숄로호프의 대부분의 작품의 주인공은 카자크이다. 특히『돈 강 이야기」와 「고요한 돈 강』은 볼셰비키 혁명과 내전에 휩쏠린 돈 강 카자크들의 비극적인 운명을 직접적으로 다루고있다. 그러므로 숄로호프의 작품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카자크의 역사, 전통, 생활 방식을 알 필요가 있다.
우선 ‘카자크‘란 단어의 어원을 알아보자. 유명한 사전 편찬자인 V. 달리는 ‘카자크‘라는 단어가 ‘방랑하다‘, ‘떠돌아다니다‘를 의미하는 중앙아시아아의 ‘카즈마크‘에서 나왔다고 생각한다. - P268

 유목 생활을 한 중앙아시아의 키르기스인들은 스스로를 ‘카즈마크‘라고 불렀다고 한다. 한편, 유명한 러시아의 사학자인 V. 클류체프스키와 N. 코스토마로프는 이 단어가 러시아인들과 우크라이나인들이 러시아의 남쪽과 남동쪽을 집중적으로 식민지화했던 14~15세기에 타타르인들로부터 차용되었다고 생각한다. P. 골루보프스키 같은 사학자는 폴로베츠인들사이에서 ‘수호자‘, ‘경비원‘으로 사용되었던 ‘카자크‘란 단어가러시아어로 사용되었다고 생각한다. 20세기 초에는 기존의 견해들을 뭉뚱그려 ‘카자크‘란 단어가 몽골어 ‘코‘(갑옷)와 ‘자흐‘
(경계, 국경)에서 나왔고, 그 의미는 ‘국경의 수호자‘라는 의견이 제시되었다.
15~16세기 무렵의 모스크바 러시아 시대에는 국경선(불가강 중류의 랴잔과 툴라에서 드네프르 강까지)을 지키기 위해 고용되어 군무에 종사했던 사람들이 카자크로 불렸다. 국경선 남쪽에는 국경을 수비하는 카자크들의 독립 촌이 존재하기도 했다. 16~17세기에 군무에 종사한 카자크들은 국경선의 남동쪽으로 국토를 확장하고, 시베리아와 극동을 정복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이 시기에 군무에 종사하던 카자크들과 함께 스스로를 ‘떠돌이‘라고 불렀던 ‘자유로운‘ 카자크들이 있었다. 이들은 국가의 기존 질서에 불만인 사람들, 모험가들, 돈 벌러 돌아다니는 사람들, 지주의 횡포를 견디지 못하고 도주한 농노들,
라스콜리니키(구교신자들)로 군무에 종사하는 카자크들과 뒤섞여 일정한 거처나 사유재산이 없이 돈 강, 테레크 강, 야이크강 유역에서 카자크 공동체를 이루며 자유롭게 살면서 이웃한공국과 유목민들과 항상 싸움을 했다.  - P269

카자크 공동체에서는 누구나 평등하게 땅을 공동으로 경작했고, 세금이나 연공도 없었다. 그들은 임기제의 아타만(대장)과 원로회의 의원을 뽑았다. 평상시에 아타만은 카자크들의 뜻을 받들고 실행했지만 전쟁 시에는 무제한의 전권을 행사했고, 원로회의는 법이 아니라 카자크의 전통과 풍습으로 공동체를 운영했다. 그러나 일련의 농민 봉기(스테판 라진 봉기, 푸카초프 봉기, 불라프 봉기)가 일어나자 러시아 정부는 18세기 초부터 아타만과 원로회의 의원선출 제도를 폐지하고 그들을 군 계급으로 서열화하고, 아타만에 의한 카자크군 지휘권을 점차 박탈하기 시작했으며, 카자크의 상층부에게 러시아 귀족의 권한을 부여하여 회유하기도했다. 러시아 정부는 카자크 군대를 개혁하면서 국가의 영토확장ㅇ에 용감하고 호전적인 카자크들을 이용했다.
1861년 농노해방 이후 많은 농민들이 일자리를 찾아 러시아의 남동 지역으로 이주하면서 카자크 촌에 급격한 변화가 일어난다. 카자크 촌에 분여지가 증대하면서 부자와 가난한 사람이 생기고, 관직을 얻은 카자크가 생기고, 군무에 종사하지않는 농민 출신의 비카자크인이 부유한 카자크에게서 땅을 임대하여 경작하면서 카자크 촌에는 계층 분화가 빠르게 진행된다. 이후에 땅을 둘러싼 카자크 계층들 간의 불화, 카자크의 가부장적인 전통과 풍습을 지키려는 노인 세대와 보다 자유분방한 젊은 세대 사이의 갈등이 내연된다. 결국 볼셰비키 혁명이후 내전이 발발하면서 카자크들은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좌우(적위군과 백위군)로 갈라져 피비린내 나는 동족상잔의 비극에 휘말리게 된다. - P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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