를 보내고 있는 화분들은 자식들 다 장성하여 분가하고 홀로 늙어가는 우리네 모습을 보는 듯 하여 마음까지 쓸쓸해진다. 행운목 분갈이를 해 줘야 하는데 아직이다. 햇빛을 너무 많이 쬐였을까. 잎도 시들시들하다. 영양제를 놔 주고 가끔 말을 붙여보지만 나의 목소리에 대답이 없다. 이럴땐 어디가 안좋다, 어떻게 해 달라 말이라도 들을 수 있다면 좋으련만. 작년에 화분 하나는(얻어온 화분인데 이름도 모른다.) 너무 많이 자라 베란다의 공간이 부족해 뻗어나가지 못해서 나무를 대어 줬더니 벌레가 생겨버렸다. 약이라도 뿌려줬어야 하는데 나는 그저 그 화분을 죽여버리고 말았다. 그 땐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왜이리 가슴이 아픈것일까. 새삼 생명의 소중함을 깨닫기라도 한 것인지. 조용한 아파트에 홀로 있다보니 생명을 가진 것들에 대한 애착이라도 생겨나는 모양이다. 나무와 꽃을 바라보며 인생을 보는 저자와 달리 나는 찰나의 시간밖에 보지 못한다. 그저 물 주는게 귀찮고 혹여 죽이기라도 할까봐 겁이 날뿐이다. 얼마만큼의 물을 줘야 맞는 것인지 아무것도 모르니 저자처럼 자신의 가족인 화분들을 어디 분양도 못하겠다. 그저 살아주면 고마우니까. 어디 먼곳으로 가야 깨달음을 얻는 것은 아닐게다. 우리집 작은 베란다에서도 삶과 철학이 보인다. 어깨에 올려진 무거운 짐을 내려두고 잠시 쉴 공간을 마련해 둔다면 삭막한 이 곳에서도 조금의 여유로움을 찾을 수 있겠지.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힘쓰는 나무를 보면서 나도 오늘은 좀 더 알차게 보내야겠다 생각한다. "철학", 이 단어만으로 무겁게 다가오지만 평범한 한 문장이 내 마음에 담길 때 뭐 어려운 철학이 필요한가. 삶을 살아내는게 곧 나의 철학인것을. 오늘도 화분에 물을 주면서 사색의 시간을 가져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