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지 않는 책


이따금 사람들은 책 밑에서 토론을 한다. 나무 그늘 밑에서 토론을 하듯.
그럴 때 책 속의 언어들은 바람처럼 우리들 내부로 시원하게 불어오기도 하고태풍처럼 비바람을 몰고 오기도 한다.

대부분의 삶이 책 속에서 이뤄지는 사람들은 제 자신을 애기하듯 책을 읽고
읽은 책들로 은밀히 자신만의 정원을 꾸민다.

이따금 나는 그들의 정원에 초대되어햇빛이 아닌 다른 빛에 열광하는 꽃과 나무들 사이로어렴풋이 보이는 그들만의 비탄을 탐색한다.

아직도 그들 속에 숨쉬는 자연의 일부인 그들을 훔쳐본다.

그들에게 책은 큰 평화이기도 하고 가장 큰 불안이기도하고
끝끝내 이기고 싶은 적(敵)이기도 하지만
책 읽기란 맨얼굴로 산소를 들이마실 때처럼 자연스러워야 하는 법.

운명을 씹듯이 책들을 씹으며 자꾸만 작아지는 사람들. - P48

도움그들의 타는 입술은 무덤 같아요
혀 밑에 파묻힌 죽은 자들의 얼굴이 보이는 듯하지만
책에 대한 경의는 책에 빠진 그 사람만의 행복.

때로는 행복한 책한권 때문에
임종을 앞둔 수술대 위에서도 죽지 않는 책을 꿈꾸고 공유하고 싶은 법.

내 속에도 그런 책들이 있다.
부싯돌처럼 서로를 비비며 불꽃을 만들어내는 책. 음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이방 저방에서 불이 켜지는 책.
그들에게도 있고 내게도 있는 책.
죽지 않기 위해 자꾸만 창백해지는 새하얀 책! - P49

중독된 사람들


나는 내 몸에 쌓이는 니코틴이 좋고 타르가 좋고 카페인이 좋다 날마다 마지막 담배를 피우는 것으로 인생을 흘려보낸 제노 코시니가 좋고 담배와 섹스 중 하나를 택하라는말에 담배를 택한 루이스 브뉘엘이 좋고 죽는 순간까지 시가를 끊지 못했던 프로이트가 좋고 담배를 끊지 않으면 다리를 절단해야 한다는 의사의 말에도 아랑곳없이 담배를 계속 피운 사르트르가 좋고 니코틴 때문에 손톱이 딱딱한 나무껍질처럼 변한 자코메티가 좋고 세비야의 담배 공장에서여공으로 일했던 비제의 카르멘이 좋고 로마의 한 호텔방에서 자기 자신을 최후의 담뱃불로 불태운 잉게보르크 바흐만이 좋다 담배 한 개비를 피울 때마다 2리터의 독극물이 제몸에 쌓이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던 사람들 나는 그들이 좋다 그 습관과 그 독으로부터 비겁하게 도망치지 않았던 중독된 사람들 그들의 그 사랑스런 검은 폐가 좋다 담배와 아무 상관없이도 하루에 1분 1초도 출산 없이 지나가는 날 없고 죽음 없이 지나가는 날 없다 담배가 무서운 사람은 담배를 피우지 않으면 된다 도처에 무수히 깔린 금연 서적에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일생 동안 담배맛을 즐겼던 쉼보르스카의 시집 앞에서 오늘의 다섯번째 담배에 불을 붙이는 숙녀!
오늘은 저 숙녀와 함께 「첫눈에 반한 사랑」*을 읽어야겠다에쎄 스페셜 골드를 맛있게 나누어 피우며


*쉼보르스카의 시 제목. - P53

검은 숲


내 생의 모든 것들 네가 다 가지렴
그 뒷면 어디쯤, 혼자서도 노랗게 피어나는 민들레꽃.
그 악착같은 아이덴티티도 모두 네가 가지렴
나는 내 안에서 뭉게뭉게 피어나는 멋진 구름 아래의자 하나 갖다놓고
깊은 심심함에 아비 없이 장기 여행 떠나는 아이처럼
세상의 모든 길들 혼자 익히고 혼자 버릴게
사람들은 손을 타면 탈수록 공중에 매달린 장미 가시 같아지고
발걸음은 더욱 무거워져 하루종일 폭풍 주의보에 시달린다지
그 피할 수 없는 욕망의 고달픔도 모두 네가 가지렴어느 날 갑자기 체포되어 개처럼 칼에 찔려 죽은 요제프K*도
매일매일 안개 낀 생의 뒷면 닦고 또 닦으려다
절망 위에 쏟아진 정체 모를 기의와 기표에 눌려 압사당한 거라지
그 아픈 표지도 모두 네가 가지렴
쉬지 않고 내용에 도전하고 형식을 갈아끼워도
의도적으로 행갈이당해야 하는 사람들로 넘쳐나는 이 축복받은 거리도
모두 네가 가지렴습관적으로 피 묻혀 보여주는 왜소한 감상 저장고, - P64

64페이지에 이어서


그 불결한 발작성 무의식의 권태도 모두 다 네가 가지렴
나는 내 안에서 뭉게뭉게 피어나는 멋진 구름 아래의자 하나 갖다놓고
비상하는 힘찬 해만 모으며 사는 황홀한 새들만 골라 잡아먹는
검은 숲이나 그릴게
아주 새카맣고 아주 구슬프
어떤 용서도 없이
내 사랑! - P65

석양의 얼음공주



나는 그가 좋아 세상 물정에 어둡고 오만하고 잘난 체하는 나를 한 마리 새하얀 양으로 그려주는 그가 나는 좋아 가시 많은 장미꽃보다 헐벗은 카우보이 같은 잭 런던의 강철군화를 벽에 걸어주고 아양 떨고 매달리고 침 흘리는 개새끼들을 저멀리로 차버리는 그가 나는 좋아 호시탐탐 그의하나밖에 없는 애인이 되고 싶어 불타는 권총 한 자루와 날렵한 잭나이프를 가슴에 숨기고 보이는 대로 그의 여자들에게 뜨거운 피맛을 보여주는 나를 향해 던지는 그의 야릇한 천만 불짜리 윙크가 나는 좋아 그는 세기의 소매치기 집단 페이건보다 더 빠르게 내 마음을 훔치고 카사노바보다더 빨리 나를 군중 속으로 밀어내지만 나는 뒤집기 게임의명수 그의 수법을 쭉쭉 빨아당겨 멋진 복수를 꿈꾸는 얼음공주 그가 달콤새콤하고 쫀득쫀득한 손길로 나를 어루만질때에도 그가 세기의 영웅처럼 코트 자락을 펄럭이며 우아하게 자동차 문을 열어 그 안에 탄 여자들을 보여줄 때도 나는앙증맞은 토끼처럼 깡충거리며 겉으론 환하게 속으론 새파랗게 칼을 갈지 물론 그는 모르지 모르면서도 힘껏 가속페달을 밟으며 음산한 엑스터시 협곡을 향해 신나게 질주하는그 그는 꿈에도 모르지 얼음은 녹을 때 더 치명적이고, 더아리고, 더 정직해지고, 더 뜨겁다는 걸 죽을 것 같은 쾌감이 크면 클수록 내가 더 자주 더 빨리 활활 타오르는 불꽃들을 비웃는 얼음공주로 변해간다는 걸 비웃음은 붉은색으로만 치장된 화려한 매장 어떤 것을 골라도 아주 지루하고 건 - P66

66페이지에 이어서


조해지지 비루먹은 개처럼 역겹고 추해지지 온갖 감정이 넘쳐나는 문체 뒤에 숨어 있는 심장의 메마름‘ 나는 그 서늘한 메마름으로 서서히 내게서 그를 죽일 거야 새하얀 양가지 많은 장미, 헐벗은 카우보이. 달콤새콤하면서도 쫀득쫀득한 손길. 텅 빈 새파란 하늘, 그 모든 것을 발갛게 물들이며 죽어가는 저 잔인한 석양처럼! - P67

황홀한 침법
--------사임 수틴


그에게 필이 꽂혀버렸어. 언제나 해진 외부 주머니에 손을 넣고 구부정하게 도심을 기웃거리는 씻어지게 가난한헌옷 수선공의 열번째 아들. 바로 1분 전의 일이라도 지나간것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고, 친구라곤 오로지 피범벅이 되어 쓰러지는 권투장의 아우성과 고함소리, 외롭고 퉁명스럽고 거칠고 지저분한, 늘 허기진 위통에 시달리는 파리한얼굴의 남자, 동시대 작품들에겐 아무런 흥미도 없고, 플랑드르 대가들의 그림이나 쿠르베, 샤르댕, 랭브란트 그림 앞에선 무아경이 되는, 밤새 지붕 틈새로 새어든 빛 같은 그에게 나도 모르게 필이 꽂혀버렸어. 아마도 그가 그린 붉은색때문일 거야. 화폭을 가득 채운 강렬하면서도 비극적인 붉은색, 나는 그보다 더 칠흑 같은 빛을 보지 못했어. 그보다더 크게 울부짖는 열림을 보지 못했어. 내 옆의 누군가가 감자기 나를 움켜쥐는 뜨거운 손 같은, 불꽃으로 달려드는 나방처럼 나도 모르게 그에게 필이 꽂혀버렸어. 그건 마치 죽은 자들의 왕국으로 침범해 들어가 그들의 영혼을 황홀하게만지는 것과 같았어. 한 번도 살아보지 못한 아주 깊고 오래된 집 앞에 영원히 혼자 서 있는 듯한!
- P69

아비뇽의 처녀들



아비뇽의 처녀들은 촉촉이 젖은 살갗 위에
옷 대신 캄캄한 밤을 입는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더 빛이 나는 아비뇽의 처녀들은
남이 입던 신의 축복 따위는 청동거울 속에 집어넣고
당신 때문에 활활 사랑이 불타오른 척
당신 머리 위를 노래하는 새처럼 날아다닌다

참으로 아름다운 아비뇽의 처녀들은
한 여인이면서 다섯 여인 몫의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어
이 세상에 어떤 美가 존재하는지 어떤 시인이 그 美를 찬양하는지
아무런 관심이 없다

오로지 당신 눈빛과 마주치고
그 눈빛에서 절망 대신 환희가 솟아오르면
화창한 주말 날씨의 해변처럼
따뜻하고 부드러운 자궁을 한껏 열어
당신을 품고 당신을 낳을 뿐

한 번도 누구누구의 정식 연인이 되어본 적 없는 아비뇽의 처녀들은
홀로 있을 때나 함께 있을 때나 발가벗어 그림자 진 당신영혼에 - P72

기쁘게 은방울꽃과 데이지꽃 수를 놓으며
서둘러 짐 챙겨 떠나는 이 세상 모든 이별의 왈츠가이제는 당신 마음속에서 끝나기를 곧 끝나버리기를 기다린다

캄캄한 밤을 달래는 푸른 달빛이 서서히 서쪽에서부터 차올라오듯이 - P73

위대한 양파



아버지의 외박이 일주일째 계속되던 날, 어머니는 양파를까자고 했다. 양파 중에서도 가장 어리고 독한 것들만 골라오라고 했다. 나는 광주리 가득 양파를 담아왔다. 양파를 까면서 우는 건 자연스런 일이므로 눈물 콧물 흘려가며 열심히 양파를 깠다. 껍질이 벗겨지면서 드러나는 양파의 눈처럼 희고 예쁜 속살은 언제 봐도 신기했다. 한참 그 美에 빠져 있다 문득 어머니를 올려다보니 어머니도 울고 있었다.
온몸이 울음바다로 변해 있었다. 하지만 그 눈물은 양파 때문이 아니라 일주일째 집을 비운 아버지가 만든 진짜 눈물이었다. 어린 눈에도 그 눈물이 너무나도 아파 나는 못본척숨죽이며 양파만 깠다. 눈물 콧물이 떨어져도 가만히 있었다. 어머니가 왜 우는지, 어머니의 설움이 무엇인지 알기에꼼짝도 않고 양파만 깠다. 아, 어머니는 저렇듯 남몰래 흘려야 할 눈물이 있을 때, 남몰래 터뜨려야 할 설움이 차오를때 이렇게 양파를 까며 우신 거구나! 나는 양파가 내심 고마웠다. 어머니는 양파를 까면서 울고 깐 양파를 썰면서도 울었다. 그 때문인지 눈물 젖은 하얀 양파가 프라이팬에서 황갈색으로 익어가며 내뿜는 향기는 무어라 말할 수 없이 달달하고 먹음직했다. 온 마음이 깨끗해지는 기분이었다. 채소 중의 채소, 양파는 정말 위대했다. 어머니의 아픔을 모조리 눈물로 씻겨내고는 다시 평심(心)의 세계로, 다시 우리 어머니로 말끔히 되돌려놓아주었다. - P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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