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식 밖의 세계사 지혜가 드는 창 5
안효상 지음 / 새길아카데미 / 1993년 10월
평점 :
품절


 글쓴이는 중요하다고 알려진 역사적 사실들의 알려지지 않은 측면이나 잘못 알려진 것들을 드러내주거나, 또 중요하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교과서나 역사서에서 잘 다루지 않는 것을 제시하는 것으로 이 책의 방향을 잡았다고 한다. 또 쉬운 접근을 위해 67개의 장면으로 나누었고 책말미에는 읽는 이들을 위해서 30권의 읽을거리를 덧붙여주는 인심도 베풀었다. 책을 읽으며 또 다른 책을 만나는 것은, 읽는 이의 입장에선 늘 버거운 즐거움이다. 67개의 각기 다른 역사 속의 궁금증들. 물론 헤아릴 수 없는 왜?로 둘러싸인 게 역사지만, 그 중에서 언급된 67개 속에서 몇 장면을 들추어보면,

67-2. 태양신이 하사한 함무라비법전

세계사 시험에도 가끔 등장하던 그 법전이다. 그런데 태양신이 주었다고? 문명의 발상지의 하나인 메소포타미아 지방은 개방된 평야지대로 권력의 교체가 잇따랐다. 기원전 2350년경 셈족인 아카드인이 처음으로 통일왕국을 세웠으나, 얼마 못 가 아무르인이 이 지역을 통일했다. 기원전 18세기 함무라비 시대에 전성기를 맞이하는데, 그는 중앙집권적 체제를 정비하고 법전을 만들었다. 1901년 프랑스의 드 모르간이 이끄는 페르시아탐험대가 수사에서 발견했다. 이 돌기둥에는 함무라비왕이 태양신으로부터 법전을 받는 광경이 조각되어 있고, 282조로된 법률조문이 이란의 고대문자인 설형문자로 새겨져있다. 이 함무라비법전은 최초의 성문법전인데, 현재는 프랑스 루브르박물관에 모셔져있다.  

생각 하나---함무라비법전은 이란의 유물인데 왜 보관은 프랑스가 하면서 돈까지 벌까! 이란에 박물관이 없어서는 아닐것이고 역사의 위대한 유물들을 훔쳐 한 곳에 전시하면서 명성을 쌓고 싶은 문화대국(?)의 긍지때문이 아닌가 한다.

67-14. 당고조, 당태종은 중국사람이 아니었다.

중국의 역사는 한족과 이민족이 반반씩 이뤄놓은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예로, 5호 16국 시대에는 이민족과 한족은 문화적으로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호한체제라는 정치문화형식을 발전시켰다. 화북을 통일한 선비족의 북위정권이 지나치게 한화정책을 취하자 6진의 군사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6진의 하나인 무천진 군벌에 속하는 인물들이 수를 건국한 수문제 양견과 당고조 이연의 할아버지 이호 등이었다. 이씨 집안은 원래 대야씨 성을 가진 호족이었다. 수와 당은 고구려를 침략할 때도 수양제, 당태종, 당고종은 직접 전장에 나서 전투를 지휘했으며 당태종은 유목민의 군주를 가르키는 칸을 덧붙인 칭호 천가한이라 불리길 좋아했다. 이는 모두 유목민의 영향이다. 또 당고종이 당태종의 후궁이던 무조(측천무후)를 자신의 황후로 삼은 것이나 현종이 태자비인 양옥환(양귀비)를 귀비로 맞은 것 등은 북방유목민들 사이의 관습이었으며, 또 중국 역사상 전무후무한 여황제 측천무후의 등장도 여권을 존중하던 유목민의 영향으로 보여진다. 그리고 당제국의 국제성이야말로 유목민의 개방성에 연유한 것이다.

생각 둘---수와 당의 건국세력이 유목민(선비족)인 건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다. 다양한 문화의 꽃을 피운 당의 바탕이 유목민의 호방함과 개방성에 있었던 모양이다. 그렇다면 최근 중국에서 흘러나온 허무맹랑한 주장, 칭키츠칸이 중국인이라는 것을 믿어줘야 하는지? 아니라면 북방유목민이 지배세력이었던 그 시대를 흠모해서 칭키츠칸을 한족의 조상으로 긴급 영입하고자 하는 뜻인건지? 그들의 광대한 땅만큼 광대한 상상력의 탓인것인지................

 67-25. 다빈치가 한밤 중에 공동묘지에 간 이유

다빈치는 14세때 조각가로 유명한 화공인 베로키오 밑으로 들어가 기술을 배우기 시작했다. 당시 화공길드는 토목, 건축, 회화 등 손으로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다했다. 1482년 밀라노로 간 다빈치는 군사기술자, 측량과 지도제작, 기중기의 고안, 운하건설, 궁정오락연출, 비행기와 헬리콥터의 설계도를 작성하기도 했다. 그리고 해부도도 남겼는데, 매우 정확할 뿐만 아니라 인체에 대한 그의 철학적 성찰이 담겨있었다. 당시엔 해부가 엄청난 죄악으로 교회의 금지령 아래에 있었지만 그는 약 30구의 시체를 해부했다고 했는데, 다른 사람의 눈을 피하기위해 한밤 중에 묘지에서 시체를 파내어 촛불로 비추어가며 해부했다고 한다.

생각 셋---다빈치는 자신의 천재성의 크기에 비례하는 성실과 열정을 가진 흠모하기에 마땅한 사람이다. 몇해전 예술의 전당에서 다빈치 전시회가 있었다. 이 전시회에서는 다빈치의 노트가 자세히 공개되었었는데, 그의 수많은 해부도는 대단한 충격을 안겨주었다. 여러 해부도는 다양한 인체를 대상으로 한 것도 놀라웠지만, 그 묘사는 사진으로 찍은 듯 했다. 자신의 작품 속에서 다시 태어날 대상에 대한 열정으로 그 시신들 앞에서 얼마나 많은 감정들이 교차했을지. 서슬퍼런 교회법 아래에서도 예술에 대한 그의 사랑은 자신을 다독이는 힘이었을 것이다.

67-67. 오키나와는 독립왕국이었다.

극동 최대의 미공군기지를 보유하고 있는 오키나와는 사실 불과 100여년 전인 명치유신 무렵까지는 류큐라는 독립왕국이었다. 류큐왕국이 역사서에 등장하는 것은 1372년으로 명나라 홍무제의 요청에 응해 명나라에 조공했다는 기록이 있다. 류큐왕국은 3개의 정권으로 분열되어 존재하다가 1429년에는 통일정권이 수립되었고 16세기에는 동지나해 일대에 무역영역을 갖는 전성기가 시작된다. 번성하던 류큐왕국은 1609년 쓰시마 번의 침략을 받는다. 이에 류큐왕국은 이중조공외교로 유지되고 있다가, 1872년 명치 신정부가 류큐를일개 번으로 만들어버렸다. 1879년에는 오키나와 현에 편입되는데, 2차 대전때 미국의 본토침공작전으로 17만명의 목숨을 잃게 된다. 1945년 4월 니미츠(C.W.Nimitz)포고에 의해 미군정이 시작되고 거대한 미공군기지가 되었다가 오키나와는 1972년 5월에 일본에 귀속된다. 당시 미 닉슨대통령은 동맹국들의 책임분담정책을 펴는데 이때 교섭에 의해 귀속된 것이다. 오키나와 내에서는 독립론이 일어나 정당이 결성되기도 했지만 묵살되었다.

생각 넷---약소국의 비애다. 두 강국의 거래에서 약소국의 독립의지는 존재조차 없다. 우리나라도 일제시대 이후 주권을 회복하기까지 수많은 회담에서 강대국들의 거래탁자에서 좌지우지 되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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