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에 휘날리는 비닐 시트
모리 에토 지음, 김난주 옮김 / 시공사 / 2007년 1월
평점 :
품절


 
제목만으로 그저 바람결에 흔들리는 비닐시트를 상상했는데 그것이 나의 모습일수도 있다는 생각에 시원스러운 바람의 느낌을 가질 수 있을줄 알았던 내 마음속에서 팡~하고 무언가가 터져나가는것 같다. 먹고 싶은 것 먹고 이쁜 물건으로 날 꾸미고 편안한 침대에서 잠을 자고 세상 반대편에서 총성에 죽어가는 사람들이 있어도 리모콘으로 작동하며 텔레비전으로 시청하는 나, 이것이 큰 행복이었다니. 알고 있었음에도 외면해왔던 세상들. 늘 나를 중심으로 생각해 왔기에 가슴속에서 부끄러움이 치밀어 오른다. 그래서 리카의 행동에 짓눌렸던 가슴이 두근두근 뛰고 그녀의 용기있는 행동에 박수를 보내고 싶어진다. 자격이 있다면 말이다.

 

에드가 현장에서 총에 죽을뻔한 소녀를 몸을 던져 구한뒤 그녀의 인생은 암흑천지다. 이혼하기전이었다면 아프가니스탄에 가서 그의 시신을 붙잡고 오열이라도 할 것을 헤어진 아내라는 자리는 타인에게 슬퍼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조차 쉽지 않다. 함께 잘때 피부에 타인의 몸이 와 닿는것조차 꺼리던 그가 소녀의 몸을 안고 그 체온을 느끼며 죽어갔다는 것은 정말 다행스런 일이다. 어린시절 가정부와의 신체적인 접촉도 금지당했던 그였기에 UNHCR에서 일하는 모습은 더 큰 사명감을 가지고 있는 듯 보여진다. 포근한 침대보다 현장에서 난민들과 함께 하는 것을 더 좋아하는 그에게 리카는 잠깐 머물기를 원하는 존재였을까. 어김없이 휴일을 맞으면 돌아오는 그를 기다리는 그녀는 이미 함께 일하는 동료가 아닌 아내의 자리에서 바라볼 뿐이라 이것이 두 사람 사이에 불행의 시작이었다. 그에게 안락한 가정의 느낌을 주고 싶었는데 그가 죽고 그녀가 향한 곳은 아프간, 어쩌면 그의 일을 대신한다는 느낌도 있지만 분명 잘 해낼것이라 생각된다. 현장에 투입되기를 그렇게 거부했는데 '죽음'이란것이 일상사가 되어 있는 곳에서 치열하게 살아가는 그녀의 모습을 볼 수 있겠지. 온 세상의 바람에 휘날리는 비닐시트가 바닥에 고정되어 더이상 날리지 않는 날이 꼭 왔으면 하는 희망을 가져도 되지 않을까.

 

난 늘 같은 삶의 반복으로 지루하다고 느끼는 인생을 어딘가에서는 정말 치열하게 산다. 집안일을 하고 남편을 기다리며 음식을 하고 늘 고만고만한 시간을 보내는 난 에리코의 모습과 비슷하나 그녀는 나와 같은 사람들 무리에서 떨어져 나가 의미있는 일을 한다. 버려진 개들의 안락사를 막고 새로운 가정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 물론 에리코도 처음엔 이런 일에 관심조차 없었는데 비비와 걸을 키우면서 진심으로 새식구를 만나기를 바라고 이 개들로 인해 시댁과의 소원했던 거리도 좁혀지는 계기를 만들게 된다. 아이가 없는 상황에 개를 키우는 모습은 시아버님의 마음을 더 차가워지게 했으나 점점 마음을 열고 다가와 그녀에게 큰 힘을 주는 존재가 된다. 개의 사료를 사기 위해 혼자 힘으로 해결하기 위해 밤에 술집을 나가는 에리코의 모습은 솔직히 이해하기 힘들다. 시간적으로 개 산책을 시키는 오전, 오후 시간을 피해 선택한 일이 술집에서 일하는 것이라지만 내가 바른 인생을 살아온 것도 아니건만 술집에서 일하는 모습은 이질적으로 다가온다. 꼭 술집이어야 했냐는 생각, 한발 나아갔다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을 모르지 않지만 아직은 난 에리코에게 맘적으로도 다가서지 못하나 보다.

 

여기 단편이야기들속에 존재하는 사람들은 동떨어진 세상의 사람들이 아니다. 내가 될수도 있다. 흘러가듯이 살아온 인생에 학창시절 예전에 야구부였던 친구들과 10년마다 만나 야구를 하자는 약속은 직장을 가지고 나이가 들어가면서 실현불가능한 일이 되어버릴지 모르지만 오로지 이 하루를 위해 10년을 달려온것처럼 또 그 뒤 10년을 치열하게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주는 친구들과 함께 하는 야구를 위해 과연 직장도 버릴 수 있을까. 남는 인원이 없어 한명이라도 빠지면 무산될 위기에 있는 야구시합은 이시쓰에게는 인생이 걸린 문제다. 물론 직장도 중요하지만 친구들을 위해 빠지긴 어렵다. 고객 클레임이 들어오면 가서 사죄해야하는 그의 일이 내일 있을 시합날에도 처리해야할 일이 한 건 생김으로써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된다. 젊은 시절 좌익수였던 겐이치는 가슴이 두근거리며 이 야구시합에 뛰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 이시쓰가 시합에 나갈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그래 인생이란 알 수 없듯이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타성에 적당히 젖어 살던 늘 변명하며 살던 그에게도 다시 야구공을 잡을 기회가 주어지니 상쾌한 바람이 가슴속에 들어오는 듯 유쾌해진다. 이 작은 것이 큰 행복을 불러올수도 있다니 놀라울뿐이다.

 

그래 인생 뭐 있나. 이렇게 살면 되지. 최고가 되고 싶었으나 그저 최고를 옆에서 돕는 사람이 되어 그가 빛날 수 있게 돕는 직업을 선택하게 될수도 있고 한순간의 깨달음으로 전혀 다른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인생 아니던가. 이들의 이야기들을 통해 내가 느낀 것이라곤 이것이다. 똑바로만 가는 인생, 이것은 내가 바라는 인생이 아닐 것이다. 험한 고개도 넘고 내리막길도 걷는 것이 인생임을 알기에 어린시절 막연히 동경하던 어른이 되어 힘차게 살아갈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할 수 있으리라. 때론 삶이 고단해질때 이 책을 펼쳐본다면 희망이 생기고 손안에 힘이 생겨 다시 일어설 수 있을 것이다. 쉽지 않은 세상 이런 마음이라면 쓰러져도 다시 일어설 수 있을테니까. 자, 내 안에 남들이 모르는 숨겨둔 마음이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이젠 단단하게 묶어뒀던 나를 풀어 바람에 자연스럽게 흔들리게 하자. 이것으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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