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로쟈 > 너희가 섹스의 공포를 아느냐?

작년 여름에 근간 목록에 올라와 있던 파스칼 키냐르의 에세이 <섹스와 공포>에 대한 기대를 표명한 바 있는데, 반년이 지나서 드디어 책이 출간됐다. 이 겨울이 가기 전에 중후한 에세이 한 권을 읽을 수 있게 되어 반갑다. 발빠른 리뷰도 올라와 있어서 옮겨놓는다.

한국일보(07. 02. 10) 쾌락 뒤에 숨겨진 공포 '섹스와 공포'

사회적인 공인을 통과하지 않은 섹스에 대한 현대인들의 끈질긴 공포감은 어디서 연유된 것일까. 이 같은 공포감의 연원으로 기독교의 엄격한 청교도주의를 꼽는 것이 정설처럼 굳어져있지만, 영화 <세상의 모든 아침>의 원작자인 프랑스 소설가 파스칼 키냐르는 이에 의구심을 품었다. 특히 1980년대 에이즈의 등장으로 인한 청교도적 윤리의 확산은 키냐르의 의구심에 불을 지피는 계기가 됐다.

섹스에 대한 현대인의 공포감의 뿌리를 찾아가던 키냐르의 눈길이 멎은 곳은 폼페이의 회화였다. 통음난무의 자유분방한 풍조를 반영하듯 폼페이의 벽화들은 에로틱하기 이를 데 없었지만 벽화에 그려진 인물들의 시선은 수줍고 심각했다. 즐겁고 쾌활해야 할 그림 속의 여인들은 정면을 바라보지 못했고 겁에 질려있었다.

키냐르는 <섹스와 공포>에서 자유로웠던 초기 로마의 성윤리가 공포감에 짓눌리게 되는 시기는 공화정이 제국의 형태로 정비되던 아우구스투스 황제기(BC 18~AD 14)라고 지적한다. 황제는 간통 처벌법인 ‘율리아의 법’ 제정 등 성의 억압을 통해 시민들을 통제하고 이를 기반으로 황제권을 강화하려 했다. 여자를 유혹, 밀애를 즐기는 내용을 노래한 당대의 인기시인 오비디우스는 당장 ‘불온시인’으로 낙인 찍혀 다뉴브 강변으로 쫓겨나 그곳에서 생을 마쳐야 했다.

성에 대한 억압과 금기가 없었던 기독교가 ‘로마의 윤리’를 따르기 시작한 것도 이 시기다. ‘육체적인 것에 마음을 쓰면 죽음이 오고 영적인 것에 마음을 쓰면 생명과 평화가 온다’ ‘음행하는 자는 제 몸에 죄를 짓는 것이다’라며 기독교인의 윤리를 설파하는 신약의 로마서는 바로 이 때에 쓰여졌다. 로마인들이 알몸을 가리기 위해 팬티를 착용하게 된 것도 이 시기의 변화된 성 모럴을 반영한 풍속이라는 것.

키냐르는 아우구스투스가 재위하던 32년이 단지 로마역사의 변곡점과 같은 시기가 아니라 세계사의 ‘지진’과도 같은 기간이었다고 과감하게 결론내린다. 디오니소스적이었던 로마의 에로티시즘이 이 시기 불안과 공포감에 가득찬 우수로 변질됐고, 이 공포감은 적대감으로 탈바꿈하면서 기독교 원죄의식의 질료가 됐다는 것이다. 섹스를 지옥으로 보내버린 중세의 청교도적 윤리가 이 시기에 뿌리 내리고 있고 현대의 성 윤리 역시 일정 부분 중세 윤리의 영향을 받고 있다는 점에서 이 시기는 신대륙 발견기보다도 더 큰 변혁기라는 것이다.

역자 송의경씨는 “탄생이 죽음으로의 출발을 의미하는 양면성이 있듯이 섹스에는 쾌락과 공포가 본질적으로 혼재돼 있다”며 “섹스에서 공포만을 분리해 생각하는 경향이 강한 현대인들이 쾌활함이라는 에로티시즘의 또 다른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 결코 간과해서는 안될 책”이라고 말했다.(이왕구 기자) 

07. 02.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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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책벌레는 무엇으로 사는가

아이를 유치원 차에 태워보내고 편의점에 가서 '한겨레'를 사들고 왔다. 금요일자 '18도'를 챙겨두기 위해서인데 몇 안되는 일간지가 편의점에는 딱 한 부씩만 들어와 있기 때문에 오후에 가보면 간혹 없을 때가 있다(물론 이런 수고를 하는 건 오늘 '재택근무'를 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출판 칼럼니스트' 표정훈씨 이야기가 '한국의 글쟁이'의 18번째 연재로 실려 있다. 언론매체에 자주 등장하는 이 대표적인 '탐서주의자'에 대해선 굳이 부연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그의 궁리닷컴을 방문한 지가 꽤 오래됐군). 나도 간혹 '책벌레'란 소리를 듣긴 하지만, 이 '국민 책벌레'에 견줄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우리 시대에 책벌레는 무엇으로 사는가를 그를 통해서 엿보기로 한다. 한겨레의 기사와 함께 지난달 중앙일보에 게재한 표정훈의 칼럼을 같이 옮겨놓는다(아래 작업실 사진을 내 방구석이 지저분하다고 구박하는 아이나 아이엄마가 봐야 하는데!.. 둘러보니 내가 더 나은 것 같지도 않군^^;).

한겨레(07. 02. 08) 출판 칼럼니스트 표정훈

아주 아주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 초등학교 때부터 읽고 싶은 책을 사달라 부모를 조르는 게 일이었고,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참고서보다 교양서를 즐겨 읽었으며, 대학에 들어간 뒤에는 아예 학교 도서관을 구획 나눠 차례대로 정복해 들어가는 사람. 심지어 우리말 책만으로는 성이 안차 궁금한 책이 있으면 원서라도 사서 읽고(물론 자기 전공도 아닌데),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기가 좋아서 독후감을 쓰고 책을 분류하고 읽고 싶은 책의 모습을 그리는 사람. 책 읽는 게 세상에서 가장 좋으니 책만 읽고 살아가고 싶어하는 이런 책벌레는 어떤 직업을 가져야 할까?

표정훈(38)씨는 그 답을 보여주는 책벌레다. 10여년 전만해도 표씨 같은 책벌레들을 위한 똑떨어지는 직업은 없었다. 그러나 최근 들어 책벌레들만이 할 수 있는 새로운 직업이 생겼으니, 바로 ‘출판 칼럼니스트’ 또는 ‘출판 평론가’란 직종이다(*내가 궁금한 것 중 하나는 '출판평론가'나 '도서평론가' 등의 직함이 어떻게 구별되는지이다. 같은 지면에 나란히 실린 '이권우의 요즘 읽은 책'에서 가령 이권우씨는 언제나 '도서평론가'라고 자신을 소개하기 때문이다. 범위의 문제인가?).

취미가 직업이 되고,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먹고 살 수 있다는 점에서 책벌레들에겐 가장 이상적인 직업이다. 물론 책벌레가 아니면서 출판 평론가가 될 수는 없겠지만, 출판 평론가들 사이에서도 표씨는 알아주는 책벌레다. 또한 이권우, 박천홍, 최성일씨 등 요즘 활발히 글을 쓰는 다른 출판 칼럼니스트들이 대부분 출판관련 저널리스트 출신인데 견줘 표씨는 거의 유일하게 오로지 책벌레로만 지내다가 자연스럽게 출판 글쟁이가 된 이다.

학창시절을 책과 보낸 표씨는 대학 졸업 후 새내기 번역가가 된다. 때마침 불어온 인터넷 바람 속에서 책에 대해 이야기하는 홈페이지를 만들었는데, 다른 데서는 볼 수 없는 생생한 책 이야기로 입소문을 탔다(*그게 궁리닷컴이다 http://www.kungree.com/). 한 일간지에서 가볼만한 사이트로 그 홈페이지를 소개했고, 이어 책관련 칼럼을 써보라는 제안을 해왔다. 책에 대한 이야기를 쓰면서 표씨는 물만난 고기처럼 책벌레다운 글솜씨를 보여주었다. 그 뒤 여러 매체에서 책과 출판에 대한 글요청이 몰려들면서 표씨는 자연스럽게 이른바 ‘출판칼럼니스트’란 직업을 갖게 되었다.

표씨는 여러 책을 쓰고 번역했지만 저술가라기보다는 말 그대로 글쟁이에 가깝다. 책이란 보편적인 주제를 글로 쓰기 때문에 <한겨레>부터 <조선일보>까지, 매체의 분야에 상관없이 글 부탁을 받는다(*'한국의 글쟁이'로 이미 소개됐던 역사학자 이덕일씨도 그러하다). 쓰는 글은 서평이 주류를 이루지만 책, 그리고 독서문화를 중심으로 다양한 분야를 넘나든다. 또한 우리 출판계에서 책문화 전도사로도 활동해왔다. 책과 출판 관련 전시회를 기획하는 일도 여러차례 맡았다. 삼성출판박물관, 아단문고 전시회를 기획했고, 2005년 우리나라가 주빈국으로 참가한 프랑크푸르트 국제도서전 한국관 기획위원으로 힘을 보탰다. 여기에 꾸준히 번역을 하는 동시에 여러가지 책 기획에 참여해왔다(*해서 들은 바로는 표씨가 언제나 큰 배낭을 메고 다닌다는 것. 출판사들에서 얻은 책들을 잔뜩 담아서).

이 넓은 활동폭이 가능한 것은 모두 그가 ‘책벌레’인 덕분이다. 표씨가 처음부터 끝까지 완독하는 책은 일주일에 3~4권, 3분의 1 정도 읽는 책이 대여섯권이다. 1만여권의 책을 가지고 있고, 월 50만원 정도를 책 구입에 쓴다(*같은 책벌레로서 잠시 견주어보니, 나보다 많이 읽지만 예상을 뛰어넘을 정도는 아니다. 그가 주로 많이 읽는 역사서들을 나는 그다지 읽지 않는다. 아니 읽을 시간을 내기 어렵다. 그리고, 1만여권의 책을 갖고 있다면 나보다는 약간 많은 수치일 듯하다. 도서구입비 월 50만원은 비슷한 듯하다).

책벌레들의 특징이 ‘박람강기’(博覽强記)라는 점을 감안해도 표씨의 지식은 넓이 면에서 도드라진다. 교수도 아니고 박사도 아닌 그가 이런 지식을 갖게 된 비결은 꼬리를 물며 책을 이어가는 독서습관이다. “책을 읽으면 참고문헌에 있는 책이나 관련있는 책, 거론된 책을 찾아서 읽거나 체크를 해놔요. 저자가 마음에 들면 그 사람 다른 책을 조사해서 알아놓아요. ‘이 짓’을 한 10년 넘게 했어요. 그렇게 하니까 책의 그물이 지어지는 거죠. 외국에 가서 책을 보다가도 참고도서 목록이 충실하면 정작 그 책 내용은 별로라도 사는 경우도 있어요.” 이런 모든 조사과정이 지식으로 쌓이는 셈인데, 누가 시켜서 하는 일도 아니고 이런 과정 자체를 즐기기 때문에 하는 일이다(*적어도 대학원생 이상이면 이 정도는 해줘야 한다. 최소한 자기 전공에 대해서는). “책이 전경이라면 그 전경을 둘러싼 배경을 조사하고 알아가는 것, 그게 즐겁기도 하고 그렇게 하면 더 잘 볼 수 있으니까요.”

여기에 그가 가장 자신 있어하는 장기인 인터넷 검색능력이 더해진다. 그런데 이 검색의 노하우에는 특별한 비결이 없다. 어떻게 해야 잘 찾느냐고 묻자 답은 맥빠지게도 “책을 읽어라”였다. 그 다음이 표씨가 ‘열쇳말 그물짓기’라고 부르는 검색과정이다. 역시 대단할 것은 없지만 대신 집요한 추적 의지의 중요성을 엿보게 한다. 니콜라스 루만이란 독일 사회학자를 찾은 과정을 예로 들어보자. 루만은 사회학 석학이지만 동시에 지식과 정보를 잘 관리, 편집해서 많은 책을 쓴 것으로도 유명한 학자다. 표씨가 찾고자 한 것은 이 사람의 지식관리법. 문제는 단순히 루만의 이름만 검색어로 치면 사회학 업적만 건조하게 화면에 뜰 뿐이다(*나의 관심은 보다 고리타분해서 루만의 '지시관리법'보다는 그의 대저 <사회체계들>에 가 있다. 아직까지 번역/소개되지 않는 게 사회학자들의 직무유기가 아닌가, 의혹을 품으면서).

표씨는 흔히 다작하는 저술가들이 활용하는 도구인 ‘인덱스 카드’ 등을 독일어로 추가해 다시 검색한다. 그래도 역시 원하는 지식관리법은 여전히 안나온다. 다음은 영어로 ‘지식’을 뜻하는 ‘knowledge’와 ‘관리’란 뜻의 ‘management’를 검색어로 보탠다. 이런 식으로 계속 검색어를 더해가며 찾아가면 결국은 나오게 되어 있다는 것이 표씨의 지론이다. 이렇게 찾아낸 정보들 가운데 원하는 항목들을 모아가며 계속 연관개념을 찾아낸다. 이런 작업을 오랜 세월 규칙적으로 해오면서 쌓인 지식량, 그리고 노하우가 아니라 정보가 어디에 있을지 알고 유추해내는 ‘노웨어’(know-where)가 표씨 스스로 꼽는 자산이자 강점이다(*그의 책들을 아직 안 읽어봐서 얼만큼의 '강점'인지는 잘 모르겠다. <탐서주의자의 책> 정도는 읽어둘 법한데, 책은 '당신이 없는 사이에' 출간됐었다).

이는 글을 쓰는 원칙에도 적용된다. 최대한 많이 조사하는 것, 그리고 그 자신이 연구자가 아니고 독자의 연장선에서 글을 쓰는 것이니만큼 독자가 앞에 있다고 생각하고 쓰는 것이다. “글 쓰는 것도 일종의 서비스업”이라고 믿는다. 지식이 담겨 있으면서도 어렵지 않은 글이 그의 지향점이자 특징으로 갖춰진 것이다. 이런 점 때문에 표씨는 2000년대 초반 등장과 동시에 출판계에서 많은 주목을 받아왔다. 인터넷이란 새로운 도구를 가장 잘 활용해서 다양한 정보를 찾아내고 조합하는 능력, 그리고 원서를 직접 읽고 기획할 수 있는 외국어실력과 기획력으로 새로운 시대에 가장 적합한 필자로 꼽혀왔다.

그동안 표씨가 펴낸 책은 크게 두가지. <책은 나름의 운명을 지닌다>(2003)나 <탐서주의자의 책>(2004) 같은 책과 독서에 대한 지적인 교양 에세이, 그리고 <하룻밤에 읽는 동양사상> 류의 가벼운 실용교양서다. 저술한 책은 그닥 양이 많지는 않다. 주된 분야는 역시 방대한 독서량에서 나오는 지식으로 맛깔스럽게 쓰는 고급스러운 에세이쪽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 면에서 표씨는 그동안 다양한 여러가지 활동을 해오는 대신 저술의 측면에서는 받아온 기대만큼의 성과를 내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책에 대한 에세이 <탐서주의자…>와 <책은 나름의…>가 고급 에세이로 호평을 받았지만, 두 책 모두 짧은 글모음이란 점에서 이제는 표씨가 한 단계 더 뛰어넘는 책을 내주기를 출판계는 기대하고 있다. 여기저기 이것저것 분산되게 쓰고 있는 재능을 이제는 한 분야에 집중할 단계라는 충고도 나온다.

표씨 역시 스스로도 이 점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다. 그래서 지난해 하반기부터 활동 폭을 줄이고 출판평론성 글, 각종 에세이 등 토막글을 고사하면서 단행본을 쓰는 데 집중하기로 승부수를 걸고 있다. “당장은 딜레마죠. 들어오는 정기 수입이 토막글이고, 이런 글들이 시간도 적게 들구요. 하지만 글쟁이로서 제가 생산적 결과를 내놓을 수 있는 기간이 앞으로 길어야 15년 정도일 것을 감안하면 에너지를 집중해서 호흡이 긴 책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했어요.”(*출판평론가의 정년은 55세인가?) 

그래서 표씨는 지금부터가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주제를 가리지 않고 실용서도 써보려구요. 독자들과 비슷한 비전공자이지만 교양 분야에 대해 연구가 아니라 공부를 하는 거죠. 그래서 공부한 것을 정리해서 소개하고 흥미를 느끼게 해주는 일을 하려는 겁니다.”(글 구본준 기자)

 

중앙일보(07. 01. 12) 자성의 목소리 없는 출판계

불철주야 책 만들기에 여념 없는 출판인들에게 출판계는 치열한 삶의 현장이지만, 일반 독자들이 바깥에서 보기에는 대체로 심심하다. 각종 사건들로 바람 잘 날 없는 정치권이나 연예계와 비교해보라. 그런데 이 심심한 동네가 '내일은 또 무슨 일이?'라는 걱정을 해야 하는 곳으로 바뀌었다. 정지영씨의 '마시멜로 이야기' 대리 번역 의혹, 한젬마씨 저서 대필 논란, 마광수 교수의 제자 시(詩) 도용 혹은 표절 파문, '인생수업' 표지 사진 표절 혐의, 독서단체를 빙자한 책 사재기 대행 웹사이트 의혹….

책에 표시된 저자 혹은 번역자, 대리번역자와 대필작가, 출판사, 그리고 독자에 대한 다음과 같은 책임론이 사뭇 분분하다. 관행을 방패 삼거나 수단을 가리지 않고 책을 많이 팔려는 출판사의 상략(商略)이 문제다. 번역과 저술에서 실제로 맡은 구실이 미미하거나 사실상 없으면서도 제 이름을 걸어놓은 사람들이 문제다. 대리번역자나 대필작가가 지금 와서 나서는 게 볼썽사납다. 유명인이 쓴 책이나 베스트셀러에만 몰리는 독자들이 문제다.

그런 책임론에 대해 출판계 차원의 솔직한 자성의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게 아쉽다. 출판인도 아닌 필자가 결례를 무릅쓰고 대신 자성하고 싶다. 첫째, 다매체 환경에서 출판의 위상 문제다. 정지영씨는 방송인으로서의 명성을 발판 삼아 번역자(?)가 되고 한젬마씨는 저자(?)로서의 권위와 유명세에 힘입어 방송인으로 입신했다는 차이는 있지만, 두 사람 모두 영상매체 친화적인 브랜드다. 책이라는 매체 자체의 완결성보다는, 더 인기 있는 다른 매체에 기대려는 출판의 초라해진 자화상을 반성하고 싶다.

둘째, 출판기획의 본말(本末) 문제다. 책도 치밀한 '기획'을 거쳐 시장에 내놓는 '상품'이며 출판업은 영리를 추구하는 기업활동이다. 그러나 영리 추구 목적의 출판기획에도 본과 말이 있다. 오로지 팔릴 것만을 생각하는 게 그 근본인 것 같지만 책의 존엄에 대한, 어떤 의미에서는 시대착오적인 존중이야말로 진정한 근본이다. 근본을 살피지 못한 점을 반성하고 싶다.

셋째, 베스트셀러의 맹점이다. 베스트셀러 집계의 기술적 공정성과는 별도로 애당초 저자나 번역자 자체가 거짓이거나 교묘한 사재기 상술이 개입할 여지가 있는 한, 베스트셀러 순위는 신뢰하기 힘들다. 고백하건대 필자는 베스트셀러의 요인을 분석하는 글을 쓰곤 했다. 그러나 만일 저자나 번역자 자체가 거짓이거나 사재기로 만들어진 베스트셀러라면 그 요인 분석은 고의가 아니었을지라도 거짓의 공범 구실을 한 셈이니, 이 자리를 빌려 사과드리고 반성하는 바이다.

넷째, 겉으로는 고급 문화인 행세를 하면서 속으로는 진작부터 고쳤어야 할 해묵은 관행을 계속 끌고 가는 이중성을 반성하고 싶다. 출판은 마땅히 지원받아야 할 부문이라며 물적.제도적 지원을 요구할 때는 한껏 목소리를 높이면서도 정작 출판인과 출판계가 먼저 스스로 개선해야 할 것들을 과감하게 고치는 노력에는 인색하지 않았는가.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진리를 새삼 떠올릴 때다.

'삼국지'의 한 대목을 떠올려 본다(이하 황석영 '삼국지'(창비)에 바탕을 둠). "이 책은 우리 촉땅에서는 삼척동자도 다 외우고 있는데, 새로 지은 책이라니 무슨 소리요? 이 책은 전국시대에 어느 무명씨가 지은 것이오. 조 승상은 도적질에 능하니 그를 표절해 자신이 지은 것처럼 그대를 속인 것이오." 사신으로 파견된 장송이 조조가 지었다는 '맹덕신서'를 한 번 훑어보고 외운 뒤 조조의 신하 양수에게 한 말이다. 이 일을 전해 들은 조조는 언성을 높여 "옛 사람 생각이 나와 우연히 들어맞았던 게지!"하고 즉시 '맹덕신서'를 찢어 불살라버리라 명했다. 저자이자 발행인인 조조가 보여 준 최소한의 자존심이 차라리 그립다.(표정훈 출판평론가)

07. 02. 09.

P.S. 참고로, '출판평론가'의 자녀교육법이 궁금하신 분들은 '여성동아'(2006년 5월호)의 기사를 참조해보시길(http://www.donga.com/docs/magazine/woman/2006/05/08/200605080500037/200605080500037_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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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이매지 > 서울에서 가볼만한 출사지 BEST 10

서울에서 가볼만한 출사지 BEST 10

청명한 가을 하늘만 보면 왜 ‘천고마비’ 라는 말이 나왔는지 알 법하다. 이렇게 좋은 날씨에 사무실에서 하늘만 쳐다보고 있자면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것은 인지상정. 도심을 벗어나 산이나 바다, 강으로 가는 것도 좋지만 멀리 갈 여유가 없다면 서울 도심 곳곳을 다시 바라보는 건 어떨까? ‘등잔밑이 어둡다’는 말처럼 가깝고 친근한 곳일수록 소홀해 지는 법이다. 창간 5주년을 맞아 서울에 살고 있다면 한번 쯤 가봤을 법한 출사지들을 필자 마음대로 뽑아 소개해 본다.

글.사진ㅣ 유호종(http://blog.naver.com/zazaboto)

1. 인사동 쌈지길, 인사동길 재발견
우리나라의 전통을 찾을 수 있고 외국 관광객들도 가장 많이 찾는 인사동. 골동품상이 늘어서 있는 모습이 옛 인사동의 모습이라면 이제는 아니다. 바로 쌈지길이 들어서고 나서부터이다. 인사동의 작은 골목길을 나선형으로 연결해 놓아 올린 층 개념이 아닌, 길과 길이 이어진 수직적 골목길의 개성 있는 건물이다. 자연스러운 순환동선을 통해 가장 인사동적인 길을 만든 흔적이 역력하다. 건물이라기보다는 길이라는 의미가 강하다. 형형색색의 이색적인 가게와 오밀조밀 배치된 가게들은 인사동을 찾는 이들에게 또 다른 즐거움을 선사한다. 인사동은 이제 골동품을 파는 곳이 아니라 전통을 창출하는 곳이다.

2. 청계천 청계광장, 문화행사의 메카
곧 개장 1주년을 앞두고 3천만 명이 다녀갔을 정도로 이젠, 서울 시민들뿐만 아니라, 도심 속 휴식, 문화공간으로 서울을 찾는 관광객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는 곳. 청계천 5.84km 구간 중 방문객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구역은 청계광장에서부터 세운교까지의 코스. 청계천이 시작되는 세종로에 조성된 청계광장에는 삼색 조명이 어우러진 캔들 분수와 4m 아래로 떨어지는 2단 폭포가 장관을 연출한다. 폭포 양 옆에는 전국에서 돌을 가져온 8도석으로 제작된 ‘팔석담’을 깔았다. 밤이면 빛과 물이 어우러지는 환상적인 모습을 연출한다. 또, 청계천 전 구간을 1/100로 축소한 미니어처(miniature) 역시 멋진 볼거리를 제공한다.

3. 남산N타워, 다시 태어난 서울의 랜드 마크
낙후된 시설을 리모델링 해 산뜻하고 화려한 모습으로 탈바꿈한 N 서울타워. 새롭다(new)는 이름에 걸맞게 외관의 색상과 패턴이 변화하는 조명시스템을 구축하여 매일 밤 7시부터 12시까지 6개의 서치라이트가 다양한 각도로 하늘에 발사되어 꽃이 활짝 핀 모양으로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서울의 중심이자 상징이며 서울에서 가장 높은 이곳에서 북악과 북한산은 물론 한강과 남한산성, 관악산까지 서울의 아름다운 광경을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기 때문에 서울 전체를 파노라마 촬영하거나 저녁노을 진 서울의 모습을 실루엣으로 잡으면 멋진 풍경을 찍을 수 있다.

4. 경복궁, 우리 문화를 사랑하고 즐길 수 있는 곳
경복궁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국가 사적지이자 연간 200만 명이 넘는 내•외국인 관람객들이 찾는 국내 최대의 관광명소. 경복궁 최고의 볼거리는 바로 전문가의 고증을 통해 15세기 조선전기의 국왕과 왕실을 호위했던 수문장을 그대로 재현하는 수문장 교대의식이다.
교대식이 끝나고 이들과 기념사진도 찍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관람객을 위한 수문군 복식체험, 인형 채색, 탁본 체험 등도 마련되어 시민들의 흥미를 돋우고 있다. 또 수문장 교대의식보다 더 재미있는 부대행사가 마련되어 있는데 그것이 바로 ‘국왕 행차의식’. 국왕을 모시고 행렬을 진행하는 진지한 모습의 신하들, 이들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으려는 외국 관광객들과 아이들의 코믹한 모습을 대비해서 담아보면 더욱 더 큰 재미가 있다.

5. 홍대 피카소 거리, 인물사진을 위한 최고의 오픈 세트
홍대하면 ‘수많은 클럽들과 카페들‘, 그리고 ‘인디문화의 메카‘가 떠오른다. 그렇기 때문에 홍대 앞을 가면 왠지 담아볼 것이 많을 것 같은 생각에 발걸음을 옮겨보지만, 막상 눈에 보이는 이것저것들을 사진에 담아보려고 생각하면 쉽지만은 않다. 대신에 하나의 주제를 선택하면 의외로 쉽게 풀리는 곳이 홍대 앞이다. 예를 들어 홍대 앞 어느 골목을 들어서건 간에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벽화들을 주제로 담아본다거나, 주말이면 항상 열리는 Club day에 음악과 춤도 즐기고 거기에서 벌어지는 재미있는 모습들을 담을 수 있다.

벽화들은 홍대 미대학생들을 중심으로 대대적인 작업을 마친 결과 지금은 골목 곳곳에서 쉽게 만나 볼 수 있게 되었다. 주로 오래된 건물의 담벼락에 주로 그려져 있으며,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골목에 그려져 있어서 촬영에 방해를 받을 일도 거의 없다. 따라서 단순한 벽화를 주제로 한 사진뿐만 아니라 모델 촬영 같은 인물 촬영을 하기에도 그만이다.


6. 삼청동, 가을에 데이트하기 가장 좋은 곳
경복궁의 동십자각 건너편이 삼청동의 시작이다. 경복궁 돌담길 맞은 편 쪽에는 적어도 한 두 번은 들어봤을 유명 갤러리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그 길을 따라 삼청터널 쪽으로 방향을 잡으면, 서울에서 둘째라고 하면 서러울 유명한 맛집들이 자리 잡고 있고 또, 독특하고 개성 있는 인테리어와 외관을 자랑하는 건물들이 모여 있어 데이트하기에 가장 완벽한 환경을 갖추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조선시대에는 경복궁 동쪽 일대가 주로 양반들이 주로 살고 있던 곳이라 삼청동과 골목 하나 둘 사이로 붙어 있는 청운동, 명륜동, 가회동, 계동 등은 1990년대까지 한옥보존지구로 지정되어 있어서 아직까지도 전통적인 한옥의 모습들을 찾아볼 수 있으며, 간혹 일제 강점기 때 지어진 일본풍의 건물들도 발견할 수 있다.


7. 선유도 공원, 서울의 떠오르는 추천출사지 1번지
양화대교 남단에 위치해 있는 선유도 공원은 선유 정수장이 있던 곳을 재활용(?)하는 차원에서 재설계하여 2000년부터 서울시가 시공하여 만들어 2002년에 개방된 공원으로 벌써 서울에서 가장 유명한 출사 지역이 되었다. 주말은 물론 평일에도 연인, 가족, 동호회 할 것 없이 많은 사람들이 모델촬영을 하러 이곳에 모인다. 선유도의 출사지역은 크게 공원 내와 공원 밖으로 나눌 수 있는데, 공원 내에는 여타 공원들과는 달리 계획적인 문화시설이 잘 비치되어 있다. 현대적인 감각의 카페테리아 “나루”를 비롯해 항상 물이 흐르는 작은 운하(?)들. 그리고 수많은 종류의 나무와 꽃들, 인공 폭포와 벤치 등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재설계하기 전의 정수장 시설들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어 마치 판타지 소설 속에 들어온 것은 아닌가 착각마저 들게 한다. 선유도는 낮과 밤이 다르다. 낮에는 식물이나 꽃의 접사나 풍경 사진, 그리고 이채로운 배경을 이용한 인물 사진이 가능하고, 밤에는 무지개 빛깔의 선유교의 야경이 볼 만하다. 또한 선유도 내에서 촬영하는 한강 야경도 촬영할 만한데 특히 공원 안쪽에 위치한 정수 처리 시설물에 다채로운 빛깔의 등을 비춰놓아 만든 다채로운 색의 바위들은 또 하나의 촬영 재미를 느끼게 해준다. 다만, 선유도는 주말을 이용한다면 이용객이 많으므로 자제하는 것이 좋고, 평일을 이용하는 것이 좋다.


8. 낙산공원, 서울의 야경을 한 눈에 내려다보자.
낙산공원은 아는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은 통 모르고 있는 출사지. 젊음의 거리 대학로 그 안의 마로니에 공원 뒤편 길로 5분정도 걸어 올라가다 보면 도심 속의 자연공원인 낙산공원을 발견할 수 있다. 이곳의 정상은 전망과 야경이 빼어나 각종 드라마에 단골로 등장해왔다. 동대문에서 혜화문까지 연결되는 2.1 km의 옛 성곽 길은 산책코스로도 그만이다. 중앙 계단을 올라 오른 편을 살펴보면 육각 정자를 발견할 수 있는데 이곳이 바로 서울 시내를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중요 촬영 포인트이다.
특히 야경이나 노을을 촬영하기 위해 많이 찾는 곳이기도 하다. 부근의 창신동 골목길은 골목 굽이마다 삶의 정겨운 기운이 넘쳐흐르므로 서울의 삭막함을 떠나 색다른 멋을 담고 싶다면 한번쯤 들려볼만한 곳이다.


9. 하늘공원, 이국적인 바람개비와 가을 억새가 있는 초원
가을 하면 떠오르는 국내 출사지 중에서도 대표명소로 자리 잡은 곳. 쓰레기 매립지였던 난지도를 개간하여 만든 하늘공원이 인기를 얻는 가장 큰 이유는 친환경 이미지를 부각시키는 풍력 발전기와 억새와 띠밭이 황금물결을 일으키며 춤을 추는 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억새밭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기에는 이보다 더 좋은 곳이 없다. 또 해질 무렵에는 떨어지는 해를 바람개비와 함께 담으면 가장 아름다운 나만의 가을 엽서를 만들 수 있다.


10. 올림픽 공원, 피크닉과 건강을 위한 최고의 출사지
올림픽 공원 안쪽에 위치한 몽촌토성을 한 바퀴 도는 조깅 코스만 해도 수km는 족히 될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넓은 곳이다. 주로 몽촌토성을 중심으로 한 잔디밭과, 호수, 아시안 게임과 올림픽 경기를 치러낸 실내경기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울특별시가 당시로서는 거금인 1,823억 원이나 들여서 만든 곳인 만큼 하루정도 피크닉을 떠나기에는 만점인 곳이다. 한 바퀴를 돌려면 적어도 한 시간 이상을 걸어야 하기 때문에 절로 운동이 된다.

이곳을 찾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피크닉과 운동을 위해서다. 평화의 문 방면에서는 대부분 인라인 스케이트를 즐기는 사람들이 많다. 또한 경기장이 몰려 있는 건강 올림픽 공원 주변에는 인라인 스케이트, 스케이트보드 등의 엑스게임을 즐기는 사람들을 위한 공간도 꾸며져 있어 박진감 넘치는 볼거리를 제공하기도 한다. 한강 시민공원이나 중랑천 주변과 더불어 가장 안전하게 인라인 스케이트를 마음껏 탈수 있는 서울서 몇 안 되는 공간이다. 체육 시설이 중심이지만, 예전에 초라하게 자리 잡고 있던 서울 올림픽 미술관이 이제는 미술관다운 모습으로 새로 완공되어 문화 체육 공간으로서의 자리를 더욱더 굳히고 있다.


출처 : http://magazine.jungle.co.kr/cat_photo/detail_view.asp?menu_idx=139&master_idx=11528&pagenum=2&temptype=5&page=&code=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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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7-03-14 18: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0번, 싸이보그라도 괜찮아,에 나오는 장면 같아요.
도심 속 가볼만한 곳이 많네요. 홍대앞 피카소거리도 가보고 싶어요.
 
 전출처 : 로쟈 > 박노자가 본 러시아혁명

올해는 1917년의 러시아혁명 90주년이 되는 해이다. '10월 혁명'이라 불리지만 지금의 달력으론 11월이고 그때쯤이면 러시아 내외에서 이 역사적 사건(이자 소위 '과거의 사건')에 대한 활발한 조명이 이루어질지 모르겠다. 국내에서도 대학가에서는 이미 이러한 조명이 기획되고 있는 듯하다. 마침 최근에 러시아계 한국인이면서 노르웨이 대학의 교수로 있는 박노자의 글방에 '러시아 혁명'에 관한 짤막한 글이 올라왔다. 예전부터 '당신들의 러시아'를 읽고 싶던 차에 흥미롭게 읽었다. 여기에 스크랩해놓는다(http://wnetwork.hani.co.kr/gategateparagate/list.html?blog_board=4).

박노자 글방(07. 01. 29) 1917년 러시아 혁명, 배울 것 배우고 미화하지 말기를

지금은 사회 전체가 비판 의식이 좀 강화해서 덜하지만, 제가 1991년에 처음으로 서울에 왔을 때만 해도 소위 "운동"하시는 분들 사이에서 레닌과 1917년의 러시아 혁명에 대한 의견은 대체로 "성경 무오류설"을 믿는 기독교인들과 다를 게 없었습니다. 소련이 몰락으로 치닫고 있었지만, "레닌을 따라 배우자"는 사람을 제가 살았던 안암골에서 그리 어렵지 않게 만나볼 수 있었어요.

사실, 제가 그러한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좀 어리둥절했었지요. 빛이 있는데에서 꼭 어두움도 따라 생기고 각종의 어두운 그림자들이 따른다는 것은 이미 도교나 불교에서도 잘 알려진 변증법의 기본인데, 그 "자생적 볼세비키" 분들에게 그러한 이야기가 안통할 때가 많았어요. 그 분들께서 제게 "혁명을 어떻게 보느냐"라고 물었을 때에, 사실, 저는 단순한 "호불호"를 갖다가 답을 못했었지요. 하도 진보와 퇴보, 문화의 대중적 보급과 야만적 잔혹성, 상당수의 신분상승과 일부의 몰락이 얼키고 설킨 것이 혁명이기에 말씀입니다.

글쎄, 1917혁명의 덕분이 아니라면 저부터 러시아에서 태어날 리도 없었을 걸요. 제 조상인 가난한 유대인들은, 제정 정권이 지속되거나 반동적 "백군"이 이겼을 때에 아마도 pogrom (유대인 학살)에 죽거나 미국으로 도망쳤을 것이고, 저도 러어를 모국으로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는, 혁명이 제게 개인적으로 '생명의 은인'에 가까운 것이지요(*박노자가 유대인 가계라는 건 처음 알았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1905년 혁명 때에 행동대 일하다가 경찰의 수배를 피해 아르헨티나로 이민간 제 조상의 친척 한 분은, 본인도 사회주의 혁명가이었음에도 1920년대 중분에 소련에 잠깐 왔다가 너무 실망이 커서 남미로 돌아갔답니다. 물질적 가난에만 경악한 것이 아니고 본인과 같은 아나키스트들에게 최소한의 표현의 자유도 없었다는 사실에 가장 크게 경악한 것이지요.  본인이 목숨을 걸고 행동대에서 일했던 것은, 제정 정권과 같은 부자유, 탄압, 사상적 획일화의 정권을 탄생시키기 위한 것이었느냐 이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레닌을 좋아하느냐"는 질문에 저로서 간단히 답하기가 아주 힘들었어요.

The 1917 Russian Revolution

그건 그렇고 1917년 혁명의 성격을 생각해봅시다. 이 혁명이 사회주의적이라고 하는데, 그게 일면으로 맞을 것입니다. 20만 명의 볼세비키 당원의 대다수가 "사회주의 지향적인" 대규모 공장의 숙련공과 중, 하급 지식인이었고 그 지도부 역시 주관적으로 사회주의를 위해 평생 투쟁하려는 사람들이었지요. 그런데, 문제는, 그들이 과연 "사회주의"를 구체적으로 무엇으로 생각했을까요? 이건 자세히 이야기하자면 아주 길겠지만, 간단히 축약하자면 그들에게 어떤 구체적인 "사회주의"의 청사진은 없었던 것 같아요. 거의 "임기응변"의 가까운 방식이었지요.

일단, "부르주아 민주주의" 자체도 제대로 연습을 못한 후진국에서는 이 분들을 기본적인 민주적 절차 (제헌의회 등등)를 다 무시해도 된다고 생각했으며, 권력을 잡은 지 한 달도 지나지 않아 벌써 비밀 경찰 격의 "체카"를 만들어 사형제를 부활시켰지요. "체카" 자체의 통계를 그대로 믿어도, 18-20년간 사형집행된 "반동 분자"들은 12700 여명이었는데, 그들 중에서는 상당수는 "유산계급 출신"이라는 이유로 마구 붙잡혀 "반동 분자 준동에 대한 집단적 응징"이라는 명목으로 총살된 "인질"들 이었지요. 레닌이 직접 지시한 것은 아니겠지만 지방 체카들은 고문과 부녀자, 아동의 학살 등 제정러시아 암흑의 통치하에서도 상상하기 어려웠던 "반혁명 분자 근절 방법"들을 이용했어요.

국방부 장관 트로츠키가 구 제정러시아 군의 장교들을 혁명의 "적군" (Red Army)에다 다시 징병했을 때에 그들의 가족들을 "인질"로 특별 관리하다가 해당장교의 탈영/"반역 행위"시에 그 노모나 아이들을 수용소에 보내거나 총살하도록 조치해놓기도 했어요.  그런데 부녀자와 아이들을 마구 죽이면서 저들이 건설하고자 하는 사회는 도대체 무엇이었는가요?

1917년의 10월 혁명을 앞두고 레닌이 "국가의 소멸", "직접 생산자들의 직접적인 생산 과정의 전국적 관리" 등, 참 듣기 좋은 이야기를 많이 했어요. 국가가 진짜 언젠가 소멸됐으면 아주 좋았을 터인데, 레닌 등이 국가를 운영하는 입장이 됐을 때에 그 말도 점차 바뀌기 시작했어요. 1919년말-1920년초에, 레닌이 "전시 공산주의"의 "알곡 징발제도"와 배급제를 '사회주의의 맹아', '사회주의에의 이행 방법'이라 이야기하고, 그 뒤에는 "공산주의란 전국의 전기 보급과 소비에트 권력 장악"과 같은, 자본주의적 개발주의를 그대로 방불케 하는 이야기도 서슴지 않았어요.

[Photograph of Lev Davidovich Trotskii]

 

 

 

 

 

 

 

 

 

  

 

국방부 장관 트로츠키는, 자기 부처에 대한 애착이 강해서 그런지 "전국 노동의 군사화"를 주장하여 "노동 군대"를 만들어서 생산 요충지에 배치시키는 것이 바로 사회주의에의 첩경이라고 선전했어요. 이와 같은 "노동의 군사화"가 전시 공산주의라는 특수 상황에서 일시적으로 필요했는지 몰라도, 볼세비키 지도자들은 이를 "사회주의적 덕목"으로 취급한 것은 그들의 "사회주의 프로젝트"의 "해방 지향성"을 의심케 합니다. 나중에 1921년초에 전국적 농민 반란과 크론스타드 수병 봉기 등 민중의 저항에 정신들 차려 "알곡 징발제"와 같은 반인륜적 폭력을 정지하고 어느 정도 민중의 숨통을 트이게 했지만, 권력의 독점을 또 끝까지 지키려 했었지요.

1921년까지만 해도 일부 소비에트에서 멘세비키 등 비폭력, 민주주의 지향의 "선진형" 사회주의자 들이 계속 참여했지만 (사실, 인쇄노동자의 노조나 화학 노조 등이 1921년까지 거의 멘세비키들이 장악했었지요), "신경제 정책"을 발표하여 경제에서의 국가적 폭력을 줄임과 동시에 멘세비키, 에세르, 아나키스트 등의 "비 볼세비키" 혁명 세력들을 크게 박해하기 시작했어요(*박노자의 포지션은 비폭력, 민주주의 지향의 '선진형 사회주의'쯤에 해당하겠다). 

이미 1918년4-5월부터 간헐적으로 멘세비키 계통의 노조 활동가들을 총살하거나 체포하는 개별적인 소수의 경우들이 있었지만, 1921년에 그 탄압이 커져 1922년초에 전국에 체포된 멘세비키 활동가 (대다수 노조 간부들이지요)만 해도 무려 1500 명이었어요. 아니, 의견을 달리 하는 사회주의적 노동자 활동가들을 마구 붙잡아 감옥에 집어넣는 것은, 무슨 놈의 "노동자 민주주의"입니까? 1920-1921년까지 노동자 민주주의의 일부 요소들이 분명히 존재했지만 그 뒤에는 거의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어요.  

한 마디로, 과거 혁명들의 장점을 아는 동시에, 그 단점도 좀 배우도록 합시다. 볼세비키들의 혁명적 열성과 같은 장점도 알아야 하지만, 그 조급성, 그 인명 경시의 정신, 그 절차적 민주의 무시를 이 시대의 혁명가들은 제발 따르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청년 레닌의 둘이 없는 지기로서 1890년대 중반에 그와 함께 "노동계급 해방 투쟁 동맹"을 이끌었다가 나중에 멘세비키의 길을 걷게 된 율리 마르토브(1873-1923, 사진) 선생의 1918년의 레닌 관련의 논평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낮에 총살 명령에 사인해놓고도 편안히 밤잠을 잘 수 있는 이 사람을, 난 이해 못한다". 글쎄, 제가 꼭 마르토브의 노선에 동의하지 않습니다만, 역시 촌철살인의 평이었지요. 저도 낮에 인간의 목숨을 빼앗아놓고 밤에 편안히 자는 사람을 이해 못하지요.그러나, 레닌의 잠은 정말로 편안했을까요? 

1917년, 한 군 부대에서의 혁명적 집회의 모습. 그러나, 1918년5-6월에 일부 멘세비키 노동자들은 독립적인 노조의 전국적 총회를 열려고 하자, 레닌 정권이 경찰 박해로 맞섰습니다. "노동자 민주주의"는 이미 그 때도 사실 빛좋은 개살구에 가까웠지요.

07. 02. 05.

 

 

 

 

P.S. 내가 갖는 의문은 "볼세비키들의 혁명적 열성과 같은 장점"과 "그 조급성, 그 인명 경시의 정신, 그 절차적 민주의 무시"가 과연 별개의 것인가 하는 점이다. 그러니까 조급하지 않게 인명을 존중해가면서 그리고 절차적 민주주의를 실현해가면서, 즉 어떠한 '과잉' 혹은 '광기'도 배제하면서 우리는 '혁명적 열성'을 유지해나갈 수 있는가? 박노자의 인도주의적/민주주의적 사회주의란 것도 '참 듣기 좋은 이야기'에 속하는 건 아닌가? 해서 경청할 만하지만 내게 '리얼하게' 다가오지는 않는다. "낮에 총살 명령에 사인해놓고도 편안히 밤잠을 잘 수 있는 이 사람" 레닌의 '속사정'에 대해서는 역시나 지젝의 레닌론 <혁명이 다가온다>(길, 2006)를 참조할 수 있다. 정리해놓을 시간이 좀처럼 나지 않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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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 밖의 세계사 지혜가 드는 창 5
안효상 지음 / 새길아카데미 / 199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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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는 중요하다고 알려진 역사적 사실들의 알려지지 않은 측면이나 잘못 알려진 것들을 드러내주거나, 또 중요하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교과서나 역사서에서 잘 다루지 않는 것을 제시하는 것으로 이 책의 방향을 잡았다고 한다. 또 쉬운 접근을 위해 67개의 장면으로 나누었고 책말미에는 읽는 이들을 위해서 30권의 읽을거리를 덧붙여주는 인심도 베풀었다. 책을 읽으며 또 다른 책을 만나는 것은, 읽는 이의 입장에선 늘 버거운 즐거움이다. 67개의 각기 다른 역사 속의 궁금증들. 물론 헤아릴 수 없는 왜?로 둘러싸인 게 역사지만, 그 중에서 언급된 67개 속에서 몇 장면을 들추어보면,

67-2. 태양신이 하사한 함무라비법전

세계사 시험에도 가끔 등장하던 그 법전이다. 그런데 태양신이 주었다고? 문명의 발상지의 하나인 메소포타미아 지방은 개방된 평야지대로 권력의 교체가 잇따랐다. 기원전 2350년경 셈족인 아카드인이 처음으로 통일왕국을 세웠으나, 얼마 못 가 아무르인이 이 지역을 통일했다. 기원전 18세기 함무라비 시대에 전성기를 맞이하는데, 그는 중앙집권적 체제를 정비하고 법전을 만들었다. 1901년 프랑스의 드 모르간이 이끄는 페르시아탐험대가 수사에서 발견했다. 이 돌기둥에는 함무라비왕이 태양신으로부터 법전을 받는 광경이 조각되어 있고, 282조로된 법률조문이 이란의 고대문자인 설형문자로 새겨져있다. 이 함무라비법전은 최초의 성문법전인데, 현재는 프랑스 루브르박물관에 모셔져있다.  

생각 하나---함무라비법전은 이란의 유물인데 왜 보관은 프랑스가 하면서 돈까지 벌까! 이란에 박물관이 없어서는 아닐것이고 역사의 위대한 유물들을 훔쳐 한 곳에 전시하면서 명성을 쌓고 싶은 문화대국(?)의 긍지때문이 아닌가 한다.

67-14. 당고조, 당태종은 중국사람이 아니었다.

중국의 역사는 한족과 이민족이 반반씩 이뤄놓은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예로, 5호 16국 시대에는 이민족과 한족은 문화적으로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호한체제라는 정치문화형식을 발전시켰다. 화북을 통일한 선비족의 북위정권이 지나치게 한화정책을 취하자 6진의 군사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6진의 하나인 무천진 군벌에 속하는 인물들이 수를 건국한 수문제 양견과 당고조 이연의 할아버지 이호 등이었다. 이씨 집안은 원래 대야씨 성을 가진 호족이었다. 수와 당은 고구려를 침략할 때도 수양제, 당태종, 당고종은 직접 전장에 나서 전투를 지휘했으며 당태종은 유목민의 군주를 가르키는 칸을 덧붙인 칭호 천가한이라 불리길 좋아했다. 이는 모두 유목민의 영향이다. 또 당고종이 당태종의 후궁이던 무조(측천무후)를 자신의 황후로 삼은 것이나 현종이 태자비인 양옥환(양귀비)를 귀비로 맞은 것 등은 북방유목민들 사이의 관습이었으며, 또 중국 역사상 전무후무한 여황제 측천무후의 등장도 여권을 존중하던 유목민의 영향으로 보여진다. 그리고 당제국의 국제성이야말로 유목민의 개방성에 연유한 것이다.

생각 둘---수와 당의 건국세력이 유목민(선비족)인 건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다. 다양한 문화의 꽃을 피운 당의 바탕이 유목민의 호방함과 개방성에 있었던 모양이다. 그렇다면 최근 중국에서 흘러나온 허무맹랑한 주장, 칭키츠칸이 중국인이라는 것을 믿어줘야 하는지? 아니라면 북방유목민이 지배세력이었던 그 시대를 흠모해서 칭키츠칸을 한족의 조상으로 긴급 영입하고자 하는 뜻인건지? 그들의 광대한 땅만큼 광대한 상상력의 탓인것인지................

 67-25. 다빈치가 한밤 중에 공동묘지에 간 이유

다빈치는 14세때 조각가로 유명한 화공인 베로키오 밑으로 들어가 기술을 배우기 시작했다. 당시 화공길드는 토목, 건축, 회화 등 손으로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다했다. 1482년 밀라노로 간 다빈치는 군사기술자, 측량과 지도제작, 기중기의 고안, 운하건설, 궁정오락연출, 비행기와 헬리콥터의 설계도를 작성하기도 했다. 그리고 해부도도 남겼는데, 매우 정확할 뿐만 아니라 인체에 대한 그의 철학적 성찰이 담겨있었다. 당시엔 해부가 엄청난 죄악으로 교회의 금지령 아래에 있었지만 그는 약 30구의 시체를 해부했다고 했는데, 다른 사람의 눈을 피하기위해 한밤 중에 묘지에서 시체를 파내어 촛불로 비추어가며 해부했다고 한다.

생각 셋---다빈치는 자신의 천재성의 크기에 비례하는 성실과 열정을 가진 흠모하기에 마땅한 사람이다. 몇해전 예술의 전당에서 다빈치 전시회가 있었다. 이 전시회에서는 다빈치의 노트가 자세히 공개되었었는데, 그의 수많은 해부도는 대단한 충격을 안겨주었다. 여러 해부도는 다양한 인체를 대상으로 한 것도 놀라웠지만, 그 묘사는 사진으로 찍은 듯 했다. 자신의 작품 속에서 다시 태어날 대상에 대한 열정으로 그 시신들 앞에서 얼마나 많은 감정들이 교차했을지. 서슬퍼런 교회법 아래에서도 예술에 대한 그의 사랑은 자신을 다독이는 힘이었을 것이다.

67-67. 오키나와는 독립왕국이었다.

극동 최대의 미공군기지를 보유하고 있는 오키나와는 사실 불과 100여년 전인 명치유신 무렵까지는 류큐라는 독립왕국이었다. 류큐왕국이 역사서에 등장하는 것은 1372년으로 명나라 홍무제의 요청에 응해 명나라에 조공했다는 기록이 있다. 류큐왕국은 3개의 정권으로 분열되어 존재하다가 1429년에는 통일정권이 수립되었고 16세기에는 동지나해 일대에 무역영역을 갖는 전성기가 시작된다. 번성하던 류큐왕국은 1609년 쓰시마 번의 침략을 받는다. 이에 류큐왕국은 이중조공외교로 유지되고 있다가, 1872년 명치 신정부가 류큐를일개 번으로 만들어버렸다. 1879년에는 오키나와 현에 편입되는데, 2차 대전때 미국의 본토침공작전으로 17만명의 목숨을 잃게 된다. 1945년 4월 니미츠(C.W.Nimitz)포고에 의해 미군정이 시작되고 거대한 미공군기지가 되었다가 오키나와는 1972년 5월에 일본에 귀속된다. 당시 미 닉슨대통령은 동맹국들의 책임분담정책을 펴는데 이때 교섭에 의해 귀속된 것이다. 오키나와 내에서는 독립론이 일어나 정당이 결성되기도 했지만 묵살되었다.

생각 넷---약소국의 비애다. 두 강국의 거래에서 약소국의 독립의지는 존재조차 없다. 우리나라도 일제시대 이후 주권을 회복하기까지 수많은 회담에서 강대국들의 거래탁자에서 좌지우지 되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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