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로 써라
류시화
어떤 러시아 시인은 말했다
피로 써라
시를
시같은 유서를
다만 피로 써라
나는 피로써 시를 쓰지 않는다
시가 거의 유행가처럼 되어 버린 곳에서
때로는 언어 이외의 것으로 울고 싶어지는
아, 이 무슨 삶이란 말인가 (P.93 )
빵
내 앞에 빵이 하나 있다
잘 구워진 빵
적당한 불길을 받아
앞뒤로 골고루 익혀진 빵
그것이 어린 밀이었을 때부터
태양의 열기에 머리가 단단해지고
덜 여문 감정은
바람이 불어와 뒤채이게 만들었다
그리고 또 제분기가 그것의
아집을 낱낱이 깨뜨려 놓았다
나는 너무 한쪽에만 치우쳐 살았다
저 자신만 생각하느라고
제대로 익을 겨를이 없었다
내 앞에 빵이 하나 있다
속까지
잘 구워진 빵 (P.17 )
-류시화 詩集, <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에서
새벽에 잠들었다, 그 사이 꿈을 꾸었다.
배가 너무 고파 식당엘 갔는데
그만 식권을 잃어 버렸다. 누군가에게 식권을 빌리려
두리번 거려도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어 갈팡질팡하다 깨어버렸다.
아, 꿈속에서도 나는 절반으로 헤매는 사람이구나.
오늘은 류시화의, 속까지 골고루 잘 구워진 빵을 먹어야겠다.
오늘 하루가 멀다.