숄로호프의 대부분의 작품의 주인공은 카자크이다. 특히『돈 강 이야기」와 「고요한 돈 강』은 볼셰비키 혁명과 내전에 휩쏠린 돈 강 카자크들의 비극적인 운명을 직접적으로 다루고있다. 그러므로 숄로호프의 작품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카자크의 역사, 전통, 생활 방식을 알 필요가 있다.
우선 ‘카자크‘란 단어의 어원을 알아보자. 유명한 사전 편찬자인 V. 달리는 ‘카자크‘라는 단어가 ‘방랑하다‘, ‘떠돌아다니다‘를 의미하는 중앙아시아아의 ‘카즈마크‘에서 나왔다고 생각한다. - P268

 유목 생활을 한 중앙아시아의 키르기스인들은 스스로를 ‘카즈마크‘라고 불렀다고 한다. 한편, 유명한 러시아의 사학자인 V. 클류체프스키와 N. 코스토마로프는 이 단어가 러시아인들과 우크라이나인들이 러시아의 남쪽과 남동쪽을 집중적으로 식민지화했던 14~15세기에 타타르인들로부터 차용되었다고 생각한다. P. 골루보프스키 같은 사학자는 폴로베츠인들사이에서 ‘수호자‘, ‘경비원‘으로 사용되었던 ‘카자크‘란 단어가러시아어로 사용되었다고 생각한다. 20세기 초에는 기존의 견해들을 뭉뚱그려 ‘카자크‘란 단어가 몽골어 ‘코‘(갑옷)와 ‘자흐‘
(경계, 국경)에서 나왔고, 그 의미는 ‘국경의 수호자‘라는 의견이 제시되었다.
15~16세기 무렵의 모스크바 러시아 시대에는 국경선(불가강 중류의 랴잔과 툴라에서 드네프르 강까지)을 지키기 위해 고용되어 군무에 종사했던 사람들이 카자크로 불렸다. 국경선 남쪽에는 국경을 수비하는 카자크들의 독립 촌이 존재하기도 했다. 16~17세기에 군무에 종사한 카자크들은 국경선의 남동쪽으로 국토를 확장하고, 시베리아와 극동을 정복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이 시기에 군무에 종사하던 카자크들과 함께 스스로를 ‘떠돌이‘라고 불렀던 ‘자유로운‘ 카자크들이 있었다. 이들은 국가의 기존 질서에 불만인 사람들, 모험가들, 돈 벌러 돌아다니는 사람들, 지주의 횡포를 견디지 못하고 도주한 농노들,
라스콜리니키(구교신자들)로 군무에 종사하는 카자크들과 뒤섞여 일정한 거처나 사유재산이 없이 돈 강, 테레크 강, 야이크강 유역에서 카자크 공동체를 이루며 자유롭게 살면서 이웃한공국과 유목민들과 항상 싸움을 했다.  - P269

카자크 공동체에서는 누구나 평등하게 땅을 공동으로 경작했고, 세금이나 연공도 없었다. 그들은 임기제의 아타만(대장)과 원로회의 의원을 뽑았다. 평상시에 아타만은 카자크들의 뜻을 받들고 실행했지만 전쟁 시에는 무제한의 전권을 행사했고, 원로회의는 법이 아니라 카자크의 전통과 풍습으로 공동체를 운영했다. 그러나 일련의 농민 봉기(스테판 라진 봉기, 푸카초프 봉기, 불라프 봉기)가 일어나자 러시아 정부는 18세기 초부터 아타만과 원로회의 의원선출 제도를 폐지하고 그들을 군 계급으로 서열화하고, 아타만에 의한 카자크군 지휘권을 점차 박탈하기 시작했으며, 카자크의 상층부에게 러시아 귀족의 권한을 부여하여 회유하기도했다. 러시아 정부는 카자크 군대를 개혁하면서 국가의 영토확장ㅇ에 용감하고 호전적인 카자크들을 이용했다.
1861년 농노해방 이후 많은 농민들이 일자리를 찾아 러시아의 남동 지역으로 이주하면서 카자크 촌에 급격한 변화가 일어난다. 카자크 촌에 분여지가 증대하면서 부자와 가난한 사람이 생기고, 관직을 얻은 카자크가 생기고, 군무에 종사하지않는 농민 출신의 비카자크인이 부유한 카자크에게서 땅을 임대하여 경작하면서 카자크 촌에는 계층 분화가 빠르게 진행된다. 이후에 땅을 둘러싼 카자크 계층들 간의 불화, 카자크의 가부장적인 전통과 풍습을 지키려는 노인 세대와 보다 자유분방한 젊은 세대 사이의 갈등이 내연된다. 결국 볼셰비키 혁명이후 내전이 발발하면서 카자크들은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좌우(적위군과 백위군)로 갈라져 피비린내 나는 동족상잔의 비극에 휘말리게 된다. - P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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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바뉴시카가 몇 걸음 물러서며 짧은 갈지자 걸음으로 걷다가 날 향해 얼굴을 돌리고 작은 장밋빛 손을 흔들었다. 갑자기 부드럽지만 날카로운 짐승의 앞발이 내 가슴을 짓누르는 듯했다. 나는 급히 얼굴을 돌렸다. 그렇다, 수년 동안 전쟁을 치르면서 머리가 희끗해진 중년의 남자들이 꿈속에서만 우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현실에서도 울고 있다. 지금 중요한 것은 제때에 얼굴을 돌리는 일이다. 그리고 지금 가장 중요한 건아이의 마음에 상처를 주지 않는 것이고, 그대의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뜨겁고 인색한 남자의 눈물을 아이가 보지 못하도록하는 것이다.………….

인간의 운명 - P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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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지 않는 책


이따금 사람들은 책 밑에서 토론을 한다. 나무 그늘 밑에서 토론을 하듯.
그럴 때 책 속의 언어들은 바람처럼 우리들 내부로 시원하게 불어오기도 하고태풍처럼 비바람을 몰고 오기도 한다.

대부분의 삶이 책 속에서 이뤄지는 사람들은 제 자신을 애기하듯 책을 읽고
읽은 책들로 은밀히 자신만의 정원을 꾸민다.

이따금 나는 그들의 정원에 초대되어햇빛이 아닌 다른 빛에 열광하는 꽃과 나무들 사이로어렴풋이 보이는 그들만의 비탄을 탐색한다.

아직도 그들 속에 숨쉬는 자연의 일부인 그들을 훔쳐본다.

그들에게 책은 큰 평화이기도 하고 가장 큰 불안이기도하고
끝끝내 이기고 싶은 적(敵)이기도 하지만
책 읽기란 맨얼굴로 산소를 들이마실 때처럼 자연스러워야 하는 법.

운명을 씹듯이 책들을 씹으며 자꾸만 작아지는 사람들. - P48

도움그들의 타는 입술은 무덤 같아요
혀 밑에 파묻힌 죽은 자들의 얼굴이 보이는 듯하지만
책에 대한 경의는 책에 빠진 그 사람만의 행복.

때로는 행복한 책한권 때문에
임종을 앞둔 수술대 위에서도 죽지 않는 책을 꿈꾸고 공유하고 싶은 법.

내 속에도 그런 책들이 있다.
부싯돌처럼 서로를 비비며 불꽃을 만들어내는 책. 음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이방 저방에서 불이 켜지는 책.
그들에게도 있고 내게도 있는 책.
죽지 않기 위해 자꾸만 창백해지는 새하얀 책! - P49

중독된 사람들


나는 내 몸에 쌓이는 니코틴이 좋고 타르가 좋고 카페인이 좋다 날마다 마지막 담배를 피우는 것으로 인생을 흘려보낸 제노 코시니가 좋고 담배와 섹스 중 하나를 택하라는말에 담배를 택한 루이스 브뉘엘이 좋고 죽는 순간까지 시가를 끊지 못했던 프로이트가 좋고 담배를 끊지 않으면 다리를 절단해야 한다는 의사의 말에도 아랑곳없이 담배를 계속 피운 사르트르가 좋고 니코틴 때문에 손톱이 딱딱한 나무껍질처럼 변한 자코메티가 좋고 세비야의 담배 공장에서여공으로 일했던 비제의 카르멘이 좋고 로마의 한 호텔방에서 자기 자신을 최후의 담뱃불로 불태운 잉게보르크 바흐만이 좋다 담배 한 개비를 피울 때마다 2리터의 독극물이 제몸에 쌓이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던 사람들 나는 그들이 좋다 그 습관과 그 독으로부터 비겁하게 도망치지 않았던 중독된 사람들 그들의 그 사랑스런 검은 폐가 좋다 담배와 아무 상관없이도 하루에 1분 1초도 출산 없이 지나가는 날 없고 죽음 없이 지나가는 날 없다 담배가 무서운 사람은 담배를 피우지 않으면 된다 도처에 무수히 깔린 금연 서적에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일생 동안 담배맛을 즐겼던 쉼보르스카의 시집 앞에서 오늘의 다섯번째 담배에 불을 붙이는 숙녀!
오늘은 저 숙녀와 함께 「첫눈에 반한 사랑」*을 읽어야겠다에쎄 스페셜 골드를 맛있게 나누어 피우며


*쉼보르스카의 시 제목. - P53

검은 숲


내 생의 모든 것들 네가 다 가지렴
그 뒷면 어디쯤, 혼자서도 노랗게 피어나는 민들레꽃.
그 악착같은 아이덴티티도 모두 네가 가지렴
나는 내 안에서 뭉게뭉게 피어나는 멋진 구름 아래의자 하나 갖다놓고
깊은 심심함에 아비 없이 장기 여행 떠나는 아이처럼
세상의 모든 길들 혼자 익히고 혼자 버릴게
사람들은 손을 타면 탈수록 공중에 매달린 장미 가시 같아지고
발걸음은 더욱 무거워져 하루종일 폭풍 주의보에 시달린다지
그 피할 수 없는 욕망의 고달픔도 모두 네가 가지렴어느 날 갑자기 체포되어 개처럼 칼에 찔려 죽은 요제프K*도
매일매일 안개 낀 생의 뒷면 닦고 또 닦으려다
절망 위에 쏟아진 정체 모를 기의와 기표에 눌려 압사당한 거라지
그 아픈 표지도 모두 네가 가지렴
쉬지 않고 내용에 도전하고 형식을 갈아끼워도
의도적으로 행갈이당해야 하는 사람들로 넘쳐나는 이 축복받은 거리도
모두 네가 가지렴습관적으로 피 묻혀 보여주는 왜소한 감상 저장고, - P64

64페이지에 이어서


그 불결한 발작성 무의식의 권태도 모두 다 네가 가지렴
나는 내 안에서 뭉게뭉게 피어나는 멋진 구름 아래의자 하나 갖다놓고
비상하는 힘찬 해만 모으며 사는 황홀한 새들만 골라 잡아먹는
검은 숲이나 그릴게
아주 새카맣고 아주 구슬프
어떤 용서도 없이
내 사랑! - P65

석양의 얼음공주



나는 그가 좋아 세상 물정에 어둡고 오만하고 잘난 체하는 나를 한 마리 새하얀 양으로 그려주는 그가 나는 좋아 가시 많은 장미꽃보다 헐벗은 카우보이 같은 잭 런던의 강철군화를 벽에 걸어주고 아양 떨고 매달리고 침 흘리는 개새끼들을 저멀리로 차버리는 그가 나는 좋아 호시탐탐 그의하나밖에 없는 애인이 되고 싶어 불타는 권총 한 자루와 날렵한 잭나이프를 가슴에 숨기고 보이는 대로 그의 여자들에게 뜨거운 피맛을 보여주는 나를 향해 던지는 그의 야릇한 천만 불짜리 윙크가 나는 좋아 그는 세기의 소매치기 집단 페이건보다 더 빠르게 내 마음을 훔치고 카사노바보다더 빨리 나를 군중 속으로 밀어내지만 나는 뒤집기 게임의명수 그의 수법을 쭉쭉 빨아당겨 멋진 복수를 꿈꾸는 얼음공주 그가 달콤새콤하고 쫀득쫀득한 손길로 나를 어루만질때에도 그가 세기의 영웅처럼 코트 자락을 펄럭이며 우아하게 자동차 문을 열어 그 안에 탄 여자들을 보여줄 때도 나는앙증맞은 토끼처럼 깡충거리며 겉으론 환하게 속으론 새파랗게 칼을 갈지 물론 그는 모르지 모르면서도 힘껏 가속페달을 밟으며 음산한 엑스터시 협곡을 향해 신나게 질주하는그 그는 꿈에도 모르지 얼음은 녹을 때 더 치명적이고, 더아리고, 더 정직해지고, 더 뜨겁다는 걸 죽을 것 같은 쾌감이 크면 클수록 내가 더 자주 더 빨리 활활 타오르는 불꽃들을 비웃는 얼음공주로 변해간다는 걸 비웃음은 붉은색으로만 치장된 화려한 매장 어떤 것을 골라도 아주 지루하고 건 - P66

66페이지에 이어서


조해지지 비루먹은 개처럼 역겹고 추해지지 온갖 감정이 넘쳐나는 문체 뒤에 숨어 있는 심장의 메마름‘ 나는 그 서늘한 메마름으로 서서히 내게서 그를 죽일 거야 새하얀 양가지 많은 장미, 헐벗은 카우보이. 달콤새콤하면서도 쫀득쫀득한 손길. 텅 빈 새파란 하늘, 그 모든 것을 발갛게 물들이며 죽어가는 저 잔인한 석양처럼! - P67

황홀한 침법
--------사임 수틴


그에게 필이 꽂혀버렸어. 언제나 해진 외부 주머니에 손을 넣고 구부정하게 도심을 기웃거리는 씻어지게 가난한헌옷 수선공의 열번째 아들. 바로 1분 전의 일이라도 지나간것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고, 친구라곤 오로지 피범벅이 되어 쓰러지는 권투장의 아우성과 고함소리, 외롭고 퉁명스럽고 거칠고 지저분한, 늘 허기진 위통에 시달리는 파리한얼굴의 남자, 동시대 작품들에겐 아무런 흥미도 없고, 플랑드르 대가들의 그림이나 쿠르베, 샤르댕, 랭브란트 그림 앞에선 무아경이 되는, 밤새 지붕 틈새로 새어든 빛 같은 그에게 나도 모르게 필이 꽂혀버렸어. 아마도 그가 그린 붉은색때문일 거야. 화폭을 가득 채운 강렬하면서도 비극적인 붉은색, 나는 그보다 더 칠흑 같은 빛을 보지 못했어. 그보다더 크게 울부짖는 열림을 보지 못했어. 내 옆의 누군가가 감자기 나를 움켜쥐는 뜨거운 손 같은, 불꽃으로 달려드는 나방처럼 나도 모르게 그에게 필이 꽂혀버렸어. 그건 마치 죽은 자들의 왕국으로 침범해 들어가 그들의 영혼을 황홀하게만지는 것과 같았어. 한 번도 살아보지 못한 아주 깊고 오래된 집 앞에 영원히 혼자 서 있는 듯한!
- P69

아비뇽의 처녀들



아비뇽의 처녀들은 촉촉이 젖은 살갗 위에
옷 대신 캄캄한 밤을 입는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더 빛이 나는 아비뇽의 처녀들은
남이 입던 신의 축복 따위는 청동거울 속에 집어넣고
당신 때문에 활활 사랑이 불타오른 척
당신 머리 위를 노래하는 새처럼 날아다닌다

참으로 아름다운 아비뇽의 처녀들은
한 여인이면서 다섯 여인 몫의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어
이 세상에 어떤 美가 존재하는지 어떤 시인이 그 美를 찬양하는지
아무런 관심이 없다

오로지 당신 눈빛과 마주치고
그 눈빛에서 절망 대신 환희가 솟아오르면
화창한 주말 날씨의 해변처럼
따뜻하고 부드러운 자궁을 한껏 열어
당신을 품고 당신을 낳을 뿐

한 번도 누구누구의 정식 연인이 되어본 적 없는 아비뇽의 처녀들은
홀로 있을 때나 함께 있을 때나 발가벗어 그림자 진 당신영혼에 - P72

기쁘게 은방울꽃과 데이지꽃 수를 놓으며
서둘러 짐 챙겨 떠나는 이 세상 모든 이별의 왈츠가이제는 당신 마음속에서 끝나기를 곧 끝나버리기를 기다린다

캄캄한 밤을 달래는 푸른 달빛이 서서히 서쪽에서부터 차올라오듯이 - P73

위대한 양파



아버지의 외박이 일주일째 계속되던 날, 어머니는 양파를까자고 했다. 양파 중에서도 가장 어리고 독한 것들만 골라오라고 했다. 나는 광주리 가득 양파를 담아왔다. 양파를 까면서 우는 건 자연스런 일이므로 눈물 콧물 흘려가며 열심히 양파를 깠다. 껍질이 벗겨지면서 드러나는 양파의 눈처럼 희고 예쁜 속살은 언제 봐도 신기했다. 한참 그 美에 빠져 있다 문득 어머니를 올려다보니 어머니도 울고 있었다.
온몸이 울음바다로 변해 있었다. 하지만 그 눈물은 양파 때문이 아니라 일주일째 집을 비운 아버지가 만든 진짜 눈물이었다. 어린 눈에도 그 눈물이 너무나도 아파 나는 못본척숨죽이며 양파만 깠다. 눈물 콧물이 떨어져도 가만히 있었다. 어머니가 왜 우는지, 어머니의 설움이 무엇인지 알기에꼼짝도 않고 양파만 깠다. 아, 어머니는 저렇듯 남몰래 흘려야 할 눈물이 있을 때, 남몰래 터뜨려야 할 설움이 차오를때 이렇게 양파를 까며 우신 거구나! 나는 양파가 내심 고마웠다. 어머니는 양파를 까면서 울고 깐 양파를 썰면서도 울었다. 그 때문인지 눈물 젖은 하얀 양파가 프라이팬에서 황갈색으로 익어가며 내뿜는 향기는 무어라 말할 수 없이 달달하고 먹음직했다. 온 마음이 깨끗해지는 기분이었다. 채소 중의 채소, 양파는 정말 위대했다. 어머니의 아픔을 모조리 눈물로 씻겨내고는 다시 평심(心)의 세계로, 다시 우리 어머니로 말끔히 되돌려놓아주었다. - P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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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렌지


시든, 시드는 오렌지를 먹는다
코끝을 찡 울리는 시든, 시드는 향기
그러나 두려워 마라
시든. 시드는 모든 것들이여
시들면서 내뿜는 마지막 사랑이여
켰던 불 끄고 가려는 안간힘이여

삶이란 언제나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될 때에도
남아 있는 법

오렌지 향기는 바람에 날리고
나는 내 사랑의 이로
네 속에 남은 한줌의 삶
흔쾌히 베어먹는다 - P10

때로는



아주 오래된 지도

지구가 둥글다는 걸 몰랐던 시절의 지도

때로는 그런 지도 위에서 살고 싶어질 때가 있다.

지구가 끝나는 곳이 두 눈에 보이고

그곳으로 곧장 걷고 또 걸어가기만 하면

그 끝에 가닿을 수 있는

그래서 다시는 처음으로 되돌아갈 수가 없는

뛰어내리기만 하면

몇 시간이고 몇 날이고

하염없이 떨어지다

결국

무(無)가 되는 - P16

16페이지 이어서------


무한이 되는

때로는 그런 지도 위에서 살고 싶어질 때가 있다

너무나도 간절하게 - P17

읽어줘요. 제발



마르크스가 죽은 해 카프카는 태어났지만
카프카가 죽은 해 나는 태어나지 못했어요
입 밖에 내지 못할 어둠 속에 그냥 누워서
입속에서 죽어버린 내 사랑만 탓하고 있었어요

마음 던질 시간도 없이
마음 모을 시간도 없이
날마다 마음에다 벼랑만 쌓았어요
노란 튤립처럼 머리를 꼭 닫고 있었어요

서로 뒤얽힌 운명처럼 뒤얽힌 머리로 뭘 하겠어요?
생에 침을 뱉고 그 속에 꼭꼭 숨어서
금방 구워낸 일곱 색깔 무지개처럼
두 눈 속에 빠뜨린 태양만 쪼아대고 있었어요

아무리 나를 아끼려고 해도
무수히 발길질해대는 내 자궁 안의
불온한 버릇

-----계속해서 읽어줘요. 제발

타버린 그대 마음속 지독한 탄내 같은 시집(詩集)! - P25

아무르장지도마뱀


나는 한때 사랑에 빠졌지요
녹색 넥타이를 맨 남자
언제나 발코니 끝에 서서
먼산 바라보듯 나를 바라보던 남자
나는 그게 남자들의 본성인 딴생각인 줄도 모르고내게 없는 큰 장점이라 생각하여
오랫동안 그 모습에 경탄하며 바라보았죠

그러다 아무르장지도마뱀을 발견했죠.
녹색 넥타이를 맨 그 남자와 너무나 닮은 도마뱀
침대나 식탁 위에선 분홍 혀를 날름거리며 온갖 아양을떨다가
궁지에 몰리거나 다급해지면
그 꼬리 잡힐까봐 마구 흔들어대다
급기야는 제 꼬리 댕강 잘라놓고 부리나케 도망치는 남자

나는 한동안 그 남자와 사랑에 빠졌지요
아무르장지도마뱀이 알을 까고 새끼를 어루만질 때 보이는
그 다정함과 늠름함이 너무 사랑스러워
내 발목이 퉁퉁 붓는 줄도 모르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노래만 부르는 귀뚜라미들을 잡아
그 남자 앞에 제물로 바쳤지요 - P26

페이지 26의 시에 이어지는 페이지


그러나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
그 남자가 맨 녹색 넥타이가 분홍 넥타이로 바뀌었을 때
나는 울면서 내가 키우던 도마뱀들의 꼬리를 모두 잘라
뒷산에 내다버렸지요
인간이 파충류와 사랑에 빠지다니!

아무르장지도마뱀 같은 그 남자는
이제 새 꼬리 분홍 넥타이를 매고
마치 자신이 아무르장지도마뱀이 아니라는 듯
온 마을 온 시내를 미끄러지듯 싸돌아다니고 있어요

아무리 잘라내고 또 잘라내도 다시 자라는
얄미운 도마뱀 꼬리 같은 분홍 넥타이를 매고
아주 신나게 아주 의기양양하게! - P27

벌거벗은 도시



나는 벌거벗은 도시에 산다
잠들 때도 혼자
깨어날 때도 혼자다

나는 혼자서 오리엔테이션을 하고
오리엔테이션을 받는다

혼자를 둘로 쪼개고
둘을 넷으로 쪼개고
넷을 여덟으로 쪼개고...………

그런 노래를 작곡하고
그런 노래를 부른다

누군가가 죽고, 또 누군가가 죽고. 또 누군가가 죽어 나가는••••••
이 도시가 너무나 슬프고 아파

나는 혼자서 집을 짓고
운하를 만들고 교회를 세우고
마구간을 짓고 식품점을 연다

그러곤 내가 아는 이름들을 그곳에다 붙인다. - P44

44페이지에 이어서


이름을 하나하나 부를 때마다
그곳에선 불이 켜지고
달빛보다 환한 불이 켜지고

혼자가 둘로 쪼개지고
둘이 넷으로 쪼개지고
넷이 여덟으로 쪼개지고…………

내 안으로 모여들어 쌓이는
무수한 모래알들

나는 그 모래알들을 모아
다시 집을 짓고
운하를 만들고 교회를 세우고
마구간을 짓고 식품점을 연다

결코 끝난 적 없는, 끝이 없는
그런 도시를

혼자서 지어내고
혼자서 듣고
혼자서 노래 부른다 - P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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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향은 이몽룡과 상관없이 ‘자신을 위해‘ 저항했다. 이몽룡을 사랑했지만 이몽룡을 향한 사랑 때문에 저항한 게 아니라 ‘자신의 사랑을 위해‘ 저항한 것이다. 이 사랑은 자신이 누군가를 진심으로 좋아하고 따랐던 진정을 의미하지, 나를 사랑했던 남자나 나를 구해주러 올 남자 같은 외적상황으로 구현될 그 어떤 존재가 아니다. 결과적으로 춘향은 정절을 지킨 셈이 되었다. 그러나 그녀가 목적하고 의도한 것은 그런 어설픈 정절 관념이 아니라, 자신의 자신다움을 지키려는 것이었다.
사실 춘향은 정절을 강요당하는 상황에 놓인 게 아니었다. 이몽룡은 정절을 지키라고 강요하지 않았다. 했다면 그것은 그냥 헤어지기 위한 하나의 회유책에 불과하다. 이몽룡이 남다른 인물이기에 돌아왔지. 돌아오지 않을 수 있었고 그것이 일반적이다. - P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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