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쾌한 하녀 마리사
천명관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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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를 먼저 읽고 이 책을 보았다면 나의 감상이 달라졌을까. 나는 다른이들과 다르게 "유쾌한 하녀 마리사"를 "고래"보다 먼저 읽는 우를 범했는지도 모른다. 제목은 한국의 정서와 맞지 않게 분명 생경스럽다. 그렇다고 <유쾌한 하녀 마리사>가 등장하는 단편에서 그녀는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부부의 생을 뒤바뀌게 하는 사람으로 등장할 뿐이다. 뭔가 속았다는 기분, 그랬다. 그러나 정말 통쾌하게 복수하지 않았는가. 그래서 왠지 입을 벌리고 크게 웃고 싶어졌다.  

 

단편들이라고 하지만 <세일링>에서 등장한 사람들이 <농장의 일요일>에 다시 나올때는 전혀 단편으로 느껴지지 않고 계속 내 곁에 머물렀던 사람들처럼 반갑기만 하다. <숟가락아, 구부러져라>를 읽을때는 눌러두었던 나의 기억의 한켠이 떠올랐다. 내 인생의 한곳에서 그 시기를 벗어날때 작별했던 기억말이다. 화려하게 사는 사람들의 삶보다 직장에서 나와 노숙자로 살아가는 숟가락을 염력을 이용해 구부리고자 하는데 인생을 거는 어리숙한 사람들을 보면 병원에서 실습을 하며 만난 추운 겨울 나는 것을 두려워 하던 행려병자들이 생각난다. "정말 숟가락을 구부리면 돈이 나와? 쌀이 나와?" 소리치고 싶어진다. 그러나 공무원이었던 한 노숙자의 말처럼 삶이란 눈깜짝할새에 회사에서 나와 지하철을 타고 있었는데 계단에서 신문지를 덮고 자는 신세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누구나 돌아가고 싶은 시절이 있다. '그때 이렇게 했다면 달라졌을 것이다'라는 생각은 어느새 자기변명으로 변질되고 믿음으로 굳어지게 만든다. 고등학교 다닐때 아이들 앞에서 숟가락을 염력으로 구부릴 수 있었다면 그가 노숙자가 되지 않았을까. 인생에 있어서 뭔가 자신도 하나쯤 할 수 있다는 마음을 가지고 싶었을 것이다. 그때부터 인생이 비틀리기 시작했다고 믿고 싶었겠지. 소설속에서조차 강한자가 약한자를 핍박하고 먹고 사는 것에 급급하여 인간적인 모습도 버리고 살게 되는 것은 썩 유쾌하지 않다. 그렇다고 행복한 사람들 모습만 보고 싶은 것도 아니다. 그러나 누구든 타인의 삶을 보며 내가 살아온 시절을 함께 보냈던 사람들의 행복한 모습을 보면서 "나도 그러했다"고 위안을 삼고 싶지 않겠나. 내 마음이 줄곧 그러했다.

 

이 책을 읽다 보면 배경이 한국과 외국이 절적하게 버무려져 있어 내 정서와 맞지 않는 부분도 나온다.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단편들속에 각각 부여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통해 무엇을 보고 싶었을까. 혹 <비행기>에 나오는 드라마 작가처럼 자신의 삶조차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고 만들어진 삶에서 살고 싶었던 것은 아니겠지. 나도 가끔 내가 살고 있는 이 곳을 벗어나 내가 아닌 사람으로 살아보고 싶어 공상에 빠질때가 있다. 그 공상속에서는 늘 자신감이 넘쳐 당당하고 무엇하나 못하는게 없는 멋진 모습으로 나오기 때문에 상상하는것만으로 즐거워진다.

 

책을 읽으며 내가 보냈던 어린시절이 떠오르기도 하고 30대를 보내며 그 전 시절을 추억하기도 하며 앞으로 올 시간들을 두려워하며 점점 더 깊은 사색에 빠지게 된다. 각 단편들을 보면서 나와는 전혀 다른 삶을 보면서 누구나가 형태는 다르지만 비슷한 아픔과 고통을 겪어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나이때에 다들 겪었음직한 일들, 그것이 쌓이고 쌓여 지금의 나로 성장시켰다는 것을 알기에 다른이의 삶도 수용할 수 있는 넓은 마음을 가졌으면 하고 바라게 되는 것이다. 내 삶은 얼마나 진실한가.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은 죽는순간까지도 얻을 수 없으리라. 그것이 인생이고 삶일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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