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권의 책읽기
 나는 항상 세 권의 책 읽기‘를 권한다. 하나의 주제에 대해서 세 권을 동시에 읽는 것이다. 특히 쟁점적인 주제에 대해서는 꼭 그렇게 해야 한다. 마치 ‘정반합‘ 처럼, 또한 관점과 팩트 사이의 균형 감각을 갖기 위해서다. 지적인 주제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관점의 세 권을 읽을 때까지는 아직 읽지 않았다고 생각하라. ‘비판적 책 읽기‘의 기본이다.

인생의 책 코너
 내가 읽고 또 읽는 책들은 책장 한 코너에 모아둔다. 꼭 다시 읽지 않더라도 그 코너 앞에 서면 여러 생각들이 떠올라서는 책 제목들만 봐도 느낌이 다시 온다. 슬럼프에 빠졌을 때, 다시 용기가 필요할 때, 나를 가라앉혀야 할 때 이 코너 앞에 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소금 눈물 - 난민들의 경유지, 람페두사섬의 의사가 전하는 고통과 희망
피에트로 바르톨로.리디아 틸로타 지음, 이세욱 옮김 / 한뼘책방 / 2020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의사 바르톨로의 일상을 통해 난민을 보게 되었다. 난민, 얼마 전에 있었던 제주 예멘난민들을 통해 남일이 아니란 걸 실감했다. 소금눈물을 읽으며 얽혀있는 생각을 정리가 되어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분쟁은 20세기 초 영국의 제국주의 정책에서 비롯된다. 팔레스타인 지역은 유럽에서 아라비아반도에 이르는 관문으로 관계가 첨예하게 대립되는 전략지였다. 특히 영국은 인도로가는 통상로를 확보하고 아라비아반도에 진입하기 위해 이 지역을 전진기지로 삼고자 한다. 그 과정에서 영국은 팔레스타인과 관련한 세 가지 충돌되는 약속을 한다.
1차 세계대전을 수행하며 오스만 터키 군대에 고전하던 영국은 아랍인들의 군사 협력을 끌어내기 위해 1915년 후세인 - 맥마흔 서신‘을 통하여 전쟁 후 아랍 독립국가 건설을 지지한다고 약속한다. 이듬해 영국은 프랑스, 러시아와 ‘사이크스 피코 비밀협정‘을 체결하여 팔레스타인 지역을 영국,
프랑스, 러시아가 공동통치 하기로 결정한다. 그 이듬해에는 유대인들과도 은밀하게 거래한다. 외무장관 벨푸어는 ‘팔레스타인에서의 유대인 민족 고향 건설‘에 호의를 갖고 있다고 밝힌다. ‘밸푸어선언‘은 팔레스타인 땅에 유 대 국가 건설을 목표로 한 유대인들의 시오니즘을 실현성 없는 꿈에서 가시적인 사업으로 변형시킨다.
전쟁이 끝나자 영국은 1920년부터 팔레스타인에 대한 위임통치에 들어간다. 위임통치는 1948년까지 28년간 지속된다. 이 기간 동안 유럽과 러시아등지에서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으로 대거 이주한다.
팔레스타인으로 대거 이주한다. 

영국의 위임통치종결을 6개월 앞둔 1947년 11월 유엔에서 팔레스타인 분할이 의결된다. 팔레스타인 전 지역의 56.47 퍼센트를 유대 국가에, 42.88 퍼센트를 아랍국
가에, 예루살렘은 국제지구에 할당한다는 내용이다. 당시 아랍인들은 팔레스타인 전 지역의 87.5퍼센트를 소유한 반면, 유대인들은 6.6퍼센트만을 소유하고 있었고, 나머지 5.9퍼센트는 영국 점유였다. 당연히 팔레스타인아랍인들은 유엔 분할안을 거부한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를 받아들여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 국가를 건설한다. 미국과 소련이 이스라엘을 공식적으로 승인하고 나서자 이집트, 트랜스 요르단, 시리아, 레바논, 이라크등 아랍 국가들은 이스라엘을 공격함으로써 1948년 전쟁‘이 발발한다.
전쟁의 결과 이스라엘은 전 팔레스타인 지역의 78퍼센트를 장악한다. 나머지 지역 중 가자는 이집트, 서안과 동예루살렘은 요르단의 통치하에 놓인다. 전쟁 중에 90만 명에 이르는 팔레스타인인들이 주변 아랍 국가 등지로피난한다. 이는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 거주 아랍인 인구의 90퍼센트에 이른다. 이스라엘은 1950년 ‘부재자 재산법‘을 만들어 피난한 아랍인들의 토지를 몰수하고, 동시에 피난민들이 귀환할 수 없도록 규제한다. 이 법에 따라 팔레스타인 분할안이 의결된 날 이후 아랍 국가의 시민이었거나 아랍 국가에 거주하던 사람들, 그리고 팔레스타인 거주자라 할지라도 본인의 거주지를 떠나 있던 사람들은 이유를 불문하고 부재자로 분류된다. 부재자의 재산은 점유자에게 귀속되고, 다시 이스라엘 정부는 점유자들의 전 재산을 때입한다. 나아가 이스라엘 의회는 신속하게 ‘귀환법‘을 공포한다. ‘모든 유대인은 새로운 이주자로서 이스라에로 돌아올 권리를 가지며 완전한 이스라엘 시민권을 받는다‘고 규정하고 있다.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아랍인의 추방과 유대인들의 이주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이스라엘은 두 가지 법을 발판으로 삼는다.
1967년 6월 이스라엘이 주변 아랍 국가들을 공격하이 또다시 중동에 전쟁이 발발한다. 이스라엘은 현재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분쟁의 대상이 되는 동예루살렘, 서안, 가자 지역을 점령한다. 국제법상 불법 점령지인 이 영토는 전 팔레스타인 영역의 22 퍼센트에 해당한다. 이때 43만 4천 명의 팔레스타인들이 또다시 거주지에서 쫓겨나 요르단 등지로 이주한다. 이때 피난 가지 않은 100만 명 정도의 팔레스타인인들이 남아 이스라엘의 군사 점령 하에서 생활하게 된다. 1967년 개최된 아랍연맹회의는 이스라엘이 점령지 전역에서 철수하기 전에는, 이스라엘과는 강화하지 않고, 협상하지 않고, 승인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결의안을 내놓는다. 유엔 역시 안보리 결의 242호를 채택하여 점령지역으로부터 이스라엘의 철군을 요구한다.
한편 팔레스타인인들은 1969년 이후 야세르 아라파트가 주도하는PLO(팔레스타인해방기구)에 적극 가담하여 본격적으로 무장투쟁을 전개한다. 아라파트가 1974년 유엔 총회에서 처음으로 연설하면서 PLO는 국제사회가 공인하는 팔레스타인의 유일한 대표기구로 부상한다. 1976년 1월 유엔 총회는 이집트, 요르단, 시리아가 제출하고 당사자인 PLO가 지지한 ‘1967년 이스라엘이 점령한 지역에서 팔레스타인 국가 수립‘을 요구하는결의안을 논의한다. 팔레스타인 전 지역을 영구히 장악하려는 이스라엘에게는 위기 상황이었으므로 이스라엘은 회의 참석을 거부한다. 

이 결의안은 유럽, 소련, 이슬람 국가의 지지를 받았으나 미국에의해 거부된다.
국제사회가 ‘두 국가의 해결책‘을 강력히 요구하면서 1978년 9월 캠프 데이비드에서 미국 대통령 카터의 중재로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과 베긴 이스라엘총리가 협상 테이블에 앉는다. 이 협상에서 팔레스타인 자치에 관한 ‘캠프 데이비드‘협정이 맺어진다. 협정에서 미국과 이스라엘은 점령지에 자치정부를 세운다는 방향으로 입장을 바꾸어 ‘팔레스타인 국가건설‘이라는 당면한 위기를 모면한다. 사실 캠프 데이비드 협정에 임하는 이스라엘의목표는 국제사회가 요구하는 팔레스타인 국가의 수립을 저지하고, 서안과가자 지역을 이스라엘의 관할 하에 두는 것이었다. 이스라엘은 협정에서 서안과 가자 지역에 세워질 자치정부의 주민은 팔레스타인인들뿐만 아니라이 지역의 이스라엘 정착민들도 포함한다고 명시한다. 이 협정에서 제기된 팔레스타인 자치는 국가로서의 지위와는 거리가 멀었고, 또한 팔레스타인인의 대표기구인 PLO에게는 어떤 역할도 부여되지 않았다. 당연히 PLO는이 협정을 거부한다. 그러나 이 협정으로 이스라엘의 발걸음은 더욱 빨라진다. 언젠가는 도래할 점령지에 대한 최종 지위 협상에서 이스라엘이 유리한고지를 선점하려면 이스라엘 정착민들을 늘리고 조직화해야 했다.
캠프 데이비드 협정 이후 두 국가 건설‘을 요구하는 국제사회의 목소리
는 한동안 사라진다. 이스라엘은 가자, 동예루살렘 서안 지역으로 이스라엘 정작민들의 이주를 더욱 강력하게 추진하며 팔레스타인들의 토지를 몰수해간다. 이스라엘의 점령 정책은 팔레스타인들의 강력한 저항을 불러 일으킨다.1987년 말부터 시작된 1차 팔레스타인 민중봉기로 이스라엘의 억압정책이 전 세계에 폭로되면서 이스라엘은 국제사회의 거센 비난에 직면한다.

1988년 팔레스타인에서는 이슬람 무장단체 하마스가 창설되어 PLO 와 쌍벽을 이루면서 대 이스라엘 투쟁을 주도한다. 한편 PLO는 1988년 동예루살렘을 수도로 하고 가자와 서안 지역으로 구성되는 도리 있인 국가를 선언한다.
팔레스타인인들의 강력한 저항에 직면한 이스라엘은 결국 1992년부터PLO와의 협상에 나선다. 이스라엘은 PLO를 상대로 자치정부 건설을 약속해주는 대신 팔레스타인 민족국가 건설운동을 무력화하겠다는 속셈을 가지고 협상에 임한다. 그 결과 1994년 PLO의 파벌들 중에서 파타가 주도하는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가자와 서안 일부 지역에서 수립되고, 이스라엘에 대항하는 무장 공격을 중단하겠다는 공동선언문도 이끌어낸다.
그러나 8년간이나 진행된 협상 기간 동안 이스라엘은 이중적인 정책을 고수한다. 평화협상을 진행하면서 한편으로는 이스라엘 정착민들을 지속적으로 이주시킨다. 이 기간에 동예루살렘과 서안 지역으로 이주한 이스라에 정착민들은 두 배 이상이나 증가한 40만 명을 넘어선다. 이스라엘은 정착촌들과 이스라엘 내부를 잇는 관통도로를 건설하여  팔레스타인 도시와 마을을 조각내고, 팔레스타인인들이 거주하는 마을과 도시를 잇는 간선도로에는 검문소를 세워 팔레스타인인들의 출입을 철저히 통제한다. 그 결과 팔레스타인인들은 각 도시와 마을 단위로 완전히 분리된 채 갇혀 살고 있다. 통행금지가 수시로 발령되고, 검문소 앞에서 몇 시간씩 기다리며 통행허가를 받아야 하는 상황이 팔레스타인들의 일상이 되었다.

2000 년 최종 지위 협상 자리에서 팔레스타인은 정착촌 제거, 난민 귀환, 동예루살렘 주권문제, 1967년 경계 회복 등을 이스라엘에 요구하나 이스라엘은 거부한다. 오히려 이스라엘은 점령지 일부 합병, 수자원 장악 영공 장악, 팔레스타인 국가의 비무장화, 모든 경계를 완벽히 통제할 권리 등을 요구하고 주장한다.
결국 8년간 지속된 팔레스타인 - 이스라엘 협상은 2000년 7월 결렬된다.
희망이 봉쇄된 팔레스타인에서 자살폭탄공격을 동반한 제2차 민중봉기가 발발한다. 이스라엘은 민중봉기를 막는다는 구실로 2002년부터 서안 지역에 총 길이 800 킬로미터, 높이 8미터의 콘크리트 분리장벽을 건설하기 시작한다. 이 장벽 건설로 동예루살렘과 서안은 완전히 분리되고, 팔레스타인인들은 조상 대대로 사용해오던 우물과 농장이 이스라엘 쪽으로 넘어가면서 자신들의 농장에 접근할 수 없게 된다. 심지어 식수조차 부족해서 이스라엘로부터 물을 사먹어야 하는 형편에 놓인다.
2004년 7월 국제사법재판소는 ‘1967년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점령한 지역인 동예루살렘, 서안, 가자 지역은 국제법을 위반한 점령지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이들 지역에 건설한 정착촌도 국제법 위반이다. 이스라엘 분리장벽은 팔레스타인인들의 인권을 심각하게 침해한 것이다. 이스라엘은 장벽건설로 피해를 입은 팔레스타인인들에게 보상을 하고 수용한 토지를 받해야 한다‘고 판결한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아랑곳하지 않고 점령 정책을 더욱 강화해 나간다. 샤론 이스라엘 총리는 2005년 가자의 정착민 8. 000명을 서안 정착촌지역을 대거 이주시키며 가자 철수는 서안 지역을 더욱 확고하게 장악하기 위한 조치라고 밝혔다.

1967년 전쟁 이후 2005년 현재까지 동예루살렘에 20만 명, 서안에 23만 명의 이스라엘 정착민들이 이주해 있고, 동예루살렘과 서안 지역 정작촌들은 지속적으로 확대되고 있다. 2003년 이후 제2자 팔레스타인 민중봉기가 심사 소강상태에 들어갔음에도 이스라엘의 야만적이고 공세적인 점령 정책은 해를 기듭할수록 강회되고 있다.
2006년 총선에서 팔레스타인들은 이스라엘의 가공할 점령정책을 막지못한 책임을 파타 자치 정부에게 물었으며, 그 결과 이슬람 정치세력인 하마스가 압도적으로 승리한다. 하마스 정부는 팔레스타인 영토의 22퍼센트인 동예루살렘, 서안, 가자에 민족국가 수립을 목표로 다음과 같은 사항들을 이스라엘에 제안하고 있다. 1967년 전쟁 이전의 휴전선(1948년 전쟁 결과 만들어진 휴전선)으로 팔레스타인 - 이스라엘의 국경 획정, 이스라에 정작촌의 완전한 철거, 동예루살렘의 주권 회복, 1948년 점령된 땅(현 이스라에 영역)으로부터 추방된 난민 포함 500만 명에 이르는 팔레스타인 난민 귀환, 1만 명에 이르는 이스라엘 감옥의 수감자 석방, 이스라엘 군의 완전한철수,
그러나 1967년 점령 이후 이스라엘의 주장은 확고하다. 동예루살렘의 서안, 가자 지역이 점령지가 아니라 이스라엘 국가 영역이고, 단지 이스라엘 국가 내에서 팔레스타인인들과 분쟁이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점령지의 소유권을 주장하면서도, 이곳에 조상 대대로 살아온 팔레스타인들에게는 이스라엘 시민권을 주지 않고 추방하는 인종 차별정리하게 시행하고 있다. 현재 팔레스타인들은 이스라엘과 미국이 앞장선 경제봉쇄정책으로 식량조차 부족한 지경에 이르러 생존권마저 크게 위협받고 있다.

팔레스타인인들은 자신의 생명 외에 이스라엘에게 대항할 만한 어떤수단도 갖고 있지 않다. 그런데도 미국을 비롯한 서방세계뿐만 아니라 주변의 권위주의적인 아랍 정권들은 자국의 이익을 내세워 팔레스타인을 외면하고 이스라엘과 연대하는 기만적인 정책을 펼치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재봉사의 등장으로 마을은 무질서한축제 분위기에 휩싸였다. 예쁘든 밉든, 부자든 가난뱅이든, 젊든 늙었든 상관없이 여자들은 모두 옷감과 레이스, 리본, 단추, 재봉실, 평소에 꿈꿔온 디자인을 가지고 서로 경쟁을 벌였다. 뤄와 나는 여자들이 가봉을 하는 장면을 보면서 그들이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흥분과 조바심과 가슴 저 밑바닥에서 터져나오는 거의 본능적이라 할 욕망에 질색하고 말았다.
그 어떤 정치제도나 경제적 압박도 여자들에게서 이 세상만큼이나 오래된, 아마도 모성애만큼이나 오래됐을, 옷을 잘 입고 싶은 욕망을 빼앗지는 못했다.
 저녁 무렵, 마을 사람들이 가져온 달걀과 고기, 야채, 과일들이 흡사 제사에 쓰일 제물처럼 우리 집 부엌 한구석에 쌓였다. 대부분이 여자들이었으나, 그틈에 혼자 혹은 몇 명씩 무리를 지은 남자들도 기여있었다. 

그와 동시에 프랑스 소설의 영향임에 분명한, 눈에 잘 띄지 않으면서도 자연스러운 환상이 마을 사람들의 새옷에 뱃사람 디자인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어깨 뒤로네모난 것을 드리우고 앞으로는 삼각으로 접은 천을 매듭 짓게 해서 바람에 펄럭이도록 한 세일러복을 입은 우리 마을 사람을 보았다면 뒤마 자신도 무척놀랐을 것이다. 마을 사람들의 옷에서는 거의 모두지중해의 냄새가 풍겨났다. 뒤마의 문하생이 되고만 늙은 재봉사가 만든, 선원풍의 파란 바지에 단 널찍하고 헐렁한 주머니 덮개는 여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거기에서는 꼬뜨다쥐르의 향기까지 풍기는것 같았다. 재봉사는 우리에게 가지가 다섯 달린 닻을 그리게 했는데, 그것은 그해 ‘하늘긴꼬리닭‘ 산골여자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모티프가 되었다. 용케도 조그만 단추에다 금실로 닻을 수놓은 여자들도 있었다. 그런 반면 우리는 뒤마가 세밀하게 묘사한 깃발에 수놓은 백합이라든가, 몽테크리스토의 약혼녀 메르세데스의 코르셋과 원피스 같은 것들은 제봉사의 딸을 위해 비밀로 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식민지 말기 친일문학의 대명사린 잡지 <국민문학>을 주재했던 최재서는 해방 이후 일체의 문필 활동을 접고 있었다. 그러다가 한국전쟁을 맞으면서 <메카-더 선풍>(향학사,1951)과 <영웅 메카-더 장군전>(일성당서점,1952) 등 두 편의 맥아더 전기를 각각 집필•번역하면서 공적인 담론장에 재등장한다.

 이처럼 한국전쟁을 거치며 친일의 과오를 반공으로 씻어내고, 그는 자유민주주의 진영의 정치적 주체로 갱생할 수있었다. 두 편의 맥아더 전기는 이를 위한 일종의 글쓰기의제의였다. 이후 최재서는 1950년대 《사상계》와 《새벽>의 중요 필진으로 활약했으며, 4·19 혁명 당시에는 학생들의 희생을 기리는 에세이를 통해 민주주의의 옹호자로 거듭나게된다. 최재서의 사례에서 보듯이, 한국전쟁은 많은 친일인사들이 일본이라는 과거를 지우고 미국/서구라는 새로운 진영에 완전히 안착하게 된 중요한 계기이기도 했다. 그렇지만이 새로운 시민은 냉전과 반공으로 제약된 반쪽짜리 세계시민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