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촐라체
박범신 지음 / 푸른숲 / 2008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마지막 책장을 덮은 나는 비로소 긴장하며 꼭 쥐었던 주먹을 풀어낸다. 지금 내가 있는 이 곳에 촐라체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책을 읽는 내내 나는 어두컴컴한 촐라체의 북벽을 마주하고 절대고독을 느꼈다. 잠깐의 정적도 참아내지 못해 홀로 있을 때 텔레비전의 소리라도 켜 두는 나로서는 그들이 느꼈을 절대고독을 완전하게 이해할 순 없다. 단지 자신의 소리외에 아무소리도 들리지 않는 곳에 있다는 것이 어떤 느낌일지 잠시 상상해 볼 뿐이다. 촐라체의 정상을 넘어선 상민, 영교에게 위험이 닥쳤을때 얼마나 긴장했던지 이들이 어떻게 돌아오는지 뒷장을 살피고 싶은 마음을 억눌러야 했다.
네이버에 연재했다는 '촐라체'를 나는 연재하는 동안 한번도 보질 못했다. 동상으로 자신의 신체 일부가 사라지는 것을 감수하고, 아니 자신의 목숨조차 장담할 수 없는 이 곳을 왜 그들은 오르고자 했던 것일까. 이 글의 화자인 '나'는 교생실습을 나간 중학교의 반장으로 상민을 만나 인연을 맺게 되어 그들이 등반하는 촐라체의 베이스캠프를 맡게 된다. 상민과의 인연이라고 하지만 그 또한 아들 현우로 인해 생긴 인연의 고리를 여기에 묻어버리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상민 또한 자신과 함께 안자일렌 상태로 등반을 하다 자신을 살리기 위해 줄을 끊고 추락한 김형주 선배의 생각에서 놓여나기 위해 온 이 곳엔 도처에 사람들이 묻거나 버려둔 '인연'들이 보인다.
실화에 가까운 이들의 이야기들을 통해서 무수히 많은 촐라체들과 마주한 내 자신이 떠오른다. 때론 충분이 견딜 수 있는 일임에도 힘들다고 투정도 부렸던, 내 앞을 가로막았던 캄캄한 촐라체, 나는 상민과 영교처럼 촐라체의 빙벽에 피켈을 박고 올라갈 자신이 없다. 단지 가혹한 생존의 갈림길에서 무사히 돌아온 상민과 영교를 보면서 끝이 보지 않는 촐라체를 넘어선 그들을 보며 함께 그 길을 걸은 듯 가슴벅차는 감동을 느낀다.
'나팔귀'를 칼로 찌르고 상민에게 온 영교는 상민과 함께 촐라체를 오르며 묻고 싶은 것들이 참 많다. 피가 섞였지만 온전한 형제가 되지 못하고 살아온 세월, 죽음의 길목에서 이제야 상민과 영교는 비로소 형제가 된다. 죽음에 굴복하지 않고 살기 위해 노력했던 상민과 영교의 모습에 마음이 숙연해진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인연, 어느 크레바스 안에서 죽어간 영원히 더 이상 늙지 않는 모습으로 그 곳에 남아있는 유한진, 그의 머리카락을 잘라내어 한국에 가져간 상민의 행동은 김형주 선배의 기억에서 놓여남은 물론 그 인연의 고리를 끊어냄을 의미한다. 죽음직전에야 놓여날수 있었던 그 촐라체를 그리워하며 살아가는 상민과 영교, 나에게는 물론 다른 사람에게도 묻고 싶어진다. "너의 촐라체는 무엇이냐"고.
한편의 드라마나 영화를 보는 듯 긴장감을 선사하며 나에게 감동을 주었던 '촐라체'. 이 생소한 단어가 이제는 내 마음에 깊이 박혀 떠나질 않는다. 내 귓가에 그들이 박는 피켈 소리가 들리고 '찌잉'하며 빙벽이 갈라지는 소리도 들리는 것 같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절대고독 앞에 나는 어떤 생각을 할 것인가. 잠시도 '나'를 위해 내어주지 않는 그 어떤 인연과 삶의 기억들이 내 머릿속에서 펼쳐질지 그 고독과 마주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