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혁명 - 프랑스 혁명 이전의 금서 베스트 셀러 역사도서관 1
로버트 단턴 지음, 주명철 옮김 / 알마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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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머리에


"18세기 프랑스 독자의 눈으로 볼 때 불법 문학은 실질적으로 근대문학 전체와 다를 바 없었다. 당시는 루이 14세의 절대주의를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국가기관이 인쇄물을 통제하려고 노력하던 때였다. 그러나 그것을 뿌리 뽑는 책임을 맡은 관리였던 말제르브는 그 일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참으로 그는 그 일을 하려 들지 않았다." "1750년까지 서적감독관들은 합법적인 출판물을 아주 미묘한 차이에 따라 여러 범주로 구분했다. 그들은 합법성의 영역을 특허, 묵인, 단순 허가, 경찰 허가, 단순 관용의 범주로 넓혔다. 이렇게 해서 합법성은 거의 알아차릴 수 없을 단계를 몇 차례 넘어 비합법성과 맞닿게 되었다. 한편 자유사상의 문학이 앙시앵 레짐의 정통 가치 체계의 밑동을 자르면서 자라났다. 체제수호자들은 탄압을 강화하면서 맞섰다. 이들이 탄압한 책들은 법의 울타리 밖 먼 바깥에 있는 책, 말하자면 순수하게 비합법적인 책이었다. 내가 연구하고자 제안하는 것이 바로 그러한 책이다."(36-7)


1부 금지된 문학과 문학시장


"앙시앵 레짐의 말기는 일부 역사가가 상상하는 세상과 달랐다. 그것은 즐겁고 관대한 자유방임식의 세상이 아니었으며, 게다가 바스티유도 별 셋짜리 호텔이 아니었다. 비록 바스티유는 혁명 전 선전가들이 생각해낸 것처럼 고문을 자행하던 곳으로 혼동되어서는 안 되지만, 문학과 관련해서 그곳에 들어간 수많은 사람의 삶을 망쳐놓았다. 그러나 문학을 창작하지는 않았다 할지라도 문학을 존재하게 만든 전문인이라 할 출판인과 서적상이 저자보다 더 많이 들어갔다. 이러한 사람들은 일상의 사업에서 날마다 합법과 불법을 구별해야 했다." "금서를 구분하는 문제는 무엇보다도 언어의 문제로 보인다. 경찰은 바스티유에 수감된 랭스의 서적상 위베르 카쟁을 심문하면서 그의 편지에 종종 나타나는 '철학적 상품'이라는 알쏭달쏭한 말을 설명해달라고 요구했다. 모든 종류의 금서와 의심스러운 문서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체포된 카쟁은 그 말이 '업계에서 금지된 것을 표현하기 위한 관습상의 표현'이라고 규정했다."(49-50)


"18세기 프랑스 인쇄물의 세계는 너무 복잡하기 때문에 '계몽주의'라든가 '혁명'이라든가 하는 범주로 분류하기 어렵다. 그러나 1789년 이전에 독서 대중에게 문학을 전달하던 개인들은 자신들이 취급하던 책에서 진짜 위험한 요소를 구별하기 위해 아주 쓸 만한 범주를 고안해냈다." "우리는 《사회계약론》을 정치이론으로, 그리고 《동 부그르 이야기》를 음란서적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18세기의 책세상 사람들은 두 가지 책을 한데 묶어 '철학책'으로 생각했다. 만일 우리가 그들의 자료를 그들 방식대로 본다면, 음란서적과 철학 사이에 자명한 것으로 보이는 구분은 사라지기 시작할 것이다." "1789년의 정신을 구현한 미라보가 10년 전에는 가장 저급한 외설서와 가장 대담한 정치논문을 썼다는 사실은 더이상 그다지 어리둥절한 일이라고 할 수 없다. 자유와 난봉은 함께 연관된 것으로 보이고, 그래서 우리는 은밀한 도서목록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책들이 모두 닮았음을 볼 수 있다."(69-70)


"앙시앙 레짐의 마지막 30년 동안 평범한 독자들은 처음으로 무신론을 책의 형태로 접할 수 있었다. 이러한 책들은 권두화frontispiece·표제지title page·머리말·부록·주 같은 인습적 예절의 표시를 모두 갖추고 있었다. 정통 신학은 대체로 들고 읽기 어려운 2절판의 큰 책으로 여전히 외풍이 센 독서실의 선반에 쇠사슬로 묶어놓는 경우가 있었지만, 무신론은 주머니 속에 넣고 다닐 수 있도록 작은 판본에 실려 사사로이 읽을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정통 교리의 냄새를 풍기도록 편집했지만('철학'으로 알려진 형태를 즐겨 채택했지만), 판본의 크기 때문에 마치 이성의 영역에 호소할 목적을 띤 것처럼 보였다. 독자는 이성의 영역에서 고요한 양심에 비추어 찬반의 태도를 심사숙고할 수 있었다. 계몽사상가들의 전집이나 인기 있는 작품을 편찬한 책들도 대부분 '호화로운 인쇄'를 피했다." "자유사상은 공짜가 아니었지만, 1770년경 중류계급은 물론 장인과 소매상의 상위층 사람들이 구매할 수 있는 범위 속에 들어왔다."(133-5)


"논문들이 정통 교리에 전면적인 공격을 일선에서 퍼붓고 있는 동안, 그보다 규모가 작고 덜 진지한 작품들은 교회와 국가가 존중하던 것이면 무엇이건 저격했다." "'순수 포르노그래피'는 시대착오인 동시에 모순 어법으로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수많은 책에 나오는 수도사와 수녀는 성적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려는 주요 목적에 따라다니는 인물처럼 보인다." "이러한 범주의 전체적인 특징을 보여주는 경향이 있다면, 그것은 엿보기 취미voyeurism였다. 난봉꾼의 이야기에 나오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열쇠구멍을 통해서, 또는 장막이나 나무 뒤에서 서로 관찰했다. 그리고 독자는 그들의 어깨 너머로 그 인물들의 행위를 지켜보았다. 삽화는 종종 화자가 은밀히 지켜보는 앞에서 결합하는 짝들을 보여주었다." "삽화와 본문은 상승작용을 하여, 모든 몸짓에 연극적인 기운을 불어 넣으면서 거울 속의 거울 같은 효과를 증대시켰다. '철학책'에 나오는 성은 철학적인 성격을 띠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135-7)


"랭게의 《바스티유 회고록》과 미라보의 《봉인장과 국립감옥에 대하여》는 모두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는 국가가 재판 절차도 없이 감옥에 처넣은 저자가 직접 쓴 논평으로서 쌍벽을 이뤘다." "독자는 역겨운 음식, 가학적인 옥사장, 벌레가 우글거리는 깔개, 지하감방을 둘러보면서, 거기 아무 죄도 없이 갇힌 희생자가 모든 인간세상과 단절되고 합법적인 재판을 받을 권리마저 빼앗긴 채 절망에 빠져 신음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들은 독자에게 전율과 감동을 두 배로 느끼게 만들 수 있을 만큼 진실한 어조로 자신들이 겪은 고통을 재현했다. 그들은 제 손으로 가면을 뜯어버리고, 장막을 젖히고, 허울을 찢어버리고, 왕의 비밀조직을 폭로했다. 그래서 그들도 또한 엿보기 취미를 다뤘지만, 정치적 수단으로 이용했다. 그들은 경찰국가의 국내 공작을 까발렸고, 그렇게 하는 가운데 프랑스는 지하감옥, 쇠사슬, 봉인장(구속명령서)으로 다스리는 나라라는 신화를 널리 퍼뜨렸다."(140-1)


"똑같은 주제가 정치적 비방문(libelles, 사사로운 중상비방보다는 정치적인 비방의 뜻을 지니고 있다)이라는 하위범주에 나타났다. 그러나 중상비방문 작가들은 다른 영역에서 영향력을 발휘했다. 그들은 전제주의의 희생자들에 대해 통속극 같은 논평을 하는 대신, 전제주의의 고위직 봉사자, 그리고 권력자에 대해 공작을 하는 사람들의 생활에서 비밀을 파헤쳤다." "그들은 자신들이 적시적소에 나타날 수 있는 정확한 능력을 가졌거나, 보이지 않는 제3의 화자로서전지전능함을 지닌 것 마냥 장막 뒤나 창문 너머로 들여다보면서 엿들을 수 있는 대화도 실었다. 그러므로 중상비방문도 엿보기 취미를 이용했다." "중상비방문 작가들은 그러한 환상을 부추기기 위해 차분하게 머리말을 썼다. 그들은 남들이 진실성을 의심할 여지가 없는 '역사가'나 회고록의 '편집인' 행세를 했다. 그들은 증거의 규칙을 가장 엄격하게 지키고 있다고 약속했다. 그 결과는 당대의 역사와 전기로 위장한 저널리즘의 일종으로 나타났다."(142-3)


"그러나 우리는 '철학책'에 담긴 선동적이고 정치적인 전갈message을 앙시앵 레짐을 뒤집어엎으려는 의도의 증거로 받아들여서는 안 될 것이다. 1789년을 되돌아보면서, 군주정이 인쇄된 말의 힘에 의해 마구 두드려 맞아 불구가 되었다고 쉽게 상상해버리지 말아야 할 것이다. 금서는 그 체제의 뿌리를 흔들어 정통성을 허물어갔을지 몰라도, 그것을 쓰러뜨릴 목적에서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대부분의 금서는 단지 문학시장의 불법적 부분에 대한 수요에 맞추기 위한 것이었다. 그것은 흥밋거리였을 뿐만 아니라 정보에 대한 수요, 사생활만이 아니라 당대의 역사에 대한 호기심, 추상적인 사상의 금지된 열매만이 아니라 새 소식에 대한 굶주림이었다. 그 체제는 이러한 주제를 모두 법률의 바깥에 놓으면서 그것을 취급하는 방식에서 기대할 수 있는 자제력마저 몰아냈다. 철학을 포르노그래피와 같은 구석으로 몰아내면서, 그 체제는 형이상학에서 정치학까지 모든 전선에서 두루 공격을 받았다."(149)


2부 주요 작품


▶ 철학적 포르노그래피


"16세기 초기의 아레티노는 성교를 찬미하고 육욕의 언어를 인쇄함으로써 오비디우스를 능가했다. 그의 《화려한 소네트》와 《논리적 사고》는 표준을 세우고 주제를 확립했다. 16가지 고전적인 '체위', 외설적인 말을 자극적으로 사용하기, 본문과 그림의 상호작용, 여성이 이야기하게 하고 대화체 사용하기, 논다니집과 수녀원을 돌면서 엿보기, 이야기 선을 구성하기 위해 질탕한 난교 파티를 줄줄이 엮어내는 방식으로 아레티노는 포르노그래피의 아버지라는 명성을 얻었다. 18세기는 그 나름의 아레티노를 만들어냈다. 18세기의 베스트셀러 가운데 하나인 《현대의 아레티노》나 그 밖의 작품에서는 아레티노를 기리고 있다. 18세기의 아레티노는 2세기 전에 살다 간 선배처럼 비방과 외설스러움을 조화시켰다. 그리고 그는 무엇보다도 교회의 가르침을 거부했다." "이 범주의 문학은 1780년대 미라노의 포르노그래피성 작품이 나오면서 다시 한 번 기운을 회복했다. 그리고 18세기는 사드 후작과 함께 끝났다."(155-7)


"18세기 말 《계몽사상가 테레즈》는 아직까지 포르노그래피라는 딱지가 붙지는 않았지만, 앙시앵 레짐 시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던 품위의 경계 밖으로 성애를 멀리 가져간 문학 가운데 최고의 작품으로 우뚝 섰다. 당시 사람들은 테레즈가 성애와는 다른 것을 상징한다고 보았다. 테레즈는 계몽주의를 상징했던 것이다. 테레즈는 계몽사상가philosophe였다. 그의 칭호는 계몽주의 시대 초기에 나온 주요 작품에서도 메아리치고 있었다." "이것은 특별한 시점이었다. 《계몽사상가 테레즈》가 발간된 1748년은 성욕을 자극하는 문학이 한꺼번에 분출하는 시대에 속하는 동시에 지적 지형도가 바뀌는 시대에 속하기도 했다. 사실 두 방향의 폭발을 일으킨 원동력을 하나였다. 그것은 자유로운 사고와 자유로운 삶을 결합한 자유사상libertinism이었다. 이 사상은 성적 규범만이 아니라 종교적 교리에도 도전했다. 디드로 같은 자유로운 사상가들은 양쪽 전선에서 싸웠다."(160-1)


"테레즈의 성 이야기는 교양소설Bildungsroman, 다시 말해서 교육에 관한 이야기가 된다. 그리고 그것이 쾌락의 교육인 만큼, 철학 하기와 쾌락 찾기는 결국 철학적 향락주의로 집중될 때까지 이야기 속을 함께 달린다. 이 철학을 면밀히 연구하면 수많은 원전─데카르트, 말브랑슈, 스피노자, 홉스, 그리고 18세기 초반에 원고 상태로 나돌던 자유주의 문학 전반─에서 나온 요소가 뒤섞여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가장 강력한 영향은 아마 루크레티우스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테레즈와 그의 선생들은 계속해서 현실을 물질의 작은 조각으로 축소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것이 감각에 작용하여 의지를 결정한다고 보았다. 그렇다면 궁극적으로 그들은 인간이란 자기 힘으로 통제할 수 없는 쾌락의 원리에 따라 움직이는 기계라고 묘사한다." "기계의 은유는 17세기의 기계론적 철학의 유산으로서 후대의 자유사상가들에게 알맞은 세계관을 구축하는 방법을 제공했다."(172-7)


"《계몽사상가 테레즈》는 철학으로서 기독교를 공격하고 사회정책으로서 그것을 옹호하기 위해 자유주의 사상가들이 공유하는 논점을 끌어들였다. 볼테르와 마찬가지로 원장신부 T.도 반기독교적 진리가 소수정예 집단에만 한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속된 사람들이 그것에 대해 듣기라도 한다면 그들은 한꺼번에 도망칠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자기 욕망을 채우려고 달려든다면 그 누구의 재산이나 신체도 안전하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모든 종교는 거짓인 동시에, 모든 종교가 필요하다. 그러나 이러한 명제들은 역설로 포장되어 나온다. 원장신부 T.는 비밀로 봉인해 마담 C.에게 전해주지만, 누구나 돈 주고 살 수 있는 책을 통해 독자에게 전달된다." "고상하지 않은 독자들도 책을 읽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귀가 있는 사람은 1776년 미국의 독립선언서가 세계에 던진 전언의 후렴을 주워들을 수 있었다. 그것은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권리'였다."(185-7)


"《계몽사상가 테레즈》는 일종의 사고실험이었다. 그것은 결혼제도와 어머니의 지위를 상상의 차원에서 가늠하고, 향락주의적 계산에 종속시켰으며, 부족한 제도임을 알았다. 역사가들이 과거의 제도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가늠할 때, 그들은 좀처럼 공상의 여지를 허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18세기 프랑스인은 종종 수수께끼 놀이를 했다. 그들은 물었다. 무신론자의 사회는 존재할 수 있었을까? 그리고 바람기 있는 여성이 사회는? 《계몽사상가 테레즈》는 그들에게 자유로이 사랑하고 자유롭게 생각하는 여성 계몽사상가라는 단일한 공상 속에 두 가지 위험을 한데 묶어서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그것은 문학적 상상력이 이룩한 빼어난 공훈이었다. 그것은 독자를 법의 밖으로 끌어가 유동적인 지대에 놓아주었다. 그리하여 독자는 거기에서 다른 사회질서를 생각하면서 놀 수 있었다. 몽테스키외와 루소는 각각 《페르시아인의 편지》와 《사회계약론》에서 같은 일을 했다."(191-2)


▶ 이상향의 공상


"루이 세바스티앵 메르시에가 쓴 《2440년》은 겉으로 보기에 완전히 다른 세계를 묘사한다. 그것은 메르시에가 먼 미래에 자리매김한 공상이다." "미래 공상과 립 밴 윙클 효과에 익숙한 오늘날의 독자는 이 작품을 날렵하지 못하다고 여길지 모른다. 그러나 18세기 독자는 몹시 매혹적인 작품으로 보았다. 그들은 결코 공상과학소설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미래의 이상향도 꿈꾸지 못했다. 플라톤, 토머스 모어, 프랜시스 베이컨, 그리고 그 밖의 모든 이상향 건설가들은 공간적으로 아주 멀리 떨어져 있고 현실적으로 도저히 불가능한 여행이나 엉뚱한 조난사고로 현실 세계와 동떨어진 사회를 상상했다. 그러한 세계는 도달할 수 없는 곳처럼 보였다. 그러나 메르시에는 자신이 창조한 세계를 필연적인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그는 그것을 이미 시작된 역사적 과정의 결과로 제시하고, 파리에 자리매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2440년》은 독자가 미래의 진지한 안내서로 읽어주기를 요구했다."(197-8)


"우리는 미래를 상상할 때 과학기술의 경이로운 것들로 채울 것이다. 그러나 메르시에의 미래에는 광선총도, 우주 기계도, 시간을 왜곡하는 텔레비전도, 어떤 형태로든 이 은하계에서 저 은하계로 오고 가는 장치도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그의 이상향은 도덕적 차원으로 이루어졌다. 그의 수사법은 도덕적 분노를 불러일으키려는 의도를 갖고 있다. 이처럼 그는 다른 소설가들이 독자에게 강한 정서를 불러일으키려는 목적으로 즐겨 쓰던 장치를 대부분 이용하지 않았다. 《2440년》은 단지 독자를 미래의 파리로 데려가기 때문에, 그의 정서가 개입할 수 있는 줄거리나 오늘날에는 생각할 수 없을 책략을 사용하고 있다. 이국적인 묘사로써 독자의 눈길을 끈 다음 각주를 활용하여 교화하는 방법이다. 《2440년》에는 종종 텍스트 자체를 압도할 정도로 방대한 주를 달아놓았다. 독자는 각쪽의 위에 있는 본문과 아래의 주를 오가면서 읽어야 한다. 텍스트는 2440년에, 주는 18세기에 각각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202-3)


"각주는 메르시에가 꿈꾸는 미래의 주요 경향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사실 메르시에는 단지 자기가 사는 시대의 프랑스에서 모든 폐단을 몰아낸 상태만을 상상했던 것이다." "메르시에의 이상향에 루소주의가 반영되고 있기는 해도 여전히 앙시앵 레짐 사회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래서 그의 꿈은 계속 모순 속을 헤맨다. 그는 가난과 귀족을 없애는가 하면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는 부유한 귀족을 묘사하기도 한다. 궁정이 사라졌다가, 다른 곳에서는 왕 주위에 아첨꾼들이 몰려 있는 모습이 나타나기도 한다. 작품의 첫머리에서 왕은 오직 상징적인 권력만 행사한다. 그러나 끝부분에서 왕은 사회 전체를 위해 법률을 제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메르시에는 일관성 없는 내용에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공상에 이끌려다닌다." "메르시에의 작품은 급진적인 수사법을 사용하고 있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군주제를 옹호하는 감정으로 고동치고 있다. 그것은 물론 루이 14세풍의 변종이 아니라, 평등주의를 지향하는 군주제이다."(204-8)


"메르시에의 상상은 앙시앵 레짐 시대의 정신자세의 범위를 넘어서지는 못했다. 당시의 정신자세는, 고등법원의 반란과 내란이라는 관념은 수용할 수 있어도 체제 자체의 변화를 생각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도 메르시에는 특히 종교와 정부라는 두 가지 민감한 영역에서 사회정치적 질서의 근본원리에 도전했다. 그는 단순히 가톨릭 교회의 가장 눈에 띄는 제도─수도원, 십일조, 고위성직, 교황제─를 공격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그는 교회의 정신적 정통성에도 이의를 제기했다. 2440년의 이신론적 사제는 이신론 자체나 적어도 볼테르의 형식적인 이신론을 넘어서는 종교적 감정에 호소한다." "루소와 마찬가지로 메르시에도 정치와 종교를 뗄 수 없는 것으로 본다. 그래서 시민의 축제는 하느님과 조국에게 시민이 더욱 헌신하도록 만들어준다." "학교와 성전은 젊은 남성의 교육을 완성해준다. 따라서 그들이 어른이 될 때, 개인적인 욕망이 일반의지와 조화를 이룬다. 메르시에는 루소의 생각을 정확히 따르고 있다."(211-2)


▶ 정치적 욕설


"중상비방문 작가들은 거리낌없이 아무 책에서나 자료를 가져다 이용하기 때문에 그 내용이 어디서 처음 나왔는지, 누가 처음 썼는지 출처를 밝히기 어려울 정도다. 표절이라는 오늘날의 개념은 손으로 쓴 새 소식이 담긴 쪽지를 소매 안에 넣고 다니다가 카페에서 서로 교환하고, 신문에 옮겨넣고, 다시 책에 끼워넣던 사람들에게는 통하지 않는 것이다. 고정된 내용이나 심지어 저자에 대해 말하는 것도 시대착오라 할 수 있다. 중상비방은 집단행위였으며, 중상비방문은 소문·추문·농담·노래·만화·포스터처럼 근대의 파리 시내를 휩쓸고 다니던 것들 사이에 끼어서 떠다니는 인쇄물에 속했기 때문이다. 오직 아주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는 말과 그림만이 책 속에 낄 수 있었고, 오직 소수의 책만이 도서관에 보존되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서적의 지하판매망에서 가장 널리 유통되던 수많은 작품을 포함한다. 《뒤바리 백작부인에 관한 일화》는 혁명 직전에 가장 잘 팔리던 베스트셀러로서 이러한 문학의 모든 작품을 앞질렀다."(222-3)


"18세기 프랑스의 정치사를 뒤돌아보는 역사가들은 대개 1769~1774년의 기간을 1787년 혁명이 시작되기 전의 가장 큰 정치적 위기로 본다. 그들은 이 위기를 다양하게 해석하지만, 위기의 구성요소에 대해서는 의견이 일치한다. 슈아죌 공작이 지배하던 정부는 삼중고에 시달리고 있었다. 먼저 외교 문제를 보면, 프랑스는 7년전쟁(1756~1763)으로 모욕을 받은 결과 세력균형체제에서 차지하던 지위에 심한 타격을 받았다. 영국이 제국을 해외로 널리 확장하는 데 비해 프랑스는 오스트리아와 에스파냐와 아무런 효과도 없는 동맹관계를 맺은 채 거기에 구속받고 있었다. 슈아죌의 외교적 업적으로 간주되는 부르봉 왕가협정 때문에 프랑스는 에스파냐가 영국에 대항해 포클랜드제도의 영유권을 주장하는 데 말려들었지만, 세계적인 규모의 전쟁을 다시 한 번 치를 능력은 없었다. 더욱이 동맹국인 폴란드를 다른 동유럽 열강들이 분할하려 드는 것을 보면서도 그 나라를 지켜주기 위한 조치를 취할 능력도 없었다."(234-5)


"외교 문제에서 프랑스가 보여준 약점은 국내의 재정 문제를 정돈하지 못했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이것이 정부가 안고 있는 두 번째 큰 문제였다. 취약한 징세 기반─모든 종류의 면세특권과 불평등 때문이다─과 낡은 징세제도 때문에 국가를 무력하게 만드는 적자를 떨쳐버리지 못했다. 국가는 수입을 늘릴 수 없었다. 고등법원이 세금을 신설하려는 왕령은 등기부에 등록하지 않으면서 필사적으로 저항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고등법원의 소요사태가 불안정을 낳는 세 번째 원인이었다." "물론 우리는 당시 프랑스인이 1769~1774년의 대위기를 얼마나 느끼고 있었는지 제대로 알지 못한다. 그 때문에 《뒤바리 백작부인에 관한 일화》를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이 작품은 당시 사건들에 대해 당대인이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지 보여주기 때문이다." "《일화》의 화자는 베르사유와 파리 사이를 흘러다니던 정치적 험담거리를 모아, 그 자료를 체로 치고 온갖 '일화'를 한데 짜맞추어 루이 15세 말년의 전체 역사를 구축했다."(235-7)


"우리의 저자는 새 소식을 요구하는 독자를 만족시키기 위해 글을 썼다. 그는 종종 '대중'과 '새 소식' 같은 낱말을 정확히 규정하지 않은 채 사용했다. 대중을 말할 때 그는 두 종류의 청중을 넌지시 구별했다. 왕국에 흩어져 있는 '소박한 시민들'의 일반 독서 대중과 그들보다 더 세련된 파리의 대중, 그는 자기 책을 일차적으로 사교계의 생활에 대해 잘 모르는 전자를 대상으로 썼다. 그래서 그는 도시의 이야기에 양념 노릇을 하는 요소─말장난, 농담, 숨은 뜻 따위─를 해석하고 설명해주면서 그들의 통역 노릇을 했다. 그가 파리의 대중에 대해서 말할 때, 그는 공원과 카페에 옹기종기 모여 그날의 소식을 토론하는 사람들을 염두에 두었다. 이 사람들은 궁정과 대조되는 도시에 속했다. 궁정la cour과 도시la ville는 각자 나름대로 정보의 유통경로를 발달시켰다. 그러나 두 체계는 서로 교차했으며, 둘은 함께 왕국에 유통되는 모든 소식을 실제로 생산해냈다."(245)


"내 생각에 《일화》는 단순히 일화를 전하는 작품이 아니라 혁명적인 작품이었다. 그러나 '혁명적'이라고 해서 프랑스혁명 같은 것을 기대했거나 조장했다는 뜻은 아니다. 이 작품은 부르봉 군주정의 정통성을 바로 그 기초부터 공격했다는 뜻이다. 왕들의 성생활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은 그 자체로 선동적이라 할 수 없다. 프랑수아 1세, 앙리 4세, 루이 14세의 애첩들은 마치 전쟁의 승리처럼 정복이라는 관점에서 축하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뒤바리는 창녀였다. 그래서 그는 왕의 위업을 보여주는 대신 중상비방문에서 왕의 무능력의 상징으로 제시되었으며, 한층 더 나쁘게는 왕좌의 품위를 하락시키는 상징이 되었다." "만일 우리가 왕의 몸이 18세기 다수의 프랑스인에게는 여전히 신성했다는 사실을 잊고 있다면, 이러한 해석은 엉뚱해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파리인들이 거리에서 루이 15세의 성불구에 대한 노래를 불렀을 때, 그들은 왕의 정통성을 보장하는 종교적 뿌리에 타격을 가했던 것이다."(255-8)


3부 책이 혁명을 일으키는가?


"20세기 초 다니엘 모르네의 손에서 비롯한 지성사의 하향식 전파라는 관념은 앙시앵 레짐의 문화생활을 놀랍도록 풍부하게 그리는 결과를 낳았다. 그의 《프랑스혁명의 지적 기원》(1933)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아날학파 역사가들이 내놓은 대부분의 연구의 청사진 구실을 했다. 그러나 모르네는 이 자료를 좁은 틀 속에 넣고 짰다. 모든 것이 똑같은 유형 속에 들어가, 계몽주의에서 혁명으로 넘어가는 일직선 운동을 보여주었다. 결국 모르네의 주장은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1789년에서 시작해 볼테르와 18세기 초 자유사상가들의 머릿 속에 있는 출발점까지 거슬러 올라가면서 결과에서 원인을 추론해냈다. 모르네는 문화적 매개자와 사회적 기관들을 강조했지만, 모르네 식의 지성사는 궁극적으로 공격받을 형식으로 환원될 수 있었다. 결국 계몽주의는 위대한 사람의 위대한 책으로 추진되었고, 혁명은 계몽주의로부터 영감을 받았다. 그리하여 혁명은 '볼테르의 잘못, 루소의 잘못'으로 남아 있다."(266-7)


"그러나 책의 전파가 여론에 어떻게 영향을 끼치고, 여론은 정치적 행동을 어떻게 굴절시키는지 이해하는 문제가 남는다. 키스 베이커와 모나 오주프는 계몽사상가들의 작품에 표현된 여론에 대한 관념을 다룬 논문에서 사물 그 자체보다는 관념을 연구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전제하는 것처럼 보인다. 확실히 역사가들은 철학자들보다는 사물 그 자체에 잘 접근하지 못한다. 사건들은 의미에 싸여서 온다. 그래서 우리는 행동을 해석과 분류할 수 없고, 역사를 순수한 사건으로 발가벗길 수 없다. 그렇다고 사건이 전적으로 철학적 담론을 통해서만 추론할 수 있다거나, 보통사람이 생활 속에서 의미를 찾기 위해 철학자에게 의존해야 된다는 말은 아니다. 의미를 만드는 일은 책뿐만 아니라 길거리 수준에서도 일어난다. 여론은 시장과 선술집에서도 형성된다. 대중이 사건의 의미를 어떻게 만들었는지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철학자들의 작품을 넘어서 질문을 확장시키고 일상생활의 의사소통 얼개까지 들어가야 한다."(277)


"우리는 일반적으로 어떻게 사물의 의미를 파악하는가? 내 생각에, 우리 영혼의 깊은 곳에서 통찰력을 끌어내 환경에 투영하는 방식은 아니다. 차라리 틀 속에 인식을 맞추는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그 틀을 문화에서 얻는다. 우리가 경험하는 그대로의 현실은 사회적 구축물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세계는 조직된 채로 온다. 그것은 여러 범주로 나뉘고, 관습에 따라 형성되며, 사람들이 공유하는 정서로 물드는 것이다. 어떤 것이 의미를 지닌다는 사실을 발견할 때, 우리는 우리의 문화로부터 물려받은 인식체계 안에 그것을 맞춘다. 그리고 종종 그것을 말로 옮긴다. 그래서 우리가 개인적으로 얼마나 의미를 왜곡하는지에 상관없이, 의미도 언어처럼 사회적이다. 우리는 의미를 만들면서 사회적 활동에 깊이 개입한다. 특히 우리가 글을 읽을 때 그렇다." "그래서 독서는 두 가지 요소─의사소통의 매체인 책의 성격, 그리고 독자가 내면화하고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만들어주는 일반적인 기호체계─에 따라 결정된다."(285-6)


"말하자면 아무리 개념을 명확하게 한다 해도 경험적 연구의 부족을 메울 수 없으며, 독서의 역사 연구는 적절한 증거가 부족하여 난관에 부딪힌다." "의사소통의 순환에서 수용의 측면에 관한 어려움을 비켜가기 위해 우리는 여론의 문제와 직접 부딪칠 수 있었다." "18세기 프랑스의 일반 대중은 정치화하기 이전의 상태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수많은 권력 갈등이 궁정의 테두리 밖에서 일어났으며, 참여하는 관찰자로서 대중은 점점 정치화했다. 이러한 종류의 정치는 소송의 형태─청원·저항·낙서·노래·인쇄물·이야기─를 띠었고, 대부분의 재담, 악담, 공공연한 소문은 집단 폭력(민중 소요)으로 나타났다." "결론적으로 18세기의 파리는 거대한 의사소통의 그물이었다. 그것은 모든 이웃을 한 울타리로 엮고, 당시 파리인이 '공공연한 소음'(선동적 소문)이라고 부르던 것, 또는 오늘날 우리가 정치적 담론이라고 알고 있는 것으로 언제나 윙윙거리는 그물이었다."(287-9)


"어떤 특별 주제가 험담이나 인쇄물 가운데 어디에 먼저 나타났는지 묻는 것은 별 소용이 없다. 주제는 모두 다른 지점에서 생기고 다른 방향으로 여행하면서 여러 매체와 사회환경을 통과했기 때문이다. 결정적인 질문은 전갈이 어디에서 나왔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증폭과 동화에 관한 것이었다. 다시 말해 그것이 사회에 반향을 일으키고 대중에게 의미 있는 것이 되었던 방법에 관한 질문이었다. 금서는 이 과정에 어떻게 이바지했는가? 재담과 민요는 사라지고 잊혀지기 쉬운 경향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책은 이러한 주제를 인쇄물로 고정시켰다. 그리하여 그것을 보존해서 널리 퍼뜨리고 그 효과를 늘려준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책이 폭넓은 설득력을 가진 이야기 속에 그것을 담아냈다는 사실이다. 카페에서 주고받은 일화나 혼잣말도 인쇄물로 탈바꿈하면 실제로 그 의미가 달라졌다. 책은 사소하게 보이는 요소를 섞어서 규모가 큰 서사구조 속에 집어넣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290-1)


"1787년경 독서 대중은 모든 종류의 불법 서적에 물들어 있었다. 이러한 서적은 앙시앵 레짐의 정통 가치를 모든 방면에서 공격했다. 그러나 정치적 중상비방문은 특별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것은 1787~1788년의 사건들을 특별한 방식에 맞춰놓았다. 위기가 닥치자 사람들은 갈라서서 자기 편을 찾았다. 그들은 견문이 넓은 사람들, 말하자면 여론을 구성하던 '대중'의 편에 섰다." "1787~1788년에 나온 소책자들은 문제를 수백 개 조각으로 쪼개는 대신 단순화시켰다. 모든 소책자는 그 상황을 정부에 대한 찬성이냐 반대냐, 고등법원에 대한 찬성이냐 반대냐 가운데 선택해야 할 근본적인 문제로 제시했다. 그것들은 편가르기를 선동했다. 그것들은 여론을 두 개 극으로 나누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여론을 표현하기도 했다. 여론의 형성과 소책자 작가의 흥분은 원인과 결과로 동시에 작용하면서 서로를 강화시켜주었다. 절대다수의 소책자 문학은 당면 문제를 단일한 주제, 곧 (대신들의) 전제정으로 축소했다."(364-5)


"이렇게 해서 하나의 문학 장르가 르네상스 궁정에서 주고받던 불분명한 입씨름에서 출발해 베스트셀러 책의 완전한 전집으로 성장했다. 그것은 새로운 재료와 새로운 수사학적 기술을 이야기의 집합체, 정치적 민담에 동화시키고, 단일한 윤리를 가진 중심 주제를 조직해갔다. 그것은 군주정이 전제정으로 타락했다는 주제였다. 이 문학은 국사를 진지하게 논할 공간을 마련하는 대신 토론을 닫아버렸고, 견해를 양극화시켰으며, 정부를 고립시켰다. 그것은 급진적인 단순화의 원리 위에서 작동했다. 이것은 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 이것이냐 저것이냐, 흑이냐 백이냐, 그들이냐 우리냐 편가르기를 해야 하고, 당면 문제를 절대적인 것으로 봐야 하는 위기의 시대에는 효과적인 방책이었다. 루이 16세가 백성의 안녕 이외에는 바랄 것이 없었다는 사실은 1787년과 1788년에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그 체제는 계속 비난받고 있었다. 그것은 여론을 통제하기 위한 오랜 투쟁의 마지막 판에서 졌다. 그것은 정통성을 잃어버렸다."(3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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