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냐는 기차에서도 잠들지 못하고 줄곧 딸과 남편에게 펼쳐지고 있는 멋진 삶에 대해, 자기 주위에서 피어나는 젊음의 만개에 대해 생각했다.
다 지나가버린 자신의 삶이 안타까웠다. 지나간 날들에 참 행복했었지하는 생각도 스쳐 지나갔다. 소네치카는 흔들거리는 기차에 몸을 맡긴채 앞으로 20년 후에 찾아올 틱 장애를 예고라도 하듯 늙은이처럼 고개를 까닥거렸다. - P74


의미심장한 만남들이 이상한 우연의 일치들이, 그리고 꼭 들어맞는놀라운 일들이 삶에 가득하긴했지만 메데야는 우연을 믿지 않았다. 언젠가 만났던 사람이 많은 세월이 흐르고 나서 운명의 물길을 돌리기 위해 되돌아오곤 했다. 실들이 늘어나다가 만나 고리들을 만들었고, 해가갈수록 더욱 선명해지는 무늬를 이루었다. - P9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흔히 테러집단에 대해 규정하기를,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영웅과 같은 광신도라고 한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테러집단을 악마로 보는 관점의 실상을 폭로하는 것이다. 이것이 더 강하고 효과적이다. 오래전 니체는 서구 문명이 어떻게 최후의 인간이 등장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는지를 간파했다. 최후의 인간은 열정도 없고 헌신도 하지 않는 무심한 존재다. 사는 데 지쳐버려 꿈도 꿀 수 없는 최후의 인간은 위험을 감수하지 않은 채 오직 안전과 편안만을 추구한다. 이것은 타인에 대한 관용을 보여주는 태도이기도 하다. " 독약도 조금만 먹으면 때로 달콤한 꿈을 일으킨다. 독약을 많이 먹으면 결국 편안하게 죽는다. 최후의 인간은 낮에도 즐겁지 않고 밤에도 즐겁지 않다. 그들은 건강을 염려한다. 최후의 인간은 눈을 깜박이며 ‘ 우리는 행복을 발견했어요‘ 라고 말한다." - P17

결국 다음과 같은 현상이 나타날 것 같다. 무엇이든 허용하는 제1세계가 자신에게 반발하는 근본주의자에게 맞설수록, 물질과 문화의 부를 향유하며 만족스럽게 사는 것과 초월적 대의에 생명을 바치는 것의 대립도 커질 것이다. 이 적대관계는 니체가 말한 "수동적" 허무주의와 "능동적" 허무주의의 대립을 뜻할까? 우리 서구인은 이제 니체가 말한 최후의 인간이다. 우리는 그저 일상의 평범한 쾌락에 빠져 있다.
반면 이슬람 근본주의자는 기꺼이 모든 것을 걸 수 있다. 그는 스스로를 파괴할 때까지 싸운다.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가 쓴 「재림」은 오늘날 우리가 처한 궁지를 완벽하게 기술한 것 같다. "가장 나은 인간은 신념을 모두 잃어버렸지만, 가장 나쁜 인간은 열정이 넘친다." 예이츠는 빈혈에 걸린 사람처럼 창백한 자유주의자와 열정이 충만한 근본주의자의 대립을 탁월하게 기술했다. "가장 나은 인간"은 상황에 개입할 능력이 더는 없는데, "가장 나쁜 인간"은 인종주의와 종교적, 성차별적 광신에 적극 가담한다. - P17


하지만 근본주의를 신봉하는 테러집단이 정말 그런 인간들일까? (티베트 불교도와 미국 아미시 공동체[현대문명과 단절한 채 자신들만의 전통을 유지하며 생활하고 있는 침례 종파 집단의 일종] 같은 진정한 근본주의자에게서 쉽게 찾을 수 있는 특징도 유독 그들에게는 없다. 진짜 근본주의자에게는 시기도 원한도 없다. 그들은 불신자가 사는 방식에 전혀 상관하지 않는다. 오늘날 소위 근본주의자가 진리로 가는 길을 찾았다고 정말로 믿는다면, 그는 왜 불신자에게 위협을 느끼는 것일까? (그는 왜 불신자가 위협한다고 느끼는 것일까? 왜 근본주의자는 불신자를 시기하는 것일까? 불교도가 쾌락주의를 신봉하는 서구인을 만날 때, 그가 서구인을 정죄하는 일은 거의 없다.
불교도는 쾌락주의자가 행복을 갈구할수록 불행해진다고자상하게 지적할 뿐이다. 유사 근본주의자이자 테러리스트는 진짜 근본주의자와 반대다. 죄로 얼룩진 불신자의 삶은그를 방해하고 괴롭게 한다. (심지어)그는 불신자처럼 살고 싶어하는 유혹에 시달린다. 여기서 우리는 느낄 수 있다. 죄인과 싸우는 사람은 사실 자기 자신이 느끼는 유혹과 싸운다. - P18

예이츠가 제시한 진단이 부족하다는 것이 여기서 드러난다. 테러리스트가 보여준 열정은 오히려 그에게 진짜 확신이없음을 증거한다. 그가 가진 믿음이 얼마나 연약했기에 풍자 주간지에 실린 한심한 만화를 보고 위협을 느꼈겠는가!
이슬람 근본주의가 휘두른 폭력은 자신이 남보다 우월하다는 확신에서 나오지 않았고, 세계를 소비시장으로 만들려는문명에 맞서 문화적·종교적 정체성을 지키려는 욕망에서 나오지도 않았다. 이슬람 근본주의자를 괴롭히는 문제는 무엇일까? 우리가 그들을 열등하게 여기기 때문에 괴로워하는가? 아니다. 그들이 스스로 열등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문제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보다 우월하지 않다고 생각하면서 정치적으로 올바르다고 확신하지만, 그 태도가 거꾸로 그들을더 화나게 하고 복수심을 품게 한다. 여기서 요점은 문화 차이가 아니다. 그들이 정체성을 지키려고 애쓴다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거꾸로 근본주의자는 이미 우리와 비슷하며, 우리가 세운 기준을 슬그머니 이용해 자신을 판단한다는 것이요점이다. 역설적으로, 자신이 우월하다는 진짜 ‘인종주의‘
다운 확신이 이슬람 근본주의자에게는 부족한 것이다.
최근 이슬람 근본주의의 추세를 보면, 발터 벤야민의 오래된 통찰이 옳았음을 알 수 있다. "하여간 파시즘이 부상한다는 것은 혁명이 실패했음을 입증한다. "
즉 파시즘의 부상은 좌파가 실패했음을 뜻한다. 그러나 파시즘의 부상은 동시에 좌파가 미처 동원할 수 없었던 혁명적 잠재려과 불만이 있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 P19

어떤가? 자유주의는 근본주의자의 맹습에 맞서 자유와 평등을 지킬 만큼 강하지 않다. 이것은 역설이다. 자유주의에 실제로 내재하는 결함에 대한 반응이 바로 근본주의다. 물론 근본주의는 잘못된 반응이며 사태를 신비화하는 반응이다. 이런 이유로 자유주의는 끊임없이 근본주의를 양산한다. 자유주의를 내버려두면, 자유주의는 서서히 붕괴해버릴것이다. 갱신된 좌파만이 자유주의의 핵심 가치들을 구할수 있다.
자유와 평등이라는 유산을 유지하려면 급진 좌파는 형제처럼 자유주의를 도와야 한다. 이렇게 해야만 근본주의를물리치고, 근본주의의 뿌리를 잘라낼 수 있다.
샤를리 에브도 테러에 직면하여 사고한다는 것은 무엇이든 허용하는 자유주의자의 거들먹거리는 자족을 떨쳐낸다는 뜻이다. 그리고 자유주의적 방임과 근본주의의 대립은 결국 가짜 대립임을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두 세력은 대립하는 것 같지만 상대를 전제하면서 서로를 만들어낸다. 호르크하이머는 이미 1930년대에 파시즘과 자본주의의 관계를 논했는데, 자본주의를 비판하지 않으려는 사람은 파시즘에 대해 논하지 말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호르크하이머의지적은 오늘날 근본주의에도 적용되어야 한다. 자유주의적 민주주의를 비판하지 않으려는 사람은 종교 근본주의를 논하지 말아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물어야 한다. 이슬람 근본주의자는 전근대적 현상인가, 근대적 현상인가? - P21

반식민주의가  다시 부상하는 흐름 가운데 IS의 등장은 마지막 단계에 속한다.(반식민주의가 다시 떠오르면서 제1차 세계대전 후에강대국이 자의적으로 그어놓은 국경이 재조정되고 있다.) 동시에 세계 자본이 민족국가의 힘을 잠식하는 방식에 반대하는 투쟁이 전개되면서 IS가 나타났다. 그러나 (세계 자본이 가져온) 경악과 두려움을 똑같이 일으키는 주체가 바로 IS 체제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IS 정권의 공식 입장은 늘 분명하다.
국가 권력의 주요 과제는 대중의 복지를 조정하는 것이 아니다.(국민 건강을 증진시키고 궁핍을 해소하는 것이 국가 권력의주요 과제가 아니라는 말이다.) 국가 권력이 해야 할 정말 중요한 과제는 종교생활이다. 공공생활이 모두 종교법에 따라 이뤄지도록 신경 쓰는 것이 국가의 일이다. 그래서 IS는 자신이 다스리는 지역에서 벌어진 반인륜적 참상에 무심한 것이다. IS가 내세우는 국정 과제는 이렇다. "종교를 돌보면 복지는 저절로 이뤄질 것이다." 이것이 IS가 실행하는 권력과 현대 서구 국가가 실행하는, 이른바 "생명 권력의 차이다. (생명을 규율하는 권력이 생명 권력이다.) 다시 말해 IS가 다스리는체제는 생명 권력 개념을 완전히 거부한다. - P2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 역서 시리즈 가운데의 세 번째 권인 ‘중국 현대 단편소설선3‘은 1937년 7월 7일 중일전쟁의 발발로부터 1949년 10월 1일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에 이르기까지 발표되었던 단편소설 12편을 번역하여 실었다. 이 시기에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은 제2차 국공합작을 맺어 통일전선을 구축함으로써 항일투쟁에 함께 나섰다.
- P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직조공」은 하우프트만의 대표작으로, "1840년대사건의 연극"이라는 부제목이 붙은 사회극이다. 줄거리를 이루는 역사적 배경은 1844년 슐레지엔 지방의 마을인 카슈바하, 랑엔비일라우, 페터스발다우에서 있었던 직조공들의 폭동이었다. 할아버지가 이들 직조공의 한 사람이었기에, 그 사건이 작가에게 남긴 감명은 각별한 것이었다. 작품 서두에서 작가는 어렸을 때 그 이야기를 들려줬던 아버지께 이 작품을 바친다고 말하면서 감회를 술회하고 있다. 처음에 작가는 현실감을 부여하기 위해 완전한 슐레지엔 방언으로 작품을 발표하였는데(De Waber, 1891), 곧이어 광범위한 관객을위하여 좀더 표준어를 도입하여 발표하였다(Die We-을ber, 1892).
- P16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작가 게르하르트 하우프트만(1862-1946)은 베를린에서 멀지 않은 슐레지엔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예나 대학에서 자연과학을 전공하면서 다윈과 헤켈의 진화론, 그리고 당대를 풍미하던 사회개혁론을 접하게 되었다. 본격적인 창작활동기는 1889년부터 1차대전사이인데, "특히 드라마 영역에서 풍부하고 다재다능했던 그의 탁월한 업적에 대해 1912년 노벨 문학상이 수여됨으로써, 현대드라마에서 그의 명성은 세계적인것이 되었다.
- P15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