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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사랑한다는 것 - 애국주의와 세계시민주의의 한계 논쟁
마사 너스봄 외 지음, 오인영 옮김 / 삼인 / 2003년 6월
평점 :
품절
이 책에서 너스봄이 주장하는 세계시민주의는 신국(神國)을 지상에 실현하고자 했던 중세 프로젝트의 개작(改作)이다. 그녀와 다른 저자들의 논쟁에서 세계시민주의와 애국주의가 대립항으로 설정되어 있는 것은 각자의 이념이 고려하는 동심원의 갯수가 다르기 때문인데, 양쪽 모두 개체에서 질적으로 변환된 집단의 의지를 최상의 가치로 상정한다는 점에서는 별다른 차이가 없다.
칸트는 <세계시민적 견지에서 본 보편사의 이념> 제2명제에서 인간에 대해 "그의 이성의 사용을 목표로 하고 있는 자연적 소질들은 유類에 있어서만 완전히 발전되어 있을 뿐이요, 개체에 있어서는 완전히 발전되어 있지 않다"고 말한다. 그는 인간이 "[다른 사람과 제휴하여] 자신을 사회화하려고 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으며, 그러한 상태에서 비로소 인간의 자각을 갖는다고 말한다.
물론 그의 세계시민사회는 신의 뜻을 받들어 단번에 세워진 공동체가 아니라 "조직체의 본질에 관한 올바른 지식과, 여러 가지 세태에 부딪쳐 가면서 훈련을 쌓은 커다란 경험과,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조직체를 받아들일 각오가 되어있는 선善의지"가 결합된 인간의 노고의 산물이다. 세계시민사회를 세우는 작업은 "아주 뒤늦게, 즉 많은 헛된 시도를 한 연후"에야 비로소 가능하다.
현대는 실험과 관찰이 지배 이념으로 자리잡은 과학의 시대이다. 합리적 이성을 내면화한 우리들은 이상주의라는 말에서 '실현 불가능한', '공허한'이라는 함의를 추출해낸다. 세계시민주의에 공감하면서도 다양한 반론을 제기하는 이 책의 많은 논자들 역시 그러한 현실론을 염두에 두고 있다. 칸트도 자신의 주장이 "이러한 이념-공정한 주권자-에 접근하여 가"는 것임을 적시한다.
보편 개념이 실재하느냐의 오랜 철학적 논의와 별개로, 너스봄이 되살린 이상주의 시도가 헛되지 않은 작업이라는 점은 이 책에 실려 있는 다양한 논자들의 다양한 논의들이 증명해주고 있다. 그들은 특수성과 지역성의 불가피함을 말하면서 부분이 없는 전체란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강조하는데, 이 말을 뒤집어보면 전체를 상정하지 않는 부분 역시 무의미하다는 뜻을 헤아릴 수 있다.
플라톤은 '국가'에서 미숙한 개체가 완전성에 근접하기 위해서는 공동체(koinonia) 안에서 정신을 도야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가 논의의 기초로 삼은 폴리스는 현대의 관점으로 보면 애국주의의 광역에도 미치지 못하는 소규모지만 그의 정신은 태양을 바라보는데 주저함이 없다. 인간 정신은 유한하지만 바로 그 '유한함'을 자각하기에 '무한함'을 떠올릴 수 있다. 그때 무한함은 '있다'.
제9명제
우리가 언젠가는 그 부분에서 이성적 의도가 성취될 날이 오리라는 것을 단념하고, 그것을 어떤 다른 세계에서만 기대해야 한다면, 이성이 없는 자연의 왕국에 있어서 창조의 장엄함과 지혜로움을 찬미하며, 깊이 생각해보라고 권장한들 무슨 소용이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