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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 연출의 사회학 - 일상이라는 무대에서 우리는 어떻게 연기하는가
어빙 고프먼 지음, 진수미 옮김 / 현암사 / 2016년 1월
평점 :
서문
"개인이 자신을 돋보이게 연출한다는 사실을 다른 사람들이 알게 된다면, 그들은 자신들이 본 개인의 모습을 두 부분으로 나눈다. 그리고 개인이 작정하고 조작하기가 비교적 쉬운, 주로 말로 표현하는 부분과 개인이 별로 관심이 없거나 통제하지 않는 것처럼 암시적으로만 표현하는 부분을 대조한다. 개인의 암시 표현을 단서로, 개인이 잘 다스릴 수 있는 명시 표현의 타당성을 검증하는 것이다. 여기서 의사소통 과정의 근본적 비대칭성, 즉 한쪽 의사소통 흐름만을 아는 개인과 다른 쪽 흐름도 다 보고 있는 목격자 사이의 비대칭성이 드러난다." "여기서 나는 한 가지 점을 지적하고 싶다. 개인이 계산된 비의도성을 내보이려 시도해도, 그것을 꿰뚫어 보는 능력은 우리 자신의 행동을 조작하는 능력보다 더 발달되어 있다. '감추기-발견하기-위장하기-재발견하기'가 무한 순환되는 정보게임이 몇 단계에 걸쳐 이루어지든, 목격자는 행위자보다 유리한 위치를 점유하므로 의사소통 과정 초기의 비대칭성이 유지된다."(18-20)
"개인이 다른 사람들 앞에 나설 때 상황에 대한 자기 나름의 정의를 투영하면, 비록 소극적 역할로 보이지만 다른 사람들 역시 상황 정의를 투영한다. 이 책의 주된 관심사가 바로 상황 정의에 담긴 도덕적 성격이다. 어떤 사회적 특성을 지닌 사람이든 타인들에게 적절한 방식으로 존중과 대우를 받을 도덕적 권리가 있음을 보장하는 원리에 따라 사회가 조직된다. 이때 자신이 어떤 사회적 특성을 갖고 있음을 암시하거나 명시하는 사람은 스스로 그 주장과 일치하는 인물이 되어야 한다. 따라서 자기가 투영한 상황 정의에 맞춰 스스로를 암시하거나 명시한 사람은, 다른 이들에게 자기와 같은 부류에게 합당한 방식으로 자기를 평가하고 대우하라고 도덕적으로 요구하는 셈이다. 또한 자기가 드러내지 않은 특성과 관련된 권리주장은 내심 포기하고 그에 따르는 대우도 포기한다. 그래야 자기가 어떤 사람이며 자기를 어떤 특성이 '있는' 사람으로 봐주어야 하는지를 알려준다는 걸 다른 사람들도 알아차린다."(24-5)
1장 공연
# 용어 정의
1. 공연performance : 개인이 특정 관찰자 집단 앞에서 계속하는 모든 활동, 그리고 관찰자에게 영향을 미치는 모든 행동
2. 앞무대front : 공연에서 개인이 의도하거나 자기도 모르게 택하는 전형적 표현 장치
3. 무대장치setting : 앞무대의 구성 요소로서, 가구, 장식품, 공간 배치, 공연 도중과 전후의 인간 행동에 필요한 온갖 소품들
4. 개인 앞무대personal front : 앞무대의 구성 요소로서, 공연자와 즉각 동일시할 수 있고 공연자가 가는 곳이면 어디든 당연히 따라다니는 항목들(직책이나 직위 표지, 복장, 성·연령·인종 특성, 체구와 태도, 말투, 표정, 몸짓 등)
"개인은, 남들과 함께 있으면 보통 눈에 띄지 않을지도 모를 사실을 극적으로 확인시켜줄 신호를 자기 행동에 섞는다. 자기 행동을 남들이 중요하게 받아들이게 하려면, 개인은 〈상호작용을 하는 동안〉 자기가 전하고 싶은 의사를 표현할 행동을 해야 한다. 공연자는 상호작용에서 자기가 지녔다고 주장하는 능력을, 그것도 눈 깜짝할 사이에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심판이 야구 경기에서 확신에 따라 판정한다는 인상을 주려면, 자기 판정이 옳은지 생각하느라 머뭇거리는 순간이 없어야 한다." "배역 연기란, 공연자가 앞무대를 통해 다른 유형의 배역 연기에서도 하기 마련인 다소 추상적인 주장을 제기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사회화 과정에서 중요한 또다른 면모는, 공연자들이 여러 방식으로 이상화된 인상을 보여주려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개인이 남들 앞에서 자신을 연출하는 공연은, 사실상 그의 행동 전체에 비해 사회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된 가치를 더 많이 포함하고 입증하려는 경향이 있다."(45-6, 51-2)
"공연자는 자기가 던지는 사소한 암시를 공연의 중요성을 나타내는 신호로 받아들여주는 관객에게 의존한다. 이 편리한 사실에는 불편한 진실도 들어 있다. 그 신호 수용 성향 때문에 관객은 공연자가 전달하는 암시의 의미를 오해하거나 공연자가 의도하지 않은 무의미한 몸짓에 엉뚱한 의미를 부여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연은 표현의 일관성을 필요로 한다. 이 사실은, 너무나도 인간적인 우리의 자아와 사회화된 우리의 자아 사이에 결정적 불일치가 있음을 알려준다. 우리는 인간으로서 기분과 에너지에 따라 시시때때로 변하는 다양한 충동을 지닌 존재다. 그러나 우리가 관객 앞에 등장인물로 나설 때는 충동에 휘둘리지 말아야 한다. 뒤르켐이 지적한 대로, 우리는 우리의 고차원적 사회활동이 '신체적 감각과 의식처럼 신체 상태에 끌려다니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정해진 시간에는 어김없이 완벽하게 똑같은 공연을 한다고 믿을 수 있는 일종의 정신의 관료화가 필요한 것이다."(71, 77)
"관객으로서 우리는 공연자가 조성하는 인상이 그저 겉치레에 불과한지 진짜인지 '가짜'인지 당연히 의심을 품을 수 있다. 이러한 의심은 참으로 보편적이어서, 우리는 흔히 공연에서 조작하기 어려운 측면에 특별히 주목함으로써 오인하기 쉬운 암시의 신빙성을 판단하곤 한다." "중요한 점은, 개인이 배역 연기의 어느 한 부분에서 그릇된 인상을 보이면 관계 전체 또는 역할 전체에 위협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개인이 어느 한 영역에서 신용을 잃을 행동을 했음이 드러나면, 감출 게 없는 다른 행동 영역에서도 의심을 사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개인이 공연을 하는 동안 단 한 가지만 감추었을 뿐이고 그것도 공연의 어느 한 부분이나 단계에 겨우 드러낼 뿐이라 해도, 공연자의 불안감은 공연 전체로 확산될 수 있다. … 그렇다고 겉모습과 어긋나는 사실들이 꾸며낸 겉모습보다 더 참된 실체라고 주장할 근거는 없다. 여기서 중요한 사회학적 쟁점은, 일상의 공연에서 조성된 인상은 무너지기 쉽다는 사실뿐이다."(80, 88-9)
"영미 문화에는 행동을 개념화하는 두 가지 상식적 모델이 있는 듯하다. 하나는 진지하고 정직한 행동을 가리키는 참된 공연 모델이다. 다른 하나는 우리가 심각하지 않게 받아들이는 연극배우의 공연이나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사기꾼의 작업처럼 철저하게 꾸며낸 거짓 공연 모델이다. 우리는 참된 공연을, 일부러 꾸며낸 것이 아니라 상황에서 나타난 사실에 개인이 무의식적으로 반응해 나타난 의도치 않은 결과라고 보는 경향이 있다. 반면에 꾸며낸 공연은 즉각적 반응이라고 볼 만한 실체가 없으므로 하나하나 힘들여 거짓을 짜 맞춘 것으로 보곤 한다. 이런 이분법적 개념은, 정직한 공연자라는 이데올로기를 전제하기 때문에 공연을 하는 데는 강력한 힘을 발휘하지만, 공연을 분석하는 데는 빈약한 개념이다." "완벽하게 거짓임에도 성공하는 공연이 있고, 완벽하게 정직해서 성공하는 공연이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공연의 본질은 그런 극단적 유형에는 속하지 않으며 연극적 관점에서 권장할 만한 것도 아니다."(95-6)
"연극 공연이나 사기극에서는 배역 연기의 내용 중 말로 표현할 부분에는 치밀하게 구성한 대본이 필요하지만, '암시 표현'이 필요한 방대한 부분은 몇 가지 단서나 연출 방향 정도만 있는, 흔히 모호한 무대 지시만 주어질 뿐이다." "우리는 사회화를 통해 어느 한 가지 배역의 구체적 세목을 모두 학습하는 것은 아니며, 그럴 만한 충분한 시간이나 에너지가 없을 때가 많다. 개인은 어떤 배역을 맡든, 그 배역을 '채울' 만큼 표현법을 충분히 익혀두기만 하면 된다. 일상 삶의 진솔한 공연은 개인이 할 일이 무엇인지 미리 알고 또 원하는 효과를 겨냥해 '연기'하는 '연출'된 공연이 아니다. 암시 표현이란 그로서는 '생각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보통 사람이 연출된 연기를 하는 공연자처럼 자기의 시선과 몸 움직임을 미리 능숙하게 고안할 능력이 없다고 해서 자기의 행동 목록 중에서 이미 극화된 수단을 택해 자기 표현을 할 줄 모르는 것은 아니다. 요컨대, 우리는 모두 우리가 아는 것보다 훨씬 연기를 잘한다."(98-9)
2장 팀
"공연은 주로 공연 과제의 특성을 연출할 뿐 공연자 개인의 특성을 연출하지 않는다. 전문직이든, 관료조직이나 사업체의 직원이든, 기능직이든, 서비스 업무를 행하는 사람들은 활기찬 몸가짐이므로 자신들의 실력과 성실성을 표현한다. 그들의 몸가짐이 어떤 특성을 전하려 하든, 그 주된 목적은 그들이 제공하는 서비스나 제품에 관해 유리한 정의를 확보하려는 데 있다." "가장 중요한 점은, 어느 한 참여자가 투영한 상황 정의는 여러 참여자들이 긴밀하게 협력하여 조성하고 유지하는 통합적 요소라는 것이다." "더 나아가, 팀이 전반적으로 만족스러운 공연 효과를 거두려면 팀 성원들은 배역에 따라 각기 다른 연기와 면모를 보일 필요가 있다." "일례로 미국 사회에서 부부가 저녁에 열리는 사교 모임에 참석하면, 평소 단둘이 있을 때나 오랜 친구들 앞에서 남편에게 까탈을 부리던 아내도 남편의 뜻과 견해를 존중하고 순종하는 모습을 보인다. 결혼으로 맺어진 한 팀의 성원으로서 각자의 배역을 연기하는 것이다."(105-7)
"팀 공연이 진행되는 동안, 팀 성원은 누구나 공연을 포기하거나 부적절한 품행으로 공연을 망칠 힘이 있다. 성원 각자가 팀 동료들의 선행에 의지해야 하고 팀 동료들도 그에게 의지해야 한다. 그러다 보니 팀 성원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상호의존적 유대가 생길 수밖에 없다. 간부와 실무자가 지위 차이로 분열하기 십상인 조직에서도 공연 팀들은 분열을 통합시키는 경향이 있다. 또한 관객 앞에서 팀 성원들이 협력해 주어진 상황 정의를 지켜야 한다면, 분명 자기네끼리 있을 때 주고받던 인상은 유지할 수 없는 입장에 처한다. 그러면 그들은 특정 면모를 유지하는 공모자로서, 서로 '사정을 아는' 사이, 특정 앞무대는 유지할 수 없음을 이해하는 사이가 될 수밖에 없다. 결국 팀 동료들 사이의 친밀성이란, 반드시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서서히 형성되는 유기적 관계의 친밀성이라기보다는 개인이 팀에 소속되는 순간 자동적으로 확대·수용되는 공식 관계에서 형성된 온기 없는 친밀성인 것이다."(110-1)
"우리는 팀 공연을 보고 있는 나머지 참여자들이 대응 팀을 형성하는 의미심장한 현상을 종종 발견한다. 각 팀은 서로 상대 팀에 대응해 나름의 배역 연기를 하는 것이므로 일방적 연기가 아니라 극적 상호작용이라 할 수 있고, 또 이 상호작용은 참여자 수만큼 다양한 목소리가 나오는 형태가 아니라 두 팀이 주고받는 형태를 띤다." "지위 등급이 많은 대규모 사회 조직에서는 특정 상호작용이 지속되는 동안 일시적으로 지위가 다른 참여자들이 대개 두 팀으로 나뉘어 집단화하는 경향을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군대에서 중위는 어떤 상황에서는 동료 장교들 편에 서서 사병들과 대립하고, 선임 장교 앞에서 공연을 하는 상황에서는 부하 사관들과 한 대열을 이룬다. 분쟁의 중재 상황에는 세 팀 모델이 적합하고 경쟁적 성격을 띤 일부 '사교' 자리에는 다수 팀 모델이 적합할 것이다. 물론 팀 수와 상관없이 모든 상호작용은 참여자들이 협력해 잠정적 합의를 유지하려는 노력이라는 관점에서 분석할 수 있다."(120-1)
"팀이란, 상황 정의를 투영하고 유지하는 과정에서 서로 긴밀하게 협력하는 일군의 사람들이라고 정의할 수 있겠다. 공연이 효과적이려면, 협력의 성격·정도가 감춰지고 비밀이 지켜져야 한다. 팀에 비밀결사의 성격이 있음을 뜻한다." "팀은 사람들이 소속 집단의 극적 공연에 협력하는 과정에서 창조되지만, 자신과 소속 집단을 극적으로 연출할 때 그들은 집단 성원이 아니라 팀 성원으로서 행동한다. 그런 의미에서 팀은 비밀결사이다. 비성원들에게 팀 성원들은 아주 배타적인 비밀결사의 성원들로 알려질 수도 있다. 그러나 이렇게 알려진 경우라면, 성원들이 팀으로 행동했다고 볼 수 없다. 우리는 모두 이런저런 팀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이 음모자라는 일종의 달콤한 죄책감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그리고 팀마다 특정 상황 정의의 안정적 유지에 골몰하는 과정에서 어떤 사실은 감추거나 하찮게 다루기 때문에, 우리는 얼마쯤 교활한 음모자 노릇을 실행하는 공연자일 수밖에 없다."(135-6)
3장 영역과 영역 행동
"무대 위에서 하는 개인의 공연은, 영역을 지키고 특정 기준을 실행하는 겉모습을 보여주려는 노력으로 볼 수 있다. 무대 위에서는 강조 표현된 면모의 겉모습이 나타나지만, 표현을 억제한 면모가 겉모습으로 나타나는 다른 영역, '무대 뒤' 또는 '뒷무대'가 있다." "무대 뒤에는 공연의 결정적 비밀이 있다. 또 공연자가 배역의 가면을 벗고 행동할 수 있는 곳이다. 때문에 관객에게는 무대 뒤 접근이 금지되거나 감춰진다. 뒷무대의 통제력은 노동자들이 조직의 단호한 요구에 맞서 스스로를 보호하려는 '작업 통제'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게 분명하다. 공장 노동자가 하루 종일 열심히 일하는 척하기에 성공하려면, 하루의 실제 산출량을 줄여 제출한다든가 하는, 꼼수를 감출 안전한 장소가 있어야 한다. 장의사가 유족에게 고인이 사실은 깊고 고요한 잠에 들어 있다는 확신을 갖게 하려면 시신을 염하고 화장을 시키는 따위의 마지막 장례 공연을 준비하는 작업실에는 유족의 출입을 금해야 한다."(140, 145-8)
"한 사회가 소중히 여기는 가치가 있다면 그 가치를 물질적으로 만들어내는 장소를 두기 마련이고, 그런 장소는 인접 구역과는 대조적인 무대 뒤가 될 수밖에 없다. 미국 사회에서는 실내장식가가 기량을 발휘해, 서비스를 준비하는 곳은 검은색으로 칠해 앞무대와 분리하고 앞무대는 개방식 벽돌을 쌓아 흰색 벽토로 장식한다. 고정 장치를 설치해 분리하기도 한다. 고용주들은 보기에 좋지 않은 모습으로 일하는 종업원들은 뒤에 두고 '인상이 좋은' 종업원들을 앞에 배치하여 완벽한 조화를 이루려고 한다. 좋은 인상을 주지 못한 노동자들은 예비 인력으로 고용해 관객에 감추어야 할 일을 시킨다. 감출 필요가 없는 일을 시키기도 한다. 에버릿 휴스가 지적한 바와 같이, 공장 운영의 핵심 영역만 아니라면 흑인 화학자도 수월하게 간부직에 오를 수 있다. 그리고 기업주는 흔히 무대 뒤에서 일하는 이들에게는 기술 관련 기준의 실현을, 반면에 무대 위에서 일하는 이들에게는 표현 관련 기준의 실현을 기대한다."(159)
"어떤 영역은 공식적으로 무대 위 또는 무대 뒤로 정해져 있지만, 많은 영역들이 때에 따라 그리고 보기에 따라 무대 위 기능도 하고 무대 뒤 기능도 한다. 고위 경영진의 개인 사무실은 사무실 가구의 질이 그의 조직 내 지위를 강하게 표현해준다는 점에서는 분명히 무대 위 영역이다. 그렇지만 그곳은 그가 윗도리를 벗고,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고, 편하게 마실 수 있는 술병을 가까이 두고 같은 직급 동료들과 정을 나누고 분방하게 행동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정기 공연을 위해 마련된 무대도 공연 전후로 무대 뒤로서 기능하는 때가 있다. 무대의 고정 장치를 수선·복구·재배치하거나 공연 전 최종 리허설이 이루어질 때다. 그와 같은 종류의 광경을 보려면 레스토랑, 상점, 가정집 문이 열리기 전에 단 몇 분만 보면 된다. 그렇다면 무대 위와 무대 뒤라고 말할 때, 우리는 특정한 공연을 준거로 삼는 것이고, 공연이 이루어지는 순간에 그 공간이 제공하는 기능을 말하는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161-3)
"특정 공연과 관련해 무대 위도 아니도 무대 뒤도 아닌 곳을 '외부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진행 중인 공연을 준거로 하면 외부인이 실제적·잠재적 관객이 될 수 있지만, 외부인들을 상대로 하는 공연은 진행 중이던 공연과는 아주 다를 수도 있고 비슷할 수도 있다." "바다에서 수영도 할 수 없는 엄격한 삶을 살고 싶어 하지 않는 목사라도 바닷가에서는 교구민들과 만나지 않는 게 상책이라고 생각한다. 바닷가에서 필요한 친밀성과 교구에서 필요한 거리감이나 존경심은 양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공연자는 현재 공연의 관객이 나중에 자기가 상반된 모습을 연출하게 될 공연에는 들어오지 않아야 편하고, 또 과거 자기의 공연을 본 관객은 그와 상반된 현재 공연을 보지 않아야 편하다. 현저하게 지위가 상승했거나 추락한 사람들은 단호하게 고향과 절연함으로써 관객을 분리한다. 공연자는 관객에 따라 배역 연기가 달라야 편하고, 같은 배역 연기라도 관객을 분리하는 게 더 편하다."(171-5)
4장 모순적 역할
"아마도 가장 극적으로 드러나는 모순적 역할은 사회 조직체에 위장 잠입한 이들의 역할일 것이다. 다양한 유형이 있다. 첫째, '정보원informer' 역할이다. 정보원은 공연자들에게 팀 성원으로 행세하며 뒷무대의 파괴적 정보를 얻어내 공공연하게 또는 몰래 관객에게 팔아넘기는 사람이다. 정치, 군사, 산업, 범죄 분야에 이런 역할이 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둘째, '바람잡이' 역할이다. 바람잡이는 평범한 관객 행세를 하지만 실은 공연자들과 한통속이다. 그는 공연자가 관객에게서 얻어내려는 반응의 본보기를 보여주거나 공연의 전개상 필요한 순간에 관객의 호응을 유도한다." "사사로운 대화 모임에서 아내가, 탐편이 꺼낸 얘깃거리를 이미 여러 번 들었고 또 남편이 처음 말하는 것처럼 꾸민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재미있다는 듯 적절히 장단을 맞춰주는 일 같은 건 흔하다. 바람잡이는 관객처럼 보이지만, 실은 공연 팀을 위해 눈에 띄지 않게 정교한 솜씨를 발휘하는 사람이다."(185-7)
"감찰관은 꾸민 겉모습이 실체와 다르지 않음을 확실히 보여주기 위해 공연자가 지켜야 할 기준을 점검하는 역할로 고용된 사람이다. 그런 감찰관 역을 맡은 사람은 공연자에게 미리 감찰이 있을 것임을 알리고 공개리에 감찰에 들어가기도 한다. 그러나 때로는 감찰관이 몰래 잠입하여 잘 속아 넘어가는 관객 행세를 하면서 공연자가 걸려들 덫을 놓기도 한다." "관객 가운데는 또 다른 특이한 일꾼이 있다. 공연 중에 눈에 띄지 않게 관객에 섞여 있다가 공연 팀의 경쟁자인 자기 고용주에게 간다. 그리고 목격한 바를 보고한다. 전문 정탐꾼이다." "모순적 역할에는 중개인 또는 중재자로 불리는 유형도 있다. 노사 분쟁을 조정하는 중재자는 적대적일 수밖에 없는 두 팀이 서로에게 모두 이익이 되는 합의에 이르도록 도와주는 기능을 한다. 결혼 중매인의 경우처럼, 중개인은 양쪽 당사자가 서로 간에 공개적으로 내놓으면 승낙하거나 거절하기가 곤란한 요구를 대신 전달하는 기능을 하기도 한다."(187-90)
"'서비스 전문가'는 의뢰인이 사람들 앞에서 공연을 할 수 있도록 건설, 수리, 장비 관리를 해주는 것이 직업인 이들이다. 건축가와 가구 판매원은 무대장치를 설치한다. 치과 의사, 미용사, 피부과 의사는 개인의 앞무대 모습을 관리한다. 경제학자, 회계사, 변호사, 조사 연구자는 의뢰인의 토론 노선이나 지적 위상을 언어로 표현할 수 있도록 사실 관련 요소들을 구성해준다. 서비스 전문가는 구체적 조사를 토대로, 공연의 비밀을 알고 뒷무대의 관점을 공유한다는 점에서는 팀의 성원과 다를 바 없다. 그러나 팀 성원과 달리, 전문가는 관객 앞에서 연출되는 공연에 기여는 할지라도 위험 부담이나 죄 의식 또는 만족감은 공유하지 않는다. 또한 전문가는 다른 이들의 비밀을 알지만 다른 이들은 그의 비밀을 알지 못한다는 점에서도 팀 성원과 다르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왜 전문가에게 직업윤리로 업무상 알게 된 공연의 비밀을 누설치 않는 '분별력'을 의무화하는지 이해할 수 있다."(194-5)
"'믿을 수 있는 친구confidant'는 공연자가 자기 죄를 고백하고 공연에서 자기가 보여준 인상은 그저 보여주기 위한 연기일 뿐이라는 시시콜콜한 이야기까지 자유롭게 털어놓을 수 있는 상대를 말한다. 그들은 대개 무대 밖에서 공연자의 무대 앞뒤 활동에 대리 참여만 한다. 믿을 수 있는 친구는 직업으로 서비스를 제공하는 전문가와는 다르다. 믿을 수 있는 친구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에 대한 우정과 신뢰, 상대의 감정을 존중해서 이야기를 들어줄 뿐, 수고비는 받지 않는다." "'동료'는 같은 시간과 장소에서 공연을 함께하는 팀 성원은 아니지만, 동일한 종류의 관객 앞에서 똑같은 배역 연기를 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동료는 말하자면 운명 공동체라 할 수 있다. 같은 종류의 공연을 해야 하므로 서로의 관점과 어려움을 안다. 그들의 모국어가 무엇이든, 그들은 결국 동일한 사회적 언어를 쓰는 것이다. 남들 앞에서 유지하는 앞무대를 서로의 앞에서는 지킬 필요가 없으니 긴장을 풀 수 있다."(201-3)
"동료끼리의 선의를 다른 이에게 의례적으로 확대하는 것은, 일종의 평화 제안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당신 비밀을 지켜줄 테니 당신도 우리의 비밀을 누설하지 말라'는 뜻이다." "이와 같은 동료 관계의 성격에서 우리는 사회 과정으로서 족내혼의 중요성을 이해할 수 있다. 족내혼은 계급·카스트·직업·종교·인종이 같은 집안으로 혼인 상대를 제한하는 경향을 말한다. 인척 관계를 맺은 사람들은 서로의 뒷무대를 볼 수 있는 위치가 된다. 기존 가족으로서는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만, 새로 가족이 된 사람들의 뒷무대도 자기네와 다를 바 없고 똑같이 감추고 싶은 비밀이 있다면 덜 당황스러울 것이다." "어떤 사람은 동료 의식이 지나치게 강해서, 또 어떤 사람은 동료 의식이 부족해서 문제를 일으킨다. 반감을 품은 동료가 공연 중에 배신자로 변해 옛 동료가 계속하는 연기의 비밀을 관객에게 팔아넘기는 일은 언제나 생길 수 있다. 언론은 늘 그런 고백과 폭로에 왕성한 흥미를 보인다."(206-8)
5장 배역에서 벗어난 의사소통
"관객이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는 무대 뒤로 가면, 팀 성원들은 대면 상황에서 관객을 대우하던 방식과는 판이하게 관객을 폄하하기 일쑤다. 서비스 업계에서 정중한 예우 대상인 고객이 무대 뒤에서는 조롱, 험담, 희화화, 욕지거리, 비난의 대상이 되곤 한다." "부재중인 관객을 가리킬 때는 존칭이 생략된 성, 그들이 눈앞에 있었다면 용납될 수 없었을 이름이나 별명, 경멸 조 발음이 이용된다. 의사들은 환자가 없을 때는 환자를 가리켜 '심장병'이나 '연쇄상구균'이라 부르고, 이발사도 자기들끼리는 고객을 '머리숱'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부재자 취급 방식'은 상호작용에 관해 일반화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사실이지만 그 이유를 지나치게 인간적 본성에서 찾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무대 뒤에서 이루어지는 관객 폄하는 팀의 사기를 진작시키는 작용을 한다. 그리고 관객이 앞에 있을 때 공연자는 관객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편안하고 순조롭게 상호작용을 계속하기 위해서도 관객을 배려할 필요가 있다."(216, 219, 222)
"공연자가 한 모든 말이 그가 조성한 상황 정의와 일치하리라는 기대와 달리, 공연자는 상호작용 도중 배역에서 벗어난 의사 표현을 많이 한다. 그것도 상황 정의에 들어맞지 않는 어떤 요소도 관객 전체가 알아차리지 못하게 하는 방법으로 말이다." "이런 비밀스러운 의사소통에 동참한 사람들은 관객이 알면 용납할 리 없는 관객과 그들 자신에 관한 의사표현에 협력함으로써 그들만의 뒷무대 유대를 확인할 수 있다. 나는 관객의 환상을 깨지 않을 만큼 정교하게 이루어지는 의사소통을 '팀 공모共謨'라고 부를 것이다." "라디오와 텔레비전 방송 제작 과정에서 조정실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공연자에게 시점 포착 따위의 연기 지시를 내리는 신호가 있다. 그래서 공식 의사소통을 통제하는 소통 체계가 작동함을 시청자가 알아차리지 못하게 한다. 기업 조직에서도 재빨리 그러나 세련되게 면담을 끝내고 싶은 고위직 임원은 비서들이 적절한 구실을 찾아내 적절한 순간에 면담을 방해하도록 훈련시킨다."(224-5)
"또 다른 형태의 공모는 공연자가 진정으로 팀의 잠정적 합의를 지킬 마음이 있어서가 아니라 단지 맡은 배역을 연기할 뿐이라는 점을 확실히 하는 의사소통이다. 관객이 문제를 제기할 때 공연자가 자신을 방어할 수 있게 최소한의 장치를 마련해두는 방법이다. 우리는 이런 의사소통에 '야유하기'라는 이름을 붙일 수도 있다. 팀의 잠정적 합의를 넘어설 만큼 관객을 찬양하는 야유도 있기는 하다. 그래도 은밀하게 관객을 폄하하는 야유가 대부분이다." "예를 들어, 학생들은 교사가 잠깐만 자기네 짓거리를 볼 수 없는 자리로 움직여도 손가락으로 입에 열십자를 그리며 거짓말을 하고 교사를 향해 혀를 내민다. 직장인들 또한 흔히 상사가 볼 수 없는 각도에서 상사를 향해 얼굴을 찌푸리거나 무언의 저주를 몸짓으로 표현하며 상사를 향해 경멸과 불복종을 연기한다. 가장 소심한 야유는 상대의 말을 경청하는 체하면서 실은 '낙서'를 한다든가 상상의 놀이 공간으로 '도피'하는 것이다."(236)
"두 팀 사이에서 흔히 벌어지는 '관계 재구성', 즉, 관계의 노선을 우회하거나 건너뛰거나 벗어나는 행위에는 비공식적 불평, 교묘한 폭로, 이중화법 등이 있다." "그중에 '이중화법double talk'은 공모에 동참하는 당사자를 대상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다른 형태의 공모와는 다르다. 공식적으로는 하급자의 능력과 권한 밖의 일이나 실제로는 상급자가 하급자에게 기댈 수밖에 없는 문제로 상호작용할 때 나타나는 이중화법이 대표적이다. 하급자는 이중화법을 사용함으로써 자기가 행동 노선의 주도권을 쥐고 있음을 공공연하게 드러내지 않고 또 상급자와의 지위 차이를 위협하지 않으면서 주도권을 쥘 수 있다. 병원과 감옥은 이중화법이 가득 찬 곳이다. 또한 하급자가 상급자보다 실무 경험이 더 오래됐을 경우에도 흔히 이중화법이 사용된다." "더 중요한 점은 가정과 일터에서 관계에 영향을 주지 않고서는 차마 공개적으로 할 수 없는 부탁, 명령, 거절을 안전하게 할 수 있는 수단으로 이중화법이 쓰인다는 사실이다."(245-6)
"관객보다 지위가 높든 낮든, 관계 재구성에 나선 공연자가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않으면 관객은, 그리고 연출자가 있는 경우에는 연출자도, 공연자에게 호감을 느끼지 못한다.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않는 사람에게는 말단 성원들도 흔히 거부감을 느낀다. 앞서 팀이 정한 작업 속도를 위반한 성원을 다룰 때 지적했던 것처럼, 한 팀 성원이 지나치게 양보하면 다른 팀 성원들이 택한 입장을 위협한다. 또 앞으로 그들이 어떤 입장을 택해야 안전할지 알아내고 통제할 수 없게 만든다. 담당 학생들에게 깊이 연민을 느끼고, 쉬는 시간에 학생들과 섞여 놀이를 하고, 뒤처지는 학생들을 가까이 하는 교사가 있으면 다른 교사들은 교사로서 적절한 인상을 유지하려는 자신들의 노력이 위협받는다고 느낄 것이다. 실제로, 특정 공연자들이 적절한 선을 지키지 않고 너무 친밀하거나 방자하게 또는 적대적으로 굴면, 그런 행동이 지위가 낮은 팀, 높은 팀, 규칙 위반자에게 두루 영향을 미치는 반사작용이 악순환된다."(252)
6장 인상 관리의 기술
"팀이 택한 노선을 유지하려면, 팀 성원들은 분명히 일종의 도덕적 의무를 수락한 것처럼 행동해야 한다. 개인적 이익 때문이든 소신 때문이든 재량권이 없기 때문이든, 팀 성원들은 공연을 하지 않는 틈새 시간에도 팀의 비밀을 누설해서는 안 된다. 집안의 어른들은 남의 험담을 하거나 자기 허물을 인정할 때 그걸 들은 아이들이 그 비밀을 무심코 누설하는 일이 없도록 아이들을 밖으로 내보낸다. 아이들이 분별력이 생길 나이에 이르러서야 부모들은 아이들이 방에 들어와도 목소리를 낮추지 않는다." "덧붙여 팀 성원들은 공적인 무대 위를 자신의 개인 공연에 이용해서는 안 된다. 또한 팀 성원들은 공연을 팀 고발의 기회로 삼지 말아야 한다." "팀 성원의 불충으로부터 팀을 방어할 수 있는 한 가지 핵심 기법은 팀의 유대를 높이는 한편, 관객이 비인간으로 보일 만큼 관객의 뒷무대 이미지를 창조하는 것이다. 그러면 정서적·도덕적으로 면역이 된 팀 성원들은 관객을 쉽게 속여 넘길 수 있다."(268-70)
"팀 공연을 유지하기 위한 결정적 조건은, 팀 성원 각자가 연극적으로 단련이 되어 맡은 배역을 잘 소화하는 것이다. 단련된 공연자는 '자기 통제력'이 있는 사람이다. 공연자는 자기의 연기에 깊이 몰입하여 계산되지 않은 자연스러운 연기를 보여주어야 하지만, 또 우발적 상황에 대처할 수 있을 만큼은 자기 연기에 대해 감정적 거리를 둘 수도 있어야 한다. 공연자는 자기가 하고 있는 연기에 지적·정서적으로 몰입하는 모습을 보여야 하지만 실제로 지나치게 몰입해서 공연을 망치는 일이 없도록 절제도 해야 한다." "더불어 남들에게 들키지 않고 긴장을 풀 수 있을 때가 언제인지, 냉혹한 사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도 시험에 들지 않고 공연자들이 최대한 위엄을 갖추고 완벽하게 배역을 연기할 수 있을 때가 언제인지 따위를 분별하는 연극적 용의주도함이 필요하다. 다시 말해, 공연자들에게는 팀을 위해 불의의 상황에 미리 대비하고 남아 있는 기회를 활용할 줄 아는 분별력과 주의력이 필요하다."(272-5)
"나는 공연자의 방어적 인상 관리 기법이, 관객과 외부인이 공연자를 도와주려고 발휘하는 요령 및 보호 성향과 짝을 이룬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무대 위와 무대 뒤 영역에 대한 접근 통제는 공연자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도 이루어진다. 사람들은 초대받지 않은 영역에는 자발적으로 가까이 가지 않는다. 그리고 통제된 영역에 들어갈 수밖에 없는 외부인은 그곳에 있는 이들에게 메시지를 전하거나 노크나 기침을 하여 미리 경고한다." "관객으로서의 자질에 관한 정교한 예법이 있다. 공연에 적절한 정도의 관심과 흥미를 보일 것, 지나친 이의 제기나 방해 또는 주목을 강요하는 따위의 행동은 억제하는 자제력을 발휘할 것, 실례가 될 언행을 삼갈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소동을 피하려는 마음을 가질 것 등이다." "공연자가 조성된 인상과 상반된 감추어진 진상을 내비치는 실수를 하면, 관객은 그 실수를 '외면'하거나 공연자가 내놓는 변명을 선뜻 받아들이기도 한다."(286-9)
"공연자와 관객이 그 모든 인상 관리 기법을 이용하더라도 돌발 사건이 일어나고 관객이 공연의 뒷면을 우연히 목격하는 경우가 있다는 건 누구나 다 안다." "개인은 관객이 자기에게 나쁜 인상을 가질 수 있음을 알면, 공연의 맥락상 선의로 솔직하게 행동했어도 수치심을 느낀다. 그렇게 부당한 수치심이 들면, 어이 또 자기의 수치심이 들킬 것 같은 느낌이 들게 된다. 들켰다는 느낌이 들면 또 그런 자기 모습이 관객의 잘못된 결론을 확인시켜주는 꼴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 그는 실제로 떳떳하지 못할 때처럼 방어를 한 나머지 스스로의 처지를 더 위태롭게 만들 수도 있다. 우리는 모두 이런 식으로 부질없이 남들이 상상할 것 같은 우리 모습을 상상하기 때문에 최악의 인간이 될 수 있다." "누구나 겪는 자아 연출의 문제가 있다. 벌어질 일들에 대한 우려, 당연히 느낄 수 있는 수치심과 근거 없는 수치심, 자신과 관객에 대한 양가감정, 이 모든 문제는 인간이 직면하는 상황의 연극적 구성 요소들인 것이다."(293-6)
7장 결론
"남들 앞에서 개인은 알게 모르게 상황에 대한 정의를 투영하는데, 그중 중요한 부분이 개인의 자아 관념이다. 개인이 조성한 인상과 표현상 모순되는 사건이 일어나면 사회 실재의 세 층위에 의미심장한 결과가 동시에 나타난다. 첫째, 두 팀 사이의 대화로 규정한 사회적 상호작용은 어색하고 혼란스러운 상태로 중단될 수 있다. 그러면 상황은 정의되지 못하고 참여자들은 기존의 입장도 방어할 수 없어 행동의 방향을 잃는다. 다시 말해, 순조로운 사회적 상호작용으로 창조되고 유지되던 작은 사회체계가 와해되는 것이다." "둘째, 관객은 개인이 공연 중에 그가 속한 사회 조직·팀·동료 집단의 믿음직한 대표자로서 연출한 자아를 그 개인의 자아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또한 관객은 개인의 특정 공연을 그의 배역 연기 능력의 증거로, 심지어 어떤 배역이라도 연기할 수 있는 능력의 증거로 받아들인다. 따라서 매 공연이 사회 단위의 정당성을 새로이 검증하는 계기이자 개인의 항구적 평판이 걸려 있는 계기가 된다."(303-4)
"마지막으로, 우리는 종종 개인이 특정 배역·조직·집단을 자신과 동일시할 정도로 깊이 몰입하여, 자신은 사회적 상호작용을 혼란에 빠뜨리거나 상호작용의 토대인 사회 단위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을 사람이라는 자아 관념을 갖고 있음을 발견한다. 그런데 상호작용에 혼란이 생기면 개인 인성의 토대인 자아 관념이 무너질 수 있다. 이는 개인 인성 수준에서 나타나는 영향이다. 그러니까 상호작용의 혼란은 (개인의) 인성, (사회적) 상호작용, 사회 구조라는 세 추상적 층위에 모두 영향을 미친다. 상호작용의 종류에 따라 혼란이 생길 가능성은 매우 다양하고, 혼란이 초래하는 결과의 중요성도 다 다르다. 그러나 참여자들이 조금도 당황치 않거나 모욕감을 깊이 느낄 계기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 상호작용은 없는 것 같다. 삶은 어떨지 모르지만, 상호작용은 도박과 아주 비슷하다. 사람들이 혼란을 피하려 하고 피할 수 없어서 수습하려 한다면, 그 노력의 결과는 세 층위에서 동시에 일어난다."(305)
"모든 사회적 상호작용의 바탕에는 근본적 변증법이 있는 듯하다. 남들이 있는 자리에 들어선 사람은 그 상황에 대해 여러 가지 사실을 알고 싶어 한다. 상황의 사실적 면모를 파악하려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사회적 배경을 알아야 한다. 또 상호작용을 하는 동안 다른 사람들의 행동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그리고 그들이 스스로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 내밀한 속마음도 알 필요가 있다. 이 정도로 완벽하게 정보를 획득하기는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개인은 신호·시험·암시·몸짓·지위 상징 같은 예측 수단을 활용하곤 한다. 요컨대, 개인은 자신이 관심을 갖고 있는 현실을 즉각 파악할 수 없으므로 겉모습에 기댄다. 파악이 불가능한 현실에 관심이 많은 사람일수록 역설적으로 겉모습에 주의를 집중하는 셈이다. 개인은 자리를 함께한 사람들이 보여주는 순간적인 인상을 토대로 그들의 과거와 미래를 짐작해 그들을 대하는 경향이 있다. 의사소통 행위가 도덕적 행위로 바뀌는 것이다."(312)
"사람들이 보여주는 인상은 묵시적 주장과 약속으로 간주되고 묵시적 주장과 약속은 도덕적 성격을 띤다. 사람들은 공연자로서 역량을 발휘해 자신의 됨됨이와 자신이 이룬 성과가 보편적 평가 기준에 부합한다는 인상을 유지하려 애쓴다. 기준은 아주 많고 널리 퍼져 있으므로, 사람들은 공연자일 때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도덕적인 세계에서 살고 있는 셈이다. 공연자로서 개인은, 평가 기준의 실현이라는 도덕적 문제에 관심이 있는 게 아니다. 평가 기준에 부합한다는 인상을 설득력 있게 만들어내는 비도덕적 문제가 관심사인 것이다. 우리의 행동은 대체로 도덕적 문제를 다루지만, 공연자로서 도덕적 문제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 도덕적이지 않다. 우리는 공연자로서 도덕성을 파는 장사꾼인 셈이다. 달리 표현해보자. 늘 확고한 도덕적 기준을 준수하고 사회화가 잘된 인물이어야 한다는 의무, 그로 인해 얻을 수 있는 이득, 이것이 바로 인간을 연극 무대에 선 공연자로 만든다."(3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