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대문을 해 달다
주말 낚시꾼의 차들이 새벽 두세 시에도
마당으로 불쑥 들어서곤 했다
선잠에서 깨어난 나는
저 여가의 밀매꾼들과 싸우곤 했다
계율 없이 경계를 무단으로 넘나드는 그들이
한편으로 내심 부러웠으나
이 빠진 궁합에서 비롯된 울화까지 덮어씌워
그들에게 욕을 보였으니
그들에겐 난데없는 봉변이기 십상이다
세상의 모든 문들이 헐거운 몸으로 흘러 들어오지만
그것들은 좀처럼 내 것이 되지 못하고
덜컥거리기만 했으니
득음은 요란하던 시절이다
항간의 불화한다는 소문들이
끝끝내 용서되지 않는 밤이 많았다
세상을 향한 내 연민 때문에라도
나는 서둘러 대문을 해 달기로 했다 (P.33 )
아주 오래된 책
밤에는 오래된 책을
가까이 두고 읽는다
황제가 북방 변경의 진중에서 썼다는 책에서 말하기를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라 한다
탁자 위에 연초록 먼지가 자욱하니
이 송홧가루는
탁자에 착지한 시간의 흔적이다
아주 오래된 책의 밑동에는
잎새들이 흩어져 있다
사람은 누구나 저 자신의 암자다
물은 왔다가 가고
구름은 일어났다가 흔적을 지우고 사라진다
나는 암자에 웅크리고 앉아
경계와 한계를 굽어본다
암자 속에 또 다른 암자가 있고
그 암자 속에 또 다른 누군가 홀로 웅크리고 앉아
목판본의 오래된 내면을 들여다본다 (P.40 )
순하디 순한 저녁
고해성사를 막 끝낸 편안한 음색으로 저녁이 내린다 저희들
끼리 소란스럽던 물오리들은 없다 순하디 순한 저녁이다 당신
은 울혈이 잡히지 않은 목청으로 내게 누구예요? 라고 묻는다
당신도 이제는 여기 없다 어느덧 어두워진 물은 내 곁에 와
발목에 찰랑이며 복사뼈를 장난스럽게 툭툭 친다 물은 고요하
게 저물어서 내게 묻고 싶은 것이다 당신 누구예요, 라고 목울
대에 울컥 하고 자욱하게 번지는 겨운 슬픔에 내 몸이 기우뚱한
다 화재로 전소되기 직전의 건물처럼 나는 위태롭게 물가에 서
있다
종일 네가 그리웠어, 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끝내 말하지 못한다
저녁이 그림자를 차곡차곡 개어
내 호주머니에 넣어줄 때
어떤 완강한 슬픔이 내 척추를 비튼다
나는 저 물 속에 상어가 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내가 누구냐고?
나,
...... (P.98 )
-장석주 詩集, <물은 천개의 눈동자를 가졌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