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7월 24일 토요일 DVD 평점 4점
이 영화 역시 개봉작인 [오필리아]를 감상하기전에 예습삼아 본 작품이다. 기억나지도 않을만큼 오래전에 디비디로 구입했으며, 저작권이 만료된 영화라서 그런지 몰라도 전설의 제작사인 크라이테리온 리핑판이라서 아주 깨끗한 화질로 감상할 수 있었다. 리뷰하기전에 찾아보니 햄릿을 소재로 한 영화가 정말 많던데 그중 원작에 가장 충실한 작품으로 불려지는 영화다.
영화는 세익스피어 전문가로 알려진 거장 로렌스 올리비에경이 직접 연출과 아울러 주인공 햄릿을 연기했다. 1907년도생이신지라 영화의 제작년도에 이미 마흔살을 넘기셨기 때문에 햄릿의 이미지와 잘 붙지 않기는 하지만 명배우의 연기로 극복해내셨다. 아무튼 이 영화는 로렌스 올리비에경의 영화로 여겨질 수 있는데 그에 대해 좀더 알아보자면,
˝셰익스피어 해석의 대가이며 이야기꾼이자 배우 중의 배우인 로렌스 올리비에 경은 무대 연출과 명석한 드라마 연기의 화신이다. 올리비에는 영국 국교회 목사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엄격한 종교적인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다. 어머니는 그가 12세 때 세상을 떠났지만 아버지는 그가 연기자의 길을 추구하도록 격려했다. 그는 옥스퍼드의 세인트 에드워드 스쿨에서 초등교육을 받을 때부터 학교 연극 공연에 참여했고 이후 런던에 있는 센트럴 스쿨 오브 스피치 앤드 드라마에 진학했으며 그 후에는 버밍엄 레퍼토리 컴퍼니에 입단했다.
1930년에는 첫 번째 아내이며 역시 연극계의 떠오르는 스타였던 여배우 질 에스먼드와 결혼했고 30년대 중반에는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을 풍미 있고 세련되게 연기한다는 명성을 얻었다. 특히 1935년 런던에서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그랬듯이 존 길거드 등 다른 명배우들과 함께 무대에 설 때 더욱 좋은 연기력을 발휘했다. 올리비에는 영화에서도 활동했지만 여전히 무대가 그의 열정의 중심으로 남아 있었고, 영화 연기에는 합리적인 상업적 동기가 담겨 있었다. 벌이는 영화 쪽이 좋지만 매 공연마다 실제 관객과 연기자를 연결해주는 살아있는 예술이 행해지는 곳은 바로 연극 무대였던 것이다.
이 시기에 그는 두 번째 아내(1940~1960)인 비비안 리를 만났고 부부는 할리우드를 정복해나가기 시작했다. 할리우드는 전적으로 남부의 캘리포니아에서만 씌어진 작품들에는 아쉽게도 부족한 세련된 감각과 장인정신과 전통이 영국인 배우들에게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1939년 리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히트시키며 두 번의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중 첫 번째를 거머쥐었고 올리비에는 「폭풍의 언덕」으로 주연 영화배우로서 입지를 확립했다. 이들 부부는 「영광의 결전(1937)」와 「해밀턴 부인(1941)」 등 몇 편의 영화에서 스크린 상의 연인으로도 등장했는데 두 사람의 관계의 진실은 그들이 남은 생애 동안 자주 올랐던 연극 무대에서 더욱 생생하게 표현되었다.
40년대에는 「레베카(1940)」와 「오만과 편견(1940)」, 「헨리 5세(1943)」를 만들었고 전쟁 중에는 공군으로 복무했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그가 주연을 맡고 각본을 쓰고 감독까지 하여 아카데미 남우주연상과 최우수작품상을 수상하고 감독상 후보에 올랐던, 그의 최고의 성취 중 하나인 「햄릿(1948)」이 만들어졌다.
주인공에서 조연 배우로
50년대에 「캐리(1952)」와 「리처드 3세(1955)」, 「악마의 사도(1959)」 등에 출연했던 올리비에는 조울증에 걸린 비비안 리와 이혼하며 60년대를 시작했다. 그리고 그가 처음에는 런던에서 연극으로 공연했고, 이어서 대서양 건너 할리우드에서 영화로 만든 「엔터테이너(1960)」에 함께 출연한 존 플로우라이트와 결혼했다. 「스파르타쿠스(1960)」와 「엉클 반야(1963)」, 「오셀로(1965)」 그리고 「공군 대전략(1969)」을 보면 그가 점점 주연급에서 물러나 조연으로 자주 등장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발자국(1972)」과 「마라톤 맨(1976)」, 「머나먼 다리(1977)」, 「잔혹한 음모(1978)」등 더욱 기억에 남는 역할들이 아직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젊은 세대에게 올리비에는 「타이탄 족의 멸망(1981)」에서 낮은 신들과 인간들 위에 군림하는 제우스의 모습으로 남아 있다. 그 이전에 행해진 모든 것들 뒤에 이런 이상한 기억이 한 자리를 당당히 지키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씁쓸한 일이다. 특히 올리비에가 텔레비전과 무대에서 이어온 유명한 경력을 감안하면 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의 위대한 배우가 때로는 출연료 때문에 일을 하기도 했고 또 어린이들을 즐겁게 해주는 단순한 즐거움을 만끽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올리비에가 연기한 제우스의 이 말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우리 신들은 버려지거나 잊혀진다 해도 별들은 결코 빛을 잃지 않을 것이다.˝
아카데미상 후보에 열한 번 올라 두 번 수상하고 두 번의 공로상을 받았으며, 에미상 후보에 여덟 번 올라 네 번 수상했고 골든글로브상 후보에 세 번 올라 두 번 수상하고 공로상을 한 번 받았지만, 로렌스 올리비에에게 가장 어울리지 않는 말은 아마도 ‘스타‘라는 말일 것이다. 그 자체로 그는 불멸의 존재이며 결코 잊혀지지 않을 테니 말이다.
래리와 셰익스피어
영국의 극작가 찰스 베넷은 로렌스 올리비에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는 셰익스피어의 대사를 마치 정말 자신의 생각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말할 줄 안다.˝ 1935년에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로미오와 머큐쇼의 역할을 번갈아 연기하며 런던의 연극관객들을 환호케 했던 올리비에가 영화에서 보여준 첫 셰익스피어 연기는 「뜻대로 하세요」의 올란도 역이었다. 그 작품은 별로 상서로운 출발이 못 되었고 올리비에는 만약 다시 그런 일을 하게 된다면 반드시 자신이 창작의 통제권을 가지겠다고 다짐했다. 그는 후에 「헨리 5세(1944)」와 「햄릿(1948)」과 「리처드 3세(1955)」에서 모두 주연과 감독을 직접 맡았다. 「햄릿」으로 그는 자신이 감독한 연기로 아카데미 연기상을 수상한 최초의 배우가 되었다.
· 올리비에는 영화에서 맥베드를 연기하기를 간절히 원했다. 당시 엘리자베스 테일러의 남편이던 마이클 토드는 1958년에 올리비에와 비비안 리를 주연으로 맥베드를 제작할 계획을 세웠지만 비행기 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 그는 1955년에 친한 친구인 랠프 리처드슨과 함께 영화판 「리처드 3세」를 만들었다. 영화가 성공하지 못하자 그 후 다시는 셰익스피어 영화를 감독하지 않았다.
· 「헨리 5세」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을 선전할 좋은 기회를 제공했다. 윈스턴 처칠은 올리비에가 폭격을 피해 아일랜드에서 촬영할 수 있도록 주선해 주었다.˝
전설의 여배우인 비비안 리의 배우자이고 했던 로렌스 올리비에의 또 다른 세익스피어 작품인 [헨리 5세]도 꽤 인상적으로 감상했던 기억이 남아있다. 아무튼 그는 세익스피어를 가장 잘 해석한 영화인의 독보적인 타이틀을 소유하고 있다. [햄릿]도 원작에 충실한 작품으로 카메라 워킹이나 배우들의 동선등 여러가지면을 볼때 얼마만큼 그가 공을 들였는지 알 수 있는 명작이다.
햄릿의 줄거리는 워낙 많이 알려졌지만 영화에서 다뤄진 플롯을 마지막으로 살펴보자면 다음과 같다. 공부를 이렇게 열심히 했더라면 더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었을까 생각해본 예습활동이었다. ㅋ
˝덴마크의 왕자 햄릿(Hamlet: 로렌스 올리비에 분)는 부왕이 서거한지 한달도 안돼서 어머니인 게르트루드(Gertrude: 에일린 허리 분) 왕비가, 왕좌를 차지한 작은 아버지 클라우디우스(Claudius: 바실 시드니 분) 왕과 결혼하자 어머니에 대한 심한 배신감으로 괴로와한다. 그런 햄릿 앞에 부왕의 유령이 나타나, 동생인 클라우디우스에게 살해됐음을 밝히면서 복수를 부탁한다.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위해서 작은 아버지를 살해해야하는 의무감과 자신의 우유부단한 무력감, 그리고 어머니에 대한 사랑 사이에서 갈등을 겪는 햄릿은 결국 정신 착란 증세까지 보이게 된다.
왕의 고문관 폴로니우스(Polonius: 펠릭스 아일머 분)는 햄릿의 그런 방황이 자신의 딸 오필리아(Ophelia: 쟌 시몬스 분)와의 이루지 못하는 사랑 때문이라 생각한다. 공연을 하기위해 성에 들어온 집시들에게 아버지의 살해 사건을 연극으로 꾸며 재현하게 만든 햄릿은, 그 연극을 보고 크게 당황하는 클라우디스왕을 보고 더욱 의심을 굳힌다.
어느날, 왕의 침실에서 어머니 게르트루드 왕비를 비난하고 또 설득하던 햄릿은, 이를 엿듣던 폴로니우스를 클라우디스왕으로 오인하고 죽이고 만다. 이 사건을 계기로 클라우디스왕은, 아무도 모르게 햄릿을 죽여버릴 음모를 세우고 그를 영국으로 추방한다. 그러나 그 계획을 눈치챈 햄릿은 위험에서 벗어나 무사히 덴마크로 다시 돌아온다.
한편, 사랑하는 사람의 칼에 아버지를 잃은 오필리아는 절망감에 빠져 미치더니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고만다. 오필리아의 죽음에 충격을 받은 햄릿. 오필리아의 오빠 라에르테스(Laertes: 테렌스 모간 분)는 아버지와 동생의 죽음에 대한 분노로 햄릿에게 결투를 청한다. 클라우디우스왕은 또다시 그 간교한 계략으로 라에르테스의 칼끝에 독을 묻히고, 그래도 햄릿이 이길 경우를 대비해서 결투 후 승자가 마시게될 술에도 독을 탄다.
왕과 왕비, 모든 신하들이 모인 자리에서 숙명의 결전을 벌이는 햄릿과 라에르테스. 라에르테스는 자신의 칼에 깊게 찔린다. 마침내, 햄릿은 승자의 잔에 손을 가져가고 클라우디스왕의 계략을 눈치챈 왕비는 아들에 대한 사랑으로 그 잔을 가로채 자신이 마신다. 쓸어져 죽는 게르트루드 왕비를 보고 모든 사람들은 경악하고, 마지막 숨을 몰아쉬던 왕비가 클라우디스왕의 음모를 폭로하고 죽는다. 이 광경을 본 햄릿은, 불타는 분노로 틀라우디스왕의 가슴에 깊숙이 칼을 뽑는다.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의 복수를 이룬 햄릿. 그러나 그도 상처의 독이 퍼져 서서히 죽어간다.(소개글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