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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랑가족 세이타로
오기와라 히로시 지음, 김소영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08년 3월
평점 :
절판
단 한권의 책인데도 긴 호흡을 필요로 한다. 웃음과 감동이 묻어있는 이들의 인생극장에 책장을 한장 한장 넘기는 것이 쉽지 않았고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지능이 다소 떨어지는 '간지'의 눈에는 가족들이 대여가족의 일을 할때만큼은 진짜 가족처럼 보인다. "대여가족 파견업"이란,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사람에게 떠나간 사람이 되어 잠시나마 그 자리를 채워주는 일이다. 불륜 상대의 역할때문에 함게 죽어달라는 요청으로 목숨에 위협받거나 조폭이 되어 한판 뜨러가는 위험한 상황에 빠지기도 하지만 아내와 아기를 모두 잃은 남자에게 아내가 되어줘 허전한 마음을 달래주기도 하고 죽은 아들을 대신해주는 일을 하기에 마음이 따뜻한 사람들이 아니면 이 일을 해낼 수가 없다. 가슴에 불꽃 하나씩 간직한 세이타로네 유랑가족은 이렇듯 인생자체가 무대인 것이다.
그나저나 음식에 약을 탄 여자의 모습을 보니 세이타로의 연기력은 그의 말대로 녹슬지 않았나 보다. 분명 세이타로의 외모는 죽은 사람을 대신할 수 없었을텐데도 혼자 죽기 외롭다고 저승길에 동행하길 원하는 것을 보면 과히 호감가는 얼굴이 아닌 것 같긴 하지만 말이다.
아내 미호코에겐 불성실한 남편으로 모모요, 다이치, 간지에겐 본인의 꿈을 강요하는 독재자인 세이타로. 유랑극단을 전전하며 아이들은 학업에 전념할 수가 없었고 혹독한 연기수업으로 이미 뼛속까지 연극배우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늘 아버지가 강요한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힘들었던 모모요는 엔카 가수가 되고 다이치도 돈을 모아 독립하게 된다. 세이타로가 다시 연극무대에 서는 것을 반대하던 미호코는 집을 정리하고 세이타로를 따르지만 역시 단장대리 하나노조의 밑에서 굽실거리는 모습을 보는 것이 너무 힘들기만 하다.
어린애 같은 하나노조가 파국을 맞이하려는 연극을 등한시 했을때 단장대리를 대신하여 앞에 나서는 세이타로. 과연 그는 예전의 영광을 찾아올 수 있을까. 그 옛날 교복을 입고 세이타로의 연기를 보러 연극을 보러 오던 미호코의 연기력은 상당한 수준급이다. 뭇사내들의 눈길에 내보이고 싶지 않은 세이타로의 마음이 미호코의 열정을 무너뜨려 허드렛일만 하게 되지만 분명 그녀도 역할을 맡고 싶어 "하고 싶다"는 말을 한다. 하지만 왜 미호코는 무대를 버리고 세이타로와 간지의 곁을 떠난 것일까. 이제야 비로소 세이타로는 이 극단의 단장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간지도 배우로 인정받고 있는데 미호코는 이들과 영광을 함께 하지 않는다.
이 책은 세이타로의 무대에 대한 열정과 성공을 이야기하기 보다 아들 간지가 어떻게 성장해가는지 보여주는 소설인 것 같다. 타인의 시선속에서 간지는 단순하고 우스꽝스러울지 모르지만 너무나 순수하고 자신의 감정을 그대로 표현하는 아이다. 그렇기에 연극무대에서 더 빛을 발하는 존재로 부각된다. 재능을 타고 태어난 간지, 아직은 대사가 몇마디 없는 단역에 불과하지만 언젠가는 주연으로 갈채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형 다이치의 대사가 많아 기분이 나쁜 간지의 모습은, 역시 불타는 의지를 보여주기에 아버지처럼 진정한 배우로 성공하지 않을까.
세이타로가 단장이 되고 가족들은 하나 둘 이 곳으로 모여든다. 잠깐씩 다녀가긴 하지만 이 무대에서만큼은 서로에게 마음을 열고 다가간다. 멋지게 성장한 간지를 보기 위해 미호코도 꼭 돌아오겠지? 세이타로의 사투리가 구수해서 이 유랑가족의 뒷이야기가 궁금해진다. 그들이 연기한 여러 편의 연극을 보며 바로 눈앞에 있는 듯 그들의 모습을 그려낼 수 있다. 관객들과 함께 울고 웃었던 그 시간은 급속도로 발전하는 현대에서 점점 퇴화하겠지만 사람들의 가슴속에는 손수건으로 눈물을 찍어내는 감동을 주었기에 오랜시간 잊혀지지 않을 무대를 선사한 연극으로 기억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