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의 역사 - 알지 못하거나 알기를 거부해온 격동의 인류사
피터 버크 지음, 이정민 옮김 / 한국경제신문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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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사회의 무지


1장 무지란 무엇인가?


# 무지의 여러 분류들

1. How에 대한 무지 : 런던(의 여러 모습)에 대해서 안다.

2. What에 대한 무지 : 런던이라는 도시를 안다.

3. 의식적 무지 : 시칠리아 주민들이 마피아를 전혀 모르는 듯이 행동한다.

4. 무의식적 무지 : 패러다임의 전환기에 등장한 새로운 사고방식을 인지하지 못한다.

5. 자발적(고의적) 무지 : 타조가 모래밭에 머리를 박고 있다.

6. 비자발적 무지 : 기독교의 존재 자체를 모르는 이교도를 비난할 수 없다.

7. 능동적 무지 : 새로운 이주민들이 원주민의 존재와 영토 소유권을 무시한다.

8. 수동적 무지 : 특정 분야나 행동에 필요한 지식을 활용하지 못한다.


2장 무지에 관한 철학자들의 견해 


"소크라테스는 그리스 철학에서 인식론적 전환을 불러일으켰다. 인식론은 우리가 어떻게 지식을 습득하고 해당 지식의 신뢰성 여부를 판단하는지를 다룬다. 반면에 무지의 인식론은 우리가 어떻게, 왜 무지에 머물러 있는지 다루었다. 그리스 철학자들, 특히 피론을 필두로 한 회의주의학파에서 이 문제를 논의했다." "회의주의자들은 소크라테스보다 한 발 더 나아가 대상이 동일하더라도 그것을 보는 사람들이 동일한 인상을 받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또한 같은 물체라도 서로 다른 환경에 놓인 사람들에게는 다르게 보인다는 사실도 지적했다. 회의주의자들은 (회의懐疑, skepsis의 본뜻인) '조사照查, investigation'를 믿었다. 다시 말해 기존의 믿음이나 확신을 두고, 이를 뒷받침하거나 위배하는 사례를 분석하며 지식을 얻을 때까지 판단을 유보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회의주의에는 두 종류가 있다. 아무것도 알 수 없다고 확신하는 독단적 회의주의와, 그것조차 확신하지 않는 반사적反射的 회의주의다."(36-7)


"르네상스 시대의 가장 유명한 회의론자이자 16세기 고대 회의주의 부흥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인 미셸 드 몽테뉴는 보르도 시장 시절 가톨릭과 개신교 간 전쟁을 몸소 겪었다. 몽테뉴는 '나는 무엇을 아는가?'라는 질문을 자신의 좌우명으로 삼았다." "데카르트는 저서 《방법서설》(1637)에서 몽테뉴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은 채 그에게 답하는 방식을 통해 의심에서 확신으로 나아가는 이른바 방법론적 무지를 구현했다." "17세기 회의주의는 외양과 현실 간 격차에 대한 일반적 인식을 철학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는 바로크 시대 세계관의 핵심이었다." "18세기 대표 철학자인 조지 버클리나 데이비드 흄은 둘 다 지식이라는 주제에 집착하는 경향이 강했던 17세기의 전통을 이어 갔다." "카를 마르크스는 부르주아의 계급적 이해관계와 노동자 계급의 허위의식 등 지식 습득을 방해하는 사회적 장애물에 대해 논의했고, 프로이트는 지식에 무의식적 거부 반응을 보이는 심리적 장애물이 있다고 주장했다."(37-9)


3장 집단의 무지 


"시대와 지역을 막론하고 상류층은 평범한 사람들의 삶에 대해 무지한 경우가 많았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지배 계급이 통제권을 유지하기 위해 하층민에게 정보를 아예 주지 않거나 잘못된 정보를 주는 방식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해왔다. 마르크스가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라는 유명한 문구를 남긴 배경이 바로 여기에 있다. 가난한 자들이 자신의 처지에 만족할 수 있도록 '환상에 불과한 행복'을 제공한다는 뜻이다. '지적, 도덕적, 정치적 헤게모니' 개념을 제시한 그람시는 지배 계급이 단지 힘만으로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힘과 설득, 강요, 동의를 결합해 통치한다고 보았는데, 설득은 일부 간접적으로 이루어진다. 피지배 계급 또는 하위 계급은 자신을 지배하는 자의 눈으로 사회를 보는 법을 배운다. 이후 미셸 푸코는 이들의 지식을 가리켜 '예속된 지식savoirs assujettis'이라 했다. 이들에 따르면 하위 계급은 자신들만의 표본이 없기 때문에 지배 집단의 표본을 통해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는 수밖에 없다."(43-5)


"인식론의 사회적 전환에 큰 자극을 준 것은 철학 외부에서 부상한 페미니즘이었다. 남성은 '내가 모르는 것은 지식이 아니다'라는 원칙에 따라 여성의 지식과 신뢰성을 무시하거나 평가절하해 왔다. 고대 로마에서 근대 초기 유럽에 이르기까지 신뢰할 수 없는 지식을 가리켜 '노파의 이야기aniles fabulae'라고 치부했을 정도다." "18세기 여성의 무지를 논한 저서는 '소피아'라는 필명으로 출판된 《남성보다 열등하지 않은 여성》(1739)과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의 《여성의 권리 옹호》(1792)가 있다. 소피아는 여성 무지의 책임이 '미신을 피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하지 않은 남성에게 있다'고 비난했다. 울스턴크래프트는 '시민정부의 헌법 자체가 여성의 이해력 증진을 차단한다는 점에서 거의 극복할 수 없는 장애물'이며 '오늘날의 여성은 무지로 인해 어리석거나 사악한 존재가 되어 버렸다'고 주장했다. 또한 여성이 '순수라는 허울뿐인 명분 아래 계속 무지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물었다."(46, 49)


"19세기와 20세기 여성 학자와 과학자들의 경력을 살펴보면 남성이 여성의 성과를 끈질기게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특히 남성과 여성의 공동 작업에서 그와 같은 경향이 두드러졌다. 남성들이 인정하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빛을 보지 못한 불운한 여성 과학자에는 메리 애닝, 리제 마이트너, 로절린드 프랭클린 등이 있다. 메리 애닝은 지금도 주로 화석 수집가이나 중개인으로 소개된다. 이 때문에 19세기 전반기에 도싯에서 공룡 화석을 발굴해 고생물학 발전에 기여한 공로는 묻히기 일쑤다. 물리학자인 리제 마이트너는 1930년대에 오토 한과 함께 핵분열을 발견했지만, 이 연구로 노벨상을 받은 주인공은 남성 동료인 오토 한뿐이었다. 로절린드 프랭클린은 'DNA의 암흑 여인'으로 불린다. DNA를 발견해 (프랜시스 크릭, 모리스 윌킨스와 함께) 노벨상을 수상한 제임스 왓슨이 그녀의 지분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과학 역사상 가장 악명 높은 '인용 기억상실' 중 하나에 해당한다."(50-1)


4장 무지의 연구 


"우리는 보통 초기 역사 시대를 무지의 시대로 여긴다. 하지만 모든 시대가 무지의 시대라고 해야 겸손할 뿐 아니라 정확할 것이다. 바로 다음의 세 가지 이유에서다. 첫째, 지난 두 세기 동안 눈부시게 성장한 집단 지식이 대다수 개인의 지식에는 반영되지 않았다. 인류 전체를 놓고 보면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지식을 갖게 되었는지는 몰라도, 대부분의 개인은 자신의 조상보다 조금 더 알 뿐이다. 둘째, 새로운 지식이 확산되면 다른 지식은 사장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영어, 스페인어, 아랍어, 중국어 등 세계적 언어를 지식으로 습득하는 것이 증가함에 따라 다른 언어의 소멸 속도가 빨라지고 있다." "또한 개념 차원에서 보면 하나의 패러다임이 다른 패러다임으로 대체될 때는 (전환 과정에서 과거의 지식 일부가 손실되는) '쿤 손실'이 발생한다." "셋째, 최근에 정보의 양이 급속하게 늘기는 했지만, 이는 엄연히 지식의 증가와는 다르다. 지식 증가는 정보와 달리 검증, 소화, 분류의 과정을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57-8)


"의학자, 철학자, 심리학자들은 초기 무지 연구에 기여했지만 각자 몸담은 분야가 달라 서로 고립되어 있었다. 이후 무지에 관한 책과 논문이 갈수록 많아지고 있으며, 여기에는 사회학자들이 상당한 기여를 했다. 이제 '아그노톨로지Agnotology'는 여러 학문을 아우르는 분야로 자리매김했다." "무지 연구에 대한 관심이 지난 40여 년 동안 특히 왕성하게 일어난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몇 가지 이유를 생각해 볼 수는 있다. 그 중 하나는 연구 그 자체의 발달이다. 특정 문제를 연구할 때 그것을 뒤집거나 반대로 돌려 상반된 측면을 살펴봄으로써 좋은 성과를 거둘 수 있다. 이제 기억을 연구하는 학생들은 망각으로 눈을 돌렸고, 언어를 연구하는 학생들은 침묵을 연구하고 있다. 성공은 늘 관심의 대상이었지만, 학자들은 실패를 통해 무엇을 배울 수 있는지도 연구한다. 또한 지식 사회에 대한 논의가 활발한 데 힘입어 학자들 사이에 지식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고, 그에 따라 무지 연구도 뒤따르게 된 것이다."(64-5)


5장 무지의 역사 


"무지를 연구하는 역사학자들은 근본적인 문제에 직면한다. 바로 '없음'을 어떻게 연구하느냐 하는 점이다." "다소 전통적이라 할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은 무지의 개념을 시대별로 살펴보는 것이다. 해당 사례로는 르네상스 시대의 시인이자 학자인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의 〈자신의 무지와 다른 많은 이의 무지에 관하여〉라는 편지가 자주 언급되어 왔다. 페트라르카는 소크라테스를 인용해 자신은 '모른다는 점을 안다'고 하면서, 그가 무지하다고 주장하는 네 명의 젊은 베네치아인에 맞서 자신을 변호했다." "무지의 역사를 알기 위해 최근에는 그림자를 보고 누군가를 추적하는 것과 같은 간접적 방식을 활용하고 있다. 그중 하나가 이른바 '후향적 방식'으로, 지식의 증가에서 무지의 점진적 감소로 초점을 옮기는 것이다." "두 번째 접근 방식은 셜록 홈즈가 하는 것처럼 이른바 '설득력 있는 부재'를 연구하는 것이다. 비슷한 방식으로 무지를 연구하는 역사가들은 비교를 통해 중대한 부재를 드러낼 수 있다."(71-2)


# 셜록 홈즈는 경주마 실종 사건을 조사하던 중 경비견이 그날 밤에 짖지 않았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그래서 경비견과 친밀한 사람이 범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코넬 치얼라인은 서구인들이 근대 초기 레반트(동지중해 연안) 지역에 대해 무지하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특히 아랍의 위대한 역사학자 이븐 할둔의 저서를 비롯한 일부 도서가 도서관에 비치되어 있지 않을 뿐 아니라 특정 정보 역시 도서관 소장 도서에서 찾아볼 수 없다고 지적했다. 이런 관행은 '빈 역사'라고 부르며, 기록 보관소에 특정 자료가 없는 것을 중요한 현상으로 본다." "세 번째 방식은 기존의 승리주의 서사를 뒤집어 무지의 감소 대신 무지의 증가, 혹은 무지의 폭발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이 같은 방식에서는 언어의 소멸, 책의 소각, 도서관 파괴, 발견의 집단적 망각, 지식인의 죽음 등에 관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한마디로 승자보다는 패자, 성공보다는 실패를 강조하는 것이다. 이 접근법의 가치는 전통적인 이야기의 편향성, 즉 역사학자들이 흔히 '편견'이라고 부르는 것을 드러내는 데 있다. 하지만 (이 방식만 활용할 경우)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마찬가지로 편향적일 수 있다."(72-3)


6장 종교의 무지 


"무지는 종교의 이론과 실천 모두에서 다양한 역할을 하는데, 부정신학否定神學에서 가장 두드러진다. 부정신학에 따르면 인간은 '신이 어떤 것이 아닌지'에 대해서만 말할 수 있으며(예를 들면 '신은 유한한 존재가 아니다'라고 함으로써 '신이 무한한 존재'임을 설파한다), 무지를 통해 신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다. 종교 지도자들은 종종 야훼, 하나님, 알라의 의도를 안다고 자신하지만, 종교는 인간의 무지로 인해 생겨났다고 할 수 있다." "특정 종교를 가진 사람들은 다른 종교인들의 믿음을 자신과 다른 지식으로 여기기보다 지식의 부재라 단정 짓고, 무지를 비난했다." "대항해 시대 이후 유럽에서 파견된 선교사들은 열악하기 짝이 없는 환경에서 전도해야 했지만, 본국의 동료들에 비해 한 가지 좋은 점이 있었다. 그들이 개종시키려는 사람들이 기독교를 전혀 몰랐던 것이다." "선교사들이 쓴 글을 보면 신도들을 무지하다고 여긴 경우가 흔했음을 알 수 있다. 게다가 개종한 이들 스스로도 그 같은 견해를 받아들였다."(77, 83)


"개인 차원이든 집단 차원이든 타 종교에 대한 무지는 숨기거나 위장하는 행위가 원인이 되기도 한다. 특히 강제 개종이 이루어졌을 때 더욱 그렇다. 신대륙에 끌려와 기독교를 받아들여야 했던 아프리카 출신 노예들은 서아프리카와 중앙아프리카의 토착 신앙을 끝까지 고수한 것으로 알려졌다." "타 종교에 박해가 이루어지는 한 위장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공개적으로는 어떤 종교를 지지하면서 실제로는 그와 다른 종교를 믿는 것이다." "이슬람교의 시아파가 이런 식으로 오랫동안 시행해온 위장을 아랍어로 '타키야taqiyya'라고 하는데, 여기에는 '두려움'이나 '신중함'의 뜻도 담겨 있다." "종교개혁 이후 서유럽이 가톨릭교, 루터파, 칼뱅파 지역으로 분열되면서 '그릇된'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위장이라는 관행을 따랐다. 이 위장은 당시 장 칼뱅 등이 니코데미즘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니코데미즘은 신약성서에 나오는 바리새인 니코데모가 남몰래 밤을 틈타 그리스도를 만나러 간 것에서 유래했다."(93-5)


"'불가지론자agnostic'라는 단어는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말로 영적 지식gnosis의 부족을 의미한다. 기록상 최초의 불가지론자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 크세노파네스로, 그는 '어떤 사람도 신에 관한 분명한 진실을 본 적이 없고, 앞으로도 알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른바 '독실한 불가지론'은 유대교와 기독교 모두에서 찾아볼 수 있다. '숨어 있는 하나님'이라는 개념은 구약성서(이사야 45장 15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중세 유대인 학자 모세 마이모니데스는 '부정적 속성을 제외한 채 창조주를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사실 이신론자야말로 논의에 포함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 18세기 이신론자들이 믿었던 신은 세상을 창조하기는 했지만 그다음부터는 자체의 법칙에 따라 움직이도록 내버려 두었다. 마치 시계 장인이 만든 시계가 스스로 작동하는 것처럼 말이다. 시인 알렉산더 포프는 여기서 한 가지 교훈을 이끌어냈다. '신을 살피려고 들지 말라. 인간의 적절한 연구 대상은 인간이다.'"(95-7)


7장 과학의 무지 


"19세기 영국의 철학자 허버트 스펜서는 과학을 점차 커지는 구체球體로 상상했다. 표면에 추가되는 모든 것은 주변의 무지와 더 광범위하게 접촉한다는 개념이었다. 특정한 문제가 해결될 때마다 또 다른 문제가 모습을 드러낸다. 과학자들의 시선은 항상 미래를 향하고 있다." "일단 안개가 걷히면 과학자들은 선택적 무지를 실천한다. 특정 문제에 집중하기 위해 일부 데이터를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것이다. 이 같은 선택을 무지의 관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때로는 선택이 잘못되기도 한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과학자들은 미국 철학자 존 듀이가 말한 '진정한 무지'를 실천한다고 할 수 있다. 진정한 무지는 겸손, 호기심, 열린 마음을 동반할 가능성이 높아 유익하다. '예상치 못한 무지'는 연구 과정에서 일어나는 뜻하지 않은 발견을 뜻한다. 무지는 놀라움으로 이어지는데, 놀라움은 사람들이 자신의 무지를 인식하게끔 만들어 예상치 못한 새로운 지식의 창을 열어 준다."(104-5)


"무지의 주요 유형 중 하나는 알고 싶지 않은 데서 비롯된 의도적 무지다. 이는 특정 아이디어, 특히 새로운 아이디어에 대한 반감에 기인한다는 점에서 칼 포퍼가 말한 적극적 무지와도 연관된다." "이 같은 의도적인 맹목 사례는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 다윈의 진화론, 파스퇴르의 미생물 발견, 멘델의 유전 법칙, 막스 플랑크의 양자론 등에 대한 저항이 있다. 플랑크가 '과학은 장례식을 한 번 치를 때마다 진보한다'는 쓴소리를 남긴 것은 양자론에 대한 물리학자들의 반감에서 비롯되었다. 이 말의 뜻은 새로운 과학적 진리는 반대자들을 설득해 깨닫게 함으로써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자들이 마침내 죽고 진리에 익숙한 새로운 세대가 성장하기 때문에 승리한다는 것이다. 기성세대 중에는 자신의 전문적 자본을 투자한 이론을 포기하려 들지 않는 사람이 많다. 자신이 틀렸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은 이해되지만, 실로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107-8)


8장 지리학의 무지 


"영국의 지리학자 브라이언 할리는 지도의 '침묵'(그가 공백보다 선호한 용어) 연구에서 지도가 지리적 지식을 널리 확산시키던 시기에 일부 국가의 왕들이 자국의 자원이 다른 나라에 알려지지 않게 하려고 자국 지도를 비밀에 부친 사실에 주목했다. 16세기에 포르투갈 역시 인도, 중국, 아프리카, 브라질에 무역 기지를 세우고 제국을 건설하면서도 지도를 포함한 자국 정보는 철저히 비밀에 부쳤다. 1504년 마누엘 1세는 지도 제작자들이 콩고 너머의 서아프리카 해안을 지도에 표시하지 못하게 하고, 기존 지도까지 검열하도록 했다." "스페인 정부는 스페인 제국에 대한 지식을 철저히 통제해 항해사 수업을 담당하는 학자들은 외국인들에게 지식을 전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해야 했다. 16세기 후반 모스크바 대공국에 살던 네덜란드 상인은 그 지역의 지도를 구할 수 없었는데, 지도를 유출하는 것은 사형에 처해질 수 있는 범죄였기 때문이다. 이 같은 비밀주의는 유럽 정부에만 국한되지 않았다."(146-7)


"환경에 대한 관심은 20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급격히 확산되었다. 생물 다양성의 감소는 이제 대중이 주목하는 사안이다. 2014년 엘리자베스 콜버트는 《여섯 번째 대멸종》을 출간해 최근의 생물 다양성 감소를 지구 역사상 발생한 다섯 번의 대멸종 이후 여섯 번째 대멸종으로 보았다." "기후 변화에 대한 지식은 꽤 오래전부터 가지고 있었지만, 이 문제가 공론화되기 시작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스웨덴 물리화학자 스반테 아레니우스는 1896년에 이미 지구 온난화를 예측했다(독자 여러분의 짐작대로 당시 선배 학자들은 그의 예측을 무시하고 넘어갔다). 1938년 영국 공학자 가이 캘런더는 지난 반세기 동안 온난화가 진행되어 왔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과학자들은 지구 온난화가 자연적인 주기로 일어난 게 아니라 화석 연료를 태워 생긴 온실 효과 때문이라 알고 있었다. 나쁜 소식이 대개 그렇듯 과학자들의 이 같은 발견은 (꽤 오랫동안) 거의 무시되거나 깡그리 부정당했다."(155-6)


2부 무지의 결과


9장 전쟁의 무지 


"전쟁에서 군사 작전은 다른 무엇보다 무지와 지식 간의 싸움이다. 아군의 계획을 적군이 모르게 철저히 관리하는 한편, 적군의 계획을 알아내기 위해 노력해야 하기 때문이다. 웰링턴 공작이 입버릇처럼 말했듯이 '전쟁의 모든 기술은 언덕 저편의 상황을 파악'하는 데 있다. 그리고 그에 실패할 때는 큰 대가를 치러야 한다. 전쟁은 적의 움직임에 신속하게 대응하는 것이 중요한 제로섬 게임이기 때문이다." "전쟁에서는 양쪽 진영 모두 무지로 인해 어려움을 겪는다. 그리고 그나마 정보를 좀 더 확보해 중대한 실수를 적게 한 쪽이 승자로 등극한다." "무지 중에서도 지휘관의 무지는 문제가 된다. 일반 병사들은 보통 자신들이 다음으로 공격하고 후퇴할 시간과 장소를 전혀 알지 못한다. 다시 말해 지식의 공백은 소문으로 채워진다. 프랑스 역사학자 마르크 블로흐는 제1차 세계대전 참전 후 1914년부터 1918년까지 참호 안에 나돌았던 가짜 뉴스를 주제로 선구적인 연구 논문을 집필했다."(160-2)


"베트남 전쟁에서 미국의 무지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 사회학 교수인 제임스 깁슨은 베트남전을 다룬 책에서 지식의 부재가 다양하게 존재한다고 언급했다. 진짜 아무것도 모르는 공백이 있는가 하면 다양한 이유로 전쟁을 얕잡아 보거나 무시한 데  따른 공백도 있다는 것이다. '군부대는 효율성으로 평가받는데, 민간 사상자에 신경 쓰는 것은 여기에 방해만 되기 때문에 군 관료들은 ··· 민간 사상자 수를 집계하는 데 무관심했다'고 깁슨은 설명했다." "침략자들이 군사적으로 가질 수밖에 없는 최대 약점은 외부인이라는 사실이다. 그들이 공격하는 국가의 언어, 관습, (열대 기후를 포함한) 지형에 대부분 무지하기 때문이다. 언어에 대한 무지는 미국인 대다수가 이른바 베트남의 같은 편과 소통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미국 정부는 베트남의 공산주의는 물론 민족주의와 반식민주의에 대해 알고 있었지만, '외부 개입이 혁명에 찬물을 끼얹기는커녕 불을 더욱 지핀다'는 정보의 속뜻은 무시했다."(173-5)


10장 비즈니스의 무지 


"비즈니스에서 특정 무지는 적어도 누군가에게는 득이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경매에서는 입찰자들이 서로 얼마까지 부를 준비가 되어 있는지 알지 못할 때 판매자가 이득을 볼 수 있다. 이처럼 거래 당사자들의 '대칭적 무지'는 거래 이윤으로 이어진다고 알려져 왔다. 하지만 더 흔한 것은 '비대칭적 무지'다. 이와 관련해 미국 경제학자 조지 애컬로프가 제시한 '레몬 시장의 법칙'은 유명하다. 이 법칙에 따르면 중고차 시장에서는 불량 중고차(레몬)가 좋은 중고차를 몰아내는 현상이 발생한다." "경제학자 케네스 애로는 정보를 사고파는 문제를 분석함으로써 이름을 알렸다. 애로의 역설은 자신이 구매하려는 상품에 대해 미리 알고 싶어 하는 고객의 욕구와 돈을 받기 전 정보를 완전히 누설하지 않으려는 판매자의 욕구가 상충하는 점을 지적한다. 전쟁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서 핵심은 상대적 무지다. 모든 참가자가 어느 정도 무지하지만, 그나마 덜 무지한 참가자가 성공할 가능성이 가장 높다."(183-4)


# 레몬 시장의 법칙 : 판매자는 자신이 파는 중고차의 좋지 않은 상태를 잘 알고 있지만 밝히지 않고, 구매자는 제대로 된 정보가 없는 상황에서 차를 사게 된다. 이처럼 정보의 불균형으로 인한 무지를 비대칭적 무지라 한다.


"위장 혹은 특정인들에게 알려지지 않도록 숨기는 '전략적 무지'에 의존하는 불법 비즈니스에는 알코올, 마약, 위조품 같은 금지 물품, 물품의 운송(밀수)과 판매(암시장)뿐 아니라 성매매, 청부살인 같은 불법 행위도 포함된다." "여기서 무지한 자는 세관/과세 공무원, 경찰이다. 실제로 뭔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아는 이들은 정부 고위직을 포함해 많지만, 정확히 언제 어디서 일어나는지 아는 이들은 적다. 어떤 경우에든 무지 자체는 아니더라도 위장된 무지는 유지되어야 한다." "1958~1962년 대기근이 발생한 중국에서는 비공식 배급 시스템이 생겨나거나 훨씬 중요해졌다. 당원들은 끝도 없이 교활한 방법으로 국가를 속였고, 물물 교환과 위조 허가증 사용을 포함한 병행 경제parallel economy가 발전했다. 생산자 집단에서 배급을 더 많이 받기 위해 노동자 수를 부풀림에 따라 '죽은 영혼의 거래'도 일어났다. 이러한 시스템은 회색, 비공식, 병행(평행) 대안, 그림자 경제로 다양하게 알려져 있다."(200-2)


11장 정치의 무지 


"독재자가 국민들의 무지를 조장한다면 민주주의 세력은 불안해지게 된다. 미국 제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은 '문명화된 국가가 무지하면서도 자유로운 것은 이전에도 이후에도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경제학자 앤서니 다운스는 자신이 수백만 유권자 중 한 명에 불과하기 때문에 굳이 정보를 얻으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합리적 무지'라는 새로운 용어로 설명했다. 하지만 2016년 도널드 트럼프에게 투표한 수많은 유권자의 무지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다른 용어가 필요하다. 페미니스트 철학자 린다 알코프는 그들의 무지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그들의 무지는) 지식 부족으로 설명할 수 없다. 단지 지식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어떤 것에 대한 공동의 노력, 의식적인 선택, 일련의 선택에 따른 결과이다. 특정 뉴스 기사나 뉴스 소스를 회피하고, 특정 대학 과정을 멀리하며, 특정 부류의 사람들에게 그날 뉴스에 대한 의견을 묻지 않는 것이 바로 그 예다.〉"(215-8)


"18세기 후반 독일어권 대학에 행정학이 개설되었다. 당시에 국가에 대한 지식을 독일어로 '통계학Statistik'이라고 했는데, 여기서 영단어 '통계학Statistics'이 유래했다. 이 같은 단어의 의미 변화는 정부가 공장과 학교, 빈곤과 위생을 조사하는 데 점점 관심이 많아졌음을 의미한다. 이로 인해 생산된 수많은 정보는 19세기부터 막대 그래프, 그래프, 원형 차트 등으로 표현되었다. 이러한 조사는 무지에 대한 지식의 승리로 표현할 수 있겠지만, 모든 승리가 그렇듯 이 과정에서 얻은 것만큼 잃은 것도 많았다. 정보가 지나치게 많아 다 소화하기 불가능해진 것이다." "심지어 국가 차원의 조사와 지도 작성처럼 지식의 추가가 분명한 행위도 오히려 무지를 조장할 수 있다. 특히 제임스 스콧이 '빈약한 단순화'라고 표현한 지도와 통계표를 현실로 받아들이면 때로는 비참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지도와 통계는 현실을 단순화하거나 전체적인 시각에서 바라보게 함으로써, 다양하고 복잡한 현실에 무지하게 만든다."(234-5)


12장 놀라움과 재앙 


"역사적으로 위험 징후를 무시하다가 자연재해를 입은 사례는 너무도 많다. 2005년 허리케인 카트리나에 이어 발생한 뉴올리언스 홍수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 재난 연구에서 연방재난관리청FEMA의 대응 실패가 드러났다. 관리청은 집을 잃은 사람들에게 임시 거처로 이동식 주택과 텐트를 제공했지만, 호텔에 수용하는 것은 꺼렸다. 의료 시스템은 재난에 대비하지 못했다. 허리케인이 매년 뉴올리언스를 강타한 탓에 대비 부실 문제가 늘 비난의 도마 위에 올랐다.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대부분인 빈곤층은 가진 게 적고 홍수에 더 취약한 저지대에 살았기 때문에,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 "허리케인 카트리나는 이른바 무지의 사회적 분배를 드러냈다. 도시 취약 지대에 사는 빈곤층은 홍수가 위험하다는 것을 잘 알았다. 하지만 안전하고 비싼 지역에 거주하는 공무원들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의 안전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안전까지 위협해 가며 현장 지식을 무시했다."(247-8)


13장 비밀과 거짓말 


"대부분의 국가에서 소문과 구두 소통은 당연히 신문보다 신뢰도가 낮은 것으로 간주되지만, 소련에서는 오랫동안 그 반대였다. 또한 소련의 지도는 정부가 존재하지 않기를 바라거나(교회 등) 대중에게 숨기고자 하는 것(강제 수용소 등)들을 누락했기 때문에 신뢰할 수 없었다. 연구가 집중적으로 이루어지던 새로운 과학 도시 나우코그라드도 지도에서 누락되었는데, 이 중 일부는 시베리아에 위치해 있었으며 강제 수용소 죄수들에 의해 건설됐다. 핵물리학자이자 반체제 인사인 안드레이 사하로프가 1968년 소련 내부에서 쓴 글에 따르면, 소련은 여행이나 정보 교환의 자유 없이 외부 세계와 단절된 채 시민들에게 실질적인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 폐쇄적인 사회였다. 사하로프와 같은 반체제 인사들이 할 수 있는 저항은 해외에서 출판한 책이나 비밀리에 직접 손으로 만든 출판물인 사미즈다트samizdat(러시아어 '스스로'와 '출판'의 합성어)를 통해 정보를 유포하는 것이 전부였다."(270)


"정부가 대중을 무지하게 만드는 가장 극적인 사례는 대형 재난을 은폐하는 것이다. 1943년 벵골 대기근 당시 정부는 '기근'이라는 용어 사용을 금지했다. 또 다른 악명 높은 사례는 1932~1933년 우크라이나에서 발생한 대기근인 홀로도모르Holodomor 사건으로, 당시와 이후 소련 정부의 입장은 기근이 발생했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것이었다." "중국 정부는 공식적으로 '1989년 6월 4일 사건'이라는 완곡한 표현으로 알려진 천안문 사태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규제해 6월 4일에는 인터넷에서 '오늘' 또는 '그해' 등 민감한 단어를 사용하는 게 금지되었다." "1989년 천안문 사태를 성인일 때 목격하고 이제 노인이 된 사람들은 개인적인 견해와 상관없이 일반적으로 무지를 가장한 정권에 동조하고 있다. 그들은 알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자신의 지식을 지우려고 노력한다. 프로이트식으로 표현한다면, 공식적인 억압은 비공식적인 진실 억제에 의해 강화된다."(273, 276)


"새로운 개념을 표현하는 단어조차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오래된 경우가 많다. 탈진실 시대에 관한 책은 2004년에 출판되었지만, 이 단어는 그보다 12년 전인 1992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스핀 닥터spin doctor'(주로 정치인이나 공인들의 이미지를 관리하고 대중의 인식을 조작하기 위해 고용된 커뮤니케이션 전문가)라는 문구는 1940년대 〈뉴욕타임스〉에서 사용되었다. 가짜 뉴스와 크게 다르지 않은 프랑스어 '포스 누벨fausses nouvelles'은 영어의 '페이크 뉴스'와 같은 전통적인 표현이다. 또 하나의 전통적인 용어는 '카나르canard'(허위 보도 또는 유언비어를 뜻한다)로, 이는 프랑스 소설가 발자크가 당시 파리의 언론계를 생생하게 묘사하면서 사용했다. 노련한 기자가 신참 기자에게 '사실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독자들에게 뉴스를 팔기 위해 만들어낸 허구를 우리는 카나르라고 부른다'고 설명한다. 미디어는 고의적인 허위 정보뿐만 아니라 무지 또는 부주의의 결과인 오보도 퍼뜨린다."(298-9)


14장 불확실한 미래 


"불확실성은 미래에 대한 무지로 설명할 수 있다. 비즈니스, 정치, 전쟁의 사례에서 보았듯이 중요한 결정들은 미래에 발생할 것으로 예상되는 일에 근거해 내려졌다. 문제는 실제로 일어나는 일이 예상과 크게 다르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러한 결과는 의도한 것과 정반대의 역효과를 낳을 수 있다." "물론 과거의 트렌드를 바탕으로 미래의 가능성을 추정하는 것은 가능하다. 이때의 추정은 우리가 항상 하는 행동을 체계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역사를 통해 트렌드가 항상 지속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배웠다. 나심 탈레브가 '블랙 스완'이라고 이름 붙인 대공황이나 베를린 장벽 붕괴와 같이 극단적인 충격을 주는 사건이 가끔 발생한다. 스튜어트 파이어스타인이 말했듯이 예측에서 가장 예측하기 어려운 것 중 하나는 예측이 얼마나 자주 틀리는가이다. 실제로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확신할 수 없다는 것뿐이므로, 우리는 예상치 못한 것을 예상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302, 308-9)


"한 세기 전 미국의 경제학자 프랭크 나이트는 측정이 가능한 리스크와 측정이 불가능한 불확실성을 구분했다. 나이트는 경제 행위자들의 '실질적 전지전능'을 가정하는 것을 비판하고, 예상치 못한 상황의 요소를 강조했다. 몇 년 후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유럽에서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은 불확실하며, 20년 후의 구리 가격과 이자율, 새로운 발명품의 구식화 등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문제들에 예측 가능한 확률을 도출할 과학적 근거가 전혀 없다. 우리는 그저 모를 뿐이다〉라고 했다. 불확실성과 무지와 의도하지 않은 결과에 대한 비슷한 강조는 요제프 슘페터나 프리드리히 폰 하이에크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들은 신고전파 경제학자들이 변화를 무시하는가 하면 경제 행위자들이 완벽한 지식을 가지고 행동한다고 가정한 것을 비판했는데, 이는 완전경쟁(수많은 수요자와 공급자가 완전한 정보를 가지고 똑같은 품질의 상품을 주어진 가격으로 자유롭게 사고파는 상태)만큼이나 비현실적인 전제이기 때문이다."(312)


15장 과거에 대한 무지 


"역사가들이 여전히 편향bias이라고 부르는 개념은 관점의 문제로 되돌아가게 한다. 이는 1920년대 사회학자 칼 만하임과 1980년대 페미니스트들이 논의한 것처럼, 적어도 17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철학자 라 모트 르 베이예는 만약 우리가 카르타고의 관점에서 기록된 자료만 가지고 있었다면 오늘날 우리의 포에니 전쟁에 대한 인식이 어떻게 달라졌을지 물었다. 카이사르가 아닌 베르킨게토릭스가 자신의 회고록을 썼다면,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쟁은 우리에게 어떻게 보였을까? 베이예는 역사가의 작업을 요리사에 비유해 '역사는 부엌의 음식처럼 취급된다. ··· 모든 국가, 종교, 종파가 동일한 날것의 사실을 취하고 ··· 자기 입맛에 따라 양념한다'고 말했다. 따라서 (베이예의 주장에 따르면) 그가 역사서를 읽은 것은 과거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각 국가와 집단에서 말하는 것을 알아내기 위해서였다. 그가 특정 역사가에게 관심을 가졌던 것은 바로 편견prejudice 때문이었다."(321)


"장기적으로 볼 때 근본적인 의심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선택적 무지'의 발견, 특히 역사가 대부분 엘리트에 의해, 엘리트를 위해, 엘리트에 관한 내용으로 쓰였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1820년대에 러시아의 대문호 알렉산드르 푸시킨이 예멜리안 푸가초프가 이끈 농민 반란의 역사를 연구할 때, 차르 니콜라이 1세는 푸시킨에게 〈푸가초프 같은 자에게는 역사가 없다〉고 말했다." "1960년대에 에드워드 톰슨과 에릭 홉스봄이 '아래로부터의 역사'를 주제로 쓴 책들은(톰슨의 《영국 노동계급의 형성》, 홉스봄의 《원초적 반란자들》) 지도자들보다는 피지배층인 일반 대중의 삶과 고통뿐만 아니라 그들의 관점에도 중점을 두었다. 아래로부터의 역사는 노동계급 남성들로 시작되었지만, 거기에는 곧 여성의 역사도 포함되게 되었다. 새로운 지식은 과거의 무지를 더욱 확실히 깨닫도록 해주었다. 노동 계급, 농민, 여성에 대한 무지뿐 아니라 최근에는 환경에 대한 무지로까지 인식이 확장되었다."(323-5)


맺으며_새로운 지식과 새로운 무지


"이 책은 수세기에 걸쳐 새로운 지식의 부상은 필연적으로 새로운 무지의 부상을 수반했다고 주장한다. 인류는 집단으로 볼  때 그 어느 때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지만, 개인으로 본다면 이전 세대보다 더 많이 알지 못한다." "요컨대 우리는 지식과 무지를 단수형이 아닌 복수형으로 생각해야 하며, 일반 지식이나 통념이 장소와 시대에 따라 다르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미리엄 솔로몬이 말했듯이 '새로운 지식은 새로운 무지를 가능케 한다.' C. S. 루이스의 말을 빌린다면 〈모든 새로운 학습으로 그에 따른 새로운 무지를 위한 공간이 만들어질 것이다.〉 우리는 어느 개인, 문화, 시대의 무지를 언급하기 전에 항상 두 번 생각해야 한다. 왜냐하면 알아야 할 것이 너무 많아졌기 때문이다. 마크 트웨인의 말을 빌리자면 '우리는 모두 무지하다. 다만 무지의 대상이 다를 뿐이다.' 문제는 권력을 가진 자들은 필요한 지식을 갖고 있지 않으며, 지식을 가진 자들은 권력을 갖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335, 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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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부패한 중국은 왜 성장하는가 - 부패의 역설이 완성한 중국의 도금 시대
위엔위엔 앙 지음, 양영빈 옮김 / 한겨레출판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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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부패는 무조건 나쁘다는 착각


일반 통념에 의하면 부패는 경제 성장을 저해한다. 국가 간 회귀 분석은 부패와 빈곤 사이에 강력한 상관관계가 있음을 보여 준다. 개발 기구나 많은 학계에서는 부패를 근절하는 것이야말로 경제 발전의 선결 조건이라고 한다. 최근 몇 년간 부패는 대중의 불만을 더욱 고조시켰고 이집트와 튀니지에서 볼 수 있듯이 권위주의 체제를 전복하기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중국은 부패의 역설을 보여 준다. 세계은행에 의하면 1978년 개방 이래 중국은 “역사적으로 가장 빠르고 지속적으로 경제 규모를 확대해 왔다.” 광범위한 부패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경제 성장은 왜 빠르게, 오랜 기간 지속될 수 있었을까? 이 책은 중국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예외적이지 않다는 것을 보여 준다. 중국과 가장 유사한 것은 19세기 말의 미국이다. 이 시기의 미국은 맹렬한 성장과 눈에 띄는 불평등, 그리고 재력가들과 결탁한 부패 정치인들로 특징지어진다. 지금 우리가 목도하는 것은 1978년 이후 중국의 ‘도금 시대’가 건설되는 과정이다. 12-3)


# 부패의 두 가지 분류

1. 교환(뇌물) 대 절도(갈취)로 분류한 부패

2. 엘리트(인허가료) 대 비엘리트(급행료)와 관련된 부패


# 부패의 네가지 유형

1. 바늘도둑은 절도, 공공 자원의 잘못된 사용 또는 일선 관료의 갈취를 의미한다.

2. 소도둑은 공공 재원을 통제하는 정치 엘리트가 공공 재원을 횡령하거나 유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3. 급행료는 업계 종사자나 시민들이 장애물을 우회하거나 시간을 단축시키기 위해 관료에게 주는 뇌물이다.

4. 인허가료는 높은 수준의 이해관계를 기반으로 비즈니스 행위자가 막강한 권한을 가진 고위 관료에게 시간 단축에 그치지 않고 배타적이고 수익성이 높은 특권을 받기 위해 주는 뇌물을 의미한다.


중국에서 두드러진 부패 유형은 바늘도둑과 소도둑이 아니라 인허가료 부패다. 왜 중국에서는 명백한 도둑질보다 인허가료가 부패의 중요한 유형이 되었는가? 시장 개방 이후 중국의 정치 시스템은 엘리트와 비엘리트 모두 자신들의 관할 구역에서 창조된 부를 향유하는 이익 공유의 논리를 따랐다. 전체 중국 관료주의는 발전 독려에 대해 인센티브가 있었다. 정치 엘리트는 경력이나 금전적 차원 등 모든 측면에서 발전을 적극적으로 촉진하려는 인센티브가 있다. 지방 리더에게 보다 더 확실한 인센티브는 금전적 인센티브다. 지방 경제가 번영하면 할수록 지방 리더의 수익은 더 많아진다. 하위 공무원들 사이에서 이익 공유는 수당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들의 공식적 월급은 한없이 낮은 수준이지만 보너스, 선물, 무료 식사, 보조금 등 다양한 부가 혜택들을 통해 보충된다. 부가 혜택은 수익을 발생시키는 인센티브로도 작용하고 관료들이 바늘도둑 같은 작은 규모의 부패에 의존하는 것을 막는 기능도 한다. 21-2)


왜 중국에서는 이익 공유가 자리를 잡았으나 다른 가난한 나라들에서는 그렇지 못했을까? 나는 덩샤오핑의 역사적인 결정, 공산당의 일당 독재를 유지함과 동시에 공산당 관료들에게 자본주의적 성장의 이익을 나누어 준 시장 개방을 주목한다. 지대rents, 租같은 중국의 부패는 그들의 노력과 참여를 보상해 준다. 이것은 소련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소련의 급격한 정치, 경제적 변화(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는 당원들이 전체적으로 당을 저버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맨슈어 올슨Mancur Olson의 유명한 강도질 비유를 한다면, 이익 공유제는 중국 관료를 ‘정주형 강도stationary bandits’로 만들었다. 따라서 중국 관료는 전체적인 후생을 높이려고 했는데 이로부터 일정 비율의 이익을 안정적으로 떼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부패가 공산당 관료에게 열정적으로 시장 개혁을 도입할 유인을 제공한 것이다. 이는 단순하게 강도질하고 도망가는 것을 반복하는 ‘떠돌이 강도roving bandits’와는 다르다. 22-3)


또한 중국에서는 약탈적 부패를 감시하는 기능이 선거를 통한 것이 아니라 지역 간 경쟁을 통해 이루어졌다. 프로젝트나 투자자들을 유치하려는 극심한 경쟁에 직면한 지방 리더들은 하위 공무원들에게 ‘약탈하는 손’으로 작용하는 것을 자제했다.(경제학에는 여러 유형의 손이 등장한다. 정부의 역할을 규정할 때 크게 도움의 손helping hands과 약탈의 손grabbing hands으로 구분한다.) 그런 노력들은 어떤 경우에는 종교적 열정 수준까지 승화된다. 후베이의 사례를 보면 “투자자는 하느님이다. 투자자를 데려오는 사람은 영웅이다. 관료들은 공복이다. 기업의 이익을 침해하는 자들은 죄인이다”라는 구호가 등장했을 정도였다. 이게 전부는 아니다. 계약 체결은 강력한 성장 촉진제였다. 리더들은 ‘우대 정책’을 제공하려고 애썼다. 리더들은 경쟁에서 앞서 나가기 위해 자기 지방의 위치와 그 전략적 중요성, 상업적 이점, 브랜드 등을 통해 경쟁력을 보여 주어야 했고 발전 전략을 개선해야 했다. 23-4)


2장 독이 되는 부패 약이 되는 부패


나는 중국과 러시아를 비교하는 것으로 시작할 것이다. 공산주의 이후의 사회를 공부하는 학생들은 오랫동안 ‘경제적 자유화가 왜 중국에는 활기찬 자본주의적 성장을 불러왔으나 소비에트공화국에는 몰락을, 러시아에는 경기 침체를 가져왔는가’에 대한 의문을 품어 왔다. 중국과 러시아 모두 체제가 자본주의 경제로 전환하는 시기에 폭발적인 부패의 성장을 경험했다. 왜 두 나라의 경제적 결과는 이토록 다른가? 대중적으로 설득력 있는 하나의 설명은, 러시아의 부패가 중국의 것보다 ‘더 파괴적’이었다는 것이다. 소도둑, 급행료, 바늘도둑 같은 유형의 부패는 기업 활동을 위축시키고 공공 재산을 낭비하게 만든다. UCI 부패 지수 방식으로 수집된 증거들은 다음 사실을 보여 준다. 러시아는 급격한 정치적 자유화로 인해 모든 형태의 부패가 봉인 해제된 반면 중국은 성장을 저해하는 부패를 보다 효과적으로 통제했음을 말이다. 중국에서는 경찰관들과 하위 공무원에 대한 규율이 좀 더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41, 43)


중국과 인도를 비교하면 급행료(행정적 장벽 또는 지연을 넘기 위한 뇌물)와 인허가료(프로젝트에 특별한 접근을 위한 뇌물)의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난다. 인도에서는 장애물을 넘어서기 위해 뇌물을 제공하고 중국에서는 수익성이 좋은 사업 계약을 따내기 위해 뇌물을 제공한다. 인도의 뇌물이 윤활유라면 중국의 뇌물은 슬러지에 가깝다. 발전 지향적인 중국 전제 정치에서 권력은 개별적 지도자들에게 집중되어 있다. 이들은 손쉽게 규제를 해제하거나 문호를 개방할 수 있는 권력을 지녔다. 반면에 견제와 균형의 원리에 근거한 인도의 분절적인 민주주의 정치 체제는 많은 당국자들에게 결정을 막을 권한을 부여하지만 계약을 확대하거나 요구 사항을 일방적으로 승인할 수 있는 권한은 주지 못한다. 한 마디로 인허가료는 중국이라는 자본주의 기계에 연료를 공급했고, 사업 계약을 위해 인허가료를 지불한 자본가를 부자로 만들었으며, 빠른 성장을 이룩한 공산당 간부에게 두둑한 보상을 주었다. 44-6)


미국과 중국 두 나라는 무언가 공통점이 있다. 부패의 지배적인 유형이 바로 인허가료라는 점이다. 확실히 해 두기 위해 중국은 4가지 부패 영역 모두에서 그 정도가 미국보다 심하다. 그렇지만 인허가료만 보면 그 차이가 적다. 중국은 확실히 뇌물의 통로가 되는 광범위한 네트워크 형성 분야에서 지배적이다. 그러나 회전문 인사와 로비를 통한 규제 포획을 보면 미국이 더 크다. 이는 미국 자본주의, 민주주의에서 인허가료가 제도화된 것을 의미한다. 이미 몇몇 미국 학자들은 이 점을 지적했다. 레시그는 미국 의회를 예로 들며 “우리는 제도 내의 그 어떤 구성원도 부패하지 않았지만 제도 자체가 부패한 것을 생각할 수 있다”라고 말한다. 요약하자면 미국에서는 인허가료가 기본적으로 제도화된 것이다. 중국의 인허가료는 여전히 개인적인 관계, 뇌물, 불법적인 행위와 얽히고설켰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중국의 인허가료는 낙후된 인허가료라고 표현할 수 있다. 47-8)


3장 중국의 부패는 어떻게 진화했는가


나는 중국 부패의 현 상태를 불러온 요인으로 2가지를 강조한다. 첫째는, 1993년 중국 지도부의 중앙 집중적 계획에서 ‘사회주의 시장 경제’로 이행하는 기념비적 결정이다. ‘사회주의 시장 경제’는 국가가 지배적인 역할을 하는 시장 경제를 말한다. 공산당 간부들은 민간사업과 새로운 산업에 대해 적극적인 옹호자가 되었으며 동시에 여전히 핵심 자원에 대한 통제권을 가지고 있다. 이 권한은 그들에게 거대한 개발도상국 시장에서 상당한 권력을 부여했으며, 민간 자본가들은 공산당 간부들의 환심을 사려는 노력을 경주했다. 둘째, 중앙 정부가 1998년부터 시작한, 광범위한 행정 개혁을 통한 개혁이 있다. 이러한 개혁은 국가의 공공 금융 감시 능력을 제고했고 거래를 수반하지 않는 뇌물을 억제했다. 중국의 정실 자본주의 발호는 널리 알려져 있지만, 이 두 번째 과정은 대체로 간과되었다. 즉, 부패는 중국이 명령 경제에서 시장 경제로 전환하는 데 있어서 추동자이자 산물이었다. 55-6)


1993년 이후 정립된 사회주의 시장 경제란 무엇인가? 서구의 관찰자들은 이 구호를 의례적인 것으로 폄하할 수 있다. 그러나 ‘사회주의’라는 단어는 ‘시장 경제’를 이룩하려는 목표를 위한 수식어이다. 사회주의 시장 경제 건설은 중앙 계획 경제를 시장 구조로 대체하고 경제 부문에서 국유화 부분을 극적으로 줄이는 것을 의미한다. 베이징은 국가가 정한 생산 할당량과 가격 통제를 1993년 이후 폐기 처분했다. “정통 계획 시스템은 거의 소리 없이 누구도 눈치채지 못한 채 사라졌다”고 배리 노튼Barry Naughton은 이야기한다. 이것은 국유 기업의 규모 축소와 1990년대 개혁의 거대한 물결을 동반했으며 “조대방소抓大放小(큰 것은 잡고 작은 것은 놓아준다. 대형 국유 기업은 집중적으로, 소형 국유 기업은 느슨하게 관리해서 활성화한다는 의미)”로 알려졌다. 1980년대에 유행한 국가와 민간 기업의 혼합체인 향진 기업과 집체 기업 역시 일제히 사유화의 길을 걸었다. 59-60)


1993년 이후의 개혁이 경제에서 국가의 역할을 감소시키지는 않았다. 개혁은 역할을 바꾸었을 뿐이다. 1980년대 동안 정부의 최우선 과제는 계획과 명령이었다. 무엇을 얼마나 많이, 얼마의 가격에 생산할 것인지 결정해야 했다. 1993년 중앙 계획이 해체되고 당-국가 공무원은 새로운 역할을 떠맡았다. 새로운 산업 육성, 투자 촉진, 시장에서 자금 융통, 도시 계획, 파괴와 건설 등을 정말 미친 듯이 빠른 속도로 수행해야 했다. 월더에 의하면 이러한 역할은 공산당 간부들에게 “소련에서는 절대로 가능하지 않았던” 새로운 권력의 원천을 제공했다. 따라서 중앙에 의해 진행된 개혁들이 국가의 역량을 증대시키고 교환 없는 형태의 부패를 억제했어도, 새로운 형태의 부패가 번창했다. 새로운 형태의 부패는 정치적 내부자들의 국가 자산 갈취, 밀수꾼과 폭력배와의 결탁, 정부 직책 판매, 그리고 무엇보다 광범위한 뇌물의 네트워크 형성 등을 포함한다. 62)


지방 정부는 비록 토지를 매각할 수는 없지만 일정 기간 동안 토지를 사용할 권리를 ‘토지출양금土地出让金’이라는 명목으로 팔고 전액 지방 정부의 금고에 귀속시켰다. 토지와 관련된 수입 증가는 전국적으로 1999년 510억 위안에서 2012년 3조 2000억 위안으로 추정된다. 이런 배경은 부동산 시장에서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의 수익성이 나도록 만들었다. 거대한 신흥 시장, 경제에서 확장적인 정부의 역할, 수조 위안에 달하는 불법 자금을 배경으로 권세가를 형성하는 개인들 간의 광대한 네트워크가 형성됐다. 정치인들은 그들 사이, 가족과 민간 기업가들 사이에 상호 의존하는 밀접한 관계를 만들었다. 월더가 예리하게 지적했듯이 그 결과는 ‘초-후견주의super-clientelism’였다. 이는 과거 수십 년간 상상할 수 없었던 ‘훨씬 더 강력하고, 부유하고, 수단이 좋은 당 엘리트’의 출현으로 귀결됐으며, 권력과 부의 그물이 최상층부에서 최하층부 수준까지 내려오는 위계적 질서를 만들어 냈다. 63, 65)


4장 중국식 관료주의가 이익을 공유하는 방법


중국의 중앙 정부는 국가 비전과 광범위한 정책을 내놓지만 지방 정부는 경제적, 사회적 발전 계획에서 엄청난 정도의 자치를 행사한다. 엘리트 관원은 중국의 독재적인 위계 구조에서 분명 강력한 인물들이지만 행정부의 나머지 99퍼센트 집단은 통치의 일상 업무를 수행하며 일선에서 정책을 집행한다. 게다가 개혁 시기의 일반 경찰관, 사무원, 검사원 그리고 학교 선생들은 단순한 공공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잠재적인 사업가 소질을 가진 직원들이었다. 경제가 도약하는 초기에 지방 정부는 공무원들의 사적인 네트워크를 통해서 투자자를 모집했다. 일선 관료는 ‘약탈하는 손’이 되든지 또는 ‘도움의 손’이 되든지 다 될 수 있다. 그들은 자의적으로 수수료나 벌금을 부과하거나 과도한 검사로 기업을 괴롭혀 기업가들의 성장을 저해할 수도 있다. 또는 기업가들을 서로 연결하거나, 각종 편의와 맞춤식 서비스를 제공하거나, 회의를 조직하는 등으로 경제를 부양할 수 있었다. 86)


중국의 공공 피고용인들은 ‘쌍궤雙軌(두 가지 노선이나 방법)’ 방식으로 보상을 받았다. 다양한 수당, 특혜와 결합한 공식적 급여가 바로 그것이다. 중국에서 수당과 특혜는 2가지 소득 원천에 연동되었다. 그 2가지는 지방 정부의 세수, 개별 공무원이 징수하는 수수료와 벌금이다. 가상의 간부(간부는 공산주의 용어로 관료를 의미한다) 리Li씨를 생각해 보자. 리 씨는 ‘옥玉’이라는 이름의 현县에서 건설부 직원으로 일한다. 리 씨는 국가적으로 표준적인 공식 급여를 받는다. 여기에 그는 옥현의 예산으로부터 수당을 받는다. 이 수당은 옥현이 거둔 세금과 유보된 이익에서 지급된다. 세 번째 수당이 또 있다. 그것은 리 씨가 속한 부서인 건설부가 수수료, 벌금, 사용료, 보조 서비스로 받은 이익 중 일부인 것이다. 세금이 아닌 소득으로 지급하는 것이므로 각 부서들은 부서원의 혜택(연장 근로, 집단 여행, 무료 식사, 선물 카드 등)을 책임진다. 중국의 개혁 시기에는 이러한 이익 공유 관행이 전체 공공 행정 기관에서 벌어졌다. 89)


중국의 일선 관료들이 비즈니스에서 ‘도움’과 ‘약탈’ 모두를 통해서 수입을 얻는 행위는 집단 행동 문제에 의문을 제기한다. 왜 이 관료들은 약탈(수수료, 벌금, 개별 부서의 수입)만 하면 되는데 굳이 전체 지역에 혜택을 주는 비즈니스 친화적인 노력도 하는가? 먼저 알 수 있는 것은 지역 리더들이 부하 직원들의 비즈니스 이익 침해를 막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리더들의 경력과 축재가 지역의 번영에 묶여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제도적으로 통제할 유인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 보다 흥미롭고 잘 드러나지 않으면서 자발적으로 통제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일선 관료들이 장기 이익을 위해서 약탈적 행위를 스스로 억제한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최빈국들에서는 경제 발전의 성과가 관료 집단의 노력과 괴리되어 있고 근시안적이다. 중국이 특이한 것은 일선 관료들조차 개인적인 금전적 이해가 경제 발전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고, 따라서 당장의 갈취를 억제함으로써 장기적인 이익을 누릴 줄 안다는 것이다. 90-1)


당근은 중요하지만 그것은 적절한 채찍과 결합되었을 때만 그러하다. 국가 전체와 개별 지방 수준에서 통제와 처벌의 기제가 필요하다. 1998년 주룽지 총리는 현대적 공공 행정을 만들기 위해 전면적인 절차상 개혁을 진행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2001년 재정부가 주도하고 중용한 국고단일계좌Treasury Single Account, TSA 제도이다. 이 개혁은 처음에는 중앙 정부 수준에서 시작되었고 하위 지방 정부로 확대되었다. 국고 시스템은 전체 공공 부문의 계좌를 관리하며 공금의 예금과 지출을 감시한다. 이전에는 공공 기관의 계좌는 행정 조직, 지역, 부서에 따라 매우 분산된 상태였다. 2001년 이전에는 개별적 공공 기관이 그들의 재량으로 ‘임시 계좌’를 만들어 운용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행이었다. 재정부 개혁은 임시 계좌를 불법화했고 현존하는 모든 계좌를 병합해 추적이 쉽도록 만들었다. 최근에는 광범위하게 확산된 디지털 결제가 관료 체제의 재정적 투명성을 더욱 높였다. 102-3)


5장 부패와 경제 성장이 공존할 수 있는 이유


분명히 부패 유형에서 인허가료가 지배적일 때 그것은 어떤 민간 회사를 부유하게 만들고 주식 시장 상장도 가능하게 하며 《포브스》 선정 억만장자 반열에 오르게 할 수 있다. 건설과 투자를 고취시키며 이것들은 GDP 성장으로 기록된다. 그러나 인허가료는 자본주의의 스테로이드처럼 작용한다. 이것은 성장을 자극하지만 자원의 잘못된 배분에 의한 왜곡과 체계적인 위험을 키우고 불평등을 악화시킨다. 인허가료라는 연료를 공급받은 자본주의는 사회 내, 그리고 기업 내의 불평등(정치적 연줄의 유무에 따라)을 악화시킨다. 정실 관계자들은 그들의 경쟁자보다 정부 계약을 쉽게 따내고 경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한다. 인허가료는 경제 개혁을 가로막고 자원 배분을 왜곡하는 강력한 기득권을 만들어 낸다. 인허가료는 성장을 촉진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매우 심각한 부작용을 일으킬 수 있다. 이런 위험과 왜곡이 전체 중국 시민에 영향을 주지만 그 효과는 계산하기가 불가능하다. 133-6)


페이는 이런 시스템을 “자본가가 정치인으로부터 값어치 있는 지대를 획득하는 것”으로 묘사한다. 이런 과정은 “중국 공산당의 몰락”으로 연결된다. 나는 페이가 본 정실 자본주의 문제점에 완벽히 동의한다. 그러한 문제점에는 “소수가 부를 축재하는 것과 높은 수준의 불평등성”이 있다. 그러나 그의 묘사는 동전의 다른 한 면을 간과한다. 부패 관료가 종종 유능하고 개발을 촉진한다는 사실을 놓치는 것이다. 보시라이(충칭)와 지젠예(난징)의 사례로부터 우리는 가장 유능한 리더들이 성장을 촉진하는 전략을, 단지 불도저식으로 정책을 밀어붙이고 텅 빈 ‘유령 도시’만을 건설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대신에 보시라이와 지젠예 모두 그들의 지역을 전략적으로 배치했고 브랜드화했다. 이들과 결탁한 부유한 정실들은 정치 엘리트들의 개인적인 부와 사치스러운 소비에 필요한 자금을 공급할 뿐 아니라, 정치 엘리트들이 개발 목표를 달성할 수 있도록, 그래서 정치적 성과를 내도록 도와준다. 136-7)


6장 시진핑의 반부패 운동과 중국의 미래


시진핑의 반부패 운동은 이전의 운동과 5가지 주목할 점에서 달랐다. 첫째, 매우 장기적이며 현재도 진행 중이다. 오히려 이번 운동은 ‘캠페인이 아니며 중국의 뉴 노멀’이 되었다. 둘째, 엄청난 수의 관료가 수사망에 걸려들었다. 2012~2017년 사이에 규율 당국은 대중으로부터 총 1200만 건의 제보와 보고를 받았으며, 270만 개의 단서를 토대로 150만 건을 조사했고 150만 명을 처벌했다. 셋째, 시진핑은 지위가 높든 낮든(그의 유명한 표현에 의하면 ‘호랑이와 파리’) 부패한 관료를 숙청할 것을 맹세했다. 숙청 대상에는 몇몇 ‘초거대 호랑이’가 포함되었다. 넷째, 반부패 운동은 당과 국가 기관을 넘어서 군부, 국유 기업, 금융 조직, 그리고 최근에는 국가 미디어와 대학교까지 확대되었다. 마지막으로 덧붙일 중요 사항은 최근의 반부패 운동은 여러 관료를 체포하는 것 외에 관료 체제의 규범을 똑바로 하는 데에도 목표를 두고 있다는 것이다. 시진핑은 모순적인 정책 수단(지속적인 캠페인)을 발명한 것이다. 143-5)


반부패 운동이 중국의 경제 성장을 저해할 것인가를 평가하기 위해서는 단기적 효과와 장기적 효과를 구분해서 봐야 한다. 단기적으로 기회주의적 자본가가 더 이상 법을 우회하거나 특권을 얻기 위해 후견인에 의존하지 않으면, 그들은 비즈니스 활동을 줄일 것이다. 따라서 낮은 성장으로 귀결된다. 대단히 엄격한 조사는 정부 관료를 불안하게 하고 위험 회피적으로 만든다. 이렇게 되면 그들은 새로운 계획을 승인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복지부동의 자세를 취하게 된다. 예를 들어 2015년에 지방 관료들은 국가발전개혁위원회NDRC의 승인에도 불구하고 450억 위안 규모의 투자 프로젝트를 질질 끌었던 적이 있다. 끝으로, 관료들에 대한 엄중 단속 과정에 연루될 것을 두려워한 기업들은 해외로 도피하게 된다. 2014년에 4250억 달러 규모의 자본 도피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당이 정실주의를 뿌리 뽑겠다고 결심한 이상 고통스럽지만 필요한 조정 과정이다. 160)


시진핑의 반부패 운동은 아직 기대한 장기적 편익을 거두고 있지는 않다. 또는 2가지 이유로 더 나쁜 미래 전망이 있을 수 있다. 첫째, 그의 운동은 부패한 관료를 잡아내는 것을 넘어 정치적 통제를 더 강화하는 수단으로 빠르게 진화하고 있다. 시진핑은 관료들이 당의 이데올로기를 고수하고 충성을 다할 것을 요구한다. 둘째, 시진핑은 관료 체제를 속박함과 동시에 사회적, 정치적 자유를 옥죄었다. 시진핑은 권력을 잡자마자 당-국가와 사회 두 영역에서 자유를 억압하는 정책을 펼쳤다. 최고 지도자가 그의 부하 직원들에게 과감함과 규율을 잘 지킬 것 모두를 촉구한 것인데 이는 비현실적인 요구다. 이것이 바로 새로운 문제(복지부동의 자세) 출현의 이유다. 복지부동은 ‘란정懒政’으로도 알려져 있는데 공무원의 게으름을 의미한다. 시진핑 시대는 모든 상명하복 해법(엄중한 단속)이 새로운 문제를 낳고(복지부동), 체제는 이 문제를 더욱 상명하복적인 해법(복지부동을 처벌)으로 풀려고 한다는 역설을 가져온다. 160-2)


7장 중국과 미국의 도금 시대로 살펴본 부패의 역설


도금 사회는 정실 자본주의의 시기다. 또한 이 시기는 비상한 성장과 변화의 시기였다. 수백만의 미국인이 농촌에서 공장으로 이주했고, 수많은 이의 삶의 수준이 올라갔으며, 새로운 산업이 발흥했다. 자본 시장은 확대되었고, 철도는 장거리 상업을 가능하게 했으며 J. P. 모건이나 존 D. 록펠러 같은 초거대 거물들이 등장했다. 이 시기의 만연한 부패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영국을 따라잡아 세계의 공장이 되었다. 오늘날 중국은 동일하지는 않지만 미국의 도금 시대와 비슷한 것을 경험하고 있다. 덩샤오핑 시기 개혁주의자들은 섬세한 정치적 단결을 했고 마오의 파괴적인 통치의 폐허에서 중국을 재건했다. 이것은 미국이 내전으로 인한 대대적인 파괴 후에 국가를 재건한 것과 마찬가지다. 중국의 시장 개혁은 미국이 19세기에 경험한 것처럼 심한 불평등에도 불구하고 8억 5000만 명의 빈곤층을 구제했다. 미국과 마찬가지로 중국에서 지배적인 유형의 부패는 인허가료(자본가가 권력자들로부터 특권을 구입)다. 166)


21세기로 넘어오면서 금권 정치는 점차 복잡해지는 금융 시스템으로 전이되었고, 이 금융 시스템은 레버리지에 의해 뒤틀리고 전문적인 세부 사항에 의해 복잡해져 이제는 그 누구도 이해하기 힘들게 되었다. 그렇다면 공산당 지배하에 있는 중국의 인허가료는 언젠가 워싱턴의 K-스트리트(미국의 로비집단)처럼 제도적이고 합법적인 스타일로 바뀔 것인가?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제도적 부패는 민주주의의 핵심인 공식적인 대의제 정치의 타락이다. 미국 헌법 수정 제1조는 ‘정부에 억울한 사연을 청원할 수 있는 국민의 권리’를 신성하게 받든다. 레시그의 말에 의하면 이 권리는 정치적 기구가 ‘체계적으로 잘못된 영향력에 굴복할 때’ 변질된다. 당의 지도부와 시진핑 개인을 향한 권력 집중화는 중국 엘리트의 부패를 고도의 개인적이면서도 쌍방 관계 문제로 만들었다. 6장에서 보았듯이 그의 반부패 운동하에서 후견인은 중국 정치인의 흥망을 결정하는 데 성과보다 더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175-6)


서구 사회의 발흥은 결코 좋은 제도와 ‘혁신적 문화’의 결과가 아니었다. 그것은 부패, 착취, 불평등과 함께해 왔다. 서구 역사에 대해 나쁜 점까지 모두 살피려는 솔직한 평가는 개발도상국에서의 경제적, 정치적 현대화의 과정을 보다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부패는 부유하거나 현대적인 제도를 도입하더라도 반드시 없어지지는 않는다. 그보다 부패는 비인격적인 교환과 복잡한 것을 향해 진화한다. 중국은 비슷한 구조적 변화의 과정을 매우 짧고 압축적인 시간 내에 겪었으며 여전히 진행 중이다. 이 책은 부패가 경제 성장에 ‘좋다’ 또는 ‘나쁘다’라는 과도한 단순화를 반대한다. 모든 부패가 나쁜 것은 맞지만 그 피해는 부패 유형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부패의 경제적 효과를 분석할 때 우리는 연간 GDP 성장 너머의 것을 봐야 하며 부패가 가져오는 간접적이고 왜곡된 결과를 조사해야 한다. 부패의 경제적 효과를 분석할 때 우리는 연간 GDP 성장 너머의 것을 봐야 한다. 17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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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중국의 시험지옥
미야자키 이치사다 지음, 전혜선 옮김 / 역사비평사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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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서론 


"과거제도 성립 전까지 중국은 귀족주의의 전성시대로 불리며 지방의 유력 귀족들이 뿌리를 내리고 세력을 떨쳤기 때문에 아무리 제왕 권력이라 하더라도 섣불리 그들에게 손을 댈 수는 없었다. 그들은 지방의 주州를 단위로 하여 그곳에 이른바 귀족 연합 정권이라 할 만한 지방정부를 형성했다." "귀족들의 이와 같은 오만 방자한 태도를 참지 못한 천자가 수나라 문제文帝(재위 581~604)였다. 그는 지방정부에 대한 귀족의 세습적인 우선권을 일절 인정하지 않았으며, 지방관아의 고급 관리는 모두 중앙정부에서 임명하여 파견하는 식으로 제도를 고쳤다. 그러자면 중앙정부가 항상 다수의 관리 예비군을 장악하고 있어야 하는데, 그 관리 유자격자를 배출하기 위해서 과거제를 수립한 것이다." "중국의 관리 등용 시험에는 여러 종류의 과목이 있었으므로 '과목에 따른 선거', 그것을 줄여 '과거'라는 단어가 당 대唐代에 성립했다. 송 대宋代에 이르러 과목이 진사 하나로 좁혀졌으나 여전히 과거라는 단어를 사용했다."(13-4)


시험 공부 


"학문은 가급적 일찍 시작하는 편이 좋다는 게 상식이었다. 그래서 남자아이에게는 다섯 살 무렵부터 슬슬 가정교육을 시작했다. 중국에서는 나이를 따질 때 태어나면 바로 한 살로 치기 때문에 다섯 살은 겨우 만 세 살 남짓에 해당한다. 아이의 가정교육을 담당하는 사람은 주로 어머니였는데, 혹여 다른 누가 됐든 여유가 생기는 사람이 맡았기 때문에 여기서부터 일찌감치 환경에 따른 격차가 나타났다. 이때 글자를 익히고 천자문과 『몽구』를 배운다." "여덟 살(만 여섯 살)이 정식으로 학문을 시작하는 나이로 인식되어 이때부터 이른바 초등교육이 시작되었다. 물론 이는 돈이 드는 일이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에게는 그럴 만한 여유가 없었다. 중류 이상의 가정에서만 서당, 보통 여학閭學·사학社學·학관學館 등으로 불리는 곳에 아이를 입학시켰다. 가장 중요한 학과목은 사서로, 대부분 그 가운데 『논어』부터 시작한다. 공부 방식은 책을 펼친 다음 처음부터 끝까지 통째로 암기시켰다. 암기가 학문의 거의 전부이다."(22-4)


# 『몽구蒙求』 : 당 나라 때 이한이 지은 아동용 교재. 중국 역대의 뛰어난 인물과 행적을 4자 1구로 하여 두 구를 합쳐서 여덟 자 한 문장으로 운을 붙인 형식


"열다섯 살이 될 때까지는 고전 교육을 웬만큼 마치는 게 보통인데, 그렇다면 대체 그 사이에 어느 정도 분량의 공부를 해야 하는 걸까? 학문의 중심은 어디까지나 사서오경으로서 책 본문의 글자 수를 세어보면 다음과 같다. 사서 가운데 『대학』과 『중용』은 『예기』와 중복되기 때문에 뺐지만 전부 합해 43만여 자에 달하는,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의 숫자다. 보통 이 경전들의 본문은 암송해야 하는 것이 원칙이라 하니, 엄청난 양이다. 하루에 200자씩 외운다면 딱 6년쯤 걸린다. 일단 암송이 끝나면 그 몇 배에 이르는 주석을 읽고, 본문의 일부가 시험문제로 나왔을 때를 대비하여 해답 작성법을 배운다. 그 외에도 반드시 읽어 두어야만 하는 경전, 역사서, 문학서들이 있다. 문학서는 단순히 읽기만 해서는 소용이 없고, 그것을 교본 삼아 스스로 시나 문장을 짓는 훈련을 해야 한다. 이 때문에 진지하게 이런 공부를 하고자 한다면 머리가 웬만큼 좋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않다면 도중에 질려버릴 것이다."(26-8)


현시(縣試) : 학교시(學校試) 1 


"학교시는 본래의 의미로 따지면 과거 안에는 들어가지 않는 시험이지만, 명 대부터 과거에 앞서 치르는 예비시험의 성격으로 새롭게 추가되었다. 명 대부터 과거를 보려는 사람은 반드시 국립학교의 학생, 즉 생원生員이어야 한다는 자격 요건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따라서 과거 응시자는 먼저 국립학교의 입학시험부터 치러야 했다. 이 입학시험이 바로 학교시다." "학교시는 3단계로 나눠져 있는데, 첫 번째 단계가 현에서 치러진 현시縣試, 두 번째 단계가 부에서 치러진 부시府試, 세 번째 단계가 본시험이라고도 할 수 있는 원시院試다. 동시에 응시하는 수험생은 연령에 상관없이 모두 동생童生이라 불렀다. 응시 자격에는 다소 제한이 있었다. 즉 부계 조상 3대 안에 천한 직업, 이를테면 창관娼館·기루妓樓 등의 경영에 종사한 적이 없어야만 한다. 그 밖의 부분에서는 농農·공工·상商을 따지지 않았다. 또 조부가 사士, 즉 관리라 하더라도 수험생에게 별다른 특전은 없었다. 요컨대 모두에게 사민평등의 기회를 주었다."(30-2)


"현시는 예비시험의 성격을 가지고 있으므로, 그 목적은 과다한 수험생을 어느 정도 떨어뜨려서 입학 정원에 가까운 숫자까지 추려내는 데 있다. 극히 대체적인 표준으로 말하자면 현시에서는 입학 정원의 약 4배가량을 선발해 놓고, 다음 부시에서 그 숫자의 절반으로 추린 다음, 마지막 원시에서 또다시 절반으로 추려 입학 정원 숫자에 딱 맞아떨어지도록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정원의 10배 이상이 몰리는 곳이 있는가 하면, 거의 무시험에 가까운 곳조차 생겨났다. 각 현학縣學의 입학 정원은 그 지방의 문화 수준과 인구수를 감안해서 정했는데, 많은 곳은 25명이고, 3~4명인 학교도 있었다. 문화적으로 앞선 지역에서는 응시자 숫자가 많은 데다 학력 수준이 높기 때문에 경쟁이 치열했던 반면, 시골에서는 비교적 입학 자체는 쉬웠다. 하지만 이후 계속해서 어려운 시험을 앞두고 있으므로 연속되는 시험을 뚫고 앞으로 나아가려면 처음부터 어려운 경쟁을 이겨낸 사람만이 도중에 낙오를 면할 수 있다."(44-5)


부시(府試) : 학교시 2 


"부시는 부의 장관인 지부知府가 책임자로서 현시에 합격한 사람들을 모아 놓고 치르는 시험이며, 이 시험을 통해 대략 절반 정도가 떨어진다. 사실 앞선 현시는 이 부시에 맞춰 일정이 조정되며 그에 따라 모든 현에서 같은 날 일제히 치러진다. 이는 현시의 날짜를 서로 다르게 할 경우 본적지를 위조하여 한 사람이 이중으로 시험을 치르는 부정행위를 할 수 있기에 그런 일을 미리 방지하기 위해서다. 부성府城, 즉 부의 관청이 설치된 곳은 상당히 번화한 대도시로, 그곳에는 시험을 위해 시원試院이라 불리는 대규모 상설 건물이 들어서 있다. 현시에 합격한 동생은 각 현에서 증명서를 받아 들고 이곳 부성으로 속속 모여든다." "부시는 현시 합격자에 대한 재심사의 의미가 강하다. 바꾸어 말하면 다음의 원시院試에 응시하기에 충분한 학력이 있는지를 더욱 꼼꼼하게 확인하기 위함이다. 시험문제는 공통적으로 똑같이 출제하지 않고 각 현에 따라 다른 문제를 내기도 했으며, 따라서 합격자도 각 현별로 정했다."(46-7)


원시(院試) : 학교시 3 


"청 대 중국 본토의 각 성에는 최고 행정관인 총독總督과 순무巡撫가 파견되었는데, 그 외에 학정이 고위 관리로서 임명되었다. 학정이란 제독학정提督學政의 약칭이며, 이는 교육행정장관이라는 의미다. 학정의 관위는 통상적으로 총독이나 순무보다 낮지만 그 임명을 받은 사람은 결코 총독이나 순무 아래에 속하지 않고, 그들과 대등한 권한을 가졌다. 학정은 3년 임기로 천자가 직접 각 성에 부임시킨 관리로서, 총독이나 순무가 천자의 직속 관리이듯이 학정도 천자 직속이기 때문이다." "원시는 부내의 학교에 입학하여 생원이 되기 위한 최종 시험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이 성적 결과에 따라 입학 여부가 결정된다. 한 사람의 학정이 하나의 성 안에 보통 10여 개에 이르는 부를 순시하면서 실시하는 시험이므로 날짜를 정확하게 정할 수 없다. 그래서 학정 쪽에서 계획을 세워 미리 부에 도착할 날짜를 알려주면 부에서는 그에 따라 원시를 준비하고, 그에 맞춰 부시를, 부시에 맞춰 현시 날짜를 정하는 것이다."(48-50)


세시(歲試) : 학교시 4 


"본래 학교에 오랫동안 재학하여 몇 차례 학력 시험을 치르면 그 가운데 성적이 우수한 사람은 학교에서 나와 곧바로 관리가 되는 길도 열려 있었다. 과거는 그런 학교에서 양성된 인재를 등요하기 위해 특별한 시험을 치러 관리의 자격을 부여하는 제도였다. 그리고 그 시험관은 임시로 임명된 위원이 맡았다. 그러나 후세에 이 두 가지가 혼합되면서 관리가 되기 위해서는 과거를 치르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이고 또한 과거를 보기 위해서는 학교의 생원이 되어야 했기 때문에, 그저 과거의 전 단계로서 학교에 들어가는 입학시험을 치르는 것으로 변해갔다. 게다가 그 희망자가 많았기 때문에 입학시험이 점점 어려워지자 그것은 마치 과거의 예비시험처럼 되어버렸다. 그러나 원래의 제도는  제도로서 그대로 계속 유지되었다. 학교의 교육적 입장에서 실시하는 세시歲試라는 학력 시험이 있었는데, 이것이야말로 학교시의 본체라 할 만했다. 하지만 이것은 단순한 학력 시험에 지나지 않은 탓에 점점 무시되기에 이르렀다."(60-1)


"생원은 더 이상 동생童生이 아니라 한 사람의 신사이다. 아직 관리는 아니지만 관리에 준하는 대우를 받는다. 그러나 생원이 되었다고 해서 과거 시험에 쉽사리 통과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부유한 집안이라면 과거에서 낙방해도 몇 년이고 몇 십 년이고 다음 기회를 노리면서 공부를 계속해 나갈 수 있겠지만, 중류 가정은 그렇게 언제까지나 빈둥거리는 생활이 경제적으로 용납되지 않는다. 다행히 생원쯤 되면 꼭 관리가 아니더라도 관리와 유사한 부업을 가질 수 있다. 바로 관리의 사설 비서인 막우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생원은 연줄을 찾아 가능하면 앞으로 출세할 것 같은 위세 있는 행정장관 밑에서 막우로 일하려 했다. 수당은 장관의 쌈짓돈에서 나오기 때문에 고액 연봉까지는 아니더라도 한 집안의 생계를 책임지기에는 충분하다. 그러다가 이 부업이 본업으로 굳어지면서 더 이상 과거를 볼 의지를 상실하는 사람도 생겨났다. 이처럼 과거에 대한 희망을 버린 사람을 일컬어 '진취進取를 포기했다'라고 한다."(67-9)


과시(科試) : 과거시(科擧試) 1 


"송 대宋代 이후 과거는 3단계의 형식을 취했는데, 우선 지방에서 향시鄕試(해시解試)를 실시하여 그 합격자를 중앙에 보내고, 중앙정부에서는 회시會試(공거貢擧)를 실시한 다음, 이어서 천자가 직접 주관하는 전시殿試에서 최종적으로 합격자를 결정하는 것이 표면상의 원칙이었다. 하지만 후대로 오면서 점점 이 3단계의 본시험에 딸린 소시험이 추가되어 청 대에 이르면 엄청나게 복잡한 시험이 되어버렸다. 먼저 첫 번째 향시의 예비시험이라는 의미를 지닌 과시科試가 있다." "과시는 향시를 보려는 생원만을 대상으로 하여, 과연 그들이 향시에 응시할 만한 충분한 학력을 갖추었는지를 시험하고, 동시에 그 응시 숫자를 제한하려는 목적으로 실시한다. 그런데 생원 쪽에서는 세시야 어찌 되든 상관없다고 여겨 경원시하지만 과시는 응시해 두지 않으면 나중에 곤란해질 수 있으므로 장려나 강제를 하지 않는데도 오히려 서로 앞다투어 시험을 보고자 몰려들었다. 참으로 이해타산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70-1)


향시(鄕試) : 과거시 2 


"향시는 각 성의 성도省都에 성내省內 거자擧子들을 모아 실시한다. 향시는 시험 날짜가 정해져 있으므로 전국에서 동시에 치러지는데, 시험관은 중앙에서 파견되기 때문에 목적지에 도착하기까지 상당한 시일이 걸린다. 그들이 시험 날짜에 제때 도착하지 못해도 문제지만, 너무 빨리 도착해도 그들에게 청탁을 시도하려는 사람이 생길지 모른다. 이런 이유로 중앙에서는 너무 이르지도 너무 늦지도 않게 두 사람의 고관考官을 출발시킨다." "시험장은 공원貢院이라고 하며 각 성의 성도에 상설 건물이 있다. 과시 때까지는 수험생들이 대청, 곧 건물 안의 넓은 마루에 늘어놓은 책상 앞에 앉아서 시험을 쳤다. 그러나 공원은 딱 한 사람만 들어갈 수 있는 크기의 독방인 호사號舍가 벌집처럼 수천, 수만 개가 모인 곳이다." "거자들이 전부 각자 자신의 호사에 자리를 잡으면 총감독관인 감림관은 대문에 자물쇠를 채우고 봉인한다. 이때 이후로는 무슨 일이 발생한다고 해도 시험이 끝날 때까지 대문은 열리지 않는다."(74-7, 89)


"거자가 제출한 답안은 검은 붓글씨로 적혀 있기 때문에 묵권墨券이라 불린다. 시험장에서 거자가 사용하는 먹은 반드시 검은색으로 정해져 있으며 그 이외의 색은 절대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이 답안지는 그대로 심사원에게 보여주지 않는다. 필적 등으로 판단해 특정 인물을 알아낸 뒤 그를 합격시키고 유리하게 채점하면 곤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답안을 전부 일일이 옮겨 적은 뒤 그 옮겨 적은 것을 심사원에게 보내는 것이다." "교정이 끝나면 두 개를 합쳐 보관 담당에게 보내며, 보관 담당관은 그 가운데 원본인 묵권을 따로 보관하고 필사본인 주권만 심사원인 고관에게 보낸다." "문장도 내용도 매우 훌륭함을 의미하는 '필의정잠' 등으로 채점된 답안에는 추천을 뜻하는 '천薦'이라는 글자를 기록하여 정·부고관에게 보낸다. 정고관과 부고관, 즉 주임과 부주임인 고관은 일반적으로 이렇게 추천을 받은 천권薦券만 공동으로 채점한다. 정·부고관 두 사람은 반드시 검은색 붓만을 사용하게 되어 있었다."(103-4)


"사제 관계란 예전에는 직접 학문을 가르치고 그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일컫는 말이었지만, 과거가 유행하고부터 오로지 시험관만을 스승으로 모시는 것으로 변하였다. 반면에, 학문을 손수 가르쳐준 선생은 단순히 수업을 해주는 스승이라고 해서 그다지 중시하지 않게 되었다. 수업을 해주는 스승에게는 꼬박꼬박 수업료를 납부하기 때문에 이미 금전으로 거래가 끝났다고 보는, 지극히 냉정한 구분 방식이다. 그러나 시험관은 누구를 합격시키든 자유이지만 특별히 자신의 재능과 학문을 알아주어 수많은 사람 가운데서 뽑아주었기 때문에, 이에 대해 특히 지기知己의 은혜를 느끼는 것이다. 시험관은 그저 한 번 답안을 심사해주었을 뿐이지만, 평생 은혜를 잊지 않고 서로 도와가며 관료 사회의 험난한 파도를 헤쳐 나가자고 맹세하는 것이다. 이는 천자 쪽에서 보면 매우 바람직하지 못한 경향, 즉 당파를 만드는 한 요인이 되기 때문에 몇 번이고 금지령을 내렸으나 전혀 효과가 없었다."(112)


거인복시(擧人覆試) : 과거시 3 


"향시가 치러진 이듬해 3월에는 전국의 거인들을 북경으로 모아 회시會試를 치른다. 장소는 북경의 공원貢院으로, 이곳은 전년도의 신입 거인뿐만 아니라 그 이전에 합격했던 거인들도 운집하여 그 수가 1만 몇 천 명에 이르므로 미처 다 수용하지 못할 우려가 있다. 그래서 청 대에는 회시 직전에 거인복시라는 또 한 번의 시험을 마련하여 지원자를 떨궈내고 여기서 합격한 사람에게만 회시를 볼 수 있도록 했다. 날짜는 회시 한 달 전인 2월 15일로 정해져 있다." "시험 당일, 출제는 사서 1문제, 시 짓기 1문제로 정해져 있다. 시험은 그날 안에 종료되지만, 열권대신은 4일 동안 답안을 심사하도록 명 받는다. 열권대신이 성적을 5등급으로 나누어 명부를 작성한 뒤 천자에게 바치면, 천자는 그것을 다른 조사관에게 교부한다. 조사관은 이 답안과 거인이 향시 때 작성했던 답안을 비교하여 필적이 동일한지를 조사하고, 이와 동시에 열권대신의 채점이 타당한지도 함께 심의하여 의견이 일치하면 성적을 발표한다."(126-7)


회시(會試) : 과거시 4 


"회시는 향시가 치러진 이듬해, 즉 축丑, 진辰, 미未, 술戌 해의 춘삼월에 북경 공원에서 전국의 거인들 가운데 거인복시에 합격한 이들을 모아서 치르는 대규모 시험이다. 회시는 공거貢擧라고도 칭하는데, 역사적으로 봐도 이 시험이야말로 과거의 본체를 이루는 것이다. 앞선 향시는 이른바 예비시험이고, 다음에 치러지는 전시殿試는 재시험의 의미밖에 없다. 당 대唐代에는 이 시험에 합격하면 곧바로 진사進士가 되었다." "어쨌든 다행히 회시에 합격하면 이제는 다음 번 전시에도 합격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전시에서는 원칙적으로 낙제자를 배출하지 않는 것이 관례이기 때문이다. 회시의 답안지는 모두 천자가 별도로 임명한 재조사관인 복감대신覆勘大臣에게 전달된다. 한편 회시 합격자는 예부에 가서 자필 이력서를 제출하는데, 재조사관은 답안지와 이력서를 대조하여 필적이 동일한지를 확인한다. 이상이 없으면 그 내용을 천자에게 보고하며, 이때서야 비로소 회시 성적이 최종적으로 결정된다."(129, 138)


회시복시(會試覆試) : 과거시 5 


"청 대 초기까지는 회시에 합격한 사람이 곧바로 전시를 볼 수 있었으나 18세기 건륭 시대(1736~1795)에 들어 또 하나의 작은 시험이 이 사이에 추가되었다. 이를 회시복시會試覆試라고 한다. 이 시험의 취지는, 전시는 천자가 직접 실시하는 중요한 시험인 데다 낙제를 배출하지 않는 것이 관례였기 때문에 전시에 앞서 회시의 복시, 즉 재시험을 실시하여 사실상 전시의 예비시험으로 삼았던 것이다. 이 시험을 치르는 목적은 첫째, 수험자가 전시를 보기에 충분한 학력을 갖추었는지를 확인하고, 둘째, 전시는 궁궐 안에서 치러지므로 이 시험을 미리 같은 장소에서 실시하여 수험자로 하여금 시험장 분위기를 익히도록 함으로써 본시험 때 실수하지 않도록 훈련시키며, 그리고 셋째, 전시에 대리 시험을 치르는 등의 부정행위가 발생하지 않도록 다시 한번 본인임을 확인하는 것이다." "이 회시복시 때 상당수의 합격자가 떨어지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수험자의 입장에서 보면 결코 한순간이라도 방심할 수 없다."(141, 145)


전시(殿試) : 과거시 6 


"송 대宋代 이후 천자의 독재 권력은 급속히 강화되었다. 당대의 공거는 예부라는 부서에서 실시했고 천자는 직접 관여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공거를 통해 어찌 됐든 시험관과 시험 합격자 사이에 스승과 제자라는 사적인 관계가 형성되고, 그것이 결국 우두머리와 하수인 같은 관계로 발전했다. 그 결과 정치가 전체의 이익보다는 이런 집단의 사적인 이해관계에 따라 좌우되는 폐해가 발생했으며, 나아가 이른바 붕당 싸움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일단 이 같은 사적인 당파 결합이 이루어지면 천자의 권력으로도 도저히 해결하지 못하는 사태로까지 치달아버린다. 그래서 송의 초대 천자인 태조(재위 960~976)는 공거 뒤에 또 한 차례의 시험을 추가했다. 태조는 스스로 시험관이 되어 시험을 실시하였으며, 은혜를 베푸는 형식으로 합격자들을 모두 자신의 제자로 삼고 직접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어 관료의 대단결을 꾀하려 했다. 이 시험이 전시의 기원으로, 역대 천자들에게 대대로 이어져 청조까지 이르렀던 것이다."(147-8)


"천자의 결정으로 가장 우수한 10명의 성적 순위가 정해지면 그 이튿날에 이를 포함하여 전체 수험자의 성적 발표가 이루어졌다." "제1갑의 세 명 가운데 1등은 장원壯元, 2등은 방안榜眼, 3등은 탐화探花라고 부른다. 이 세 사람은 천자로부터 진사급제進士及第라는 학위를 받으므로 대단한 명예로 여긴다. 특히 장원은 인생에서 최대 최고의 영광을 얻은 것으로, 장원급제자는 소설 주인공으로도 자주 등장한다." "제1갑의 세 명만은 순천부윤順天府尹(부윤은 오늘날 시장에 해당하는 정3품의 벼슬이며, 순천은 북경을 가리킨다)과 동행하여 의종들을 따라 부府로 가서 급제 축하연에 참가한다. 이 축하연에서는 장원이 주빈이므로 남향 상석에 앉고 방안이 그 왼쪽, 탐화가 오른쪽에 앉는다. 순천부윤은 손님을 대접하는 주인의 역할을 맡아 말석에 앉아서 대접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저 일개 서생에 불과하던 무명의 청년이 이제는 완전히 딴판으로 융숭한 대접을 받는 것이다."(166, 169-71)


조고(朝考) : 과거시의 연장선 


"전시와 회시 중에 회시 성적이 그나마 믿을 만하다고는 하지만, 천자가 몸소 주관하는 전시 성적을 무시하고 회시 성적을 끄집어내 그것으로써 새로운 진사들의 임관 표준으로 삼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청조의 옹정제는 전시를 치른 뒤에 다시 또 하나의 시험을 추가했다. 마치 지붕 위에 또 지붕을 얹는 격이지만, 이를 통해 다소나마 전시의 불합리한 점을 시정하고자 했다. 이에 전시의 재시험 같은 형태로 조고朝考라는 시험이 실시된다." "한림원은 문재가 뛰어난 사람들의 보고寶庫라 일컬어졌으며 유능한 인재들을 모아 공부나 실무 수습 과정을 거치게 한 다음 필요할 때마다 중앙관청이나 지방 요직에 임명하여 실제 정치를 맡겼기 때문에, 이른바 고급 관료 예비군이 모여 있는 기관이었다." "조고는 이른바 한림원에 잔류시킬 사람을 정하는 시험이며, 그런 까닭에 한림원 관리가 책임자가 되어 실시한다. 조고는 일종의 취직 시험이라는 성격을 갖고 있으며, 낙제자를 탈락시키는 데 목적이 있지 않았다."(199-200)


무과거(武科擧) : 과거의 별과(別科) 


"문과거文科擧와 별도로 무과거, 줄여서 무과武科 혹은 무거武擧라는 시험이 존재했다. 하지만 정부나 세간에서 무과거에 대한 관심은 지극히 낮았고, 그 합격자에 대한 예우나 합격한 뒤의 대우도 거의 주목할 만한 점이 없는 수준이었다." "무진사들은 그 성적에 따라 각각 무직武職에 임명되지만, 세간에서도 또 군대 내에서도 그다지 중시되지 않았다. 정치와 달리 시험에 운 좋게 급제를 했다고 해서 그것으로 전쟁에 실질적인 도움이 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문진사는 이래저래 비난을 받으면서도 그 가운데 유명한 정치가나 학자가 다수 배출되었지만, 무진사로서 실제로 전공을 세운 사람은 거의 없다. 군대에서 세력을 장악하는 길은 누가 뭐래도 병졸부터 시작하여 갖은 고초를 겪고 실전에서 공을 세워 장군에 오르는 것이다. 결국 무진사는 후방 내지의 평온한 장소에서 부대장으로 근무하면서 정년까지 평범하고 무사하게 지내면 되는 자리다. 그러니 세상 사람들이 조금도 떠받들어주지 않는 것도 당연하다."(202, 209)


제과(制科) : 과거보다도 수준이 높은 시험제도 


"과거는 밑에서부터 한 단계씩 정해진 순서에 따라 수많은 시험을 통과해 나가야 하는 제도로서 위로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수준이 높아진다고 한다. 그러나 출제 범위나 채점 방식이 대체로 정해져 있기 때문에 어떤 때는 매우 특별한 재능을 지닌 사람이 오히려 떨어질 위험성도 있다. 또 그런 특별한 재능을 가진 사람일수록 과거와 같은 시험제도를 경멸하여 보이콧할 수도 있다. 이 같은 과거의 약점은 예전부터 지적되었다. 이 때문에 역대 정부는 과거와 병행하되 일반적 과거 시험의 그물로는 건져낼 수 없는 대어를 다른 시험을 통해 얻고자 시도했다. 그것이 제과制科, 즉 천자의 조칙(詔)을 통해 부정기적으로 실시하는 시험이다." "그 중에서도 박학홍사博學鴻詞, 즉 뛰어난 대학자를 구하는 제과는 청조 초기에 가끔 시행되었다." "청조로서는 딱히 청조에 강한 반감을 갖고 있지는 않은, 중립적 입장의 노학자들을 끌어들여 아군으로 만드는 것이 중국을 통치하는 데 가장 효과적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210-2)


맺음말 : 과거에 대한 평가 


"역사상 나타난 모든 제도에는 영고성쇠가 있으며, 이는 개인의 생애와도 다를 바 없다. 맨 처음에는 정부 측에 필요한 인원은 많은데 인물이 부족했다. 그래서 과거를 활성화하여 진사를 다수 채용했으나, 그러는 사이에 이번에는 진사의 수가 너무 늘어나서 할당해주어야 할 관직의 수가 모자랐다. 그렇다고 진사 합격자의 수를 줄일 수도 없었으므로 기존에 하던 대로 진사를 배출했다. 결국 이로 인해 진사들의 취직난이 발생함으로써 과거가 오히려 정부에 무거운 짐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정부 측에서도 과거제도에 대해 재검토를 할 수밖에 없었다. 북송 중기 신종(재위 1067~1085) 시대에 왕안석이 재상이 되었을 무렵이 바로 그 시기에 해당한다. 왕안석은 관리를 채용할 때 그저 시험을 실시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고 더 훌륭한 인재를 양성할 필요가 있음을 인식했다. 그리하여 근본적인 교육부터 바로잡아야 한다고 생각해서 새롭게 학교 건설에 나섰다."(224-5)


"북송이 망한 뒤에도 이 학교제도는 거의 그대로 남송에 계승되었다. 그리하여 그 졸업생은 과거 출신자와 동일한 자격으로 관직의 길에 오를 수 있었다. 왕안석은 궁극적으로 과거를 폐지하고 대학 졸업생만으로 관리를 채용하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비록 이 이상이 실현되지는 못했지만 과거제도 이외에 학교제도를 병행해서 실시했다는 사실은 송 대 사회의 선진성을 보여준다. 이같이 학교제도가 모처럼 마련되어 있었음에도 과거제도를 대체하지 못했던 까닭은 무엇보다 경제적인 사정이 작용했을 것이다. 교육은 원래 돈이 드는 일이기 때문이다. 남송 대에 접어들면 태학은 규모 면에서 북송에 비해 훨씬 축소되었다. 정부는 대개 교육처럼 바로 눈앞에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 일에는 돈을 들이려 하지 않는 법이다. 이후 학교제도는 오히려 과거제도 속에 흡수되어 학교시는 과거의 예비시험으로 이용되는 실정이었다. 그 결과 실제로는 학교가 없어지고 과거만으로 환원되어버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225-6)


"명·청 시대에도 과거제도가 그 나름의 효과를 발휘했던 적은 있다. 그것은 모두 개국 초기였다. 그런데 건륭 이후의 시대가 되면 조정은 이미 차고 넘칠 정도의 관료 예비군을 떠안고 있었기 때문에 사실상 더 이상의 사람이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 단지 당시까지의 관례에 따라 과거를 실시하는 데 지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시험을 시행하면, 응시하러 오는 거자들은 모두 사탕에 모여드는 개미처럼 관직을 얻기 위해 서로 다투는 무리(엽관자獵官者)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사실 수험자 쪽에서도 평화로운 시기가 오래 지속됨에 따라 일반적으로 학력도 높아져서 성적이 평준화되었기 때문에 시험관 쪽이 우수한 인재를 취사선택하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그래서 시험을 시행하는 쪽에서는 어떻게 인재를 발탁할 것인가를 고민하기보다 어떻게 하면 다수를 떨어뜨릴까에 대한 방법을 더 많이 생각했고, 그리하여 여러 가지 번잡한 형식을 만들어냄에 따라 결국에는 과거의 진정한 정신을 잊어버리고 말았다."(2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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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제국의 충돌 - ‘차이메리카’에서 ‘신냉전’으로
훙호펑 지음, 하남석 옮김 / 글항아리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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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서론: 지구적 갈등의 정치사회학


두 개별 국가 간의 경쟁에 초점을 맞추거나 미국과 중국이 글로벌 통치 기구의 규범과 질서를 어떻게 형성하고 재구성하는지에 집중하는 연구들은 국가가 권력, 세계 지배 혹은 글로벌 거버넌스를 추구하는 자율적 행위자라고 가정한다. 이러한 가설은 ‘국가의 복귀Bringing the State Back In’ 학파가 국가 자율성이라는 베버주의적 개념을 복원한 이후로 통용되었다. 베버주의적 관점에서 볼 때, 자율성을 가진 외교 정책 엘리트들의 국익에 대한 정의와 엘리트 네트워크 속에서 내생적으로 발전된 정책 지향성은 국제정치를 분석하는 토대를 이룬다. 외교 정책 엘리트는 군사 및 정보 분야 외교 관료, 싱크탱크의 학자들, 외교 정책에 관심을 갖는 선출직 관료로 구성된다. 이는 국제무대에서의 국가 행위가 ‘위신 감정’과 세계에서의 ‘권력 지위’ 추구에 의해 추동된다는 베버의 가정에 따른 것이다. 이 관점은 국가의 외교 정책을 초국적 기업의 경제적 요구의 단순한 반영으로 보는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 대한 대응이다. 12)


국가주의적 관점과 경제학적 관점을 넘어, 국가 간 경쟁과 기업 조직 간의 경쟁 혹은 초국적 연결을 세계질서와 갈등의 형성에 있어 상호작용하는 두 개의 자율적 영역으로 보는 더 섬세한 국제정치 이론들이 있다. 이러한 이론들의 통찰에 기반해 나는 국가 간 지정학적 경쟁과 기업 사이의 자본 간 관계를 연결시켜 1990년대와 2000년대 미국과 중국의 공생관계 및 2010년대 그 공생관계가 경쟁으로 변화한 원인들을 검토할 것이다. 그리고 지구정치경제의 거시적인 구조 변화를 배경으로 미국과 중국 사이의 기업 및 국가 간의 중간 수준 상호작용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두 경제 대국을 합칠 때 GDP에서는 세계 전체의 거의 40퍼센트, 국방비에서는 50퍼센트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미중 관계의 변화는 세계 정치에서 가장 중대한 변화이며, 21세기 미래의 세계질서 혹은 혼돈을 결정짓는다. 이 책은 변화하는 미중 관계를 설명하기 위한 시도이자 지구적인 정치 권력의 지형이 어디로 향할지에 대한 예측이다. 12-3)


2장 공생


미국 시장은 1980년대 내내 중국의 초기 수출 부문에서 가장 큰 시장이었다. 중국 경제를 수출 주도 성장으로 전환시키려는 베이징 당국의 시도가 성공하려면 미국 시장이 낮은 관세로 중국산 제품 수출에 개방되어 있어야 했다. 그러나 중국 경제가 수출 주도 성장으로 가는 중대한 기로에 놓여 있을 그 당시 1979년 미국과 중국의 공식 수교 이후 시행되어왔던 중국 제품에 대한 미국 시장의 개방은 제동이 걸려 있는 상황이었다. 1993년 빌 클린턴이 10년 만에 민주당 대통령으로 취임한 직후, 탈냉전 시기 새 정부의 외교 정책 엘리트들은 자유무역에 우호적이지 않은 노동조합뿐만 아니라 중국에 우호적이지 않은 인권 옹호자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중국 수입품에 대한 관세를 중국의 인권 개선과 연결시키려 했다. 이와 관련해 클린턴 정부가 시도한 특정 정책은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의 국제무역 체제 속에서 최혜국MFN 지위와 중국의 인권 향상 문제를 연결시키는 것이었다. 19-20)


중국의 MFN 지위 갱신과 인권 문제를 연계시키는 클린턴의 입장은 1989년 톈안먼 사건 진압 이후 외교 기관의 인권 이상주의자들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입장은 무엇보다 민주당의 대선 승리에 필수적인 지지자들이었던 노동조합의 경제적 우려에 대한 대응이었다. 미국의 노조들은 중국의 무노조, 저임금 노동과 경쟁이 심화되는 것을 우려해왔다. 따라서 중국의 MFN 지위와 인권 조건을 연계시키겠다는 공약은 미국과 중국 간 무역 자유화에 대한 보호주의적 반대 입장을 살짝 감추고 있는 것이었다. 중국의 MFN 지위의 연례적인 무조건 갱신이 종료되면서 중국의 비즈니스 환경과 관련된 미국 기업들의 불확실성은 크게 늘어났다. 연례 검토의 실제 결과와 상관없이 MFN 지위를 인권 조건과 연계시키는 것은 미중 무역의 성장과 미국 기업 공급망의 중국 내 확장에 효과적으로 제동을 걸었다. 수출 주도형 성장으로 전환하려는 중국의 시도는 큰 걸림돌에 부딪혔다. 21)


1994년 초반, 노동조합과 기업의 이익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던 클린턴 행정부는 중국이 1993년에 설정된 인권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MFN 지위 갱신에 대해 심의했다. 이와 동시에 백악관에 신설된 국가경제위원회NEC의 힘이 커지면서 정부의 의사결정 과정에서 월가의 목소리가 상당히 커졌다. 월가의 베테랑 은행가이자 골드만삭스의 공동 회장인 로버트 루빈이 국가경제위원회 초대 의장이었다. 중국의 권위주의 체제를 약화시키기 위해 무역 정책을 지렛대로 활용하려는 외교 정책 엘리트들 대신 대중국 무역을 확대하려는 연합 세력을 구축한 기업의 목소리가 강력해졌다. 결국 기업과 월가의 힘이 우세했다. 1994년 5월 26일 클린턴은 중국의 MFN 지위를 갱신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사후 정당화로 클린턴 행정부는 중국과의 자유무역이 중국의 민간 기업과 중산층에 힘을 실어줄 수 있고, 이는 결국 정치적 자유화의 추진으로 이어진다는 ‘건설적 관여’ 이론을 내세웠다. 26-7, 32)


중국과의 무역에서 인권 문제를 분리하는 데 찬성하는 많은 기업을 효과적인 연합으로 이끈 가장 중요한 하나의 힘은 중국 국가 그 자체였다. 중국 국가는 이러한 기업들을 대리 로비스트로 적극적으로 모집하고 조정했다. 『런민일보』에 따르면 중국을 방문하기 위해 초청된 미국 기업 대표단 수는 1993년과 1994년에 정점을 찍었다. 이 방문 여행에서 다수의 미국 기업 임원들은 중국 정부와 대규모 주문 및 계약을 포함하는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중국 당국은 이러한 거래를 이 미국 손님들이 1994년 중국의 MFN 지위 갱신을 위해 로비해달라는 것과 명시적으로 연결시키곤 했다. 이런 사례를 살펴보면 기존에 중국에 진출하지 않고 미중 무역과 직접적인 관련이 거의 없던 미국 기업들이 왜 공격적으로 로비에 나섰는지를 알 수 있다. 인권 연계 조치 해제를 위한 로비에 가장 적극적으로 나섰던 기업 중에는 중국 정부가 제공하는 개별 우대 정책의 혜택을 받는 곳이 많았다. 28-9)


중국의 MFN 지위와 인권 문제 연계 조치를 해제시킨 것은 미중 무역 자유화의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클린턴이 중국의 MFN 지위를 무조건 승인해 기존 정책을 번복함으로써 2000년에 행정부가 중국에 항구적 정상무역관계PNTR 지위를 부여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1998년 ‘최혜국 대우MFN, Most Favored Nation’라는 용어는 ‘정상무역관계NTR, Normal Trade Relation’로 대체되었다). 이로 인해 2001년 중국의 WTO 가입에 있어 마지막 주요 걸림돌이 사라졌다. 2000년에 미국과 중국 간의 항구적 정상무역관계 논쟁이 의회에서 벌어졌을 때, 수년 동안 이어진 미중 무역 자유화로 인해 기업 부문에서는 이미 중국과의 무역 속에서 자생적인 기득권자들이 생겨났으며, 이들은 자발적으로 무역 자유화를 위한 추가 로비활동을 벌였다. 그 결과 생겨난 미국과 중국의 경제 공생 및 미국의 기업 이익은 여전히 중국을 주요 지정학적 경쟁자로 전망하는 워싱턴의 외교 군사 기관의 경향을 제어하는 역할을 했다. 32)


클린턴 행정부 말기에 이르러 냉전 이후의 세계질서는 소련의 붕괴로 만들어진 진공 상태 속에서 (예를 들어 코소보 전쟁과 같이) 여러 지역에서 빈번하게 지정학적 위기가 발생하고 있었고, (1994년 멕시코의 페소화 위기에서 1997~1998년의 아시아 금융위기에 이르기까지) 규제받지 않는 세계 자유시장의 금융위기들에 직면하는 등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이는 모두 미국에 계속 늘어나는 재정 부담을 안겨줬고 이러한 개입들로 인해 미국은 점점 더 비용이 많이 드는 지구 제국의 길로 나아가게 되었다. '차이메리카Chimerica' 체제 속에서 중국의 저가 제품 수출과 미국 국채에 대한 투자는 그 어느 때보다 더 미국 제국 건설의 중요한 경제적, 재정적 토대가 되었다. 2000년대 미국이 중앙아시아와 중동에 전념하던 시기에도 중국은 북핵 위기 등 아시아 지역의 지정학적 위기를 억제하는 데 미국을 도왔다. 차이메리카의 전성기에 중국은 미국의 지구 제국에 없어서는 안 될 조력자가 되었다. 33)


3장 자본 간 경쟁


1990년대 중국의 자유시장 개혁은 자본 축적의 법칙이 현재 대부분의 경제활동을 추동한다는 면에서 중국을 자본주의 경제로 전환시켰다. 그러나 중국의 경제 체제는 미국이 구상했던 자본주의로 수렴되지 않았다. 중국이 세계 시장에 편입된 지 30년이 지난 지금, 국가는 국유 기업SOE의 형태로 경제 전반을 통제하고 있다. 중국의 국유 부문은 중국 공산당의 여러 파벌의 봉건 영지가 되었다. 1990년대와 2000년대 중국 호황의 시기에 정치 엘리트 가문들은 서로 국유 부문을 분할해 가지고 있었고, 이는 이들 간의 세력균형을 만들어내 당-국가의 ‘집단지도 체제’를 안정화시켰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시기에 중국의 수출 주도형 호황이 주춤하자 중국 정부는 부채 기반의 고정 자산 투자로 공격적인 경기부양책을 실행해 그에 대응하려 했다. 그러나 중국의 외환보유고는 더 이상 그 거품을 따라잡지 못했다.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 시기에 중국의 미상환 부채는 GDP의 330퍼센트 이상으로 올라갔다. 35-7)


부채로 이뤄진 경기 회복의 결과로 만들어진 과다한 생산 능력과 불필요한 인프라 시설은 수익성이 없었다. 경기 침체와 더불어 외환보유고의 확대 없이 지방 정부의 부채 형태로 이뤄진 유동성 급증은 자본 이탈 압력을 발생시켰다. 그 결과 2015~2016년에 주식시장 붕괴와 인민폐의 급격한 평가절하가 일어났으며, 2016년에 자본 통제를 강화하고 나서야 경제가 안정되었다. 은행 시스템은 경기 둔화를 막기 위해 여러 차례 신규 대출을 투입했다. 이처럼 규모가 더 큰 반복적인 대출이 급증하면서 부채는 더 늘어났다. 성장 둔화와 부채 악화로 인해 당-국가 엘리트들은 민간 부문과 외국 기업에 대한 압박의 속도를 높였으며, 고속 성장의 종식으로 당-국가의 정당성이 위협받자 당-국가 엘리트들 간의 갈등도 깊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2012년 당-국가의 최고 지도자가 된 시진핑은 ‘집단지도 체제’라는 협치의 방식에서 전제적 통치 방식으로 전환하며 의사결정 권한의 집중을 위한 일련의 시책을 실시하기 시작했다. 39)


시진핑 체제에서 중국의 국가주의적 전환이 가속화되면서 미국의 외교 정책 엘리트들의 중국관은 더 완고해졌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의 여파로 미국의 최종적인 쇠퇴가 왔다고 베이징 당국이 판단하면서 중국은 광범위한 지정학적 문제에서 더 대담하게 대립적인 입장을 채택했다. 미국이 중동의 전쟁에서 빠져나오기 시작한 2010년대에 워싱턴 당국은 오바마의 ‘아시아로의 회귀’ 정책에 따라 지정학적 경쟁자로서 중국을 견제하는 데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더 중요한 사실은 중국 경제의 국가주의적 전환이 가속화되면서 중국에서 미국 기업의 이익이 피해를 입었다는 것이다. 중국 진출에 앞다퉈 나섰던 기업들은 대부분 엄청난 이득을 거뒀지만, 약속했던 것과는 달리 제한적인 시장 접근 및 기술 이전에 대한 압력 등은 이후 많은 미국 기업이 중국에서 맞닥뜨려야 할 일의 전조였다. 이러한 변화는 미국의 대중국 정책을 더 대립적인 방향으로 전환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40-1)


2001년 중국의 WTO 가입 이후, 미국 경제에 미친 ‘차이나 쇼크’는 즉각적이면서도 거대했다. 1999년과 2001년 사이에 중국으로부터의 수입품이 밀려들어오면서 미국에서 200만 개 이상의 제조업 일자리가 사라졌다. 이 충격으로 인해 2000년대에 반중 무역연합은 활기를 되찾았다. 새로운 반중 무역연합의 목적은 의회와 백악관이 중국을 환율 조작국으로 지정해 중국 수입품의 유입을 막기 위한 교정 조치를 적용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 연합의 중추는 노동조합이었다. 그리고 중국으로의 해외 진출 역량은 좀 떨어지고 중국산 수입품으로 인해 자국 시장이 잠식당하고 있는 미국 제조업체들이 이 연합의 또 다른 만만찮은 세력이었다. 이들이 실패한─트럼프 행정부 시절인 2019년 8월에서 2020년 1월까지의 잠깐 동안을 제외하고는─이유 중 하나는 중국으로 제조 부문을 아웃소싱해 낮은 중국 환율 덕에 이득을 보고 있는 미국 기업들로 구성된 대항 로비 연합이 이들의 로비 노력을 상쇄시켰기 때문이다. 50-1)


환율 조작을 둘러싼 로비활동은 미국 기업들 간의 분열을 보여주지만, 중국의 시장 접근 및 지식재산권과 관련된 로비활동은 다양한 부문의 미국 기업들 사이에 의견 일치가 이뤄졌음을 보여준다. 근본적으로 시장 접근, 지식재산권, 심지어 환율 조작 문제는 모두 서로 연관되어 있으며, 미국 및 기타 외국 기업에 대한 베이징 당국의 일반적인 적대감이 드러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2010년 1월 19개 로비 단체가 백악관에 서한을 보내 “미국의 기업과 지식재산권을 희생시켜 자국의 기업을 발전시키려는 정책을 만들어내는 중국의 체계적인 노력”에 대해 “미국 회사들에 즉각적인 위험을 초래한다”고 불만을 표하며, 미국이 중국에 더 강력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중국에 반대하는 기업 반란’이 부상한 것은 오바마 행정부가 중국을 제외하고 미국과 대부분의 아시아 태평양 국가를 포함하는 자유무역 지대를 설립하는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을 추진하려는 노력에 박차를 가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53-4)


미국 기업들이 중국의 이익을 위한 로비활동에 대한 열의가 줄어들면서, 2010년 이후 매파적 입장의 지정학적 주장이 정책 결정 과정에서 더 큰 영향력을 갖게 되었다. 일단 국가 안보에 치중하는 매파들이 견제받지 않고 정책 결정을 주도하게 되자, 워싱턴 당국은 특정 미국 기업의 이익에 피해를 주는 리스크를 감수하더라도 중국과의 지정학적 경쟁이라는 당위를 내세워 정책을 채택하는 경향이 강해졌다. 가장 주목할 만한 사례 중 하나는 중국의 군사 및 안보 기구와 긴밀한 관련이 있다고 여겨지는 중국의 민영 첨단 기술 대기업인 화웨이에 대한 미국의 정책 변화다. 화웨이에 대한 공격적인 정책은 전적으로 국가 안보만을 고려한 것이었다. 화웨이의 글로벌 확장에 장비, 부품, 기술을 판매한 많은 미국 첨단 기업의 이해관계가 훼손됐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정책이 진전돼 확고히 시행될 수 있다는 점은 미중 관계의 구조적 조건이 얼마나 달라졌는지를 보여준다. 56-7)


4장 세력권


2000년대에 세계적으로 상품 수요가 폭발하는 가운데, 중국은 다른 개발도상국들에 대한 많은 대출을 통해 해당 국가의 원자재를 확보할 수 있었다. 에너지와 원자재 수출국에 많은 대출이 이뤄졌으며, 명시된 양의 상품으로 상환받았다. 이러한 유형의 대출로 가장 잘 알려진 사례는 2007년에서 2014년에 걸쳐 중국이 베네수엘라에 630억 달러의 차관을 제공하고 원유로 돌려받은 것이다. 2010년 이후에는 인프라 시설 프로젝트에 자금을 지원하는 쪽으로 더 많은 대출이 이뤄져 인프라 건설에서 중국의 과잉생산 능력을 수출하는 길을 열었다. 이 자본 수출의 대부분은 2013년부터 일대일로一帶一路 이니셔티브라는 명목으로 이뤄졌다. 개발도상국에 대한 중국의 자본 수출 공세는 과잉생산 능력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중국 기업들에게 새로운 수요를 창출해줬다. 예를 들어 많은 제철소나 건설기계 제조업이 과잉생산과 과도한 부채로 흔들리고 있었는데, 이 해외 수출은 그 기업들에게 생명줄이 되어줬다. 61-2)


중국의 다른 개발도상국으로의 자본 수출은 중국 국내 정치경제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지만, 중국의 진출이 미친 영향은 다양하다. 중국은 개발도상국들에게 상품 수출을 위한 새롭고 확대되는 시장 및 자본의 원천으로서 기회를 제공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많은 개발도상국에게 종속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 독립적인 발전을 추구하는 많은 정부는 원자재 수출에 대한 의존을 줄여나가며 산업화를 달성하는 것을 장기간의 우선적인 목표로 삼았다. 개발도상국은 (국내 산업의 성장을 촉진하기 위해 외국 제품의 수입을 억제하는) 수입 대체 산업화 혹은 (세계 시장에서의 판매를 위해 자국의 공산품에 보조금을 지급하고 판촉하는) 수출 지향적 산업화를 통해 이를 달성하려 했다. 중국의 부상은 많은 개발도상국의 그런 노력을 가로막았다. 원자재 수출국의 수익 증가는 채굴 산업과 농업 기업의 확장으로 이어졌고, 이 국가들의 경제에서 원자재 수출 비중을 줄이기 위해 고안된 발전 정책은 무력화되었다. 64)


중국 차관으로 인한 무역적자 외에도 부채 주도 인프라 건설 호황의 지속 가능성은 또 다른 우려 사항이다. 개발도상국에 대한 중국의 인프라 건설 관련 대출은 2009~2010년 중국 국유 은행들이 지방 정부와 국유 기업에 고정 자산 투자를 밀어붙일 수 있도록 자금 지원을 하기 위해 대출의 수문을 열었던 국내 경기부양책의 외부화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투자의 대부분은 산업 부문의 과잉생산 능력을 야기했고 수익성이 발생하지 않았기 때문에 대출은 지속 가능하지 않았으며, 지방 정부와 국유 기업 사이에 부채의 시한폭탄이 되었다. 중국 정부가 대출 상환 연기, 탕감, 재정 투입 등을 통해 채무불이행 위기에 처한 국유 부문 채무자들을 구제함으로써 국내의 부채 위기는 방지할 수 있었지만, 이 해결책은 개발도상국의 해외 채무자들에게는 실행 불가능한 것이었다. 채무불이행 리스크를 고려해 다수의 중국 해외 차관에는 담보물에 대한 조건이 포함되어 있어서 채무불이행 시 중국이 전략 시설을 장악할 수 있었다. 66)


중국의 경제적 부상과 냉전의 종식으로 인해 중국은 아시아의 현 정부들과 함께 근대 이전의 중국 중심 질서를 닮은 새로운 중국 중심 질서를 추구할 수 있게 되었다. 아시아 지역에서 부국이든 빈국이든 모두 점점 더 중국 중심의 생산 네트워크로 통합되고 중국의 투자와 대출에 의존하게 되면서 중국이 경제 관계를 축소하겠다는 위협을 외교 무기로 사용하고 있음을 목도하는 중이다. 그러나 중국의 자본 수출 성장세는 2016년부터 크게 감소했다. 광범위한 세력권을 보유한 주요 자본 수출국이 되려는 중국의 야심찬 시도를 가로막는 걸림돌은 금융적인 것만큼이나 지정학적인 것이기도 하다. (인도, 네팔, 스리랑카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중국의 투자와 차관을 받는 개발도상국들은 항상 미국과 다른 강대국들에게도 의지할 수 있었다. 이런 상황은 중국의 영향력 확장을 가로막았다. 중국이 이 난관을 극복하려면 세계 금융 및 지정학적 질서에서 미국의 지배력을 극복해야만 한다. 68, 70)


5장 결론: 돌아온 제국 간 경쟁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 정의한) 자본의 경제적 이해관계와 (베버주의적 관점에서 정의한) 국가의 지정학적 이해관계는 미중 관계를 형성하는 데 있어 모두 중요하다. 미국과 중국 자본주의의 불균등 발전이 결합되면서 두 나라 사이의 자본 간 경쟁으로 이어졌다. 이 자본 간 경쟁은 중국을 지정학적 상대로 상정하려는 워싱턴 당국의 경향을 촉발시켰으며, 차이메리카 체제를 무너뜨리고 아시아와 그 외 지역에서 미중 경쟁관계를 야기했다. 이러한 미중 경쟁의 격화는 레닌이 이전에 논의했던 20세기 초 영국과 독일 간의 갈등과 유사하다. 주목할 점은 영향력을 가진 중국의 관방 학자 다수가 ‘위대한 부흥’이라는 중국의 외교 정책 어젠다를 불과 한 세기 전 독일의 입장과 공개적으로 비교했다는 것이다. 21세기가 다른 점은 이제 미국과 중국, 그리고 두 나라의 동맹국들이 전쟁을 통한 보복이 아니라 영향력을 위해 경쟁할 수 있고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다양한 글로벌 통치 기구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79-81)


더욱이 일찍이 홉슨이 지적한 것처럼, 자본주의 강대국들은 국내 노동계급의 더 높은 소득과 그에 따른 구매력을 확보하지 못하게 되면 해외의 이익을 찾아 자본을 수출해야 하며, 이 자본 수출은 국내 경제에서의 과잉생산 능력을 흡수하기 위해 필수적이다. 하지만 자본주의 강대국들이 국내 재분배에서 진전을 보이면 자본을 수출할 필요가 줄어들고, 따라서 자신들의 세력권을 개척하고 다른 강대국과 충돌할 이유도 줄어든다. 중국의 맥락에서 중국이 가계소득과 가계소비를 부양해 경제의 균형을 재조정하려는 베이징 당국의 시도가 성공하게 되면, 중국 정치경제의 과잉생산 능력, 수익성 위기, 부채 문제는 완화될 것이다. 자본 간 제로섬 경쟁을 심화하는 대신 재분배를 통해 이윤을 회복하는 것은 국가 간 갈등으로 악화하는 것을 억제할 수 있다. 미국에서 재분배 개혁을 할 것인가 아니면 신자유주의적 지구화 추구를 통해 자본을 수출할 것인가의 문제에서도 똑같이 적용할 수 있는 해법이다. 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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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필패 - 시험, 독재, 안정, 기술은 어떻게 중국을 성공으로 이끌었고 왜 쇠퇴의 원인이 되는가
야성 황 지음, 박누리 옮김 / 생각의힘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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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EAST 공식이란


"동질성homogeneity과 이질성heterogeneity은 규모scale와 범위scope라고도 할 수 있다. 민주주의와 독재는 근본적으로 다른 방식으로 규모와 범위 사이의 갈등을 해결한다. 독재는 강압, 정보 통제, 이념적 세뇌, 가치관 주입을 통해 범위의 확장을 억압한다. 민주주의는 범위를 보존하지만 모든 사안에 대해서 그렇지는 않다. 민주주의는 선거의 신성함, 권리, 법치주의와 같은 몇 가지에 대해서만 사상과 가치와 국가의 행동이 일치한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규모와 범위를 적절히 맞추려면 단순한 균형 조정 이상을 필요로 하며, 몇 가지 핵심적이고 근본적인 문제에 있어 완벽한 합의에 도달해야 한다. 반면 독재는 규모와 범위를 정반대의 가치로 취급한다. 중국의 전제 정치는 전 세계의 그 어떤 전제정치보다 가장 급격하게 범위를 확장시키면서 규모를 확장해 왔다. 한 점으로의 수렴, 순응, 획일성의 절대적인 강조는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로 인해 더욱 심해지기는 했으나 중국의 역사와 전통에도 깊이 내재해 있다."(31-2)


"이 책의 핵심은 중국의 독재가 깊숙이 뿌리내리며 확고하게 지속해온 토대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효과적인 독재 실행 메커니즘이 있다는 것이다." "충분히 인상적인 다른 독재 국가들의 규모와 범위의 비율과 비교해도 중국의 독재 체제는 규모 추구 면에서 압도적이다. 2022년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앞두고 서방 연구자들이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러시아 국민의 단 8퍼센트만이 우크라이나에 군대를 보내는 것을 지지했다. 중국이라면 대규모 군사 작전 직전에 서방 연구자들이 이와 유사한 조사를 방해 받지 않고 실시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 다른 사례도 있다. 러시아에서는 비록 심한 검열이 있긴 해도 구글 운영이 가능하다. 중국에서는 아예 금지되었다. 푸틴이 그토록 많은 비판자를 독살한 것은 공개적으로 푸틴에게 반대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비판자들이 많기 때문이다." "푸틴의 비자유민주주의 아래에서는 가장 자유주의적이었던 중국 독재 시절보다 더 많은 범위 조건이 존재한다."(42-4)


1부 시험Examination


1장 규모 확장 수단으로서의 과거 제도


"오늘날의 중국은 수나라의 통일 프로젝트의 유산이자 수혜자이다. 수나라는 587년 중국의 인식적 혁명과 정치적 변혁에 착수했는데, 바로 이 시기에 과거 제도의 원형이 확립되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과거 제도는 조정 관료의 관문을 귀족계층이 장악하게 했던 채용 제도를 대체했다. 과거 제도는 후보자 추천, 평가, 최종 선발에 이르는 전 과정을 완전하게 통제했다. 이 획기적인 개혁의 명칭은 '자료 제출 및 자기 추천'이었는데, 좀 이상하게 들리기는 해도 새로운 프로세스의 본질을 잘 담아냈다. 지원자는 자신의 의지에 따라 자료를 가지고 왔고, 더는 다른 이의 추천에 의존하지 않았다. 자격 제한이 있었지만 해당 조건만 제외하면 이론적으로는 모든 중국 남성이 조정 관료의 지위에 오를 수 있었다. 물론 모든 조치가 즉각적으로 완벽하게 시행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단 하나의 행위가 가져온 변혁적 잠재력에 필적할 다른 사례는 인류 역사를 통틀어도 별로 없다."(83-4)


"수 문제는 조정의 채용을 지명에서 지원으로 전환했으나 그 자격에 많은 제한을 두었다. 이러한 제한 중 일부는 법적인 제한이었고, 일부는 현실적인 제한이었다. 법적인 측면을 보면 수나라는 상인은 관료가 되지 못하도록 제한했는데, 황제가 된 무측천(재위 690~705)은 이를 부분적으로 해제해 주었다. 당나라에서 부활한 것으로 보이는 또 다른 제한은 과거 시험에 응시하기 위해 추천을 받아야 한다는 요건이었다. 무측천은 이 제한도 없앴다. 더 큰 변화는 현실적인 측면에서 일어났다. 과거 제도가 처음 도입되었을 때 대부분의 관료 후보자는 도읍과 그 인근 지역, 그리고 엘리트 귀족 가문에서 뽑혔다. 엘리트들의 반발과 저항을 경험한 무측천은 이들의 독점 체제를 깨뜨렸다. 그는 그 자리에 있는 현명한 정치인이라면 누구나 할 일을 했는데, 바로 외부인과 정치 신인을 영입하여 기존 권력층을 희석한 것이었다. 이를 위해 도읍을 귀족들의 거점인 장안에서 평민들이 많이 거주하는 낙양으로 옮기기까지 했다."(88-9)


"과거 제도는 북송(960~1127)에서 고유한 체계를 갖추고 발전하였다. 총 세 단계에 걸친 시험 절차, 3년에 한 번씩 치러지는 대회 일정, 준비 과정, 익명화 등이 그것이다. 초창기에는 시험이 부정기적으로 실시되었고 때로는 아예 열리지 않을 수도 있었다. 당나라(618~907) 대에는 관료 채용의 여러 경로 중 하나에 불과했던 과거 시험이 송나라 대에 이르러서는 다른 채용 경로를 압도하기 시작했다." "원나라(1270~1368)에 들어서 과거 제도는 역풍을 맞았다. 과거는 비정기적으로 개최되었고, 과거 시험 출신자의 채용 역시 하위 직급으로 제한되었다. 하지만 원나라의 통치자들은 한 가지 중대한 변화를 도입했다. 성리학을 과거 시험의 커리큘럼으로 채택한 것이다. 주희가 각색한 성리학은 텍스트가 매우 빡빡하고, 지극히 보수적이며, 명료하고 단호한 서술이 특징이었다. 과거 시험 응시자들은 더는 자유롭게 사서오경을 해석할 수 없게 되었다. 대신 미리 설정된 언어와 지침을 따라야만 했다."(69-70)


"명나라(1368~1644)의 건국 황제인 주원장은 기득권에 대한 반감이 심했고 너무 많은 관료들을 죽였기 때문에 부족한 인력을 보충할 인적 자본 이동의 파이프라인을 빠르게 확장해야 했다." "주원장도 무측천의 고민거리였던 지리적 불균형에 똑같이 직면했다. 주원장의 통치 기간에 남북 간의 정치적, 경제적, 지적 분열은 더욱 심해졌다. 이에 대한 주원장의 해결책은 과거 제도를 세세한 수준까지 직접 관리하는 것이었다. 1371년, 주원장은 120명의 과거 급제자들에 대해 불만을 표하며 두 차례의 과거 시험을 중단시켰다. 그 후 과거 시험에 출제되는 원문을 검열했고, 《맹자》의 260개 장 중 85개 장이 불쾌하다며 시험 범위에서 제외했다." "더 나아가 그는 남쪽 출신 응시자에게 전체 합격자의 55퍼센트를 할당하는 영구 상한선을 제도화했다. 이 할당제는 1427년 과거 시험에서 처음 공표되어 정치와 능력주의의 융합을 공식화했다. 이러한 지역 할당제의 정신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91-3)


"어떠한 인적 시스템이든 그 확장은 보편적인 인간의 능력과 잠재력의 확장을 함께 필요로 한다. 과거 시험은 창의성을 파괴한다는 조롱을 받기도 하지만, 중국인의 문해력을 높였다는 찬사를 받기도 한다. 두 효과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확장을 위해서는 표준화가 필요하다. 다른 방법은 없다. 하지만 표준화가 전반적인 획일화를 초래하지는 않는다는 것도 사실이다. 표준화는 목표한 차원에서는 획일화를 일으키지만 다른 차원에서는 다양성을 초래하기도 한다. 과거 시험은 어떤 차원에서는 평민 응시자가 이전보다 많아지는 등 범위가 넓어졌지만, 유교 경전 통달과 유교 이념 고수라는 차원에서는 다양성이 감소했다. 이것이 바로 통치자들이 원하고 중요시했던 차원의 동질성이었다. 과거 시험은 제국 관료제의 접근성을 높이고, 채용을 무지막지하게 치열하게 만들었으며, 의도적으로 설계하고 구축한 지표에 따라 획일화된 관료들을 뽑았다. 그 효과는 놀랍고도 의미심장했다."(98)


2장 중국의 조직화─그리고 중국공산당


# 두 가지 기업(경제) 이론

1. U자형 기업 : 기능적 전문화를 기반으로 운영되는 단일 형태Unitary-form 기업. 규모의 경제를 통해 효율성을 높일 수 있다.

2. M자형 기업 : 다기능Multi-functional 역할을 하는 브랜드나 지역별 지점으로 나뉜 기업. 여러 개의 미니 U자형 기업으로 구성된다.


"중국의 M자형 경제는 지방에 권한을 부여하는 동시에 제한하는 'M자형 조직' 구조 아래에서 작동한다. 여기에는 세 가지 중요한 요소가 있다. 첫 번째는 M자형 조직이 지방 정부에 권한을 부여할 뿐만 아니라 중앙부처를 제약한다는 점이다. 두 번째는 이와 관련하여 중국의 지방 지도자들이 중앙부처의 장관급 동료들보다 먼저 중국을 통치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는다는 점이다. 세 번째는 평가 지표로 GDP에 대한 의존도가 높다는 점이다. GDP 지표는 지방 자치를 높이는 동시에 자치의 실행에 대해서는 일정한 제약을 가한다. 중국 공무원들은 여전히 상명하달식 독재 체제에서 하급 공무원이지만, 이 특정 영역에서만은 어느 정도 행동과 결정 권한을 가지게 되었다. 더욱 중요한 효과는 GDP가 지표인 동시에 정책 목표가 되면서 중앙 지도자들이 계급 투쟁, 대중 선동, 인격 숭배 등 중국공산당이 관습적으로 추구해 온 끔찍한 대안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덕분에 중국 정치는 훨씬 온건해졌다."(114-5)


"나는 1장에서 과거 중국 제국이 고도로 형식화된 과거 시험의 성과에 따라 확장되었다고 가정했었다. 그렇다면 그 과거 시험 성적에 상응하는 현대의 능력주의적 성과 지표는 무엇일까? 바로 GDP다." "M자형 시스템에서는 각 지역이 '이익 센터'가 되며, 중앙의 인사 관리 담당자는 두 부처의 철강과 밀 생산량을 비교하는 것보다 상하이와 충칭의 GDP를 더 쉽게 비교할 수 있다. 올바른 가정(예: 시장 기반 거래)하에서는 이익을 내는 단위가 이익을 내지 못하는 단위보다 훨씬 더 전체에 유리한 조직이다. M자형 조직은 조직 계층을 따라 피라미드의 맨 아래쪽까지 비교가능성 문제의 해결책을 강제한다. M자형 조직은 부문별로 또다시 계층화되어 있는 재귀적 구조임을 명심하자. 사과와 오렌지의 상대적 가치에 대한 해결은 M자형 조직의 하위 계층에서 이루어지므로 중앙의 결정권자는 이 비교가능성 문제를 해결하는 부담을 덜 수 있다. 대신 중앙 정부는 전략과 개발 같은 더 큰 목표에 집중할 수 있다."(122-3)


"조직경제학의 핵심 주장 중 하나는 직접 감시와 통제가 문제가 되는 상황에는 인센티브 조정이 특히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 추론을 중국공산당 시스템에 적용해보자. 중국학자들은 중국공산당 체제의 관료를 두 가지 유형, 즉 제너럴리스트와 스페셜리스트로 구분한다. 지역 관료는 제너럴리스트이다. 이들은 산업, 농업, 교육 등 다양한 업무를 담당한다. 반면 중앙부처 관료들은 한 분야에서 전담 업무를 수행하는 스페셜리스트이다. 예를 들어 전자부 장관은 전자 산업을, 외교부 장관은 중국과 외부 세계와의 관계를 담당한다. 물론 모두 상대적인 개념이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사실이다. 중앙부처 공무원과 지방 공무원 모두 조직경제학자들이 말하는 의미에서는 '대리인'이다. 이들은 중국공산당 총서기, 정치국 상무위원, 국무원 총리 등 상급자의 명령에 따라 일하는 고용된 관리자들이다. 그리고 이들은 대리인이기 때문에 조직경제학에서 경고하는 대래인 문제가 발생하기 쉽다."(129-30)


"베이징 공무원들에게 산은 그렇게 높지 않고 황제는 바로 눈앞에 있다. 이들은 스페셜리스트라 할 수 있다. 따라서 감독 비용이 낮고, 지시를 내리거나 업무 성과를 평가하고 중요 업무에서 실패했을 때 직급을 강등하는 등 직접 통제가 가능하다. 또한, 여러 부문에 걸쳐 있는 것보다 단일 부문 내에서 비상 상황을 구체화하는 것이 더 쉽다. 이는 중앙부처 공직자 중 고위직에 오르는 사람이 많지 않은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 지방 공무원들은 제너럴리스트이며, 인센티브 조정 측면에서 더 많은 것을 요구한다. 자신이 황제로부터 산 넘고 물 건너 멀리 떨어진 지방의 고위 공무원이라고 상상해 보라. 중앙 정부의 이익 대신 나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활동을 하고 싶은 유혹이 강할 것이다. 그러나 중앙으로 승진할 수 있다는 합리적인 기대와 중앙 의사결정권자와 가까운 사람들─즉 베이징에서 일하는 중앙부처 공무원들─이 항상 기회를 낚아채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 당신을 일탈에 빠지지 않게 한다."(130)


"또 다른 인센티브 조정 도구인 스톡옵션의 기본 개념, 즉 대리인을 주인으로 전환한다는 개념은 중국공산당에도 적용할 수 있다. 현재 24명의 위원으로 구성된 정치국에는 두 개의 등급이 있다. 일곱 명의 위원으로 구성된 정치국 상무위원회는 중국 정치 체제의 정점에 있으며, 기업 경영 구조에서 이사회와 같은 역할을 한다. 정치국 상무위원회는 매일매일의 국가 운영에 대한 책임을 지며 모든 최종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권한이 있다. 나머지 후보위원은 의사결정권자라기보다는 다음 기수 상무위원회 위원의 후보군 역할을 한다." "후보위원이라는 직책은 지방 관료들에게 부분적이나마 정치적 '주인'의 지위를 부여하고, 상무위원의 정책과 이들의 선호가 부합하도록 조정하지만, 상임위원과 같은 수준의 의사 결정권을 부여하지는 않는다. 나와 많은 다른 학자들이 발견한 바와 같이, 부분적이나마 주인의 지위를 가진 지방 관료들은 투기적 투자 활동을 억제하라는 중앙 정부의 정책 명령을 가장 잘 준수한다."(131-2)


2부 독재Autocracy


3장 사회 없는 국가


"왕조 시대 중국의 관료제는 사회가 막 태동하여 힘겹게 헤쳐나가야 하는 연약한 시기에 생겨났다. 과거 제도의 확장은 사회에 대한 국가의 지배를 확립했다. 이 지배는 행정적이고 관념적인 지배였다. 역사가들은 왕조 시대 중국의 강력한 신사紳士 계급은 종종 국가의 긴 팔이 닿지 않는 곳에서 활동했고 일부는 사적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정부의 요구를 조작하고 제도를 이용했다고 지적한다. 모두 사실이지만, 특히 국가를 대신하여 한 가지 중요한 기능을 수행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다름 아닌 세금 징수이다. 따라서 그들은 국가를 대신하는 존재였지 국가를 제약하는 존재가 아니었다. 일부 황실 신하들이 제도를 악용하기도 했지만, 이 역시 사회가 아닌 국가가 정한 조건에 따라 가능했다. 완벽에 가까운 설계, 시민사회의 부재, 뿌리 깊은 가치와 규범들 덕분에 전제 정치 체제는 중국에 깊게 뿌리 내렸다. 이것은 과거 제도가 지닌 사회를 질식시키는 능력 때문에 가능했다."(149-50)


"부르주아 계급은 중국 사회의 또 다른 공백이다. 상인들은 사회 집단으로서의 정체성을 획득하지 못했는데, 이는 상업이 활발하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송나라에서는 활기찬 시장경제가 나타났다. 국가와 상인은 공생관계였고, 국가는 상인을 억압하는 대신 그들이 내는 세금으로 이득을 얻었다. 명나라와 청나라는 상공업 발전의 천국이었을 것이다. 명나라와 청나라는 대외 무역을 금지해 국내 시장을 보호했고, 상공업자에 대한 통제도 완화했다. 목수, 석공, 직공, 도공들은 돈을 주고 노비 신분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일할 수 있었다. 세금은 현물이 아닌 화폐로 납부했고, 덕분에 농민들은 쌀이 아니 환금성 작물을 재배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양날의 칼이기도 했다. 상인들의 일신은 국가의 자비와 선의에 좌우되었으며, 오늘은 보호하되 내일은 내칠 수도 있었다. 수직적 자본주의는 수 세대에 걸친 독재자들이 선호해 온 것처럼 상호 간에 대등한 자본주의가 아닌 종속적 자본주의였다."(159-61)


"표준화된 시험은 정답과 가치 정렬을 위해 권위에 의존하고 숭앙하는 정신적 습관을 만들고, 교육학자들이 복잡하고 이질적인 사회를 성공적으로 헤쳐나가는 데 필수적인 정신적 특성이라고 분류하는 것들을 평가절하한다. 여기에는 비판적 사고(의견의 독립성, 논리와 추론에 대한 신뢰), 다양성 인정(우리 주변의 세계가 이질적이라는 인식), 공감(다른 사람의 관점에서 세상을 보는 능력)이 포함된다. 과거 제도는 이러한 자유주의적 가치를 모조리 부정한다." "또 다른 특징이 있다. 과거 제도는 추상적 개념으로서의 전제 정치가 아닌, 전제 군주에 의해 인격화된 체제를 향한 경외심을 심어주었다. 사상적 경의는 사고 체계로서 유교의 권위가 아닌, 유학자 성현들을 향했다. 이 틀에서 나쁜 통치는 좋은 통치자를 통해 바로잡을 수 있다. 좋은 통치자는 좋은 통치의 필요조건이자 충분조건이며, 전제적 통치를 가능하게 하거나 제한하는 제도 자체는 방정식에서 제외된다. 오직 통치자만이 주목을 받는다."(184-5)


"과거제도는 집단행동을 징벌하고 그 규범은 민주주의를 향한 중국의 길을 가로막고 있다. 민주주의는 개인의 가치를 중요시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민주화는 집단행동을 통해 이루어진다. 투표는 호불호를 조정하고 협업 행위를 결집하는 도구이다. 반면 과거 제도는 개인의 주체성이 아닌 극도의 개인주의를 표방했다. 수험생들은 치열한 제로섬 토너먼트에서 죽도록 경쟁했고 협력하면 가혹한 불이익을 받았다. 수험생들은 국가가 정한 조건에 따라 외롭고, 잔인하며, 인간을 거의 원자 단위로 부수는 경쟁에 몰두했다. 그 지경으로 개인화된 사회는 더는 사회라 부를 수 없다." "사실 중국공산당은 시민들의 '정치 참여'를 적극적으로 장려한다. 다만 그 정치 참여가 공산당이 정해놓은, 조직화가 불가능한 고립 공간 안에서만 가능할 뿐이다. 시민들은 설문 조사, 온라인 포털, 청원 등을 통해 중국공산당에 자유롭게 의견을 제시할 수 있다. 독재와 폭압은 개인주의에 전혀 불리하지 않다."(191-2)


4장 권위주의적 평균으로의 회귀


"1980년대 중국의 공식적인 국가 구조는 중국 역사상 그 어떤 시기와도 달랐다. 한 가지 예를 들자면, 1980년대 내내 중국공산당 수장(중앙위원회 총서기), 국가 원수(국가 주석), 군 통수권자(중앙군사위원회 주석)가 모두 다른 사람이었다. 1993년 이후로는 한 사람이 이 세 직책을 독점하게 된다. 그렇게 된 이유는 간단하다. 일련의 역학 관계를 도미노처럼 촉발한 천안문 사태 때문이다." "1980년대 중국을 특징짓는 놀라운 수준의 권력 분산, 이념적 다양성, 눈부신 경제 성과는 1989년 6월 4일 천안문 항쟁 이후 새로운 지도부가 들어서자마자 이러한 업적들을 가능하게 했던 정치 개혁을 전부 뒤집으면서 끝장났다. 혁명 원로들은 천안문 이후 당 지도부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다양한 권력 중심을 희생시키면서 중국공산당 총서기라는 단 하나의 직책에 힘을 실어주었다. 이러한 누적 투자의 수혜자가 바로 시진핑이다. 역설적으로 천안문은 미래의 독재자를 위한 길을 열어준 것이다."(195-7)


"천안문 이후 중국 지도부에 대한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이들 중 압도적 다수가 중국에서 가장 개혁이 뒤처진 지역인 상하이 출신이라는 점이다." "상하이의 신통찮은 성적표에도 불구하고, 1989년부터 2002년까지 상하이방은 전면에 나서 중국을 통치했고, 2002년부터 2012년까지는 후방에서 중국 정치를 주물렀다. 시진핑은 정치적으로는 상하이방을 표적으로 삼았지만, 경제 모델은 상하이의 고전적인 국가주의 모델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상하이의 테크노크라트들이야말로 천안문 사태의 수혜자였다. 이념적 이유이든 정치적 편의의 이유이든, 이들은 전국적인 시위의 원인이 된 1980년대의 접근법을 거부함으로써 승자가 되었다. 경제적으로 상하이 방식의 가장 큰 특징은 국가와 기업 간의 긴밀한 유대를 보장하는 방식으로 민간 부문의 발전을 촉진하는 이른바 '정신 자본주의'이다. 중국에서 가장 자발적이고 가장 대등한 자본주의 유형인 농촌 기업가 정신은 주변부로 내몰렸다."(218-20)


# 상하이방의 주요 인물 : 장쩌민(1989년 중국공산당 총서기 취임), 주룽지(1998~2002년 중국 총리 역임), 황쥐(2002~2007년 중국 총리 역임), 쩡칭훙(2003~2008년 국가 부주석 역임), 왕후닝(현재 당내 서열 4위)


"중국 정부는 1981년 초부터 민간 기업가를 중국공산당에 영입하는 것을 허가했는데, 이는 유인책이 아니라 정책 변화와 안정의 신호였다. 이 제안을 받아들인 기업가는 거의 없었다. 그러나 1990년대 정신 자본주의 아래에서는 당 가입이 귀중한 자원과 사업 기회를 얻을 수 있는 통로였다. 민간 기업가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천안문 이후 중국 지도부의 정책 전환이 가져온 장기적 영향 중 하나는 지대 추구와 조직적 부패의 증가였다. 부정부패 척결은 1989년 학생 시위의 구호이기도 했다. 시위대가 정부 관리와 그 가족의 자산을 투명하게 공개하라고 요구하자, 자오쯔양과 다른 개혁파 지도자들은 이를 조용히 받아들일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로 인해 다른 중국공산당 지도자들을 적으로 돌리고 말았다. 천안문 사태는 부패가 정치적으로 안전하다는 선명한 메시지였다. 정치 개혁, 당의 투명성, 초기 시민사회 등 부패를 억제할 수 있었던 세력들은 천안문을 분기점으로 모두 후퇴했다."(224-5)


"상하이의 테크노크라트들은 도시 계획, 기술, 세계화에 매료되었다. 그들은 한 손으로는 농촌 기업가 정신을 찍어누르고 다른 한 손으로는 도시 부동산 시장을 자유화했다. 외국인 직접 투자의 문이 열렸고, 월스트리트와 우호적인 동맹을 맺었다. 이것이 바로 저 유명한 '차이나 신드롬'의 중국 쪽에서 일어난 일들이다. 뒤집어 말하면 미국의 메인스트리트(제조업)는 무너졌고 월스트리트(금융업)의 주머니는 두둑해졌다. 상하이 테크노크라트들이 주도한 개혁은 중국의 성장과 생산성 향상으로 이어졌지만, 중국 정치 시스템의 도덕성과 질적 수준은 처참하게 망가졌다." "정실 자본주의는 지대 수탈의 거래 비용을 낮춘다. 천안문 이후 중국 정실 자본주의의 양과 질은 모두 돌연변이 수준의 변화를 겪었다. 원자바오 전 총리의 재산은 27억 달러로 추정되며, 부패 혐의로 몰락한 저우융캉 전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의 가족과 측근들은 당국에 압수당한 재산만 무려 145억 달러에 달한다."(225-7)


"천안문 사태 이후 원로들이 장쩌민을 선택한 가장 큰 이유는 그가 권력 기반이 없다는 것이었지만, 일단 선택한 후에는 바로 그 권력 기반 부재가 장쩌민의 발목을 잡지 않도록 막아야 했고, 따라서 장쩌민의 권위와 자격을 강화하기 위해 조치해야 했다. 이들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장쩌민의 앞에서 길을 비켜주는 것이었다." "1989년 11월, 덩샤오핑은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직을 사임하고 장쩌민에게 군 통수권을 넘겨주었다. 후야오방과 자오쯔양 때에는 물러나기를 거부했던 자리였다. 혁명 원로들은 또한 장쩌민이 중국 지도부의 '핵심'이 되어야 하며 권력을 그에게 집중한다는 데 동의했다. 1992년 당 중앙고문위원회가 폐지되었다. 이로써 원로들이 국정의 최전선 관리에 개입할 수 있는 제도적 기반이 사라졌다. 이어진 조치는 1993년 양상쿤을 주석직에서 밀어내고 장쩌민을 그 자리에 앉히는 것이었다. 1982년 이후 처음으로 한 사람이 당과 국가를 모두 이끌게 되었다."(235-6)


3부 안정Stability


5장 무엇이 중국의 전제 정치를 안정적으로 만드는가?


"중국의 황제들은 어떻게 오랜 시간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 황제보다 한 단계 아래, 즉 조정의 고위 관료들의 특성이 영향을 미쳤는지 살펴보자. 밀란 스볼릭은 권위주의 정권의 안정성은 정치 엘리트의 동의에 달려 있다고 말했다. 독재자가 정치 엘리트로부터 명시적 또는 암묵적 협력을 확보할 수 있다면 권력은 훨씬 안전해진다(로마 황제들은 이 부분에서 처참하게 실패했다)." "역사학자들은 한나라 이후 황제와 관료(특히 최고위 관료인 재상) 간의 관계를 '공생'이라는 용어로 설명한다. 공생관계는 상호 의무와 의존에 기반한 충성을 의미하며, 황제는 관료와 협력하여 통치했다. 자발적 퇴임은 공생의 한 형태로, 인센티브를 개선하고 중국공산당의 M자형 경제 체제 아래 있던 지역 관리들과 유사한 방식으로 재상들의 신뢰와 노력을 끌어냈다. 황제들은 재상이 충성을 다하면 그 대가로 안전한 퇴임의 옵션을 제공했다. 그 결과 거버넌스와 행정의 질이 향상되었고 안정이 이어졌다."(260-2)


"부富는 수많은 정치 체제와 사회에서 중심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부를 가진 자에게 유리하도록 정치적, 사회적 제도가 만들어지고 부가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변화로 이어지는 현상이 자주 목격된다. 중국에서는 아니다. 중국에서는 정치가 부를 통제하지 그 반대는 성립하지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중국 황실의 조정 시스템은 매우 이례적이었고, 오늘날 중국공산당 체제 역시 마찬가지이다. 아마 마윈도 동의할 것이다. 중국은 부를 배척하지 않는다. 고대부터 중국은 활발한 상업 발전과 광범위한 정실 자본주의 시기를 경험했다. 그리고 황실 관료제의 하위직에서는 부유층에 대한 체계적인 차별을 찾을 수 없었다. 차별은 권력의 최상위 계층에서 부를 배제하기 위해서만 발생했다. 교수 채용 면접 같은 방식의 전시殿試는 경제적 특권층을 길들이려는 목적이 있었다. 이렇게 포용과 배제를 신중하게 조정함으로써 부유층을 보호하는 동시에 그들이 내부에서 체제를 파괴할 가능성을 억제할 수 있었다."(274-5)


"중국 왕조 시스템은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가 명나라의 복사판으로 변신하면서 267년간 지속되었으나, 청나라는 과거 제도의 위상이 무너지면서 함께 붕괴하기 시작했다. 청은 과거 제도를 계승하여 능력주의와 정치적 통제 목적을 달성하고자 했지만, 청 황실은 언제나 과거 제도를 양면적으로 보았다. 청나라 후기로 갈수록 황제들은 과거 제도를 더욱 낮춰 보았는데 여기에는 과거 시험이 만주족이 아닌 한족에게 월등하게 유리했다는 점도 작용했을 것이다." "청나라 황제들의 행동은 그들 자신의 정치적 수명을 단축했다. 유일한 신분 상승 통로가 좁아지면서 사회적 이동성이 축소되었다. 분노가 넓고 깊게 퍼져나갔다. 비록 과거 급제 가능성이 확륙적으로 낮다고는 해도, 과거 시험을 통해 영웅적으로 입신양명한 평민들의 일화는 '대중의 아편'으로 기능해 왔다. 더는 이런 이야기들이 나오지 않게 되자 신화는 처참히 파괴되었고 좌절이 뿌리내리기 시작했다."(283-5)


6장 털록의 저주


"1990년대 초, 중국을 주시하던 많은 이들이 천안문 사태로 중국공산당의 정통성이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고 믿었다. 이러한 믿음은 덩샤오핑의 건강 악화와 함께 더욱 힘을 얻었다. 많은 이들이 중국의 정치적 안정은 마오쩌둥, 덩샤오핑과 같은 강력한 존재감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중국공산당은 무너지지 않았고 오히려 더 강해졌다." "중국공산당 시스템에는 당이 실패해도 그 충격을 흡수하는 강력한 안정 기반이 존재한다. 이러한 안정 기반은 중국인의 규범, 즉 오랜 역사를 통해 형성된 중국인의 정신과 사고방식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러한 규범 중 하나는 '명제命題적 정당성axiomatic legitimacy'으로 설명할 수 있는 중국인들의 확고한 믿음이다. 명제적 정당성은 국가에 대한 무조건적 신뢰를 사전 부여하며, 국가의 행위와는 별개로 분리된 경우가 많다. 명제적 정당성은 국가를 강력하게 보호하고 다양한 충격을 견딜 수 있게 한다."(292-3)


"중국의 반부패 캠페인을 예로 들어보자. 광범위한 반부패 캠페인의 한 가지 잠재적 단점은 중국공산당의 정당성을 훼손할 수 있다는 것이다. 독재자는 그물에 걸린 관리들의 '충격과 공포'에 가까운 세부 사항들을 공개하여 반부패 캠페인의 이점을 보여주고 그 엄중함을 정당화한다. 그러나 너무 많은 비리가 드러나면 대중은 특정 관리가 아닌 시스템 전체의 부패가 선을 넘지 않았나 의심할 수 있다." "'시스템'을 '서로 연결된 계약들의 집합', 즉 인센티브와 규칙과 제약의 집합과 배열이 아닌, '사람의 집합'으로 보는 관점 덕분에 중국공산당은 생존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 개념에서 시스템을 바꾼다는 것은 산수 계산을 하는 것과 비슷하다. 반부패 캠페인을 벌여서 10만 명의 부패 공무원이 숙청되면, 국가는 전체 명단에서 10만 명을 뺀 만큼 더 깨끗해진다. 100만 명의 공무원이 숙청되면 국가는 100만 명 만큼 더 깨끗해진다. 이는 (늪에서 대규모로 물을 빼낼 수 있는) 스트롱맨의 통치를 뒷받침한다."(297-9)


"털록의 저주에는 크게 두 가지 요소가 있다. 하나는 승계 과정에서 핵심 인물의 유인과 관련된다. 다른 하나는 정보, 더 정확하게는 후계자의 성격, 성향, 능력에 대한 신뢰할 수 있는 정보의 부족과 관련된다." "후계자가 결정된 사람의 유인을 생각해 보자. 후계자는 〈자신이 빨리 독재자가 될수록 좋으며, 현직 독재자의 수명 단축이 본인의 즉위를 앞당길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이 된다〉고 판단한다. 독재자는 후계자의 이러한 생각을 잘 알고 있기에 필사적으로 위협을 걱정하게 된다. 후계자는 현직 독재자가 이러한 동기를 자신에게 뒤집어씌울지 의심하게 되므로 상황은 더욱 복잡해진다." "여기서 안전한 방법은 무관심한 척하며 지켜보는 눈들이 안심할 때까지 버티는 것이다. 하지만 이 전략에는 한 가지 단점이 있다. 후계자로 내정된 후보에 대한 잘못된 정보가 퍼질 수도 있다. 독재 정권이 후계자에 대한 왜곡된 정보를 찍어낸다는 것은 털록이 지적한 두 번째 고질적인 문제이다."(315-6)


# 털록의 저주 : 독재 정권은 (선거 같은) 제도화된 승계 제도가 없기 때문에 부패하기 쉽고 혼란으로 퇴보하기 쉽다. 이러한 선천적 결함이 독재 체제의 본질에 내재해 있다는 의미에서 저자가 붙인 이름이다. 중국공산당의 역사에서 대표적인 승계 실패로는 류샤오치, 린뱌오, 후야오방(그리고 자오쯔양)의 사례가 있다.


"중국공산당 정치의 한 가지 특징이 황태자 문제를 증폭시킨다. 바로 지나치게 긴 후계자 양성 과정이다. 중국의 이선 지도 체제는 마오쩌둥이 사망(1976년)하기 약 20년 전인 1956년에 만들어졌다. 덩샤오핑 역시 사망(1997년)하기 거의 20년 전인 1980년대 초부터 승계 기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임신 기간이 길면 문제가 발생할 시간이 차고 넘친다. '레임덕'이 영원히 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도 한 가지 위험이다. 독재 체제에서는 레임덕의 조건이 명시되어 있지도, 법제화되어 있지도 않다. 현직 독재자가 레임덕에 들어갈지 말지를 스스로 결정할 뿐이다. 그리고 그에게는 대기 기간을 최대한 길게 가져가면서 야심만만한 후계자 후보의 인내심을 시험할 유인이 너무나 많다. 이 역학 관계에는 또 다른 반전이 있다. 종종 황제와 황태자의 나이 차가 그리 크지 않다는 것이다. 용상에서 불과 몇 발짝 떨어져 있음에도 자신의 정신적, 육체적 능력이 쇠약해진 뒤에야 앉을 수 있는 황태자의 머릿속을 상상해 보라."(322-3)


"털록은, 권위주의 정권은 승계가 제대로 기능하지 못해 필연적으로 수명이 짧고 권력자 한 사람에 의해 통치가 좌우되며 정치적 혼돈으로 쉽게 부패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지금까지 중국공산당은 이 예측을 보기 좋게 뒤집었다. 중국공산당은 연이어 권력 승계에 실패했지만 체제 위기로는 이어지지 않았다." "중국이 털록의 저주를 억제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길들인 데에는 네 가지 중요한 요인이 있었다. 첫째, 마오쩌둥과 덩샤오핑이라는 두 거물의 카리스마와 기타 특이한 요인들이 후계 갈등의 여파를 억눌렀다. 둘째, 중국 군부가 후계 갈등의 주요 선동자가 아니었다. 셋째, 1980년대에 중국 정치가 온건 정치의 시대로 접어들면서 승계 관련 이해관계가 줄어들었다. 넷째, 덩샤오핑의 개혁으로 후계자 승계를 위한 규칙이 도입되었다. 그러나 시진핑 체제에서는 이러한 조건 중 일부가 상당히 약화되었다. 털록의 저주가 앞으로 중국 정치에 검은 구름을 드리울 수 있다."(326-7)


4부 기술Technology


7장 니덤 문제의 재구성


"1969년 출간한 저서 《중국의 과학과 문명》에서 조지프 니덤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왜 중국은 초기 기술 우위를 활용하지 못하고 독자적인 산업혁명을 시작하지 못했을까? 그는 길고 화려한 경력에 걸쳐 수많은 설명─중국에 과학적 사고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추정부터 봉건적 관료주의, 상업의 낙후에 이르기까지─을 제시했다. 니덤은 1430년대 이후 외국 지식의 흡수를 막은 관료주의적 통제를 비난한다." "그러나 우리가 수집한 데이터에서 주목할 만한 발견은 중국의 기술 발전이 단절된 시점이 많은 이들이 생각하는 명나라 때가 아니라 훨씬 이전 6세기였다는 사실이다. 해금 정책이 중국의 쇠퇴에 심각한 영향을 미쳤으나 쇠퇴를 촉발한 근본적인 원인은 아니었다. 물론 명나라의 지배계급은 엉망진창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이미 700여 년 전에 시작된 추세에 가속도가 붙어 탄생한 엉망진창이었다. 17세기 또는 18세기까지 중국은 산업화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343-4)


"니덤 문제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에서 많은 연구자가 종종 놓치고 잊어버리는 질문, 즉 중국이 애초에 어떻게 기술 분야에서 초기 우위를 점할 수 있었을까로 돌아가 보자. 니덤 문제는 분석의 축을 중국의 실패에 놓는다. 고대 중국의 엄청난 업적들은 종종 중국의 기술 우위가 후대 왕조에서 완전히 무너졌다는 부정을 통해 긍정된다." "중국의 쇠퇴를 반과학적이고 보수적인 유교 윤리 탓으로 돌리는 설명이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데, 그렇다면 유교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거두었던 고대 중국의 업적들은 해명할 수 있을까? 중국인의 타고난 창의력을 전제로 하는 설명도 똑같은 문제를 안고 있으며 그 방향은 정반대이다. 후대 중국의 쇠퇴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창의성의 결과가 다양한 이유는 창의성을 허용하고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 다양하기 때문이다. 나는 중국이 초기에 기술을 선도할 수 있었던 데에는 국가의 역할이 결정적으로, 어쩌면 독점적으로 작용했다고 추측한다."(345-8)


"더글러스 노스에 따르면 〈현대 기술의 잠재력 실현은 국가와 함께는 불가능하지만, 국가 없이도 불가능하다.〉 이는 전근대에도 다르지 않았다. 왕조 시대 중국은 정부가 직간접적으로 기술을 지원했다. 대규모로 의학 및 농업 지식을 편찬하여 보급하고 기술 표준을 제정하였다. 또한 발명가들에게 금전적 보상과 승진이라는 직접 보상을 제공했다." "국가의 직접 지원은 중국의 초기 기술 우위를 설명할 만큼 대단하지는 않았다. 사후 지원은 종이나 지진계 같은 영향력이 큰 몇 가지 발명품을 설명할 수는 있어도 대량 발명은 설명할 수 없다." "고대 중국에서 발명의 씨앗을 뿌리는 데에는 국가의 간접 역할이 훨씬 더 중요했다. 중국 황실은 정부 기구에 상을 내렸고, 그 규모도 컸다. 한 가지 방법은 정부가 발명가들을 고용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국가의 사전 지원 기능은 고대 문명들 가운데 가장 독특하며, 중국이 우위를 점할 수 있었던 진정한 원천이었다."(348-9)


"그러나 왕조 시대 중국의 기술 발전은 누적되지 못했다. 중국 발명가들은 앞선 시대의 위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지 못했다. 이전의 발명이 이후 발명의 밑거름이 되지 못했고, 개별적인 창의성의 분출이 결합해 창의력과 독창성의 다음 물결로 이어지지 못했다." "중국에서 비非축적 패턴이 발생한 이유는 무엇일까? 중국의 발명은 진공 상태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과학도, 상업적 발전과 시장경제도, (특허와 같은) 지식 창출과 보호의 제도화도 없는 진공 상태 말이다." "중국의 발명성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일찍 정점을 찍었다. 일반적으로 중국 역사상 가장 빛나는 왕조를 꼽으라면 당나라와 송나라다. 하지만 당나라와 송나라의 영광은 발명의 규모보다는 두 왕조의 중요성에 더 큰 영향을 받았다. 당과 송은 위진남북조 시대나 그 이전의 전국 시대와 비교하면 보잘것없다. 당과 송은 나름대로 혁신적인 시대였을지 모르지만, 그 영광은 이전 시대가 남긴 잔영에 불과했다."(362-4)


"17세기는 지적, 정치적으로 억압적이었던 명나라의 종말과 서구의 과학 혁명이 맞물린 시기였기 때문에 니덤에게 편리한 타이밍이었을 수 있다. 니덤에게 과거 제도는 일부라도 과학적 내용을 담고 있다면 과학과 양립할 수 있는 제도였다. 당나라와 송나라의 과거 제도가 후대 왕조들과 비교해 좀 더 유연하고 개방적인 형태였던 것은 사실이지만, 실상 당나라와 송나라는 이미 발명 곡선의 쇠퇴기에 접어들고 있었다. 당나라와 송나라 사람들은 후대의 원, 명, 청 왕조보다 더 창의적이었지만 위진남북조 시대, 전국 시대에 비교하면 뒤처졌다. 데이터를 보다 직관적으로 해석하자면 중국은 과거 제도가 있을 때보다 없을 때 더 창의적이었다. 원나라, 명나라, 청나라의 과거 시험 커리큘럼의 규모 확장과 제한적 범위는 추가적인 연쇄 효과를 낳았지만, 중국 기술 쇠퇴의 초기 촉발 요인은 과거 제도의 확립과 규모 확장에 수반된 광범위한 정치적, 인식적 변화로 인해 발생했다."(369-70)


"유럽에서는 정치적 분열, 민주주의, 시민사회, 시장경제가 과학 기술과 함께 발전하였고 서로 자극을 주고받으며 선순환 구조를 끌어냈다. 왕조 시대 중국은 기술 격차의 반대편에서 경합성 효과를 명백하게 보여준다. 중국의 기술은 스스로 반전된 것이다." "조엘 모키르가 지적한 바와 같이 유럽과 중국의 진정한 차이점은, 중국에서는 통치자의 선호가 매우 중요했으나 유럽에서는 그렇지 않았다는 점이다. 유럽에도 혁신과 무역을 싫어하는 통치자들이 있었지만, 그들이 대륙 전체를 통제하지는 못했다. 통치자의 선호에 따라 경제의 무게 중심은 움직일 수도 있지만, 경제성장과 기술 혁신은 여전히 자금을 조달하고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6세기 이후 중국은 이러한 조건을 잃었다. 명나라의 해군력에 기반한 팍스 시니카를 상상하는 대신 〈중국이 6세기 이후에도 경합성 조건을 유지했다면 중국의 기술은 어떻게 되었을까?〉라고 질문하는 것이 더 생산적인 접근 방식이다."(380-1)


# 경합성contestability : 어떤 대상에 대한 도전 또는 대체 가능함을 의미한다. 경제학에서는 낮은 비용으로 특정 산업이나 시장에 자유로운 진입과 퇴장이 가능함을 의미한다.


8장 정부 공화국


"〈기본적인 법치주의와 아주 원시적인 사상의 자유도 없는 독재 국가가 어떻게 그토록 많은 성취를 얻을 수 있었을까?〉" "개혁주의 중국공산당이 만들어낸 숨겨진 범위 조건들 중 하나는 바로 내가 〈학문적 세계화〉라고 부르는 연구 및 교육 분야의 국제 협력이다. 다른 범위 조건은 능력 있는 중국 기업가들이 중국공산당의 직접적인 감독을 벗어나 시장 기반 금융에 접근하고 권리를 보호받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홍콩은 이 점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 아니 했었다." "시진핑 치하에서 중국공산당의 이단적 모델은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되었다. 중국의 반서방 외교 정책 기조로 인해 서방과의 교육 및 기술 협력은 점점 더 압박을 받고 있으며, 홍콩의 자치권은 말살당하고 있다. 중국의 지도자들은 많은 서방 연구자들이 열을 올렸던 논리, 즉 중국의 막강한 우위는 중국의 규모에서 온다는 주장을 그대로 수용했다. 중국의 역사와 미래는 이 명제가 틀렸다는 것을 증명할 것이다."(393-8)


"내가 중국 시스템을 '정부 공화국'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중국에는 정부와 관련된 자금 지원의 이점은 있지만, 과학 공화국의 기본 요소라 할 수 있는 탐구의 자유와 협업이 없기 때문이다. 중국 대학은 정부의 엄격한 통제와 감독을 받으며, 정부가 운영에도 아주 세밀하게 관여하는 경우가 많다. 엄밀하게 말해서 모든 중국 대학은 관료제의 일부이다. 각 대학은 재정부나 외교부처럼 행정상의 위계가 있다." "최근 몇 년 동안 당서기가 대학 총장보다 더 많은 권한을 행사하고 있다. 교육부가 박사 과정 학생을 지도할 자격이 있는 교수진을 정하고 대학의 학위 수여 요건을 결정한다. 심지어 커리큘럼 개발에도 교육부의 검토와 승인이 요구된다. 국가는 정말 시시콜콜한 것들까지 하나하나 관리하고 개입한다. 공식적으로 확인되지 않았지만, 교육부는 모든 정치경제학 수업에서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가르칠 것을 의무화했을 뿐 아니라 어떤 중국어 판본을 써야 하는지까지 명시하고 있다고 한다."(416-8)


"정부 공화국의 거대함 그 자체 덕분에 많은 연구 프로젝트가 자금 지원을 받았고 양量의 혁명이 일어났다. 단편적인 인센티브 프로그램에서 교수의 보수와 논문의 수는 정비례한다. 이 보상 제도의 본래 의도는 관료인 심사자의 결정을 객관적인 지표에 묶어 재량권을 줄이자는 것이었다. 단순한 갯수 판단은 학술지에 대한 명시적인 존중이자 동료 심사에 대한 암묵적인 존중이다. 중국의 교육 개혁가들은 관료 권력을 일부나마 제거할 수 있는 방법으로 이 방식을 구상했다." "2007년부터 2017년까지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중국의 지식 생산은 질이 아닌 양에 압도적으로 치우쳐 있다고 나타났다. 이 기간 중국 과학자들은 206만 건의 논문을 발표하여 미국(380만 건)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논문을 발표했다. 그러나 논문의 평균 인용횟수는 9.4회로 미국 과학자들이 발표한 논문의 17.47회에 비해 훨씬 낮았다. 분석에 포함된 10개 국가 중 중국은 평균 인용횟수에서 꼴찌였다."(421-2)


"정부 공화국은 규모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이에 더해 해외와의 협력은 중국 과학과 기술의 핵심적인 원동력이다. 학계의 국제 협력은 작동 중인 비교우위의 한 버전이다. 중국은 범위보다는 규모에서 상대적으로 우수하다. 기본적인 경제 논리를 따른다면 중국은 규모 확장에 특화하면서 글로벌 시장을 통해 범위 조건과도 거리를 좁혀나갈 것이다. 그러나 자본과 노동 같은 자질적 요소와 달리 중국 학계의 범위 조건은 정책 입안자들의 세심하게 의도된 결정에서 기인한다." "중국 공산당은 과학과 기술이라는 '다르게 생각하기'의 특정한 결과물은 원하지만, 그 결과를 만들어 내는 과정은 혐오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중국의 대학은 당의 통제 수단이다. 대학은 중국의 중요한 인구 집단의 사상과 행동의 자유를 통제하고 억압한다. 바로 청년층이다. 대학에 대한 통제를 완화하는 순간 중국공산당의 즉각적인 결함, 즉 부정적인 외부효과가 드러날 수 있는 것이다."(423-4)


5부 EAST 모델의 미래


9장 시진핑의 공산당


"시진핑은 기존 체제에 두 가지 관점에서 큰 충격을 가했다. 첫 번째로, 천안문 사태 이후 당 지도자들이 일부 분야(농촌 금융)에서는 퇴보했지만 다른 분야(민영화와 세계화)에서는 개혁을 이루었다는 점을 상기하자. 시진핑은 외교 정책부터 국내 정치, 소셜 미디어, 경제에 이르기까지 모든 분야에서 전면적인 변화를 도입했으며, 그 방향성은 일관적으로 강경주의 일색이었다. 천안문 사태 이후 중국의 지도자들은 정치적 범위 조건을 약화했지만 경제 및 사회적 범위 조건은 그 지평을 넓혀나갔다. 시진핑 체제에서는 그 어떤 범위 조건도 남지 않았다. 두 번때는 시진핑의 행동 속도이다. 중국은 대체로 점진적이고 누적되는 접근 방식으로 움직인다고 알려져 있다. 시진핑은 그렇지 않았다. 그의 반부패 캠페인은 수백만 명의 공무원을 끌어내렸고, 부동산, 게임, 사교육 서비스, 핀테크에 대한 동시다발로 대규모 단속을 실시해 실물 경제에서 수조 달러의 부와 수십만 개의 일자리를 증발시켰다."(444)


"시진핑의 반부패 캠페인은 이제 10년째에 들어서고 있다. 더는 캠페인이 아니라 '영구 혁명permanent revolution'과 같이 중국공산당이 만들어 낸 모순적인 개념 중 하나라고 설명하는 것이 더 맞을지도 모른다." "부패의 정치적 도구화는 자기 영속적인 역학을 만들어 낸다. 정치적 경쟁자를 표적으로 삼는 행위 자체가 정치적 경쟁을 촉발하고 따라서 반작용을 일으킬 수 있다. 부패가 만연하므로 시진핑의 미래 경쟁자는 자신의 정치적 동맹자들을 부패 혐의로 고발하여 우위를 점할지도 모른다. 시진핑의 전임자들이 반부패 캠페인에 신중에 신중을 기하고, 시행할 때에는 마치 외과 수술과도 같이 정확하게 특정 부위만 도려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정치적 동기에 의한 반부패 드라이브는 숙청과 재숙청의 끊임없는 순환의 함정을 파고, 이번 숙청은 다음 숙청을 위한 씨앗을 뿌린다. 이러한 불안정한 환경에서는 가만히 있으면 도전을 받고, 가만히 있지 않아도 도전을 불러일으킨다."(451-3)


"중국은 빠르게 인격 통치로 빠져들고 있다. 수잔 셔크가 주목한 현상은 주요 관리들에게 개인적으로 충성 서약을 요구한 마오쩌둥 시대 관행의 부활과 중앙위원회가 차기 지도자들을 추천하는 비공식 '투표'의 폐지다." "인격 통치의 철칙은 일관성과 무작위성 없이는 규모의 확장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스템에는 비뚤어진 유인이 넘쳐나며, 부하직원은 시민은 물론 자신의 상사를 대할 때에도 불투명하게 행동할 동기가 다분하다. 그리하여 제임스 스콧이 '가독성 문제legibility problem'라고 이름 붙인 현상이 발생한다. 시스템은 아부하는 자들을 선호하고, 이렇게도 저렇게도 해석될 수 있는 이중화법, 전략적 게임, 계산된 신호들을 용인한다. 정보의 노이즈 비율이 올라간다. 린뱌오처럼 개인 일기장에서는 지도자(여기에서는 마오쩌둥)를 경멸하나 공개적으로는 그를 열렬히 찬양하는 이들이 더 많아진다. 솔직하고 허심탄회하게 의견을 말하는 후야오방은 줄어든다. 시스템의 질이 나빠진다."(454-6)


"절대적 소득 증가는 정치적 안정에 매우 중요하다. 경기 침체 상황에서 가계 부문을 달래는─그리하여 가계가 여전히 정치적으로 고분고분하게끔 관리하는─유일한 방법은 가계 부문에 유리한 소득 변화를 설계하는 것이다. 절대적 소득 증가라는 카드는 더는 사용할 수 없다. 감세라는 선택지도 있지만, 중국 정부는 자신들의 소득이라면 놀라울 정도로 양보가 없다. 그렇다면 이 시나리오에서 취약해지는 것은 자본가들이다. 시진핑이 중국 자본가들에게 수모를 주고 대규모 기부금을 받아내서 3차 소득 재분배를 위한 자금을 조달하고 이른바 '공동부유共同富裕'를 실현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약탈적 전술이다." "첨단 기술 기업들이 약속한 대규모 기부금은 기업가 개인의 재산이 아닌 회사 자금, 즉 투자자의 돈으로 출연하는 것이다. 당연히 기부금 발표 이후 이들 기업의 주가는 하락했고, 이는 첨단 기술 부문의 해고로 이어져 전문 노동력의 소득 지위에 악영향을 미쳤다."(485-6)


10장 EAST 모델을 깨고 나오기?


"중국공산당 체제를 무너뜨릴 수 있다는 생각은 잊어버리는 게 좋다. '만리방화벽'을 우회하는 VPN을 통해 정치 관련 정보를 검색할 수 있어도, 중국 젊은이들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전 세계의 권위주의 정권들은 기꺼이 기술을 받아들이고, 기술의 태생적 자유주의 편향성에도 당황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대신 조지 오웰의 세상을 더 잘 구현하기 위해 맞춤형 감시 기술을 활용한다. 디지털 독재 앞에 KGB와 슈타지는 명함도 못 내밀 지경이다. 기술이 모든 사람을 위한 평평한 세상을 만들지는 못했지만, 독재자들을 위한 평평한 세상은 만들어냈다." "기술 자체는 사회나 정치를 변화시키지 못한다. 기술은 정치의 방식을 변화시킬 수 있으며, 정치적 상황을 교란하기보다는 강화하는 데 사용될 수 있다." "오늘날 중국공산당의 독재 정권은 경제와 기술의 힘에 맞서 정치를 지키기 위해 어마어마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며, 정치적 변화를 틀어막는 데에 대체로 성공했다."(504-6)


"중국인과 서구 사이에는 깊은 가치관의 골이 존재한다. 중국인은 '최대 다수의 최대 이익을 옹호하는 권리'라는 공리주의적 개념을 가지고 있다. 서방에서 권리란, 정치적 반체제 인사 등 권리를 박탈당한 소수가 받는 침해로부터의 보호를 말한다. 이러한 권리 개념은 중국인들에게는 널리 공감을 얻을 수 없다. 인종적으로 동질적인 사회와 융합을 중시하는 정치 문화에서는 인구의 하위 집단이 고유한 불변적 특성을 가질 수 있다는 생각은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중국인과 관여하는 한 가지 방법은 민주주의에 대한 성과 기반 논리에 호소하는 것이다. 성과 기반 논리는 중국공산당이 주로 사용하는 논리이기 때문에 중국인들이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우리는 사실과 증거에 기반한 민주주의 담론을 이끌어내야 한다. 경제성장에 있어 민주주의가 독재 국가에 대하여 결정적으로 우월하지는 못할 수도 있지만, 독재 국가가 민주주의보다 우월하다는 설득력 있는 증거 역시 없다."(523-5)


"중국식 시스템은 분명히 효율적인 측면이 있다. 하지만 중국공산당 시스템은 하나의 패키지로 고려해야 한다." "동아시아의 성공을 독재의 우월성을 주장하는 근거로 삼아 남한, 대만, 싱가포르의 독재 정권과 GDP 성장을 연결 짓는 주장도 있다. 선택 편향을 제거하고 보면, 동아시아 독재 정권들의 성공 사례 뒤에는 각각 또 다른 동아시아 독재 정권의 실패 사례가 있다. 대만은 풍요로워졌지만, 마오쩌둥의 중국은 그렇지 못했다. 남한은 빠르게 발전했지만, 북한은 허우적거렸다. 싱가포르의 강력한 1인 통치는 성공했지만, 자유방임주의였던 홍콩도 마찬가지였다. 1989년 이후 새로운 독재 체제가 도입된 중국이 좋은 성과를 거둔 것은 사실이지만, 보다 리버럴했던 1980년대의 중국이 훨씬 더 인상적인 성과를 거두었다. 동아시아의 경험을 종합해 볼 때 독재의 우월성을 뒷받침하는 증거는 없다. 오히려 남한과 같이 독재의 수위가 낮은 정권이 북한과 같은 극단적인 독재 정권보다 나은 성과를 거두었다."(529-31)


"1990년대에 등장한 '아시아적 가치' 학파의 핵심 주장은 법치, 민주주의, 언론의 자유를 바탕으로 하는 서구 시스템이 유교 이념에 뿌리를 둔 국가에는 적합하지 않고 근본적으로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 주장에는 결함이 있다. 서구적 가치에는 '유전적'인 요소가 없다." "우리가 타인이 발명한 아이디어를 사용하는 이유 중 하나는 내 조상들이 만들어 낸 가치 중 일부가 끔찍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중국에서 전족을 옹호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아이디어의 국적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어떤 아이디어가 옳은지 그른지, 그리고 이익을 가져오는지이다." "이때 우리에게는 자기 의견을 말할 자유, 비판하고 비판받을 자유, 토론할 자유, 즉 완전한 민주주의는 아니더라도 '토론 민주주의'라는 자유가 필요하다. 다시 말해, 우리는 아시아의 가치를 긍정하기 위해 서구의 가치 중 일부, 즉 의사 표현의 자유와 토론을 긍정해야 한며, 그러한 가치들을 거부한다면 유용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53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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